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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피에 님의 서재입니다.

구름의 전설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대체역사

시니피에
작품등록일 :
2015.03.19 05:37
최근연재일 :
2015.05.15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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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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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25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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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불꽃의 원기-5

해동국 최북단. 민족의 영산, '흰두루산'. 그곳은 민족의 정기가 샘솟는 못이었으며, 한민족을 수호하는 영험한 기운이 펄떡이는 맥박이었다. 이곳에 구름을 벗삼고 도를 닦던 한 무리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도사'라고 불렀다. 어느 날, 천하를 재패한 거대 제국인 천자국은, 수천의 군대와 귀신을 부리는 술객들을 앞세워 도사들을 죽이고 민족의 영산을 빼앗고 말았다. 천자국은 한민족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영산의 곳곳에 쇠말뚝을 박고, 귀신들을 모시는 신사를 세웠다.




DUMMY

“하람아! 하람아!”

하람은 천근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떠 보았다. 그러자 희뿌옇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가리울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 드디어 깨어났구나. 좀 어떠냐. 괜찮느냐?”

하람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작고 집주인의 간소한 살림이 느껴지는 소박한 방이었다. 하람은 몸을 반쯤 일으켰다. 무명 이불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온돌이 오래전부터 데워져 있었는지 온몸이 훅훅 달을 정도의 훈기가 가득했다.

“여긴 어디입니까?”

“수천 어르신 댁이다. 일어나지 말고 좀 더 누워있어라.”

가리울은 수심이 잔뜩 어린 얼굴로 하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람이 괜찮은 것을 확인하자 그제야 살짝 미소를 지었다. 속세를 초탈한 태도와 행색은 도사나 각설이나 별 다를 게 없구나, 하람은 생각했다. 자기도 다 떨어진 넝마로 바꿔 입고 다녀야겠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해서 아래를 내려다 본 하람은 자기가 낯선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빤 뒤 잘 개어져 오래 보관해 온 것같은 깨끗한 저고리와 바지였다.

“스승님, 제 옷이……”

“허허, 네 옷은 이미 타버려서 말이다. 도저히 입고 다닐 게 못 되더라. 자, 하람아. 스승에게 말해 보아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다. 한 번 기억을 더듬어 보아라. 그리고 찬찬히, 하나도 빠짐없이 내게 말해 보아라.”

가리울은 한껏 들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흥분된 비명을 억지로 누르고 있다는 태동였다. 하람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귀족 자제들이 제게 시비를 걸고, 절 섶다리로 끌고가 때렸습니다. 그리고 추웠는데... 그저 불이... 맞아요. 제 자신이 불이 된 것이 기억납니다. 춤을 추니까 불꽃도 춤을 추었습니다."

"중요한 것이다. 불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느냐? 네 손이냐, 바깥쪽이냐. 아니면 단전에 있었느냐?"

"불의 중심이요? 그런 것까진... 그저 심장이 엄청나게 뜨거웠습니다. 심장에 불이 붙은 것처럼요. 아프진 않았어요. 미친 소리처럼 들리시겠지만……”

"심장!"

가리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고 방을 몇 바퀴 돌았다. 영문을 모르는 하람은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가리울의 태도는 보는 사람의 정신을 사납게 만들 것처럼 한층 더 격양되어 있었다. "심장, 심장이구나! 오행의 진원지가 심장이라고." 하람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가리울의 다리를 붙잡았다.

"역시 제가 착각했던 것이겠지요?"

순간, 가리울이 하람의 어깨를 움켜쥐며 외쳤다.

“아니다, 아니야! 네가 느낀 것은 사실이다. 너는 불꽃의 원기와 하나가 된 것이다. 대단하구나. 난 그저 도술의 원리만 간단히 설명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해내다니, 정말 널 다시 봤다. 또, 또 말해 보아라. 생각나는 것이 없느냐?”

“제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애써 기억을 되새기며 하람이 말했다. “도령들이 다리 위로 도망치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섶다리에 손을 뻗어 잡았습니다. 그랬더니 다리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정말 그럴려던 건 정말 아니었는데...”

