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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키어스의 두근두근 판타지 서재!

악마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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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키어스
작품등록일 :
2012.03.04 23:26
최근연재일 :
2018.01.12 12:31
연재수 :
46 회
조회수 :
15,854
추천수 :
181
글자수 :
172,566

작성
12.01.17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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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1쪽

3. 아버지 - 4

옛날에 썼던 글이에요




DUMMY

드디어 내 성인식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벌써부터 성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온갖 장식과 성인식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기 시작하셨다.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도 아버지는 해도해도 부족한 것처럼 하인들을 닥달하셨다. 하인들은 힘들어도 평소엔 자상하신 아버지의 안절부절한 모습을 보는게 즐거운지 웃으며 아버지의 애같은 투정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난 그 모습에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한숨을 쉬는 것을 보고, 라라네가 뒤에서 내 허리를 꼬옥 끌어안고는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왜 그렇게 한숨을 쉬어요? 이제 성인이 되는게 아쉬워서 그러는거에요?"

난 피식 웃고, 라라네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그럴리가 있겠소."

"그럼 왜 한숨을 쉬어요? 또 정원일이 잘 안되요?"

"아니, 그런게 아니라오. 다만 아버지께서 내 성인식에 너무 많은 공을 들이는건 아닌가 싶어서 말이오."

라라네가 허리에 두른 팔을 풀고, 옆에 나란히 서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안그래도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보통 성인식은 친한 몇 분만 초대해서 간소하게 치르지 않던가요. 물론 황자님의 성인식은 국가 축제였지만요."

"그러게 말이오. 아버님은 내게 가주를 맡기시는 걸 무척이나 반기시는 모양이오."

"후훗, 당신이라면 잘 해낼거에요."

"빈 말이라도 고맙소."

그녀에게 짧은 입맞춤을 하고, 다시 정원으로 돌아가려는 길이었다.

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이곳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헐렁한 바지와 웃옷을 입고, 목에는 땀으로 흥건한 수건을 걸었고, 모두가 천과 장식품을 들고 분주할 때 홀로 옆에 나무판자를 끼고 허리에 공구가방을 메고 있었다.

혹시 분주한 틈을 타 들어온 수상한 사람일 수도 있었기에 나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보게."

"예?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는지 물어도 되겠나."

내 질문에 그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어설프게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규란테 미르유님의 명령이어서 말입니다. 제가 무엇을 하는지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말라 하시더군요. 자, 여기 그 분의 친필 서명입니다."

그가 내민 종이에는 확실히 아버지의 필체로 '미르유 가의 출입을 허가한다'라고 적혀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종이를 돌려주었다. 그는 고개만 살짝 꾸벅이곤 다시 제 일을 하러 떠났다.

난 도대체 아버지께서 무슨 생각으로 저런 사람을 부르셨나 싶었다. 목수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분명 목수들은 이주쯤 전에 화려한 단상을 만들어두고 물러갔기 때문이었다.

조금 겸연쩍게 생각하면서도 아버지께서 하신 일이니 허튼 일은 아닐거라는 생각으로,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다시 시간이 흘러 성인식 전날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두어시간이면 하루가 넘어갈 밤늦은 때,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서재로 가는 길이었다.

아버지는 말그대로 음식만 나오면 될만큼 만반의 준비를 갖추셨고 하인들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한달간의 지긋지긋한 업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꽉 막히신 분이 아니시니 그들은 지금쯤 내일 신나게 먹고 마실 생각에 들떠있을지도 모른다.

난 서재앞에서 문을 두어번 두드렸다.

"들어오거라."

왠지 목소리가 조금 늘어지는 것 같더라니 아니나다를까, 벌써 두 병째 술을 비우고 계셨다. 아버지께서는 내게 손짓하며 말씀하셨다.

"이리와 앉거라."

난 아버지의 앞에 앉아 술에 한껏 취하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우신지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나가질 않고 있었다.

"드디어... 내일이구나."

아버지께서는 내 앞에 잔을 하나 놓으시더니 맑은 술을 따르셨다. 그 알싸한 향은 분명 아버지께서 즐겨드시는 '붉은 눈물'이라는 술이었다. 이름과 다르게 맑고 깨끗한 술은 술 자체보다는 얽힌 유래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난 그 유래까지는 알지 못했다.

난 내 앞에 놓인 술을 멀뚱히 보고있다가 아버지께 여쭈었다.

"마셔도... 됩니까?"

"그래."

중후한 목소리의 조금 딱딱했던 아버지의 말투는 술이 어우러져 사근사근하게만 들렸다.

난 잔을 들고도 머뭇거렸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내게 한 번도 붉은 눈물을 준 적이 없으셨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술을 마시더라도 내게는 꼭 다른 술을 따라주셨었다.

내가 그것을 조심스레 입에 가져다대기도 전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요즘... 정원일에 푹 빠졌다고 하더구나."

"예."

"그래... 그거 좋지. 나도 아직 사랑을 찾지 못했을 시절엔... 내 힘으로도 어찌하지 못하는 일을 즐겨했단다. 그래, 그래... 나는 그림을 즐겨그렸지."

"그림라면 쉽게 그릴 수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선 술을 한모금 머금으시고 고개를 탁하게 웃으셨다.

"내가 그렸던 것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란다. 붓이 가는대로, 손이 가는대로 그은 나만의 그림이었단다."

"네."

