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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키어스의 두근두근 판타지 서재!

악마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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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키어스
작품등록일 :
2012.03.04 23:26
최근연재일 :
2018.01.12 12:31
연재수 :
46 회
조회수 :
15,865
추천수 :
181
글자수 :
172,566

작성
11.12.30 20:29
조회
304
추천
4
글자
7쪽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6

옛날에 썼던 글이에요




DUMMY

나는 이야기왕이다.

자각하자마자 갑자기 허기가 졌다. 그래서 손에 들고 있는 '이미 먹은 음식'을 던지고 책상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분명 지금까지 먹어왔던 것과 별다를 바 없는 글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심지어 그런 것들조차 내 눈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나는 눈에 글자를 조심스레 담은 다음, 하나하나까지 잘게 씹어 맛을 음미했다. 글의 맛은 안타깝게도 글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너무 오랜만에 진정으로 음식을 맛봤기 때문인걸까.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속도로 순식간에 그 많던 진수성찬을 전부 먹어치워버렸다.

육체의 과식은 끝이 있지만, 마음의 과식은 끝이 없다.

오히려 앞에 먹은 음식이 전채음식이라도 되는양 마음에 감미로운 여운을 남긴다. 나는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포만감에 흐뭇하게 웃으면서도 계속해서 또 다른 음식을 찾아헤맸다.

"형? 지금 뭐하는거야?"

내가 새로운 음식을 찾아 서랍을 뒤지고 있을 때마침 자누가 들어왔다. 나는 내 정체성을 찾아준 사랑스런 동생을 양팔벌려 환영했다.

"어서오렴, 자누."

아무래도 자누는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는지 이전만큼 쉽사리 내게 달라붙지 않았다. 나는 그런 동생의 행동을 방긋 웃으며 용서해줄 수 있었다. 그야, 전에 있던 나와는 달리 지금의 나는 진짜이니까.

나는 기쁜 마음으로 자누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기뻐해주렴, 자누. 나는 드디어 내가 누구인지 깨달았단다!"

아무 것도 모르고 듣는다면 다소 웃기게도 들릴법한 말이었기에 자누도 잠시 알딸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금새 뭔가를 떠올렸는지 꽃이 만개하듯, 세상을 다 얻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내게 한걸음 다가왔다.

"정...말? 정말이야? 정말 형... 깨달은거야?"

"그래, 지금 내가 저 책상위에 있는 글들을 모조리 읽고도 모자라서 새로운 글을 찾고 있는걸 보면 모르겠니?"

나는 다시 한걸음을 앞으로 딛었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겨우 서너걸음. 앞으로 서너걸음이면 내 사랑하는 동생과 교감을 나눌 진한 포옹을 나눌 수 있다.

"정말로... 정말로 생각났나보구나. 다행이야, 다행이야 정말..."

자누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연신 다행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다 네 글 덕분이야. 진심으로 고맙다고 생각해. 네 글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진정으로 내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을거야."

"웅, 우응! 정말 다행이야. 고마워, 형. 고마워..."

나는 어린애처럼 펑펑 울음을 터뜨린 동생에게 손을 뻗어 다시 한걸음 다가갔다. 이번에는 자누도 나에게 한걸음 다가왔다. 이제 나와 자누 사이에 남은 거리는 단 한걸음뿐이다. 서로가 기대와 불안을 안고 작은 용기를 가지기만 하면 메워질 짧고도 먼 거리.

한걸음.

자누는 눈물을 닦고 애써 웃는 표정을 만들어보이며 내게 이렇게 부탁했다.

"형, 부탁이 있어."

"뭔데?"

"형이 발견한 자신이 무엇인지, 직접 말해줘. 형의 입으로 형이 무엇인지."

"아아, 몇번이고 말해줄께."

겨우 그런 것으로 이 거리가 좁혀질 수 있다면.

이 한걸음을 좁혀서 너를 내 품에 안을 수만 있다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자누는 내 행동을 보고는 배시시 웃었지. 나는 자누에게 살포시 마주웃어준 다음, 한걸음 앞으로 디딤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자누를 향한, 그리고 새로운 자신을 향한 애정을 듬뿍 담아서...

말했다.


나는

이야기왕이야.


