퀵바

시니피에 님의 서재입니다.

구름의 전설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대체역사

시니피에
작품등록일 :
2015.03.19 05:37
최근연재일 :
2015.05.15 21:12
연재수 :
33 회
조회수 :
7,226
추천수 :
13
글자수 :
171,726

작성
15.04.19 08:19
조회
234
추천
0
글자
11쪽

4. 불꽃의 원기-3

해동국 최북단. 민족의 영산, '흰두루산'. 그곳은 민족의 정기가 샘솟는 못이었으며, 한민족을 수호하는 영험한 기운이 펄떡이는 맥박이었다. 이곳에 구름을 벗삼고 도를 닦던 한 무리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도사'라고 불렀다. 어느 날, 천하를 재패한 거대 제국인 천자국은, 수천의 군대와 귀신을 부리는 술객들을 앞세워 도사들을 죽이고 민족의 영산을 빼앗고 말았다. 천자국은 한민족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영산의 곳곳에 쇠말뚝을 박고, 귀신들을 모시는 신사를 세웠다.




DUMMY

어느덧 신시(申時-오후 3시~5시)가 되어 동산의 서쪽 능선 위에 올라앉은 해가 더더욱 이울기 시작했다. 능선은 마치 작두처럼 해를 쪼개고 하늘 사방으로 선혈 같은 노을을 흘렸다.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고 여긴 하람은 술병을 어깨에 고쳐서 지고 더욱 걸음을 빨리했다.

빨래터 주변 섶다리에 이르자 하람은 걸음을 늦췄다. 건너편을 살펴보니 다행히도 아낙들과 그 성가신 꼬마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람은 섶다리 위를 걸으며 어쩌면 지금이 이 다리를 건너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여겼다. 갑작스런 결정이었다. 하제 해가 뜨기 전에, 하람과 가리울은 새벌을 떠나기로 정했기 때문이다. 단둥은 새벌에서 가마뫼 항구로 가는 거리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어쩌면 몇 달이 걸릴지 모를 긴 여행길이었다.

“힛, 그래도 밥 빌어먹을 걱정은 덜겠구나. 내가 타령을 읊고 네가 밥을 빌러 다니면 누가 가련히 여기지 아니하겠느냐.”

“스승님!”

“어, 알았다. 알았어. 농이었느니라. 헛, 그놈 성질 한 번 불같다.”

“왜 허필 각설입니까? 차라리 광대나 사당패면 어떻구요.”

“이놈아! 내가 그런 축들이랑 같더냐? 근본이 다르다, 근본이. 각설인 그래도 속세를 버린 방랑시인 뭐 그런 낭만이 있잖느냐.”

하람과 가리울은 일부러 보는 눈이 많은 곳으로 다니기 위해 마을들마다 방문하기로 하였다. 마을 안에서는 바가지를 들고 다니며 각설이 노릇을 하고, 마을을 벗어나 사람들과 떨어지면 숲길이나 산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기로 하였다. 거추장스러운 짐을 지지 않기로 하였으므로 딱히 준비랄 것이 없었다.

하람은 산 속에서 수천 선생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면서 영원할지 모를 작별을 한다는 것이 마음의 저울 막대에 꽤 큰 무게 추를 걸어 다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는 새벌과 작별해야 하는 것이다. 종살이에, 괴롭힘 받으며 살아왔지만 새벌은 소년의 마음속에 추억들을 풍경화를 그려 넣었다. 저자거리에 장이 서면 눈을 휘어잡는 온갖 잡화들과 북적이며 흥정하는 사람들, 길 사이로 들어서면 늘어선 소박한 초가들과 논, 밭. 그리고 조금 더 높은 지대 위에 세워진 멋진 기와집들. 호탕한 주모와 그런 주모에게 수작거는 장돌뱅이들이 모이는 주막, 살면서 딱 한 번 지나친 해동 왕궁의 장엄한 모습 등, 눈 감으면 많은 것들이 뇌수의 수면 아래 아련하게 떠올랐다. 하람은 쓸쓸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이 느려졌다.

