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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피에 님의 서재입니다.

구름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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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피에
작품등록일 :
2015.03.19 05:37
최근연재일 :
2015.05.15 21:12
연재수 :
3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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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44
추천수 :
13
글자수 :
171,726

작성
15.03.22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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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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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1. 폭풍의 전조-4

해동국 최북단. 민족의 영산, '흰두루산'. 그곳은 민족의 정기가 샘솟는 못이었으며, 한민족을 수호하는 영험한 기운이 펄떡이는 맥박이었다. 이곳에 구름을 벗삼고 도를 닦던 한 무리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도사'라고 불렀다. 어느 날, 천하를 재패한 거대 제국인 천자국은, 수천의 군대와 귀신을 부리는 술객들을 앞세워 도사들을 죽이고 민족의 영산을 빼앗고 말았다. 천자국은 한민족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영산의 곳곳에 쇠말뚝을 박고, 귀신들을 모시는 신사를 세웠다.




DUMMY

둘만 남게 되자, 마루는 하람과 실갱이를 벌여야 했다. 하람이 자꾸 종이 주인을 대하는 예를 갖추려다 모래처럼 무너지고, 낙엽처럼 바닥에 구르길 반복했던 것이다. “그만!” 결국 마루는 호통을 치고야 말았다. 그제야 하람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마저도 목침을 허리에 받치고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고 반쯤 일어난 모습이었다. 마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 이름이 무어니.”

“하람입니다. ‘하늘님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천것이라 성은 없습니다.”

“그래, 하람아. 난 마루야. 어제까지 진 가(家) 성을 썼지만, 오늘부턴 그냥 마루야.”

“예, 마루 도련님.”

“아냐. 그게 아니라니깐. 하람아, 몸은 좀 어때? 견딜만하니?”

하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과 숨소리, 손목과 경동맥 등 자기가 아는 수단을 동원해 이 미추홀 출신 소년이 괜찮다는 결론을 내린 마루는 하람의 곁에 다가앉았다. ‘일단 이 아이부터 시작하자.’ 마루는 이 집안의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고, 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여주길 바랐다. 하람은 오늘 처음 만났으니 진 씨 집안에 대한 타성에 젖어 있지 않을 터였다. 그럼 지금부터 이야길 해 두자. 마루는 결심했다. 나이는 두 소년이 열 셋으로 같았으나, 달은 하람이 다섯 달 빨랐다.

폭풍이 한결 잦아들었지만 거센 빗줄기는 계속해서 지붕 위를 때리고 있었다. 하람은 옛날에 아버지가 들려 준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그중 천자국이란 나라의 무시무시한 군사력과 대륙의 반대세력들을 규합하기 위해 행한 정복전쟁 이야기는 많은 영웅들과 용감한 병사들의 활약상이 땀을 쥐게 했지만, 동시에 천성적으로 폭력을 싫어하는 하람을 듣기 힘들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폭풍이 만들어 내는 빗소리는 천자국의 수천 궁수들이 적의 마지막 보루를 향해 쏘아대었다는 수천만의 화살 비처럼 무시무시했으나, 마루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하람은 어느 새 그 소리가 구슬들이 판자를 두들기는 소리처럼 마음속으로 기분 좋게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차츰 마음의 벽이 빗소리에 젖어 허물어졌다. 하람은 마루에게서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온 것 같은 친밀함을 느꼈다.

“아까도 말했잖아. 난 귀족이 아냐. 내가 입은 옷을 봐. 너랑 다를 게 없잖아. 내 몸에 흐르는 피도 마찬가지야. 다를 게 없어.”

“음, 그렇군요.”

“높임말 쓰지마.”

“쉽지 않아요. 이럴 땐 높임말이 거의 없는 천자국이 부럽네.”

“둘만 있을 땐 이름을 불러. 불러봐, ‘마루야’라고 해 봐.”

하람이 따라했으나 실수를 연발했다. 낮은말과 높임말을 번갈아 했다가 마루의 장난스런 호령에 놀라면 바닥에서 몸까지 퉁기는 식이었다. 두 소년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마루는 지금껏 짓눌러오던 고독이 마치 긴 폭풍의 계절이 지난 뒤의 하늘처럼 환하게 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람 또한 마루가 있어 다행이었다. 그에겐 갑자기 닥친 비극을 보듬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조숙하고 이해심 많은 마루는 딱이었다. 게다가 마루는 하람이 지금껏 봐 온 여느 귀족의 자제와는 전혀 달랐다.

“그러니 날 친구로 대해줘. 정 힘들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만 도련님이라 부르라구. 그럼 나도 너를, 가천 형님이 아버님께 혼나고 하인들한테 화풀이 할 때처럼 대해주지!”

“어떻게 하는데?”

