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나르키어스의 두근두근 판타지 서재!

악마보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포·미스테리

나르키어스
작품등록일 :
2012.03.04 23:26
최근연재일 :
2018.01.12 12:31
연재수 :
46 회
조회수 :
15,850
추천수 :
181
글자수 :
172,566

작성
11.12.27 22:05
조회
333
추천
6
글자
7쪽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4

옛날에 썼던 글이에요




DUMMY

아무래도 원고를 읽다가 의자에서 잠이 든 모양이야. 분명 마지막으로 창밖을 봤을 때는 노을이 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느덧 어둑어둑해져 있었지.

난 손에 들고있던 원고를 한쪽에 치워두고 기지개를 주욱 폈어. 뼈가 뚜둑거리는 소리가 상쾌했지. 그러다 불현듯 내 눈에 들어오는게 있었어.

바로 낮에 동생이 두고 갔던 원고였어. 나는 그 원고를 대충 넘겨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어. 도저히 한달만에 써낼만한 양도 아니었을 뿐더러 알아보기 어렵게 휘갈긴 글씨도 하나 없었지.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제일 앞면을 손으로 쓸어보았어. 그것만으로도 동생이 이 글에 쏟아부은 노력의 뜨뜻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지. 그렇게 생각을 하고나자 이 글을 읽지않고는 참을 수가 없게되었어.

그래서 나는 망설임없이 의자에 앉아 아직 읽지않고 쌓아둔 원고더미를 향해 짧은 사과의 표시를 한 다음, 그 글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지.



밤새 훌쩍 넘어갔던 해가 수줍게 얼굴을 내밀어 나른한 푸름을 세상 곳곳에 뿌리는 시간이 되어서야 나는 의자를 뒤로 크게 젖히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어. 그리고 얼굴을 쓸어내리며 크게 숨을 내쉬었어.

나는 창가에 서서 찌뿌둥한 몸을 풀고 다시 의자에 앉아 방금 전까지 정신없이 읽던 원고를 지그시 바라보았어. 동시에 자누에게 건네줄 감평을 적은 종이도 보았지.

새햐안 백지.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집어낼 부분이 없었지. 그리고 평가와는 별개로 나는 이 글에 진한 감동을 받았어.

글 자체의 내용은 소소했어.

책을 사랑하는 소년이 우연찮게 존경하는 작가와 만나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생각을 나누고, 글을 쓰며 성장해 훌륭한 작가가 되는 이야기였지.

비극적인 사건이나 깜짝 놀랄만한 반전이 없는 평이하기 그지없는 글이었지만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는 그런 글이었어. 난 묘하게 먹먹해지는 가슴을 다독이며 천천히 눈을 감았어.

솔직히 말하면 방금 읽은 글은 내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수많은 글 이상의, 이하의 것도 아니었어. 그런데 내가 왜 그런 평범하기 그지없는 글에 감동을 느꼈을까?

아무래도 다른 것들과는 현격하게 사랑의 농도가 달랐기 때문이었을거야.

글자 하나하나에 정성이 들어간 그것은 가히 사랑 그 자체라해도 무방할 정도였어. 나는 그것을 읽으며 내가 글을 읽는 것인지 자누가 쏟아놓은 사랑을 읽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지. 물론 둘 다였겠지만.

그런데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이건 내가 어디에선가 봤던 이야기라는 점이야. 비단 이 글만이 아니었지. 자누가 가져온 글은 전부 마치 내 기억 깊숙한 곳에 묻어둔 이야기를 발굴해내는 것처럼 읽을 때마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글에서 표현된 정경을 떠올릴 수 있었지.

도대체 왜 그런걸까. 나는 천천히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떠올려보기 시작했어.

바로 그 때.

"이거 놀랍군."

나는 갑자기 앞에서부터 들려온 목소리에 상념을 떨쳐버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어. 그 목소리의 주인은 훤칠한 청년이었어. 청년의 오른팔은 어깻죽지부터 그 아래가 없었어. 그는 텅 빈 소매를 나풀거리며 내 앞에 서서 책상 위를 왼손으로 쓸어보고 있었지.

"누구냐."

하지만 그는 내 질문은 신경쓰지도 않고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파괴한건가... 이런 곳에 나만한 인간이 있을 줄이야."

난 일어서서 책상밑에 숨겨둔 호신용 몽둥이를 꺼내들었지. 그리고 다소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어.

"문을 잠궈놨는데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빨리 나가는게 좋을거야."

하지만 그는 여전히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는 쇠몽둥이와 나를 번갈아보다가 한 손으로 턱을 쓸었지. 그러고는 찬찬히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나를 관찰했어. 그 시선이 얼마나 불쾌했는지 나도 모르게 몽둥이로 그의 머리를 후려칠 뻔했지.

"이상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흥미롭다. 그대는 어떻게 나를 보고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건가? 과거, 나를 보고도 무심을 유지했던 자들이 몇 있기는 했지만."

나는 그에게 소리를 질렀어. 자꾸 영문을 모를 말을 해서 짜증이 솟구쳐서가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 들어와서 불안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두려웠어.

도대체 그의 어디가 어떻게 두려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나긋나긋한 손짓에, 차가운 숨결에, 느긋한 말 한 마디가 내게 닿을 때마다 마치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바들바들 떨려왔지.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무서웠던 것은 그의 '눈'이었어.

