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아히체님의 서재입니다.

오늪의 이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아히체
그림/삽화
@jo_9o
작품등록일 :
2015.10.03 15:53
최근연재일 :
2016.02.20 09:13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17,264
추천수 :
59
글자수 :
288,708

작성
16.01.23 08:48
조회
448
추천
0
글자
18쪽

원추리 연가 _ 23. 살인귀의 본능

DUMMY

세로는 하얀 건물을 돌아보았다. 제일 먼저 터져 나왔던 폭발음 이후로는 별다른 소란이 들려오지 않는다. 모루의 신변에 걱정이 스쳤지만 그 아이라면 무사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루가는 정반대다. 그가 무엇을 어떻게 뒤집어엎었을 지 불안이 덜컥 밀려온다.


"라울. 활로를 열어."


세로의 외침에 집의 모든 문과 창문, 안과 밖을 단절시키는 모든 가림막이 폭발과도 같은 거센 돌풍에 휩쓸려 안으로 휘몰아쳤다. 세로는 무거운 공기가 눅눅하게 내려앉은 실내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현관 너머의 응접실은 폭격을 맞은 듯 난장판이었다. 군데군데 무너져 내린 벽과 엉망으로 게다가 피가 흥건한 바닥 위로 피투성이 루가가 쓰러져 있다. 그 위로 깔고 앉은 한 남자가 미동 없는 루가의 얼굴로 사정없이 주먹을 휘갈긴다.


등 뒤로 불어오는 바람에 힘입어 힘차게 달려간 세로는 드로우의 어깨를 걷어찼다. 신체에 맺히는 풍압의 힘을 빌려 커다란 덩치의 남자를 반대쪽 벽까지 날려 보냈다.


"루가. 괜찮…?"


그 틈에 루가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펴보던 세로는 말문이 턱 막혔다. 쥐어터진 얼굴은 시퍼렇게 온통 부어올라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단지 고통만을 위한 피부 위 수많은 상처에서 끊임없이 피가 새어 나온다. 살점이 뜯겨 나가 너덜너덜해진 다리는 그 어느 부위보다 응급처치가 시급했다.


하지만 엄청난 상처보다 더 심각한 건 루가의 반응이었다. 마치 눈을 뜨고 잠들어 있는 양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행여나 숨이 끊어졌나 세로는 그의 호흡부터 확인했다. 미약하게 뛰어오르는 심장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결코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루가. 정신 차려!"


세로는 루가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었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그의 뺨을 후려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니 그 순간 루가의 눈에서 광채가 번쩍였다.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판단조차 어려운 빈사 상태의 루가는 세로를 밀쳐내고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반 토막으로 부러져있기에 망정이지 온전히 붙어있었으면 일격을 피하기 힘들 만큼 근접한 거리였다.


세로는 팔을 뻗어 루가의 머리 위로 뭉친 압력의 공기를 끌어모았다. 그것이 세로의 손짓이 따라 루가의 등 위로 터져 나오며 그를 바닥으로 깔아뭉갠다.


"안 되겠다. 다 죽어가는 상태로 휘적대지 말고 그냥 잠이나 푹 자라."


루가의 눈을 억지로 눌러 감겨주고 일어선 세로는 시릴 정도로 휘황찬란하게 번쩍이는 빛무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 앙상한 세로의 팔목을 움켜쥔 건 루가와 다른 짐승의 손이었다.


큰 몸집과 어울리지 않게 재빠르게 다가선 드로우는 세로의 팔목을 붙잡아 비틀었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쉽사리 꺾어진 그의 팔을 잡아올려 세로의 몸을 바닥 위로 내동댕이쳤다.


"닌딘. 몰아쳐!"


세로의 목소리를 따라 창밖에서 불어온 진풍(震風)이 드로우의 목 아래를 후려친다. 자연의 힘이 덧붙은 매서운 진격이 그의 몸뚱어리를 번쩍 들어 바닥으로 내쳤다. 꼬꾸라지는 드로우의 몸 너머로 루가의 등이 움찔거린다. 그는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몸을 푸덕이며 드로우의 살의에 또다시 반응하고 있었다.


