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화제의 중심
SH엔터테인먼트 옥상 정원.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한 참새들처럼 점심 식사 후, 흡연실로 삼삼오오 모여드는 직원들.
"와, 아니 이게 말이 되냐고, 누구만 일하고 누군 일 안 해? 이거 명백히 차별아닙니까 과장님?"
그들은 지금 오전에 날아든 메일 한 통으로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이 망할 놈의 회사 들어온 지 8년 정도 됐는데 나도 이런 건 처음 봤다. 들어온 지 1년 막 넘은 신입이 바로 승진하는 케이스는."
"그것뿐이면 제가 말도 안 합니다. 아니, 인센티브 오천이 말이 됩니까? 송주폰지 뭔지 걔 연봉도 그정도 안될 것 같은데."
"팀한테 주는 인센이잖아. 누가 들으면 오해하것다."
"어쨌든요. 이건 엄연히 차별이고 특혜입니다. 블라이드 앱에다가 공론화라도 시켜야 하는 거 아닙니까?"
"공론화는 개뿔, 직원 100명도 안 되는 회사에 그런 게 되겠냐? 가만 보면 우리 최 대리는 대책없이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어.“
"하아···. 그냥 괜히 답답한 마음에 헛소리 해본 겁니다. 아니, 막말로 경영 지원팀은 그런 인센티브 같은 거 받을 일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 일이라는 게 눈에 띄는 성과가 딱히 없으니···."
"어쩌겠냐? 원래 세상은 불공평한 거야. 씨벌, 나도 이럴 줄 알았으면 팔자 좋게 매니저나 할 걸 그랬다."
"저도 그럴 걸 그랬습니다."
그렇게 시답지 않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는 두 사람 사이로 한 남자가 불쑥 끼어들어 어깨동무를 했다.
"오우. 몰랐네. 우리 오 과장이 그 정도로 매니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줄은."
"헛? 이, 이 팀장님?"
갑작스럽게 난입한 이기백을 보며 두 사람이 당황을 금치 못했다.
"진작 얘기하지 그랬어. 예전에 매니저 하다가 도망갔다고 해서 난 또 매니저 일 싫어하는 줄 알았잖아."
"티, 팀장님. 그런 말씀은 좀···."
벙쪄있는 부하직원을 힐끔 쳐다본 오 과장이 난색을 표했다.
"에이, 뭐 어때. 다 지난 과거 일인데. 사람은 다 제 적성에 맞는 일이 있는 거야. 이거 봐. 비록 담당 배우한테 매니저 교체 요구당해서 쫓겨나긴 했지만, 지금은 자기 적성 찾아서 잘하고 있잖아. 이야···. 그러고 보면 세월 참 빨라. 입사해서 어리버리 탈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어엿한 과장이 돼서 부하직원한테 짬 대우도 받고. 내가 아주 뿌듯해 응? 안 그래 오 과장?"
"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어깨를 팡팡 두드리는 이기백을 보며 오 과장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하지만 차마 이기백에게 뭐라고 하진 못했다.
회사 내에서 이기백 성질머리가 얼마나 더러운지 모르는 이가 없었고, 무엇보다 한번 잘못 찍히면 사람 말라죽을 때까지 털어대는 저 주둥이 때문에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고개를 돌린 이기백이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최 대리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유심히 살펴봤다.
"어디 보자 여기 이 친구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아, 예. 경영지원부 최성규 대립니다."
"호오, 반가워 최대리. 인상이 되게 좋네. 얼굴도 호감형이고. 내가 왜 이런 친구를 몰랐지?"
무차별 칭찬 폭격에 최성규가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근데 말이야 내가 들으려고 들은 게 아니라, 아까 무슨 차별이니 특혜니, 경영지원부는 성과랄게 없다니 이런 소릴 들은 것 같은데."
"아, 그건···!"
"아냐 아냐. 최 대리한테 뭐라 하려 그러는 게 아니라,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그래서 말인데 혹시 괜찮으면 매니저 일해볼 생각 없어? 우리 배우 1팀에서?"
"제...가요?"
갑작스러운 영입 제안에 최성규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딱 보니깐 최 대리가 매니지먼트일에 관심이 많아 보여서 말이야. 오면 내가 잘해줄게. 아! 대신 정시 퇴근 같은 건 없고, 담당 아티스트의 비위를 좀 잘 맞춰야 해. 가끔 콘돔 같은 거 사 오라고 하면 냉큼 달려가서 사 와야 하고. 어제 어떤 매니저는 담당 연예인 아들 유치원 등원까지 시켜줬다지? 참···. 나도 같은 일 하고 있지만, 우리 애들 멘탈도 좋아. 내가 딱 보니 우리 최 대리는 멘탈도 좋아 보여. 아주 매니저로서 적격이야. 어때? 응?"
