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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피에 님의 서재입니다.

구름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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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피에
작품등록일 :
2015.03.19 05:37
최근연재일 :
2015.05.15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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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09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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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3. 도사, 가리울-2

해동국 최북단. 민족의 영산, '흰두루산'. 그곳은 민족의 정기가 샘솟는 못이었으며, 한민족을 수호하는 영험한 기운이 펄떡이는 맥박이었다. 이곳에 구름을 벗삼고 도를 닦던 한 무리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도사'라고 불렀다. 어느 날, 천하를 재패한 거대 제국인 천자국은, 수천의 군대와 귀신을 부리는 술객들을 앞세워 도사들을 죽이고 민족의 영산을 빼앗고 말았다. 천자국은 한민족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영산의 곳곳에 쇠말뚝을 박고, 귀신들을 모시는 신사를 세웠다.




DUMMY

“주모, 어제 만났던 가리울이란 각설이, 어떤 사람이에요?”

“응, 한 마디로 기인이지. 그래도 싫지가 않아. 다녀가면 이상허게 좋은 일이 생기거든. 그 양반이 다녀간 뒤론 말이다, 잔병치레도 많이 없어지고 또 이 근처 집집마다 들끓던 쥐새끼들도 없어졌거든. 녀석들이 쌀가마마다 쏠아대는 통에, 말아먹은 막걸리만 수십 병일 게다.”

하람은 그 ‘좋은 일’들이란 것에 주목했다. 가리울이 부린 조화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하람은 술 두 병을 미리 받아두고는 주모에게 미리 무명보자기에 싸서 가져간 뚝배기와 보시기 한 첩과 함께 엽전 두 냥을 내밀었다. “심부름이에요.” “응, 마루 도련님이겠구나. 막걸리도? 잠시만 기다려라.” 평상에 앉아있던 마을 사람들은 하람을 보며 농지거릴 하거나 손을 흔들었지만, 어제만큼 놀란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여, 하람아. 왜 다시 맸어? 그냥 풀고 다니지 그러냐.” 하람도 제법 재치 있게 응수했다. “하하, 괜히 얼굴 내놨다가 깍쇠 아배 체하시면 숙향 항아님이 또 저 데려다 앉혀 놓고 작두 타실지도 몰라요.” 깍쇠 아비는 고수(鼓手)로, 무당 숙향의 기둥서방이었다. 일전에 숙향이 하람의 흉터를 낫게 하겠다며 굿판을 준비하는 통해 수천 선생이 대장군 댁이 떠나가라 호통을 쳤던 적이 있었다.

그때, 옆 평상에 앉아있던 행상 하나가 이쪽을 굽어보며 말했다.

“고저 아새끼래, 그냥 풀고 다니라. 북쪽 저 끝 단둥성엔 너 같은 망그라진 사람들이 태반이다야. 아주 걸어 다니는 시체들이 따로 없지.”

깍쇠 아비가 실소를 했다.

“얼레? 이 양반 어디 염라국에라도 댕겨 오셨나. 해동반도 내에 그런 동네가 어딨수.”

그러자 모여 앉은 장정들이 껄껄 웃었다. 그러나 행상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남쪽은 태평성대고마. 고저, 두고 보라우. 근 몇 년 내로……”

행상은 고개를 내 젓고는 갑자기 목이 탄다는 듯 막걸리를 묵묵히 비웠다. 워낙 무거운 기운에, 다른 자리 앉은 장정들은 갑자기 술맛이 떨어진다는 듯 거칠게 사발을 내려놓았다. 하람은 괜히 중간에 끼어 자기도 속담처럼 고래 싸움에 새우 꼴 나는 건가,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벙 쪄 있을 찰나, 국밥 담은 뚝배기와 갓김치 담은 보시기를 내 온 주모를 보고는 화급히 말을 걸었다.

“주모, 주모! 그 가리울이란 사람, 다른 이상한 건 없어요?”