하람은 큰 사단을 냈다는 걸 깨달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마음은 상쾌하고 또 설레었다. 그것은 어릴적, 절대로 가지 말아야 하는 금기를 깼을 때, 요컨대 들어가지 말라는 장소나 먹지 말라던 음식들을 범할 때 느끼는 통쾌함이었다.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나와 벌레같은 취급을 받으며 살아온 그가, 옛날 같으면 상상만으로도 목이 달아날 일들을 해 냈다.

“구태여 다리를 태워버릴 필요는 없지 않았느냐?”

하람은 가리울의 깊은 시선이 자신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 느껴져 뜨악스러웠다.

“아, 스승님. 그, 그렇습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옵고…. 전 그저 얼떨떨할 뿐입니다.”

가리울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 나도 네가 일부러 도술을 사용한 게 아님을 안다. 아마도 충동적이었겠지. 하지만 네가 놀라운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만은 믿어 의심치 않겠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수천 선생이 소반 위에 탕약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하람은 억지로 일어나 수천 선생에게 고개를 숙였다. 수천 선생이 대뜸 윽박을 질렀다.

“약값도 치르지 못할 가난뱅이 녀석이 어디서 자꾸 나자빠져 오는 게야?”

“……송구합니다, 선생님.”

“식기 전에 어서 마시도록 해라! 내 다시는 네 녀석 못 볼 줄 알았더니…….”

수천 선생은 혀를 차며 스승과 제자에게서 조금 떨어져 앉아 담배를 태웠다. 하람은 탕약을 조금씩 들이키며 그 쓴 맛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마침내 하람이 탕약 사발을 바닥에 내려놓자 가리울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람아, 널 탓하려는 게 아니니 오해 말고 듣거라. 시간이 많지 않아. 이제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예.”

하람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너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밤이라 멀리서 불길을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도 있지만, 실은 네가 내뿜는 도력을 어렴풋이나마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 도사들뿐만 아니라 우릴 죽이려 하는 녀석들도 분명 그런 능력을 가졌을 것이다. 아니길 바란다만, 놈들의 무리가 새벌에 숨어 있다면, 네 기운을 통해 우리의 존재를 알아챘을지도 몰라.”

하람은 더욱 낯을 들 수 없었다. 가리울이 그를 위로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 말거라. 설령 놈들이 우리를 눈치 챘다 해도, 새벌 한복판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모험을 하진 않겠지. 다만, 앞으로는 도술을 자제해야 한다. 특히 사람들의 눈에 띄어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수천 선생은 평소엔 볼 수 없는 잔뜩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한 시진 쯤 전에 이척찬 모승의 하인이 다녀갔다. 머슴에게 내가 출타중이라 말하게 하여 불려 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는데, 모승의 아들 모진이 화상을 입은 것 같더구나. 물론 하람, 네 짓이겠지.”

하람은 풀이 죽어 고개를 끄덕였다. 수천 선생은 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희는 새벌에 남아 있어도 위험하다. 모진은 분명 모승에게 사실대로 고했을 것이고, 하제 아침 쯤 되면 조정에 너희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가게 될 것이다. 병사들은 지금도 너희를 찾고 있을 것이다. 가리울과 나의 관계를 놈들이 알리 없으니, 오늘 당장 여기까지 들이닥치진 않겠지만서두. 그러나 포위망이 더 두터워지면, 너희는 성문을 빠져나가기도 힘들 것이다.”

가리울이 물었다.

“어르신, 새벌을 빠져나갈 때 도성의 어느 문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수천 선생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북문이 좋겠지. 북쪽은 산길이 많아 사람들의 왕래가 뜸하므로, 군사들의 주의가 그나마 덜 할 것이다.”

가리울은 하람에게 말했다.

“해뜨기 전에 여길 떠나야 겠다. 일어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거의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았던 하람은 팔다리가 끊어질 듯 저려왔고 가슴이 뻐근하여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하람은 억지로 일어나려 몸에 힘을 주어 보았으나, 결국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밑둥잘린 볏단처럼 힘없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수천 선생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안되겠어! 당장 이런 몸으로 움직이는 건 무리다. 동틀 무렵 깨워 줄 테니 억지로라도 휴식을 취하도록해라.”

“아닙니다, 전……”

“의원 말을 들어!”

“예…….”