대장군의 저택을 불과 한 정(약 100미터. 1리는 36정) 남겨놓았을 때, 머슴 꼬마 하나가 하람에게 달려왔다. 학필 도령의 몸종으로, 하람과도 안면이 있었다.

“하람이 형. 어딜 다녀오느라 이리두 늦었어? 가천 도련님이 하람이 불러 오라했어. 벌써 몇 시진 전인지 모르겠어.”

하람은 깜짝 놀랐다.

“도련님이? 왜? 무슨 일로?”

“내가 뭘 알겠어? 불호령 떨어지기 전에 얼른 가봐! 학당에서 기다리고 계셔.”

머슴 꼬마는 이렇게 말하고는 어디론가로 총총히 사라져버렸다. “아니, 이제 곧 저택인데.” 하람은 마루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가천을 만나야 한다는 게 두려웠다. 하람이 어딜 다녀 오는 지 유일하게 아는 사람은 마루였다. 아마 복잡한 심경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하람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이것도 이제는 마지막이다 여기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마을 동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학당은 동산 아래 기슭에 위치했다.

학당은 귀족과 부유한 상인의 자제들을 위한 배움터로, 하람 또한 아버지가 훈장이었기에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학당에서 글의 기초를 배운 뒤 더 심화된 교육을 하는 곳으로 진학하거나, 귀족의 자제들의 경우 저명한 학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따로 공부를 하기도 했다. 이는 모두 관직에 등용되기 위한 방편이었다. 어찌되었든 하람은 이제 자신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하람은 학당의 문간에 다다랐다. 눈을 들어 보니 문간 앞 공터에 대여섯 명의 귀족 자제들이 모여서 투호(목이 좁은 항아리에 화살처럼 길쭉한 물건을 던져 집어넣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모두 가천의 또래 도령들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가천의 손에 이끌려 저택에 놀러오기도 해서 얼굴이 낯익었다. 아이들은 모두 자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가장 품계가 높은 귀족을 뜻하는 색깔이었다. 하람은 겁이 덜컥 났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 잡았다.

하람은 그들에게 꾸벅 머리를 조아리고는 그대로 지나쳐 학당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귀족 아이 중 한 명이 하람의 덜미를 잡아 챘다.

“뭐야, 이놈은? 한낱 천것 주제에 우리에게 길을 빌면서 사례도 없이 지나가려 하네?”

하람은 식은땀이 흘렀으나 이미 이 아이들에게는 진실을 따져 보았자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대꾸를 할수록 아마 더더욱 트집을 잡으려 들 것이다. 자색 옷이 가장 높은 품계인 만큼, 이 도령들은 특히 자기보다 품계가 낮은 사람은 당연하고 하인들에겐 더욱 잔혹했다. 하람도 당한 기억이 태반이었다. 한번은 어느 나른한 초여름, 마당에서 새끼를 꼬다가 잠들었는데 도령들이 새끼를 떼어 하람의 발가락 사이에 꽂고 불침을 놓은 적도 있었다.

하람은 오늘만 잘 넘기자, 라고 재차 다짐했다. 그는 고개를 거의 땅에 닿도록 조아리며 간곡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도령님들. 이 천것이 원체 무식하고 버릇이 없는데다 잘 잊어먹으므로, 되새기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가 나리들을 발견하지 못하여 그만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린 것입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다음부턴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보통 이 정도면 으름장 한 번을 더 놓고는 넘어가곤 했다. 이렇게 자기들끼리 놀이에 열중하던 중엔 심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령들은 별안간 서로를 쳐다보더니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람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중 특히 덩치가 크고 힘센 아이가 하람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잡아 올렸다. 목이 조이자 눈에서 별이 보였다.

“말은 잘 하네. 어이, 나는 말만 번지르르한 녀석들 딱 질색이야. 더 싫은 건 뭔지 알아? 그 흉측한 얼굴은 대체 뭘 믿고 내놓고 다니는 거지? 앙?”

도령들이 왁자글 웃었다.