그의 눈에서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꽃에, 두려움에 떨고있는 내가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었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냐고! 넌 도대체 누구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그대는 도대체 무엇인가? 대체 무엇이길래"


나를 보고도 그렇게 웃을 수 있는건가.


처음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하지만 그의 뒤쪽에 걸려있는 전신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눈에 들어왔어. 그 안에서 나는...

희열이 넘실거리는 눈을 번득이며, 입고리가 날카롭게 휘어올라가 찢어지는 웃음을 짓고 있었지.

그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를 밀치고 달려가 거울을 향해 몽둥이를 있는 힘껏 휘둘렀어.

섬뜩한 파열음과 함께 내 웃는 얼굴이 조각조각 부서졌어. 하지만 나는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무언가에 홀린듯에 계속해서 몽둥이를 휘둘러 거울을 후려쳤지. 그 사내는 그런 나를 말릴 생각도 하지않고, 눈도 돌리지 않고, 가만히 내가 나를 부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지.

부수고, 부수고, 또 부쉈어. 유리조각이 고운 가루가 되어 더 이상 웃을 수 없을 때까지 휘둘렀어. 근육이 땡기고 숨이 거칠어졌지만 이런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어.

이윽고, 더 이상 팔이 올라가지 않게되고, 더 이상 '웃음'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나는 손을 멈췄어. 그리고 터질듯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었지.

"하아... 크, 카흑! 쿨럭! 흐, 하아..."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꿇고앉은 내게 사내가 가까이 다가왔지.

"그대는 그렇게까지 자신의 사랑을 묻어두고 싶은건가. 그대도 보았다시피 그대의 '사랑'은, 악마는 밖으로 나오고 싶어하고 있지 않나. '사랑'을 꺼낼 수 있는 나를 보고 희열에 떨지 않았나."

나는 땀에 푹 젖어 뿌옇게 흐려진 눈으로 그에게 띄엄띄엄 물었어.

"헉, 허억... 너, 넌 도대체, 누... 구길래... 쿨럭!"

내 질문에 그는 시원스럽게 대답했지.


"악마다."



또... 꿈을 꾸었어.

이번에도 저번과 같은 꿈이었지. 하지만 저번보다는 더욱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었어.

내가 누워있던 돌바닥이 실은 누군가의 무덤이었으며 나에게 별빛은 꿈이라 말해주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도 말이야.

그의 이름은......




재밌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작가의말

매일 추천수 달아주시는 분이 누군지 정말 궁금하네요.
감사합니다!
매화 댓글 달아주시는 카이세르니님도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58 에벱베베
    작성일
    11.12.27 23:02
    No. 1

    저... 제가 매일 추천 달아드리고 있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짬짬히 보는 터라 댓글을 못 달 때가 더 많긴하지만 작가님 작품은 열심히 보고있습니다.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6 라이도
    작성일
    11.12.28 14:27
    No. 2

    추천은 별로 익숙하지 않아서... 오늘은 하고갈께요! 그리고 저 악마의 저 대사는 역시나 너무 마음에 들어요..
    시원스럽게 "악마다." 라고 말하는 부분. 음. 왜 마음에 들까요?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악마보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늦은 감이 있지만 이 글을 보기 전에. +3 12.01.11 395 0 -
공지 댓글 좀 부탁드립니다아~ +2 11.12.10 297 0 -
공지 연재 재개 +11 11.12.01 484 0 -
46 1. 차별없는 사랑 - 6 18.01.12 49 2 9쪽
45 1. 차별없는 사랑 - 5 +1 17.01.30 151 4 7쪽
44 1. 차별없는 사랑 - 4 +2 17.01.27 162 4 7쪽
43 1. 차별없는 사랑 - 3 +2 12.03.04 274 5 11쪽
42 1. 차별없는 사랑 - 2 +2 12.02.18 307 5 9쪽
41 1. 차별없는 사랑 - 1 +3 12.02.13 298 4 5쪽
40 0. 이야기의 시작. +4 12.02.08 305 4 6쪽
39 4. devil deal +2 12.02.03 310 7 6쪽
38 3. 아버지 - 10 end +3 12.02.02 246 4 8쪽
37 3. 아버지 - 9 +1 12.01.29 247 4 8쪽
36 3. 아버지 - 8 +1 12.01.27 295 4 10쪽
35 3. 아버지 - 7 +1 12.01.22 366 4 10쪽
34 3. 아버지 - 6 12.01.22 286 4 9쪽
33 3. 아버지 - 5 +2 12.01.19 364 3 8쪽
32 3. 아버지 - 4 +2 12.01.17 285 3 11쪽
31 3. 아버지 - 3 +2 12.01.15 257 4 6쪽
30 3. 아버지 - 2 +1 12.01.12 323 4 12쪽
29 3. 아버지 - 1 +3 12.01.10 265 3 17쪽
28 XX. 그대를 위한 누군가의 외침 +1 12.01.09 248 4 2쪽
27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9 end +2 12.01.04 237 4 5쪽
26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8 +2 12.01.03 254 4 15쪽
25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7 +1 12.01.01 244 3 14쪽
24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6 +3 11.12.30 304 4 7쪽
23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5 +2 11.12.28 260 2 9쪽
»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4 +2 11.12.27 334 6 7쪽
21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3 +1 11.12.26 231 3 7쪽
20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2 +3 11.12.24 323 4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