그때, 광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들어 왔다.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진가람 대장군의 외동아들, 가천이었다. 진가천은 통이 넓은 대구고 바지에 저고리를 입고, 머리에는 조우관(새의 깃털을 꽂아 귀족임을 드러냈던 삼국시대의 관)을 쓰고 있었다. 가천이 급히 좌우를 살피자, 조우관에 꽂혀 있던 깃털이 뱀의 대가리처럼 이쪽저쪽으로 움직였다. 가천은 나막신을 벗어 손에 들었다. 딱딱거리는 소리가 나막신끼리 부딪쳐서 난 소린지 가천의 이빨이 부딪는 소린지 알 수 없었다.

마루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가천을 향해 정중히 절을 올렸다.

“형님께서 이런 누추한 곳엔 어인 일이십니까.”

가천은 순간, ‘앗!’하는 소리를 치더니 곧 헛기침을 하며 사방을 살폈다.

“음, 아버님과 글을 읽다가 광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 들어와 보았다. 헌데, 저 놈은 누구지? 못 보던 녀석인데.”

“이번 미추홀 습격 때 살아남은 아입니다. 이름은 하람이라고 합니다.”

가천은 마루를 밀치며 하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놈이 실성을 했나? 어디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내가 누군지 모르느냐? 어서 고개를 조아리지 못해?” 하람은 멍해져 있다가 화들짝 놀랐다. 마루와 편하게 이야길 나누던 통에 온몸의 근육이 자기도 모르게 늘어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루가 화급히 가천의 소매를 잡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형님, 제 탓입니다. 저 아이에게 아직 이 집에서 누굴 섬겨야 하는지 알려 주지 못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형님.” 가천은 소매를 떨치며 마루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그래, 너 이 자식. 너 잘 만났다. 아버님이 하사한 그 명진국의 보검은 어디 있지? 네 놈에겐 어울리지 않아. 냉큼 내놓아라!”

마루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으나 그는 모아올린 소매 아래에다 교묘히 눈빛을 감추었다.

“그럼요, 형님. 아무리 봐도 저 같은 둔재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디다.”

마루가 허리춤에서 검 한 자루를 검집째 들어 올렸다. 가천은 헛숨을 들이키며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마루는 한 무릎을 꿇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가천은 눈을 가늘게 뜨다가 “뭐야 이거?”하며 검을 뺏어 들었다. 검집과 칼자루는 어느 한 군데 성한 데가 없었다. 불속에서 건졌는지 장식과 문양에 온통 검댕이 묻었고, 물에도 빠졌는지 철조각이 드러난 곳마다 벌겋게 녹이 슬어 있었다. 가천은 검집과 칼자루를 쥐고 당겨 보았다. 그러나 도대체 뽑히지가 않았다. “이거, 안쪽도 녹이 잔뜩 슬은 모양이구만!” 가천은 에잉, 하고 입을 앙다물며 마루에게 검을 다시 던져 주었다.

“아까 말은 취소하마. 역시 아버님이야. 꼭 네게 걸 맞는 걸 주셨구나.”

“그러합니다.”

가천은 하람 쪽을 흘긋 보더니 킬킬거리며 말했다.

“저 아이도 네게 어울린다. 그러니 네 몸종으로 삼아라.”

가천을 깔깔 웃으며 광의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마루는 가천의 뒷모습을 향해 더 깊이 고개를 조아리며 배웅했다. 돌쩌귀가 마찰하는 소리가 요란하자, 가천은 황급히 문 뒤로 몸을 숨기고는 문밖으로 눈만 내밀어 밖을 살폈다. 그리고는 나막신을 고쳐 신고 부리나케 나가버렸다.

“저런, 형님도.” 마루는 굽혔던 몸을 일으키고는 가슴을 쫙 펴며 기합을 넣었다. 이 열 셋 소년은 소년 장사였다. 팔뚝이 여느 장정 못지않게 두껍고 탄탄했다. 마루는 칼자루를 움켜쥐더니 한 번에 잡아 빼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빠져나온 검에서는 시퍼런 검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마치 젖은 풀잎이 달빛에 반짝이는 것처럼 선연하고 우아한 빛이었다.

“명진국에 눈매가 매서운 ‘적비’라는 소년이 있었는데 이 검은, 소년이 아비의 원수를 갚는데 사용했던 물건이야. 정확하게는 의로운 검객이 자신의 목을 바쳐 대신 갚았지만.”

“흉한 검집 안에…… 그런 물건이 있었구나.”

마루는 하늘을 향해 발검 자세를 취했다.

“아버님은 아신 거지. 내가 무엇이든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란 걸.” 마루는 발검 자세에서 걸음을 앞으로 내딛으며 허공을 향해 베기와 찌르기를 반복해 보였다. 하람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고개를 빼고 내려다보았다. “어때?” “좀 어색한 거 같아.” “뭐? 이래도?” 마루가 몸을 돌려 하람 쪽을 향하더니 하람의 머리 위 공중을 겨냥하고 검을 후렸다. 그러자 예리한 날이 부드러운 것을 가르는 슥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천장에 매달려 있던 메주 아랫부분이 툭 떨어져 깨져버렸다.