한걸음을 딛었다.

그리고 여전히 한걸음이 남았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걸까. 난 분명 한걸음을 딛었는데, 나와 자누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한걸음만큼 벌어진 채였다.

이유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자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자누는 나보다도 더 놀란,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몸을 뒤로 빼고 있었다.

"형... 지금... 뭐라고 그랬, 어?"

"왜 그러니?"

"뭐라고 했냐고!!"

자누는 한순간에 나를 향해 새카맣게 타오르는 적의를 불태웠다. 나는 그 적의와 마주하고 웃음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웃음기를 지우고 벌렸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다시 말해주면 되는거니?"

"그래. 다시 말해줘."

"나는 이야기왕..."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자누가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있는대로 악을 쓰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형은 이야기왕이 아니야! 이야기왕이어서는 안된다고!!"

그리고 순식간에 나에게 달려들어 오른손으로 내 어깨를 세게 움켜쥐었다. 자누는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애원했다.

"형, 아니지? 그치? 잘못 말한거지? 그렇다고 말해줘, 제발. 제발! 형은 이야기왕이 아니라고, 지금 한 말은 거짓이라고 말해줘! 형!!"

나는 자누의 처절한 애원을 듣고 가만히 생각했다.

왜 자누는 나를 거부하는건가. 도대체 나의 무엇이 잘못되었길래, 나에게 '내'가 되지 말라고 하는건가.

나는 알고 있다. 내 말 한마디에 자누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오를 것인가를. 물론 작은 거짓말을 함으로써 잠시나마 자누가 웃을 수는 있을터다.

하지만 그뿐이다. 나는 다시 나를 잃어야하고 자누는 다시 거짓이 된 나를 형이라 불러야한다.

절대로... 그럴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자누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다시, 말했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말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야기왕이야."


자누의 얼굴이 처절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자누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어깨에서 손을 떼고 내게서 등을 돌려 힘없이 밖으로 걸어나갔다.

나는 그 뒷모습에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었다. 마치 속이 텅 비어서 껍데기만 남은 인형이 걸어가는 것처럼,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깨에 시뻘건 피멍이 들었다. 나는 손을 어깨에 대고, 자누가 그랬던 것처럼 있는힘껏 그것을 움켜쥐었다.

정신이 아찔해질만큼 아팠다.




재밌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작가의말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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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1. 차별없는 사랑 - 6 18.01.12 49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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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1. 차별없는 사랑 - 4 +2 17.01.27 162 4 7쪽
43 1. 차별없는 사랑 - 3 +2 12.03.04 275 5 11쪽
42 1. 차별없는 사랑 - 2 +2 12.02.18 307 5 9쪽
41 1. 차별없는 사랑 - 1 +3 12.02.13 299 4 5쪽
40 0. 이야기의 시작. +4 12.02.08 305 4 6쪽
39 4. devil deal +2 12.02.03 311 7 6쪽
38 3. 아버지 - 10 end +3 12.02.02 247 4 8쪽
37 3. 아버지 - 9 +1 12.01.29 247 4 8쪽
36 3. 아버지 - 8 +1 12.01.27 296 4 10쪽
35 3. 아버지 - 7 +1 12.01.22 366 4 10쪽
34 3. 아버지 - 6 12.01.22 287 4 9쪽
33 3. 아버지 - 5 +2 12.01.19 364 3 8쪽
32 3. 아버지 - 4 +2 12.01.17 286 3 11쪽
31 3. 아버지 - 3 +2 12.01.15 257 4 6쪽
30 3. 아버지 - 2 +1 12.01.12 324 4 12쪽
29 3. 아버지 - 1 +3 12.01.10 266 3 17쪽
28 XX. 그대를 위한 누군가의 외침 +1 12.01.09 248 4 2쪽
27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9 end +2 12.01.04 238 4 5쪽
26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8 +2 12.01.03 255 4 15쪽
25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7 +1 12.01.01 244 3 14쪽
»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6 +3 11.12.30 305 4 7쪽
23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5 +2 11.12.28 261 2 9쪽
22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4 +2 11.12.27 334 6 7쪽
21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3 +1 11.12.26 232 3 7쪽
20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2 +3 11.12.24 323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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