하람은 바닥에 다시 몸을 뉘었다. 수천 선생은 눈살을 찌푸리며 방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가리울은 솜이불을 올려 하람의 가슴까지 덮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무 걱정 말고 푹 자두어라. 스승의 명령이다.”

하람은 몸을 떨며 말했다.

“스승님…….”

“뭐 필요한거라도 있느냐?”

“……무섭습니다.”

비록 열네 살이나 나이를 먹었어도 또래에 비해 하람은 작고 가냘팠다. 일찍 부모를 잃은 탓에 어른스런 부분도 있었지만, 아직은 부모의 품에서 보호받을 나이였던 것이다. 가리울은 말없이 하람을 바라보더니 소매를 걷고 하람의 흉터 진쪽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하람에게 얼굴을 기울이며 낮고 편안한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마음 편히 잠들어라. 너 홀로 견뎌 내야했던 시절들은 모두 지났다.”

하람은 눈을 감았다. 몇 가닥 남지 않은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가리울은 하람의 가슴을 토닥였다. 숨소리가 조금씩 느려지더니 마침내 하람은 깊이 잠들고 말았다. 망가졌지만 참으로 평화로운 그 얼굴을 보며 가리울은 미소를 지었다.

"허참. 내 다신 사람따위 정 주지 않겠다 다짐했거늘."

가리울은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날이 국운이 쇠해가고 있던 해동국. 해동국의 항구도시 '미추홀'에 살던 소년 하람은, 해적들의 습격에 아버지와 얼굴 반쪽을 잃고 대장군 진가람의 저택에서 종으로서 살아간다. 장군의 아들 가천의 관례를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 하람은 새벌의 각설이 가리울을 만나 이상한 일들을 겪게 된다. 몸은 왜소하고 얼굴은 흉측하지만, 선골을 타고 나 도사의 자질을 가진 소년, 하람. 구름처럼 변화무쌍한 그의 일대기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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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8. 살 오를 꽃-4 <1기 연재 종료> 15.05.15 178 0 14쪽
32 8. 살 오를 꽃-3 15.05.15 125 0 10쪽
31 8. 살 오를 꽃-2 15.05.15 124 0 11쪽
30 8. 살 오를 꽃-1 15.05.15 146 0 10쪽
29 7. 여우구슬-4 15.05.15 122 0 10쪽
28 7. 여우구슬-3 15.05.14 168 0 14쪽
27 7. 여우구슬-2 15.05.14 178 0 9쪽
26 7. 여우구슬-1 15.05.14 174 0 13쪽
25 6. 가림새 마을 - 4 15.05.13 123 0 9쪽
24 6. 가림새 마을 - 3 15.05.12 177 0 10쪽
23 6. 가림새 마을 - 2 15.05.12 120 1 13쪽
22 (재업로드) 5. 새벌을 떠나다-3 15.05.12 160 0 12쪽
21 6. 가림새 마을 - 1 15.05.12 138 0 13쪽
20 5. 새벌을 떠나다-4 15.05.06 139 0 10쪽
19 5. 새벌을 떠나다-2 15.04.29 275 0 13쪽
18 5. 새벌을 떠나다-1 15.04.27 252 0 13쪽
» 4. 불꽃의 원기-5 15.04.25 178 0 9쪽
16 4. 불꽃의 원기-4 15.04.21 161 0 14쪽
15 4. 불꽃의 원기-3 15.04.19 235 0 11쪽
14 4. 불꽃의 원기-2 15.04.18 256 0 11쪽
13 4. 불꽃의 원기-1 15.04.14 187 0 10쪽
12 3. 도사, 가리울-3 15.04.11 120 0 15쪽
11 3. 도사, 가리울-2 15.04.09 270 0 11쪽
10 3. 도사, 가리울-1 +2 15.04.06 296 1 11쪽
9 2. 개구멍받이-5 15.04.03 268 1 13쪽
8 2. 개구멍받이-4 +2 15.03.31 278 1 10쪽
7 2. 개구멍받이-3 +2 15.03.28 409 1 13쪽
6 2. 개구멍받이-2 15.03.25 241 0 11쪽
5 2. 개구멍받이-1 15.03.23 318 0 10쪽
4 1. 폭풍의 전조-4 15.03.22 266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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