세로는 드로우가 부러뜨려놓은 제 손목을 받쳐 들고 오로지 살기만을 쫓는 두 짐승을 견제했다. 손가락을 까닥이기만 해도 고통이 밀물처럼 쓸려 올라온다. 긴장으로 축축해진 세로의 목덜미가 어떠한 힘에 뒤로 끌어당겨 졌다.


"네놈이 파인 녀석이 말했던 구출 요망의 가출 소년인가? 저 두 괴물은 상식이 안 통하니 알아서 잘 피하라고."


실내 가득 채우는 발광의 진원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울렸다. 두 눈을 쑤셔오는 강렬한 자극에 세로는 손등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넌 누구냐. 이젠?"


"그거 아니면 뭐겠어. 이만 지겨운 인연을 정리해볼까."


빛 안에서 어슴푸레 사람의 형태가 비친다. 나지막한 키의 인영은 쭉 뻗은 한쪽 팔 위로 겹친 반대쪽 팔을 뒤로 천천히 잡아당겼다. 활을 당기는 모습 같다고 생각한 찰나, 멀어진 손의 자세가 흐트러지며 빛무리에서 두꺼운 빛줄기가 쏘아졌다. 그 살이 향하는 곳은 루가의 얼굴이었다. 세로의 낯빛이 순간 새하얗게 물들었다.


"안돼. 어서 피해! 루가!"



원추리 연가 _ 23. 살인귀의 본능



화살이 쏘아진 순간 세로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하지만 내려 앉은 건 그것뿐만이 아니던 모양이었다. 연이어 찾아온 진동과 묵직한 소음에 땅 위를 제대로 디디고 서질 못한 채, 세로는 결국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비틀거리던 몸뚱이로 겨우 버티고 서 있던 루가 역시 땅을 뒤흔드는 진동에 무너져 내린다. 그 덕에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 화살은 애꿎은 벽난로를 후려쳐 산산조각냈다.


이내 온 바닥이 파여 들어 어둠 속으로 폭삭 가라앉았다. 땅과 하늘이 뒤집히는 충격 속에서 세로의 눈동자 위로 길게 뻗은 창의 머리가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 창이라고 불리기에 기묘한 모양의 그 무기는 지하의 천정을 받들고 있는 대들보를 모조리 쳐낸 후, 자그마한 그림자의 곁으로 돌아갔다.


"모루?"


그 인물의 정체에 확신이 와 닿자 갑작스러운 진동과 땅의 붕괴가 한 사람의 인위적인 힘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조금 늦었다네."


한 층 아래를 이루고 있는 지하 공간은 지상의 집 보다 두 배 이상은 넓었다. 바닥은 반들반들한 자기 판이 깔렸었지만 벽체는 땅을 파헤친 흙더미 그대로였다.


가장자리만을 남기고 모조리 부서져 내린 천장과 집안의 집기가 모조리 쓸려 와 엉망으로 뒤엉켜 흙먼지를 일으키는 광경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막 창을 휘두른 자세의 모루는 낙하 잔해를 피해 가장자리에서 키치르의 부축을 받고 서 있다.


한쪽 팔만을 사용해 가볍게 돌린 창을 품에 안으며 모루는 무거운 몸을 기댄다. 소녀의 소매 또한 온통 붉은 빛깔로 젖어 있다.


"너마저. 어쩌다 이렇게까지 다친 거야."


세로는 제 눈을 의심하며 되묻는다.


"하하. 방심했다네."


한데 엉켜 지하로 떨어져 꿈틀거리는 루가와 드로우, 여전히 빛 속에 몸을 숨긴 미켈을 차례로 돌아보며 키치르는 그곳에 보이지 않은 인물을 찾아 애를 태웠다.


"세로 형. 쿠키는요?"


"그 아이는 널 따라 뒷 건물로 달려갔는데."


세로의 말에 소년의 얼굴은 핏기가 가셨다.


"안돼요. 쿠키는 그곳에 트라우마가 있어요. 가까이 가지도 못하는 곳인데. 어떻게…."


