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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키어스의 두근두근 판타지 서재!

악마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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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키어스
작품등록일 :
2012.03.04 23:26
최근연재일 :
2018.01.12 12:31
연재수 :
46 회
조회수 :
15,852
추천수 :
181
글자수 :
172,566

작성
11.12.28 19:28
조회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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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9쪽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5

옛날에 썼던 글이에요




DUMMY

"형! 일어나봐!"

눈을 뜨자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는 동생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지. 자누는 안도의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어.

"어른이 되서 바닥에 아무렇게 자빠져서 자면 어떡해?"

"응, 미안."

"그리고 이게 무슨 난장판이야? 거울은 또 왜 빻았어?"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신경쓰지마."

내 옷에서 반짝반짝 떨어지는 유리가루를 털어내며 어제 그 자가 서있던 곳을 곁눈질로 흘겨보았어. 그러자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지.

홀연히 찾아와 다시 홀연히 사라진 그자도. 두려움에 떨던 나도. 환희의 웃음을 짓던 나도. 미친듯이 나를 부쉈던 나도...


악마는 말했어.

"큭큭큭, 그대는 이미 정체성을 잃었군."

비웃음과 함께 흘러나오는 그 말을 흘려들을 수가 없었어. 내 손으로 직접 '나'를 부숴버렸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를 보고 두려워하지 않는 내가 이질적임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었지.

'악마는 사람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이다.'

그 말이 맞아. 악마는 두려워해야함이 당연해. 이유는 알 수가 없으나 자연의 섭리인 것처럼 응당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나는 궁금하다."

그는 검지손가락을 뻗어 내 미간에 살짝 가져다대었어. 서늘한 감촉이 듦과 동시에 내 의식이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지. 그 와중에도 악마의 말만큼은 또렷하게 귀로 파고들었지.

"과연 그대가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을..."


내가 멍하니 있는걸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동생이 내 앞으로 폴짝 뛰어와 물었어.

"왜 그래, 형. 몸이 안 좋아? 안 좋으면 오늘은 집에 가서 쉬는게 어때? 벌써 사흘째 여기에서 잤잖아."

나는 망념에서 깨어나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주었지.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피로가 쌓인걸까. 오늘은 집에 가서 자야겠어."

봄날의 고양이마냥 생글거리며 내 손길을 받아들이던 녀석이 갑자기 눈을 퍼뜩 뜨더니 나에게 물었지.

"그러고보니 내 글은 어땠어? 감평해줘, 감평."

내가 밤새 써놓은 종이를 건네주자 자누는 먹이를 낚아채는 매처럼 재빠르게 종이를 채가더니 황급히 그것을 읽기 시작했지. 사실 읽을 것도 없었지만.

그리고 나는 정말 급한 원고 몇 개만 챙겨서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어.

준비가 끝났을 즈음, 자누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 옷깃을 끌었어. 혹시 내가 너무 무성의하게 비평을 한게 아닌가 걱정이 슬며시 들었지. 하지만 자누가 시무룩해진 이유는 따로 있었어.

"형, 이거 말고 다른거."

"다른거라니?"

"감평말이야. 고칠 점 말고. 형이 느낀 점... 그런거 없어?"

느낀 점? 그러고보니 저번에도 느낀 점을 말해달라고 했었지. 나는 어떻게 말해주면 좋을지 짧게 고민을 하다가 그냥 느낀 그대로 솔직히 말해주기로 했다.

"재밌었어. 정말 잘 썼던데? 앞으로 조금만 더 노력하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을거야."

"으응... 혹시 뭐 생각난거라도 있어? 이 글이 사실은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던가... 그런..."

아무래도 자누도 자기가 쓴 글의 소재가 너무 평이하다는 것을 염두해두고 있는 모양이었어. 그래서 나는 동생이 기운을 잃지않도록 좋은 방향으로 격려를 해주었지.

"물론 소재가 조금 평범해서 어디에서 들어본 적 같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네 글이었어."

분명히 기뻐하리라고 생각했던 나의 예상과는 달리 자누는 시무룩해져서 애매한 웃음을 보였지. 그 반응에 혹시 내가 뭐라도 잘못한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어.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동생은 애써 활짝 웃으며 내게 이렇게 말했어.

"알았어. 다음에도 기대해줘. 다음에는... 다음에는 반드시!"

동생은 그렇게 말하더니 잽싸게 뒤돌아 뛰쳐나가버렸어.

그 순간, 내 눈에 뭔가 이상한 것이 보였어. 마치... 신화에 나오는 악마처럼 시뻘건 팔이 언뜻 보인 것 같았지. 하지만 눈을 비비고 다시 봤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그래, 착각이겠지. 착각일거야.

그렇게 되뇌이며 가방을 짊어매고 사무실에서 나왔어.



그로부터 다시 한 달이 지난 후, 나는 자누가 놓고간 원고를 손에 들고 있었어. 벌써 여든여덟번째 글이었지. 원고의 제일 앞장에는 '이야기왕'이라는 제목이 큼지막하게 적혀있었어.

"이야기왕이라..."