“이 녀석 마루의 몸종이잖아. 그놈 믿고 이리 나대는 거지.”

“아, 그 가짜 귀족 놈? 쳇, 가짜 주제에 글깨나 읽는다고 훈장님 앞에서 늘 우릴 망신 줬지. 마주칠 때마다 아주 아니꼽다는 듯이 쳐다 본단 말이야. 언제 한 번 혼쭐을 내줄테다. 헌데 네가 그놈 몸종이라니, 더더욱 곱게 보내줄 수 없구나!”

하람이 필사적으로 말했다.

“제발 보내주십시오, 도령님들! 저는 가천 도련님께서 부르셔서……”

그러자 아이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다시 킥킥거렸다. 한 아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덩치 큰 아이에게 턱으로 지시를 했다. 그러자 덩치 큰 아이가 주먹을 하람의 얼굴 주변에 을러대며 말했다.

“가천이? 가천이는 집에 돌아간 지 오랜데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너 이놈. 바른대로 말해라. 우리가 없는 새에 뭘 훔치러 온 거지? 마루가 시킨 짓이냐. 바른 데로 고하지 못해?”

그제야 하람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했다. 이것은 함정이다. 하지만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그는 몸이 차가워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나 맞으면 풀려날까? 이번엔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들에게 내 목숨은 길 위의 벌레처럼 우연히 으깨어도 문제되지 않는 사소한 것일 테다. 하람의 손에서 힘이 풀리며, 쥐고 있던 술병이 바닥에 떨어졌다.

한 도령이 술병을 줍더니 환성을 질렀다.

“이야, 이거 약주 아니냐. 날도 추운데 잘 되었네!”

하람은 정신이 번쩍 들어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말했다.

“돌려주십시오! 그것은 도련님 관례에 쓰일……”

그러자 덩치 큰 아이가 하람의 명치를 때렸다. 하람은 헛숨을 들이키며 몸이 축 늘어졌다. 속에서부터 신물이 흘러나와 침과 함께 입가로 흘러내렸다.

“뭐야, 이 녀석. 머슴살이 한다는 녀석이 뭐가 이렇게 약해?”

하람은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했다.

“……제발 돌려주십시오. 꼭 가져가야 합니다!”

“에라, 이 병신아. 가천이 관례에 쓸 거면 어차피 우리들 목구멍으로 들어갈 거잖아? 지금 마신다고 뭐 다를 거 있어?”

“운 좋은 줄 알아라. 네놈의 불손함을 술 한 병으로 관대히 용서해 줄테니.”

아이들은 서로 왁자지껄 떠들며 하람을 팽개치고 저만치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람은 고개를 휘저었다. 안 된다. 이대로 돌아가면 나는 신뢰를 잃게 된다. 사실, 장군댁 사람들이 두 냥 정도 하는 술 한 병 잃어버린다고 그를 내쫓거나 하진 않지만, 하람의 성품이 이런 면에서는 참 고집스러웠다. 게다가 얼굴 한쪽이 타버린 후 자기 몸에 대한 조심성이 옅어진 때문이기도 했다. 하람은 몸을 추스르자마자 아이들에게 달려들어 술병을 빼앗고는 줄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저 놈 잡아!”

아이들은 하람을 쫓기 시작했다. 하람은 죽을힘을 다해 뛰었으나 따라붙은 한 아이의 발에 채여 나동그라졌다. 아이들은 쓰러진 하람을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걷어차며 실컷 분풀이를 했다. 목덜미에 잘못 맞은 주먹에, 하람은 그만 정신을 잃고 있었다.

한 도령이 하람을 잡고 일으켰다. 하람은 축 늘어져 있었다.

“모진아, 이놈 기절했는데?”

“들쳐 업어.”

다른 도령이 말했다.

