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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키어스의 두근두근 판타지 서재!

악마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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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키어스
작품등록일 :
2012.03.04 23:26
최근연재일 :
2018.01.12 12:31
연재수 :
46 회
조회수 :
15,838
추천수 :
181
글자수 :
172,566

작성
12.01.22 23:07
조회
365
추천
4
글자
10쪽

3. 아버지 - 7

옛날에 썼던 글이에요




DUMMY

이후 2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가 적혀있다. 하지만 모두 찾을 수 없었다는 말 뿐이고, 뒤로 갈수록 생각은 점점 부정적으로 변해간다. 난 페이지를 촤르륵 넘기다 마지막 한 장 째에서 일기의 양상이 변하는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 장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XXXX. XX. XX.

드디어... 사랑을 찾았다.

이부터는 글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으므로 나의 피로써 이 행복을 기록하겠다.


이 뛰노는 듯한 글씨체만 보더라도 기뻐서 일기를 쓰는 것조차 잊어버렸을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그 다음 장부터는 1부터 18까지 숫자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18의 다음에는 19가 아니라 365가 적혀있었고, 차례대로 1씩 줄어갔다. 마지막에는 0이 쓰여있었는데 얼마나 반복해서 적었는지 0이 새카만 공이 되다못해 종이가 찢어져 있었다.

일기장을 몇 번 다시 뒤적이고 나서 더 이상 건질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관 위에 놓인 술병을 들었다. 그리고 술잔에 그것을 따랐다.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틀림없는 붉은 눈물이다.

과연 이것을 마시라고 올려둔 것일까.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어렴풋이 그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잔에 입을 대었다. 과연 이번에도 내게 무언가를 보여줄 것인가, 기대와 걱정이 섞인 생각을 하면서.


술을 마시자 아까처럼 목소리가 들려오는 대신, 눈앞이 캄캄해지는가 싶더니 새하얀 글자들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기장에서 끝난, 그 다음의 이야기였다.

내 눈이 그것들을 훑자마자 하이얀 글자들은 서로 엇물리고 섥혀서 살아움직이는 영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나는 곧 그것에 눈을 빼앗기고 말았다.

제일 처음 보인 것은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환하게 웃는 여인의 얼굴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방금 막 진흙탕에서 뒹군 것처럼 얼굴에 먼지와 흙이 처적처적 붙어있었고, 머리카락도 허벅지까지 닿을만큼 길었지만 관리라고는 해본적이 없는 듯 까슬까슬해 보이는데다가 산발적으로 뻗쳐있었다.

얼핏보면 헤프게도 보이는 웃음을 짓는 여인에게 한 남자가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당신이... 제 사랑이십니까?"

"예에?"

"아, 질문이 잘못 되었군요. 죄송합니다. 저는 규란테 미르유라고 합니다. 실례가 되지않는다면 당신의 성함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성함이랄 것까진... 전 멜레아에요. 성은 없어요."

여인은 조금 주저하며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먼저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여인이 얼굴에 묻은 흙을 털어내기도 전에 남자는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갑작스럽습니다만, 멜레아. 저와 함께 해주시겠습니까?"

그녀는 얼빠진 표정으로 시원하게 웃어보이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시간이 흘러서 이번에는 한 쌍의 남녀가 따스한 공기가 감도는 방 안에 마주앉아있었다. 여자는 흐뭇한 미소로 자신의 부푼 배를 어루고 있었다.

"여보, 우리 애 이름은 어떻게 할까요?'

"당신이 좋은대로 지으시오. 난 당신의 행복한 미소를 보기만해도 즐겁다오."

여자는 조금 부루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은 항상 그래요."

"뭐가 말이오?"

"항상항상 제가 좋아하는대로 하라고 하잖아요. 아, 처음에는 아니었네요. 한낱 가난한 여자에 불과했던 나한테 갑작스레 청혼을 했으니까요. 사실 그 때, 당신하고 부딫혀서 넘어졌을 때, 머리박고 사과하려고 했다고요."