이번에는 읽지 않았는데도 머릿속에서 내용이 주마등처럼 주욱 흘러들어왔어. 아마... 이것도 읽은 적이 있는 모양이었는데, 나는 이 상황을 스스로 인정할 수가 없었지.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이야기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다시 말로 꺼낼 수 있어.

그런데 이 감각은 뭐란 말이야. 분명... 분명 어디에선가 읽었는데. 머릿속에서 살아움직이는 정경까지도 있었던 것 같은데! 왜 기억해낼 수가 없는거지?

하지만 내가 아무리 애써도 분명하게 내용을 떠올려낼 수는 없었어. 이 간질거리는 느낌은 마치 내 마음속에서 누군가가 일부러 기억을 숨긴채, 내게 빨리 읽으라하는 재촉같았지.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간지럼이었고, 혀가 녹아버릴만큼 달콤한 유혹이었지.

그래서 나는 지체하지 않고 첫장을 넘겼어.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입모양으로만 중얼거렸지.

"도대체... 뭐야, 이건."


옛날, 옛날 글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가 이야기를 얼마나 좋아했느냐하면 한 번 들었던 이야기는 절대로 잊지않았고, 처음 듣는 이야기를 하는 꾼이 있다고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야기를 듣고 말았지요.

그렇게 그는 평생동안 수많은 글을 읽고, 접하고, 들으며 세계 최고의 이야기꾼이 되었습니다. 어느새, 사람들은 그를 '이야기왕'이라고 부르며 그에게만 슬쩍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야기를 들을망정,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풀어놓은 적이 없다는 것의 의미를 말이지요.


이야기를 듣고 수집하지만 절대로 다른 이에게는 들려주지 않는다. 이는 곧, 모든 글이 모이는 곳에서 그것들을 읽어 수집하지만 절대로 이 글을 다른이에게 발설해서는 안되는 사람과 마찬가지 아닌가.

이건 마치...

"나... 잖아."


이야기왕은 들었다. 듣고 또 들었다. 그에게 있어 삶의 의미란 듣고 수집하는 것의 연속이었다.

작가는 이야기를 가질 수 없지만 독자는 이야기를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뒷내용을 읽지 않고서도 이 다음에 나올 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어.

'이야기는 절대로 작가의 것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야기에는 다른 사람의, 작가의 인생과 가치관이 녹아있으며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설령 이야기가 같은 줄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서로 다른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끊임없이 끊임없이 이야기를 수집했다. 만약 누군가가 그것을 무엇에 사용하고 어째서 수집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는 지체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왕의 대사를 입에 담아보았다.

"이야기는 곧 애정과 노력이다. 그리고 나는 매일마다 그것을 먹고 살아가지. 사람이 살기위해 음식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이야기를 먹지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그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잠시 떨어져있던 나의 일부가 되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나의 혀에 쉽사리 녹아들었고, 곧 나의 마음 속에 자리를 잡았어.

그와 동시에 내 기억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거대한 결의가 깨어났지. 단단한 껍질을 부수고 내게 되돌아온 그것은 평범한 종이 한 장이었지만 나의 전부라해도 무방할만큼 내 안을 그득하게 채워갔어.

나는 손을 뻗어 종이를 잡은 다음, 그것에 적힌 한 줄의 글귀를 입으로 발음해보았어.


"나는 이야기왕이 되겠어요."


아아, 아아...

그렇구나. 그랬구나.

나는 이제야 과거에 나를 비웃던 악마에게 당당히 그의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되었어.

고마워, 자누.

네 글 덕분에 나는, 내가 누구인지 진정으로 알게 되었어.


나는

이야기왕이야.




재밌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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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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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1. 차별없는 사랑 - 1 +3 12.02.13 298 4 5쪽
40 0. 이야기의 시작. +4 12.02.08 305 4 6쪽
39 4. devil deal +2 12.02.03 310 7 6쪽
38 3. 아버지 - 10 end +3 12.02.02 246 4 8쪽
37 3. 아버지 - 9 +1 12.01.29 247 4 8쪽
36 3. 아버지 - 8 +1 12.01.27 295 4 10쪽
35 3. 아버지 - 7 +1 12.01.22 366 4 10쪽
34 3. 아버지 - 6 12.01.22 286 4 9쪽
33 3. 아버지 - 5 +2 12.01.19 364 3 8쪽
32 3. 아버지 - 4 +2 12.01.17 285 3 11쪽
31 3. 아버지 - 3 +2 12.01.15 257 4 6쪽
30 3. 아버지 - 2 +1 12.01.12 323 4 12쪽
29 3. 아버지 - 1 +3 12.01.10 265 3 17쪽
28 XX. 그대를 위한 누군가의 외침 +1 12.01.09 248 4 2쪽
27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9 end +2 12.01.04 237 4 5쪽
26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8 +2 12.01.03 254 4 15쪽
25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7 +1 12.01.01 244 3 14쪽
24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6 +3 11.12.30 304 4 7쪽
»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5 +2 11.12.28 261 2 9쪽
22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4 +2 11.12.27 334 6 7쪽
21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3 +1 11.12.26 231 3 7쪽
20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2 +3 11.12.24 323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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