“응? 너 그 각설이 타령에라도 반했느냐? 거 이상하게 읊조리는 것들마다 뼈가 있긴 했두만서도. 아, 맞다. 여기 깍쇠 애비가 그 양반에게 할 말이 많을 게다.”

“누구? 어, 가리울이! 아, 글씨, 그 각설이만 나타나면 아주 내 오금이 다 저린다! 우리 마누라가 글씨, 백일 치공을 드리다가도 그 각설이만 나타면, 아주 그냥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뛰쳐나가 입에 게거품 멀고 호통을 친다니깐. 뭐라더라? ‘네 놈! 네 놈 때문에, 조상신들께서 귀곡을 그치질 못하시는 구나!’ 하며, 제물들을 마구 던지는 통에 백일 치공이 물거품이 되었지. 그 후로 우리 숙향이만 보면 꽁지가 빠지게 도망간 댄다.”

모내기철까지 소일거리가 없어 땡전 한 푼 없이도 주막 근처를 기웃거리던 뜨내기들도 한 마디씩 했다.

“한 번은 몇 년 만에 기근이 찾아와서 말이야, 먹을 것이 없어 새벌의 농민들이 글쎄, 쥐굴을 뒤졌단다, 쥐굴을. 기근이래도 쥐들 먹을 건 있었던 모양이지. 아님 양반님네들 광에는 언제나 알곡이 넘치니, 그거라도 빼 온 건 아닐지. 아무리 새벌 인심이 좋아도 기근 땐 각박해지기 마련이거든. 아이구, 온 새벌이 각설이들 타령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헌데 이상하게도, 그 양반이 안 보이는 거지. 죽었다. 저건 분명히 죽었다. 아,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이 마을을 떠난 적이 없던 작자가, 기근 때만 안 보인단 게 말이 되누.”

왕도가 있는 해동국의 서울이자 서강 상권으로 인하여 상인들의 노다지인 이 새벌조차도 굶어 나자빠진 시체들이 눈에 띌 때가 있었다고 했다. 기근이 끝나 각설이들 타령도 잦아들 때쯤 나타난 가리울은, 오히려 전보다 더 건강해져서 밥 내 놓으라 기세 좋게 소리쳤다는 것이다.

이야기에 몰입한 장정들은 가리울에 대해 핏대까지 올리며 자기네들이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개중엔 가리울의 정체가 도깨비고 각설이 짓은 인간들과 더 친해지고 싶어서 인간으로 둔갑한 모습이란 소리까지 나왔다. 가리울에 대해 들을수록 하람은 머리만 더 아파지는 걸 느꼈다. 열띤 토론으로 평상들이 왁자지껄해졌을 무렵, 하람은 슬쩍 빠져나와 산 들머리로 향했다.


하람은 국밥과 막걸리 한 병을 싼 보자기를 매고 산을 힘겹게 오르기 시작했다. 아이들로부터 정신없이 도망칠 때는 몰랐으나 짐까지 들고 걸어 오르다 보니 제법 가파른 산길이었다.

이른 봄 날씨는 변덕스럽기가 꽃 한 송이 낙엽 한 장 대하는 계집 마음 같았다. 아까는 입김이 날 정도로 춥더니 해가 솟자 따스한 기운이 들판 곳곳에 아지랑이를 만들 정도였다. 하람은 땀이 흐르자 축축해진 붕대가 얼굴에 들러붙는 것을 느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1다경 茶頃-15분)이 지나자, 그는 마침내 가리울이 그를 구해준 장소에 이르렀다. 하람은 손나발을 입에 대고 사방을 향해 외쳤다.

“가리울님! 가리울님!”

대답은 없었다. 하람은 낙엽과 나뭇가지를 부스러뜨리며 이리저리 걸었다. ‘이제 곧 경칩인데. 벌써 따뜻하다. 개구리가 나올 때가 다 된 것 같은데.’ 하람은 갈맷빛 소나무와 잣나무가 잔뜩 우거진 침엽수림에 들어섰다. 너무 급하게 산에 올랐던 고로, 가슴은 방망이질 치고 숨이 가빠왔다. 게다가 산을 오를수록 고봉으로부터 내려온 찬 공기가 땀에 젖은 몸을 또 으슬으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가래가 끓고 입에서 단내가 났다.