"아하하, 그랬소?"

"아무튼, 그래서 아이 이름은 뭐가 좋을까요? 아이 이름만큼은 당신이 지어주세요."

"으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려. 어디보자..."

그는 아내의 배에 살며시 손을 가져다대고 속삭였다.

"얘야, 태어날 때 여자가 되고싶니?"

그녀가 어이없어하는 것을 무시하고 계속 말을 걸었다.

"그럼 남자가 되고 싶니?"

툭.

배가 움찔하고 움직이자 남자는 신나서 계속 물어보았다.

"그럼 이름은 라만사가 좋겠니?"

......

"반응이 없구나. 그러면 렘테가 좋겠니?"

......

"좋아! 그러면 아버지가 재밌게 읽었던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다. 팜페슈! 팜페슈는 어떠냐?"

툭.

"역시! 너도 마음에 들 줄 알았다."

"도대체 팜페슈는 어느 소설에 나오는 이름이에요?"

"영웅소설이라오. 평생 자기 가족을 위해 살다가 행복하게 죽은 가장이지. 난 반드시 내 아이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오."

"후훗, 그러네요. 저도 그렇게 되길 바래요."

그는 살며시 그녀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겼고, 그녀는 마냥 행복한 표정으로 자신의 남편과 태어날 아기를 바라보았다.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어두운 방 안에서 수척한 얼굴을 한 여인이 침대에 누워있었고, 남자는 그보다 더 헬쑥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은 요람이 있었는데 그곳에 작은 살덩이가 꼼지락꼼지락 움직이고 있었다.

여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여보..."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퀭한 눈으로 그녀와 마주했다. 잠시 후, 그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왔다.

"울지 마세요..."

"하지만... 하지만, 멜레아! 나는!"

"여보..."

"멜레아, 멜레아..."

여인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고 눈물을 떨구는 남자를 보며 여인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남자의 머리를 쓸었다.

"울지마요. 저는 이제 죽지만... 당신에겐 저와 당신의 아이가 남아있잖아요."

"아니오! 아이 따윈 필요 없었소! 당신만, 당신만 내 곁에 있다면 나는 아무 것도 필요없소! 당신이 죽으면 나도 같이 따라죽겠어!! 그러니 제발 죽는다는 말은 하지 말아주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그런 말씀마세요. 저 아이는 저와 당신의 아이이기도 하면서, 저와 당신인걸요..."

잠깐 말을 맺은 그녀는 눈이 침침한 듯 눈꺼풀을 올리는 것도 힘들어보였다.

"여, 여보... 제 부탁... 들어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오! 무엇이든! 무엇이든 말해보오!"

"팜페슈를 부탁해요... 성인식 때까지는... 당신의 도움이 피, 필요할 거에요. 그러니까...... 팜페슈를, 저, 저라고 생각하고...... 키워, 주... 세..."

"알았소! 내 반드시! 반드시 성인식까지 당신이 만족할만한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보이겠소! 하지만 그건 당신도 함께요! 그러니......!!"

그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것을 남자는 놓치지 않았다.

"당신을 만나서... 정말 행복했어요...... 사랑해요."

그 순간...

남자의 심장이 멎었다.

심장을 그득히 채우던 피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듯한 허무함과 싸늘한 한기가 그의 몸을 감쌌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그녀의 손을 자신의 뺨에 부비었다. 미약하게나마 그녀에게서 온기를 얻으려한 남자는 도리어 자신의 싸늘함으로 그녀의 몸을 차갑게 식혀버렸다. 심지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조차 방금 빙곡에서 떠온 것처럼 차게 식어있었다.

남자는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세상에 온기를 빼앗긴 그녀였지만 그는 그녀를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따스한 것으로 여겼다.

그렇게 수십일이 지나고나서야 하인들이 데려온 아기의 울음소리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흐리멍텅한 눈으로 힘차게 우는 아기를 보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와 멜레아의 아이.