"넌 이만 되돌아가 보게."


모루가 키치르의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누나랑 형들은…."


"망설이지 마. 자네에게 제일 우선인 게 뭔지, 그것만 생각해."


키치르는 솟구치는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일렁거리는 가슴을 가다듬고 지하 통로의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점점 커지는 시끄러운 발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려온다.


"세로 님. 무사하신 겁니… 까흑!"


필사의 힘을 다해 우물을 기어오른 파인은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지하로 꺼진 바닥을 딛고 우스꽝스럽게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이,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파인의 요란한 등장에 놀란 눈동자들이 그를 향해 쏠린 사이, 미켈은 다시 한 번 빛의 살을 쏘았다. 그 기세를 눈치챈 키치르는 루가에게 몸을 날렸다.


지하 가득 피어오른 먼지가 빛을 산란케 했다. 산산이 흩어진 광파의 위력은 전과 같지 않았다. 소년은 투명해진 제 몸을 거울삼아 빛줄기를 튕겨낸다.


"키치르. 뭐하는가! 위험해."


모루가 걱정스레 소년을 말렸다.


"하지만 이러다 루가 형이 죽겠어요."


쨍쨍하게 뿜어내질 못하고 지하의 어둠과 먼지에 삼켜져 어스레하게 옅어지는 빛무리를 느끼며 미켈은 쓰러진 루가를 곁눈질했다. 지금은 저렇게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지만, 적의를 느끼면 언제든 다시 몸을 일으키는 게 루가 디아브라는 살인귀의 본능이었다.


파괴력이 낮아졌다고 해도 빛을 거두어들이는 건 루가의 어둠에 힘을 보태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약해진 공격으로 언제까지 힘을 소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켈의 시선은 제 빛줄기를 반사해낸 키치르에게서 멈추었다. 그는 입꼬리를 비죽였다.


"키치르. 나 역시 너처럼 내 가족과 고향의 이웃, 친구….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고 홀로 남아야 했지. 단 한 사람의 광란으로 말이야."


키치르의 얼굴에 동요의 기색이 피어오르자 미켈은 속으로 비웃음을 삼켰다.


"그 범인이 바로 저 악마. 루가 디아브. 지상 최악의 살인귀를 누구를 위해 구하려 드는 거야. 키치르."


"그건…."


미켈은 숨을 들이마시며 주변을 밝히는 모든 빛을 사그라뜨렸다. 뻥 뚫린 천정에서 드문드문 내리치는 한낮의 태양 볕을 제외하고 어둠이 곳곳에 스며들었다. 그는 누그러진 음성으로 키치르의 망설임을 북돋는다.


"너한테 저 녀석을 공격 하라는 게 아니야. 쿠자인이라도 지켜내야 하잖아. 병을 이기는 약의 연구가 끝났으니 함께 돌아가자. 하나 남은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건 오직 너뿐이다."


키치르의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 커다란 손이 비친다.


'쿠키.'


소년의 머릿속에 지금쯤 저를 찾아 홀로 떨고 있을 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여린 속내를 들킬세라 사나운 말투와 급한 성미로 무장한 어린아이.


한밤중 발작을 견디지 못해 수련하는 척 밖을 나돌던 쿠자인을 지켜보며 수많은 밤을 함께 지새웠다. 그 무엇보다 쿠자인을 지키는 게 제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키치르는 모루를 돌아보았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도 망설이면 안 돼. 정에 휘둘려서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그녀가 했던 충고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키치르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제 앞에 내밀어 진 미켈의 손을 붙잡았다.


"멍청한 자식. 약의 연구? 목줄에 매인 개 신세의 내게 그런 권한이 있을 리 없잖아?"


번져가는 악의를 숨기지 못하고 미켈은 흉한 미소를 내비친다. 그는 손에 힘을 주어 소년을 바짝 끌어당겼다. 미켈의 의도를 눈치챈 파인이 목소리를 높여 경고했다.


"미켈 씨. 목표물 외에 살인은 허가되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네 재량껏 사고사 처리해."