아버지는 술잔을 들어 창밖에 휘황찬란히 빛나고 있는 달을 비추었다. 그리곤 달을 품은 액체를 그대로 입에 들이 부으셨다. 솔직히 난 아버지의 그런 모습에 적잖게 당황하고 있었다. 술을 즐기실지언정 과음을 하실 분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난 슬쩍 내 앞에 놓인 술잔을 바라보았다. 나도 이것을 마시면 저렇게 되는걸까.

내 걱정도 모른채 아버지께서는 새로운 술병을 집어드셨다.

"아무튼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그림 따위를 이야기하자는게 아니다."

"성인식 때문입니까?"

"그래."

이제 술잔에 마시는건 감질나시는지 그냥 병목을 휘어잡고는 그대로 주둥이를 기울여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셨다. 난 더욱 더 불안해졌다.

그래서 나는 불안을 떨쳐보고자 가볍게 농을 쳐보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성인식을 고대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제게 가주의 직위를 넘겨주고 쉬고 싶으렸습니까?"

하지만 내 농에 아버지께서는 그나마 있던 웃음마저 지우시고 나지막히 중얼거리셨다.

"그래... 쉬고, 싶구나."

"아...버지?"

아버지께선 그대로 아무말없이 달을 바라보시다가 돌연 킥킥거리며 웃으셨다.

"그녀에게는 미안하게 되었지만... 정말이지. 쉬고 싶구나."

그렇게 한동안 잠자코 달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옆모습을 보았다. 왠지... 지금 봐두지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불현듯 아버지께서는 고개를 돌려 내게 물으셨다.

"성인식의 절차는 숙지하고 있느냐."

"아, 네."

"어디 말해보거라."

"우선 원하는 사람과 함께 단상에 오르고, 그곳에서 간단한 성인서약을 합니다. 그 다음 함께 올라간 사람이 따라주는 술을 받아마시고 가보를 들고 다시 간단한 서약을 합니다."

"그래, 거기까지는 아무래도 좋다. 그 다음을 말해보거라."

"그 다음에는..."

'각성의식'입니다.

"그래. 그거 말이다."

아버지께서는 갑자기 술병을 확 기울여 단숨에 비워버리셨다. 그리고 씁쓸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각성의식은 어른이 되기 위해 깨달음을 주는 시간이지. 그래서 성인식의 과정은 답습하면서도 각성의식만큼은 가문의 전통이나 선대의 신념에 따르는 경우가 많지. 그래서 너도 황자님의 각성의식이 어떻게 치러졌는지 알고 있잖느냐."

전쟁포로 100명의 피를 여신의 제단에 바쳤다. 그것도 황자가 그의 손으로 직접.

"그렇다면 미르유 가문의 각성의식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네..."

"말해보거라. 미르유의 성을 가진자가 깨달아야할 것을."

나는 아버지께서 어렸을 때부터 숱하게 강조해왔고, 서재 벽에도 새겨져있는 문구를 읊었다.


삶이란

다른 무언가의 죽음으로서 성취되는 것.


미르유의 성을 짊어진 자로써

나 자신의 삶을 위해 자신을 죽이겠노라.


난 초대 가주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이 구절을 다섯 살때부터 눈을 감고 외웠지만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께선 이런 내 생각을 짐작하셨는지 옅은 웃음을 보이셨다.

"그래,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겠느냐?"

"아직...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주억거리시더니 술을 세 병이나 드신 분 답지 않게 멀쩡하게 일어나셨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 손바닥에 무언가를 올려놓으셨다.

그것은 엄지손가락만한 자그만 병이었고, 그 안에는 새빨간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이건......"

"2대 가주님. 아니, 아버님... 네 할아버님의 피다."

난 그것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껏 이런 것이 있었다는 말은 듣지도 못했고 왜 이런 걸 굳이 병에 소중히 모아두었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너도 심적으로 견딜 수 없이 힘든 날이 올게다. 그러면 그 때, 어떤 술이든 상관없으니 술에 이것을 한 방울만 섞어서 마시거라. 술의 양은 상관이 없다. 오랫동안 마셔야 할 것 같거든 술을 한데 모아두고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상관없으니까."

"이걸 왜... 제게?"

"앞으로는 나보다 네게 더 필요할테니 말이다. 나도 이제 음주는 그만하고 쉬어야지..."

아버지는 그렇게 중얼거리시더니 휘적휘적 걸어서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잊어버린 것이 있으셨는지 그 자리에 멈춰서서 다시 말씀하셨다.

"파슈. 너 '구절'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지?"

"네."

"그렇다면... 너는 아직 사랑을 찾지 못한게로구나."

그렇게 말씀하시곤 시원스레 웃으셨다. 내가 무어라 반박을 하기도 전에 아버지께서는 그 웃음을 흘리며 이어 말씀하셨다.

"나는 내일 성인식에 참석하지 않을거다."

서재문이 닫히고 나는 멍하니 닫힌 문만을 바라보다가 구절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읽어봐도 이해하지 못했고, 허망하게 주저앉은 내 귓가엔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한 마디만이 왱왱거렸다.

너는 아직 사랑을 찾지 못했구나. 너는 아직 사랑을 찾지 못했구나. 너는 아직 사랑을 찾지 못했구나.

너는 아직 사랑을 찾지 못했구나......

어느 새, 시간은 12시를 넘어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다.




재밌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작가의말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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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XX. 그대를 위한 누군가의 외침 +1 12.01.09 248 4 2쪽
27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9 end +2 12.01.04 237 4 5쪽
26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8 +2 12.01.03 254 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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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4 +2 11.12.27 334 6 7쪽
21 여든여덟의 추도문 - 5. 후로나 키인 - 3 +1 11.12.26 232 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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