그녀의 아이.

멜레아.

그는 그녀의 사체와 살짝 입을 맞추고 그녀를 고이 눕혔다. 그리고 하인들에게서 아이를 받았다. 팜페슈를 보며 결심했다.

내가 유일하게 사랑한 그녀의 부탁이 너다. 그러니 너를 반드시 성인식까지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겠다. 그리고 성인식이 되어, 멜레아의 마지막 부탁이 끝나면...

나도 멜레아를 따르리라.


술에 기록된 기억이 끝나고 나는 손에 들고있던 술병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유리가 산산히 부서지는 그 소리가 마치 내 마음이 깨지는 소리 같았다. 난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관뚜껑을 열어 그 안을 확인하고 난 후, 힘없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버지..."

그곳에는 새로이 짠 관에 그 어떤 장식도 필요없을만큼 화려한, 그가 사랑했던 그녀를 옆에 두고 조용히 생을 마감한 남자가 있었다. 지금 그의 가슴에 거무죽죽하게 말라붙은 피는 분명 내 손에도 덕지덕지 묻어 있으리라.

"저는... 어머니의 대용품일 뿐이었습니까..."

대답은 아버지의 얼굴에 피어난 숭고한 아름다움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한 때나마 그를 위해 효도를 해보려한 내가 한심스러워짐과 동시에 짙은 절망이 나를 짓눌렀다.

나는 행복한 아버지의 시신을 앞에 두고 나 자신에게 물었다.

'과연 내가 아버지만큼 라라네에게 나를 바칠 수 있겠는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새로이 깨달았다.


그녀는 나의 사랑이 아니다.


아버지가... 그가 짖궃게 웃으며 말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그대로 멍하니 앉아 다음 날 아침까지 죽은 것처럼 있었다.

덜컹... 덜컹... 덜컹...

톱니바퀴가 어긋한 기계에서 나는 듯한.

심장소리를 들으며...




재밌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작가의말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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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1. 차별없는 사랑 - 6 18.01.12 48 2 9쪽
45 1. 차별없는 사랑 - 5 +1 17.01.30 151 4 7쪽
44 1. 차별없는 사랑 - 4 +2 17.01.27 161 4 7쪽
43 1. 차별없는 사랑 - 3 +2 12.03.04 274 5 11쪽
42 1. 차별없는 사랑 - 2 +2 12.02.18 306 5 9쪽
41 1. 차별없는 사랑 - 1 +3 12.02.13 298 4 5쪽
40 0. 이야기의 시작. +4 12.02.08 304 4 6쪽
39 4. devil deal +2 12.02.03 310 7 6쪽
38 3. 아버지 - 10 end +3 12.02.02 246 4 8쪽
37 3. 아버지 - 9 +1 12.01.29 246 4 8쪽
36 3. 아버지 - 8 +1 12.01.27 295 4 10쪽
» 3. 아버지 - 7 +1 12.01.22 366 4 10쪽
34 3. 아버지 - 6 12.01.22 286 4 9쪽
33 3. 아버지 - 5 +2 12.01.19 363 3 8쪽
32 3. 아버지 - 4 +2 12.01.17 285 3 11쪽
31 3. 아버지 - 3 +2 12.01.15 256 4 6쪽
30 3. 아버지 - 2 +1 12.01.12 323 4 12쪽
29 3. 아버지 - 1 +3 12.01.10 265 3 17쪽
28 XX. 그대를 위한 누군가의 외침 +1 12.01.09 247 4 2쪽
27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9 end +2 12.01.04 237 4 5쪽
26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8 +2 12.01.03 254 4 15쪽
25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7 +1 12.01.01 243 3 14쪽
24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6 +3 11.12.30 304 4 7쪽
23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5 +2 11.12.28 260 2 9쪽
22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4 +2 11.12.27 333 6 7쪽
21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3 +1 11.12.26 231 3 7쪽
20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2 +3 11.12.24 322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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