“하지만 가천이는 다시는 장군님 댁에 발을 들이지 못할 정도로 혼만 내라고……”

뱀처럼 눈이 쭉 찢어지고 얼굴이 창백한 아이가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더더욱 이정도로 끝내면 안 되지. 분명 또 마루 놈이 얘를 보호하려 들텐데. 자, 가서 이 무례한 천것에게 귀족에게 대들면 어떻게 되는지를 뼈에 사무치도록 가르쳐 주자고. 악비야, 좀 더 수고 좀 해라.”

그러자 악비라고 불린 덩치 큰 아이가 하람을 어깨에 가뿐히 올렸다. 그때, 한쪽 구석에서 숨어 형편을 엿보고 있던 학필이가 아이들에게 달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형님들. 가천 형님이 어떻게 되었냐며 가 보라셨소.”

모진이 말했다.

“섶다리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가천이에게 오라고 일러. 선물을 준비했다고.”

악비도 말했다.

“어, 학필아. 그리고 아랫것들 시켜서 보자기에 먹을 것 좀 싸 오너라. 형님 배고프다.”

“거 종노릇하기 힘드네. 알았소, 내 금방 다녀오겠소.”

대답과 함께 학필이는 나는 듯이 달려 장군 댁으로 향했다.




나날이 국운이 쇠해가고 있던 해동국. 해동국의 항구도시 '미추홀'에 살던 소년 하람은, 해적들의 습격에 아버지와 얼굴 반쪽을 잃고 대장군 진가람의 저택에서 종으로서 살아간다. 장군의 아들 가천의 관례를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 하람은 새벌의 각설이 가리울을 만나 이상한 일들을 겪게 된다. 몸은 왜소하고 얼굴은 흉측하지만, 선골을 타고 나 도사의 자질을 가진 소년, 하람. 구름처럼 변화무쌍한 그의 일대기가 이어진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구름의 전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3 8. 살 오를 꽃-4 <1기 연재 종료> 15.05.15 178 0 14쪽
32 8. 살 오를 꽃-3 15.05.15 125 0 10쪽
31 8. 살 오를 꽃-2 15.05.15 124 0 11쪽
30 8. 살 오를 꽃-1 15.05.15 146 0 10쪽
29 7. 여우구슬-4 15.05.15 122 0 10쪽
28 7. 여우구슬-3 15.05.14 168 0 14쪽
27 7. 여우구슬-2 15.05.14 178 0 9쪽
26 7. 여우구슬-1 15.05.14 174 0 13쪽
25 6. 가림새 마을 - 4 15.05.13 123 0 9쪽
24 6. 가림새 마을 - 3 15.05.12 177 0 10쪽
23 6. 가림새 마을 - 2 15.05.12 120 1 13쪽
22 (재업로드) 5. 새벌을 떠나다-3 15.05.12 160 0 12쪽
21 6. 가림새 마을 - 1 15.05.12 138 0 13쪽
20 5. 새벌을 떠나다-4 15.05.06 139 0 10쪽
19 5. 새벌을 떠나다-2 15.04.29 274 0 13쪽
18 5. 새벌을 떠나다-1 15.04.27 252 0 13쪽
17 4. 불꽃의 원기-5 15.04.25 177 0 9쪽
16 4. 불꽃의 원기-4 15.04.21 161 0 14쪽
» 4. 불꽃의 원기-3 15.04.19 235 0 11쪽
14 4. 불꽃의 원기-2 15.04.18 256 0 11쪽
13 4. 불꽃의 원기-1 15.04.14 186 0 10쪽
12 3. 도사, 가리울-3 15.04.11 120 0 15쪽
11 3. 도사, 가리울-2 15.04.09 269 0 11쪽
10 3. 도사, 가리울-1 +2 15.04.06 295 1 11쪽
9 2. 개구멍받이-5 15.04.03 267 1 13쪽
8 2. 개구멍받이-4 +2 15.03.31 278 1 10쪽
7 2. 개구멍받이-3 +2 15.03.28 409 1 13쪽
6 2. 개구멍받이-2 15.03.25 241 0 11쪽
5 2. 개구멍받이-1 15.03.23 318 0 10쪽
4 1. 폭풍의 전조-4 15.03.22 266 2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