"아, 아니. 저는 매니저에 별 관심이···."
"에이, 갑자기 빼고 그래. 얘기하는 거 다 들었는데. 내가 볼 땐 최 대리는 매니저가 딱이라니깐? 경영지원 부서랑은 다르게 성과도 만들 수 있고 특혜처럼 보이는 인센도 받을 수 있다고. 아! 대신 국내 탑급 배우 정도는 알아서 영입해와야 하고, 방송국 존나게 뛰어다니면서 예능도 몇 개 따와야 하고, 감독들한테 손 존나게 비벼 되면서 담당 배우 분량도 늘려와야 하는데······. 어때? 할만하겠지?"
거침없이 몰아치는 이기백의 전방위 압박에 최성규가 진땀을 흘리며 오 과장을 쳐다봤다.
"어, 그래? 그래 인마. 자주자주 연락 좀 해라."
오 과장은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었는데 최성규는 단번에 알아챘다.
그가 전화 받는 척하고 있다는 사실을.
휴대폰 화면에서 사설 토토 사이트가 버젓히 보이고 있었으니.
"어···. 음. 제안은 감사하지만 제가 사람하고 어울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큼큼, 제가 괜히 실언을 했던 것 같네요. 어이쿠, 이거 벌써 시간이? 얼른 가서 연말 결산 빨리 처리해야 하지 않습니까 오 과장님?"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최 대리가 과장된 액션을 보이며 오 과장을 불렀다.
"어? 아! 그렇지. 오늘까지 안 하면 부장님 노발대발한다. 얼른 가자고."
그렇게 도망치듯 사라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쯧쯧 혀를 찬 팀장님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배알 꼴리면 지들도 매니저하면 되지 참나. 뒤에서 짹짹 대기나 하고. 쯧쯧. 안 그러냐 주포야?"
"뭐, 다른 직원들 입장에선 박탈감이 생길 수도 있죠."
"박탈감은 개뿔. 쟤들이랑 우리랑 들어올 때 초봉 차이 얼마나 나는지 모르지? 그런 건 생각도 안 하고, 이번 한 번 대우 좀 받았다고 입은 댓 발 나와서는. 쯧쯧, 아무튼 저런 개소리는 그냥 무시해."
"어차피 신경도 안 씁니다. 그렇게 생각하든지 말든지 뭐···."
정말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나를 보며 팀장님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너란 놈은 생각이 없는 것인지, 그릇이 큰 것인지 가끔 헷갈린단 말이지."
"둘 다라고 봐주시면 감사하죠."
"오냐 짜식아. 대단한 로드 매니···. 아니지, 이제 실장이구만? 허 참. 이제 1년 막 지난 놈이 벌써 실장이라니."
"그러게요.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빨리 승진하여 높은 자리에 앉겠다는 야망 따윈 없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따지고보면 충분히 자격 있지 뭘. 주포 네가 꼬인 군번이라 위에 변변한 사수도 없이 사실상 실장급이 해야 할 일까지 다 했잖냐. 거기다가 슬기 일도 잘 풀리고, 김지원 영입한 공도 있고. 그런 건 솔직히 팀장급도 못 할 일이야."
"팀장님 없었으면 불가능했죠. 뭐 아무튼, 인센티브도 받았으니 거하게 회식 어떻습니까? 막내도 들어왔는데."
며칠 전에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후임이 하나 들어왔다.
이봉구라는 친군데 까무잡잡한 피부에 축 처진 눈꼬리가 막 농촌에서 상경한 청년 농부처럼 생겨서 내가 아주 좋아하는 관상이다.
조금 느리긴 하지만 참을성 있고 우직하게 일하는 소 같은 스타일.
단순 운전 업무는 봉구랑 나누어 할 수 있어서 덕분에 시간이 제법 널널해졌다.
"고럼고럼! 당연히 해야지. 투 뿔 한우로다가 조지자고."
"오오, 좋습니다. 보너스 많이 받으셨으니 팀장님 지갑 털리도록 아주 그냥 양껏 먹겠습니다."
내 말에 고개를 갸웃한 팀장님이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뭔 소리야? 너 설마...이 돈을 내가 다 먹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네? 팀장님 보너스니깐 당연히···."