“저런. 올해 된장국 먹을 땐 조심해야겠네. 흙모래 씹힐라.”

하람은 쿡쿡거리며 웃다가 아픔이 전해져오자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몸을 펴고 누웠다. 그래도 웃음이 그치질 않아 딸꾹질까지 했다. 마루도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럼 마루 도련님은, 어디서 기거하고 있어?”

“또, 도련님 소리하네. 여기랑 가까워. 내가 쓰는 방은 별채야. 거기 행랑채가 딸렸는데 이제부터 네가 거기서 살게 될 거야.”

두 소년은 간난이가 광으로 늦은 점심을 가져다 줄 때까지 먹는 것도 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은 서로의 살아온 이야기에서부터 과거에 읽었던 책 이야기나 어른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까지 끊이지 않고 길게 이어졌다. 도깨비나 귀신 이야기, 욕심 많은 부자나 골탕먹는 이야기나 외롭고 가난한 노인에 대한 이야기, 서럽고 한스러운 민중들의 이야기에서부터 저잣거리의 우스갯소리에 이르기까지 길게 이어졌다.

어느덧 폭풍은 잦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드디어 바람이 멈추었다. 구름이 흩어지기 시작한 밤하늘엔 두 소년의 이야기 소리만 남아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나날이 국운이 쇠해가고 있던 해동국. 해동국의 항구도시 '미추홀'에 살던 소년 하람은, 해적들의 습격에 아버지와 얼굴 반쪽을 잃고 대장군 진가람의 저택에서 종으로서 살아간다. 장군의 아들 가천의 관례를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 하람은 새벌의 각설이 가리울을 만나 이상한 일들을 겪게 된다. 몸은 왜소하고 얼굴은 흉측하지만, 선골을 타고 나 도사의 자질을 가진 소년, 하람. 구름처럼 변화무쌍한 그의 일대기가 이어진다.


작가의말

작 중, 마루가 언급한 

‘적비‘는 옛적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간장과 막사의 아들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초왕에게 복수를 다짐했던 ‘적비‘란 소년의 이야기에서 가져왔습니다.


작 중 복식 또한 관제처럼 삼국시대에서부터 고려시대까지 마구 혼용됩니다.

진가람 대장군의 복장은 삼국시대의 귀족의 차림이며, 가천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수천선생은 조선시대의 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두루마기는 이전시대부터 있었으나, 수천선생은 허리띠가 아닌 옷고름으로 고정하는 복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문인과 무인을 확연히 구별하기 위한, 이 세계의 설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로 제 직관에 따르기 때문에, 이 또한 혼용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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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8. 살 오를 꽃-4 <1기 연재 종료> 15.05.15 179 0 14쪽
32 8. 살 오를 꽃-3 15.05.15 126 0 10쪽
31 8. 살 오를 꽃-2 15.05.15 124 0 11쪽
30 8. 살 오를 꽃-1 15.05.15 147 0 10쪽
29 7. 여우구슬-4 15.05.15 122 0 10쪽
28 7. 여우구슬-3 15.05.14 168 0 14쪽
27 7. 여우구슬-2 15.05.14 178 0 9쪽
26 7. 여우구슬-1 15.05.14 174 0 13쪽
25 6. 가림새 마을 - 4 15.05.13 124 0 9쪽
24 6. 가림새 마을 - 3 15.05.12 177 0 10쪽
23 6. 가림새 마을 - 2 15.05.12 121 1 13쪽
22 (재업로드) 5. 새벌을 떠나다-3 15.05.12 160 0 12쪽
21 6. 가림새 마을 - 1 15.05.12 138 0 13쪽
20 5. 새벌을 떠나다-4 15.05.06 140 0 10쪽
19 5. 새벌을 떠나다-2 15.04.29 275 0 13쪽
18 5. 새벌을 떠나다-1 15.04.27 252 0 13쪽
17 4. 불꽃의 원기-5 15.04.25 178 0 9쪽
16 4. 불꽃의 원기-4 15.04.21 162 0 14쪽
15 4. 불꽃의 원기-3 15.04.19 235 0 11쪽
14 4. 불꽃의 원기-2 15.04.18 257 0 11쪽
13 4. 불꽃의 원기-1 15.04.14 187 0 10쪽
12 3. 도사, 가리울-3 15.04.11 121 0 15쪽
11 3. 도사, 가리울-2 15.04.09 270 0 11쪽
10 3. 도사, 가리울-1 +2 15.04.06 296 1 11쪽
9 2. 개구멍받이-5 15.04.03 268 1 13쪽
8 2. 개구멍받이-4 +2 15.03.31 278 1 10쪽
7 2. 개구멍받이-3 +2 15.03.28 410 1 13쪽
6 2. 개구멍받이-2 15.03.25 241 0 11쪽
5 2. 개구멍받이-1 15.03.23 318 0 10쪽
» 1. 폭풍의 전조-4 15.03.22 267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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