미켈의 팔꿈치와 무릎, 손가락 마디마디에 빛이 모여들었다. 마치 반딧불이와 같이 신체의 관절에 빛이 집중된다. 그는 다리를 들어 올려 키치르의 복부에 무릎을 꽂아 박았다. 무릎에 모여든 번쩍이는 빛 몽우리가 키치르의 배를 뚫고 등 위로 솟구쳤다.


"일단 내 힘을 반사하는 네놈만 사라져주면 기회는 내게 돌아와."


"키치르!"


화들짝 놀란 모루가 소리를 질렀다. 키치르의 몸을 투과한 날카로운 빛줄기는 이내 붉은 핏물로 바뀌어 내뿜어진다.


"어딜 가십니까."


황급히 움직이려던 모루의 어깨를 붙잡은 파인을 중심으로 그들의 주변이 일렁였다. 어느새 그의 모습조차 허공의 속에 파묻혀 모루의 눈앞은 깨끗이 비워졌다.


"세로 님을 무사히 모실 때까지 방해 마시고 잠시 여기 계셔 주시죠."


"환상 결계? 하지만 속임수란 모르고 당할 때야 놀랄 일이지, 다 알고 보면 정말 보잘 게 없어!"


모루는 창을 고쳐 쥐었다. 소녀의 눈에는 드물게 노기가 서려 있었다. 창을 크게 휘두르며 주변을 모조리 쓸어낸다. 몇 걸음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창의 날사이로 무언가가 덜컥 걸려들었다.


"쿠엑!"


파인이 모루의 창에 두드려 맞자, 그의 결계는 너무나도 쉽게 부서져 내렸다.


"이럴 수가. 이렇게나 쉽게…."


"이젠의 힘들은 모두 고대 괴물 '젠'으로 부터 이어져 왔어. 이런 잔재주를 가진 젠 종족은 내게 아주 익숙해."


"그게 무슨 소리인 겁니까. 이건, 사기야…."


허무할 정도로 쉽사리 파인의 결계를 무너뜨린 모루는 소년을 향해 내달린다. 핏빛 웅덩이의 중심에 쓰러져 있는 키치르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이제 장애물은 없다. 남은 결판을 내자."


희뿌연 먼지가 걷히고 미켈은 다시금 환락에 젖어들었다. 그의 몸이 서서히 빛을 되찾아가기 시작한다. 모루와 키치르의 위로 그림자가 끼얹어졌다. 그 시린 기운에 모루는 고개를 들었다.


시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피폐한 루가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는 유일한 무기인 부러진 검을 내세워 미켈에게 달려들었다. 군데군데 붙어있는 천장의 그늘 밑으로 스며든 그림자의 어둠이 꿈틀거리며 그를 엄호한다.


이제 루가를 상대로 장난은 끝이다. 미켈은 모루에게 일격을 가했던 것 처럼 모든 빛무리를 한데 모았다. 굵어진 빛기둥이 루가를 향해 쏘아졌다. 부러진 검은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루가의 손을 벗어났다.


루가의 발 밑에서 암흑의 벽이 솟아올라 방패를 구축했다. 하지만 어둠에 개의치 않는 거센 광선(光線)에 기어이 투과를 허락하고야 만다. 하지만 벽 너머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켈은 루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 노력이 수고스럽지 않게 루가의 머리통은 곁에서 불쑥 내밀어 진다. 미켈은 주변을 더더욱 밝게 불태웠다. 이제 검조차 잃은 루가의 남은 힘은 어둠뿐, 이 정도의 밝기에선 대적할 무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예상을 깨고 루가의 손에는 길쭉한 무언가가 들려있다. 검도, 어둠도 아닌 그것은 그의 허리춤을 지키고 있던 검집이었다.


"검집 따위로 뭘 어쩌겠…."


그 순간 미켈의 어깨에서부터 아릿한 통증이 번져간다. 방심 위로 쉽게 허를 찔렀다. 검집이라는 암실에서 단단하게 뭉쳐온, 검의 모양을 한 짙은 어둠. 부서질 리 없는 농밀한 암흑의 검에 패배했다. 루가는 검 채로 미켈을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눈을 찌르던 빛이 그제야 완전히 멎어든다.