“후아, 그놈의 산 넓기도 하다. 이젠 산 들머리 되찾는 것도 그른 게 아닌가 모르겠네.”

하람는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향기로운 솔잎의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와 그의 가슴을 시원스럽게 내리 쓸었다. 하람은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샘을 찾았으나 없었다. 귀를 기울여도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람은 바위에 가지고 온 보자기를 내려 놓았다. 그러자 술병 안에서 막걸리가 출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바짝 마른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이거라도 마실까? 그래, 가리울님이 만나면 다시 채워주시겠지?”

하람은 병을 보자기에서 꺼냈다. 그러자 별안간 지팡이가 날아와 하람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 하람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싸쥐었다.

“이놈아, 어찌 계속 남의 도움만 빌려 해?”

그러나 호통과 다르게 가리울은 하람을 향해 천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람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가리울의 앞에 꿇어앉았다. “가리울님! 제가 은혜를 입었습니다. 보답할 길이 달리 없어 음식을 가져 왔으니, 부디 요기 하세요.” 가리울은 껄껄 웃었다. “허허, 감이 좋구나, 이놈. 그럼 나 좀 시장하니, 여기 편하게 앉아 기다리거라.” 가리울은 보자기를 헤치고 뚝배기 안에 든 것을 입 안으로 퍼 넣었다. 간혹 갓김치를 입에 넣기 위해 고개를 돌린 것 외에 가리울은 뚝배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후, 덕분에 잘 먹었구나. 헤헷, 이거 워낙 오래 각설이 짓을 하다 보니 어느새 뼛속까지 진짜 각설이가 되었구나. 추한 꼴 보여 미안타.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앉아, 이놈아. 안 잡아먹어.”

가리울은 뚝배기를 치우고 하람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무엇이 즐거운지 계속해서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질 못했다. 잔뜩 긴장했던 하람은 가리울의 모습에서 조금 용기를 얻어 물었다.

“가리울님, 어제는 도와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소인이 도저히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것이 있어서요.”

“소인은 무슨 소인이냐. 신분으로 따지면 나나 너나 다를 것이 없는 처지인데.” 가리울은 빙긋 웃었다. “그래, 궁금한 것이 무엇이고?”

하람은 침을 삼켰다.

“가리울님은 정말 도사님이십니까?”

가리울은 말없이 지긋이 하람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끈끈한 정이 서려 있었다. 하람은 두려움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어제 제게 건네주신 자루에는 분명 온전한 병 하나와 깨진 병 조각들, 엎질러진 술에, 젖은 흙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술이 담긴 상처 하나 없는 병 두 개와 마른 흙이 들어있었으니, 이게 무슨 조화입니까? 가리울님은 정말 도사님입니까?”

가리울은 껄껄 웃었다.

“세상 사람들은 보통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내는 사람들을 가리켜 도사라고 부르더구나. 하지만 아이야, 도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란다. 도사란 우주만물의 깊은 진리를 탐구하고, 그 일부를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이 깨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물론, 선택받은 일부 사람들만이 그것을 탐구할 수 있지.”

“가리울님은, 마음대로 조화를 부리시잖아요.”

“아이야, 어찌 그걸 조화라고 부르느냐. 있던 것이 없어지고, 없어졌던 것이 다시 있기라도 했느냐? 너의 존재는 본디 오행(五行-우주만물을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 중에 흙이었다. 네 부모로부터 받은 흙의 성분이 너를 만들었고, 또 네가 죽으면 네 육신은 썩어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네 태어남은 신기하지 않더냐? 어찌 병 하나가지고 그리 신기해하느냐?”

“하지만 엄연히 다르잖아요! 깨진 병이 어떻게 사람이랑 같나요?”