"얌마!"
어이구, 깜짝이야.
얼굴이 시뻘게진 팀장님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이 자식이 대체 나를 어떻게 보는거야!? 이 돈이 왜 내 돈이야! 우리 팀 잘했다고 받은 돈인데. 너는 내가 밑에 애들 잘해서 받은 돈을 혼자 꿀꺽 할 거라고 생각했냐? 나 그런 개자슥 아니야 인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제대로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는 나였기에 이런건 당연히 팀장이 챙겨가는 건 줄 알았다.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네가 잘해서 받은 거 아니냐. 염치라는게 있는데 나는 애초에 이 돈 가질 생각이 없었어. 그러니 네가 가져가."
"에이, 그건 말이 안 되죠."
인센티브를 다 가져가라는 말에 당황하여 격렬히 손사래를 쳤다.
"아, 글쎄 그게 맞다니깐."
"싫습니다.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어쭈? 지금 팀장한테 개기냐?"
"아무리 쫄따구라지만 잘못된 것에 대해 건의는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인센티브를 놓고 격렬한 실랑이를 벌였다.
웃긴 건 서로 가져가지 않겠다는 게 문제였지만.
하지만 팀장님은 나 때문에 먹은 욕 값만 계산해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팀장님이 절반 가져가시고, 봉구 쪼금 챙겨주고, 나머지는 제가 가져가는 걸로."
"봉구까지? 괜찮겠냐?"
"많이는 아니고 그냥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용돈 챙겨주는 겁니다. 봉구도 이제 우리 1팀 아닙니까. 팀이 뭡니까? 서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집합체 아닙니까? 제가 잘한 건, 결국 팀이 잘한 겁니다. 그렇기에 회사도 제가 아닌 팀한테 돈을 준 거고요. 제 말이 틀립니까?"
"뭐···. 그렇지?"
청산유수처럼 쏟아져나오는 내 말에 팀장님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그렇게 하는 걸로 하시죠. 그게 제 마음이 편합니다."
"정말 괜찮겠냐?"
"아, 그렇다니까요. 팀이 잘 돼야 저도 잘 되는 겁니다."
절절한 내 목소리에 팀장님의 얼굴도 조금씩 풀려간다.
"사주쟁이 말이···. 내가 말년 운이 좋다더니.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감동한 얼굴이 된 팀장님이 호탕하게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그래도 인마, 젊은 놈이 너무 돈 안 밝히는 것도 좀 그래. 결국 이 짓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안 그래?"
"예, 명심하겠습니다."
나? 돈 좋아한다. 환장한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돈에 관심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 돈에 미친 사람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우선순위가 달랐다.
당장은 돈 보다 팀의 화합과 성장이 우선이었다.
어쭙잖게나마 매니저 일을 해보니 혼자서는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나의 최우선 목적은 뜨지 못한 무명 연예인들의 한을 풀어줘서 목숨을 연명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의 조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돈은 득이 될 게 없지.'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는데, 들어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입 놈이 승진도 모자라 혼자 인센티브까지 꿀꺽한다?
당장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여도 언젠가는 반드시 일이 터진다.
이건 채홍사 정만수의 기억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맛있어 보인다고 혼자 꿀꺽했다간 탈 난다는 사실을 잘 알았던 정만수는 뇌물이 들어오면 꼭 밑에 사람,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당장은 손해처럼 보이더라도 훗날 그 돈을 받은 사람 자체가 큰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정만수는 알았던 것이다.
"말 나온 김에 회식은 오늘 퇴근하고 어때? 너 끝나고 뭐 있냐?"
"딱히 뭐 없습니다."
"뽕구는?"
"봉구도 슬기씨 집에만 데려다주면 뭐 없을 겁니다."
"오케이! 그럼 나 본부 회의 끝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금방 끝내고 튀어나오마."
"예, 알겠습니다."
"으흐흐, 신나는구먼. 얼마 만에 한우냐. 나 먼저 간다!"
히죽히죽 미소를 내비치던 팀장님이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사라졌다.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생긴 것과는 다르게 귀여운 구석이 많은 아재다.
"그나저나 돈 들어온 건 어디에다가 쓰지?"
생각지도 못한 꽁돈에 내 머릿속은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
SH엔터테인먼트 5층 대회의실.
콰당!
벌떡 일어난 이기백으로 인해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니!? 본부장님! 그게 지금 무슨 말입니까? 멀쩡히 일 열심히 하고 있는 애를 왜 가수 1팀으로 보내라는 겁니까!?"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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