"키…. 치르…?"


긴박한 전투의 끝머리에서 어린소년의 목소리가 청아하게 울려퍼졌다. 지하 통로의 입구에서 숨을 헐떡이며 나타난 쿠자인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받아들이질 못하고 제 눈을 의심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모루에게 안겨 있는 소년에게서 호흡의 반동마저 느껴지지 않는다.


"키치르. 대답해!"


"쿠자인. 잠시만!"


이성을 활활 태워버린 쿠자인의 손톱과 눈동자뿐만 아니라 머리 색까지 온통 푸르스름하게 물들어간다. 아이는 날카로운 손톱을 번뜩이며 모루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독이 스민 손톱을 피해 물러서던 모루에게서 소년을 빼앗아 들었다.


아이의 눈에는 시퍼런 한기가 뚝뚝 흘러내린다. 그 푸른 액체가 닿는 흙바닥은 독한 냄새와 연기를 남기고 시커멓게 썩어들어갔다. 쿠자인은 독보다 더 독한 저주를 쏟아냈다.


"모두 똑같아. 이놈이나 저놈이나 나쁜 놈들. 용서 안 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용서 못 해."






열린 창문이 있던 지상의 집과 달리 지하 공간은 세로에게 있어 맹점 그 자체였다. 머리 위 벗겨진 천장에서 바람을 끌어다 쓰면 빛의 이젠의 힘을 흩어놓는 먼지조차 죄다 쓸려간다. 위기에 봉착한 세로는 괴력의 짐승을 앞에 두고 고분 고투 하고 있었다.


오른손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능력의 기운을 야생의 감으로 느꼈는지 드로우는 집요하게 세로의 오른손만을 노렸다. 이윽고 드로우의 손아귀에 자유를 빼앗긴 그의 오른팔은 벽에 처박혀 높게 매달린다.


다리를 바동거려 빠져나오려던 움직임에 흥분한 드로우가 세로의 복부를 후려 찼다. 쓴 위액이 솟구쳐 입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반항의 기운이 사그라들자, 드로우는 손목 아래가 비어있는 피투성이 팔을 들어 세로의 목을 거세게 짓눌렀다.


"그만두십시오! 드로우!"


파인의 목소리에 반응한 붉은색 목걸이가 주인의 신변을 위협하는 듯 윙윙 거리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선명한 문양이 드로우의 목을 파고든다. 숨이 막혀 올라와 드로우의 눈에 핏대가 서렸다. 그와 동시에 세로에게 가해지는 힘은 더욱더 거세어진다.


"그…. 러지마…."


세로는 흐린 눈으로 드로우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그 말의 의미를 곱씹을 여유도 없이 드로우의 가슴 언저리에서 후끈한 고통과 함께 따뜻하게 젖어들었다.


연이어 바지마저 적셔 내려와 붉은 그림자를 흩뿌렸다.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드로우는 천천히 눈길을 떨구어 제 가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칠흑의 검날이 피부를 뚫고 튀어 올라 있었다.


드로우의 힘이 거두어지자, 세로는 바닥에 풀썩 나자빠졌다. 드로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몸을 꿰뚫은 검을 어루만졌다. 상처 위로 피를 뿜으며 주인에게 되돌아간 검은 다시금 삐딱하게 기울여진다.


"루가..."


세로의 머리 위로 뜨거운 생명의 기운이 끼얹어졌다. 눈앞에서 이글거리던 거대한 그림자의 키가 급격하게 낮아진다. 허리 위의 것들이 비스듬하게 베어져 바닥으로 떨어지자, 그 뒤로 우뚝 선 살인귀의 금안이 흉흉(洶洶)하게 빛났다.


드로우의 피를 뒤집어쓴 세로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온통 핏빛에 물들어 있었다. 친우(親友)의 모습을 한 살인귀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다음 먹잇감을 응시했다. 금빛 눈동자 안에 가둬진 세로의 얼굴은 도드라지게 겁에 질려있었다.