“다를 건 또 무어냐? 흙을 빚어 구운 병이나, 흙에서 난 곡식으로 빚은 술이나 사람이나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사람 또한 오행의 일부에 불과한 것을, 어찌 구분 지을 수 있단 말이냐.”

하람은 가리울의 말에서 이제까지 그가 겪어보지 못한 것, 우주와 세계에 관한 깊은 진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하람은 가슴 속에 희망이 꽉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꾹 눌러 참고 있던 물음을 던졌다.

“그럼 가리울님, 제 흉터를, 없애 주실 수도 있나요?”

“아이야, 미안하다. 그것만은 할 수 없구나. 우리는 오행을 부릴 수 있을 진 모르지만, 혼과 생명이 깃든 것들 자체를 마음대로 하진 못한단다. 설령 할 수 있다 해도, 그건 천기의 영역을 거스르는 문제다. 그런 짓을 한다면 당장 차사들에게 혼이 거두어지고 말 것이다.”

하람은 크게 실망하여 고개를 떨구었다. 마치 벼랑 끝에 올라가 있던 영혼의 바위가 저 아래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종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처럼, 희망과 삶의 의지는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나날이 국운이 쇠해가고 있던 해동국. 해동국의 항구도시 '미추홀'에 살던 소년 하람은, 해적들의 습격에 아버지와 얼굴 반쪽을 잃고 대장군 진가람의 저택에서 종으로서 살아간다. 장군의 아들 가천의 관례를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 하람은 새벌의 각설이 가리울을 만나 이상한 일들을 겪게 된다. 몸은 왜소하고 얼굴은 흉측하지만, 선골을 타고 나 도사의 자질을 가진 소년, 하람. 구름처럼 변화무쌍한 그의 일대기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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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8. 살 오를 꽃-4 <1기 연재 종료> 15.05.15 178 0 14쪽
32 8. 살 오를 꽃-3 15.05.15 125 0 10쪽
31 8. 살 오를 꽃-2 15.05.15 124 0 11쪽
30 8. 살 오를 꽃-1 15.05.15 146 0 10쪽
29 7. 여우구슬-4 15.05.15 122 0 10쪽
28 7. 여우구슬-3 15.05.14 168 0 14쪽
27 7. 여우구슬-2 15.05.14 178 0 9쪽
26 7. 여우구슬-1 15.05.14 174 0 13쪽
25 6. 가림새 마을 - 4 15.05.13 123 0 9쪽
24 6. 가림새 마을 - 3 15.05.12 177 0 10쪽
23 6. 가림새 마을 - 2 15.05.12 120 1 13쪽
22 (재업로드) 5. 새벌을 떠나다-3 15.05.12 160 0 12쪽
21 6. 가림새 마을 - 1 15.05.12 138 0 13쪽
20 5. 새벌을 떠나다-4 15.05.06 139 0 10쪽
19 5. 새벌을 떠나다-2 15.04.29 274 0 13쪽
18 5. 새벌을 떠나다-1 15.04.27 252 0 13쪽
17 4. 불꽃의 원기-5 15.04.25 177 0 9쪽
16 4. 불꽃의 원기-4 15.04.21 161 0 14쪽
15 4. 불꽃의 원기-3 15.04.19 235 0 11쪽
14 4. 불꽃의 원기-2 15.04.18 256 0 11쪽
13 4. 불꽃의 원기-1 15.04.14 187 0 10쪽
12 3. 도사, 가리울-3 15.04.11 120 0 15쪽
» 3. 도사, 가리울-2 15.04.09 270 0 11쪽
10 3. 도사, 가리울-1 +2 15.04.06 296 1 11쪽
9 2. 개구멍받이-5 15.04.03 267 1 13쪽
8 2. 개구멍받이-4 +2 15.03.31 278 1 10쪽
7 2. 개구멍받이-3 +2 15.03.28 409 1 13쪽
6 2. 개구멍받이-2 15.03.25 241 0 11쪽
5 2. 개구멍받이-1 15.03.23 318 0 10쪽
4 1. 폭풍의 전조-4 15.03.22 266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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