"콜록콜록…. 제발…정신 차려."


루가는 검을 고쳐잡았다. 광기 어린 날이 세로를 향한다. 세로의 외침이 찢어졌다.


"루가!!!!"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오늪의 이젠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국가 및 용어, 캐릭터 설정집 (업데이트 15.12.20) +2 15.10.08 543 0 -
48 원추리 연가 _ 27. 번뇌 16.02.20 403 2 17쪽
47 공지 16.02.06 256 2 4쪽
46 원추리 연가 _ 26. 악몽의 편린 16.02.03 327 0 15쪽
45 원추리 연가 _ 25. 별을 헤매는 아이들 + 후기 16.01.30 418 1 16쪽
44 원추리 연가 _ 24. 환상 서곡 16.01.27 280 0 18쪽
» 원추리 연가 _ 23. 살인귀의 본능 16.01.23 449 0 18쪽
42 원추리 연가 _ 22. 빛과 어둠의 춤 16.01.20 278 0 18쪽
41 원추리 연가 _ 21. 새하얀 심연 16.01.16 302 0 16쪽
40 원추리 연가 _ 20. 별을 헤는 아이들 16.01.13 348 0 17쪽
39 원추리 연가 _ 19. 붉은 바위 너머 비밀 16.01.09 502 0 17쪽
38 원추리 연가 _ 18. 작은 도둑 16.01.06 255 0 14쪽
37 원추리 연가 _ 17. 황야의 꿈 16.01.02 483 0 14쪽
36 원추리 연가 _ 16. 제박 15.12.30 417 1 21쪽
35 원추리 연가 _ 15. 기적을 위한 한 걸음 15.12.26 333 1 16쪽
34 원추리 연가 _ 14. 사랑은? 전쟁! 15.12.23 278 0 13쪽
33 원추리 연가 _ 13. 사랑은! 전쟁? 15.12.20 177 0 15쪽
32 원추리 연가 _ 12. 태양의 의무 15.12.19 440 0 13쪽
31 원추리 연가 _ 11. 화원의 자장가 15.12.16 267 1 11쪽
30 원추리 연가 _ 10. 결혼 축제(2) 15.12.13 281 0 11쪽
29 원추리 연가 _ 9. 결혼 축제(1) 15.12.12 262 0 11쪽
28 원추리 연가 _ 8. 결의 15.12.12 462 0 12쪽
27 원추리 연가 _ 7. 어둠의 구렁 15.12.09 285 0 10쪽
26 원추리 연가 _ 6. 함정 15.12.06 229 0 10쪽
25 원추리 연가 _ 5. 마녀 아이힌(2) 15.12.03 348 0 11쪽
24 원추리 연가 _ 4. 마녀 아이힌(1) 15.12.01 495 0 11쪽
23 원추리 연가 _ 3. 여행의 시작(3) +3 15.11.29 409 1 9쪽
22 원추리 연가 _ 2. 여행의 시작(2) +2 15.11.29 510 3 9쪽
21 원추리 연가 _ 1. 여행의 시작(1) 15.11.25 283 1 11쪽
20 미궁의 빛 _ 14. 미궁의 빛 15.11.22 366 1 14쪽
19 미궁의 빛 _ 13. 의외의 탈주로 15.11.20 431 1 15쪽
18 미궁의 빛 _ 12. 루인의 망령(3) 15.11.18 243 1 14쪽
17 미궁의 빛 _ 11. 루인의 망령(2) 15.11.17 317 1 11쪽
16 미궁의 빛 _ 10. 루인이 망령(1) 15.11.15 410 1 15쪽
15 미궁의 빛 _ 9. 공동묘지의 소녀 15.11.13 260 2 15쪽
14 미궁의 빛 _ 8. 악마 루아브(2) 15.11.11 298 1 14쪽
13 미궁의 빛 _ 7. 악마 루아브(1) 15.11.08 395 1 14쪽
12 미궁의 빛 _ 6. 가짜들의 싸움 15.11.06 332 2 9쪽
11 미궁의 빛 _ 5. 탈출의 전야제(2) 15.11.04 352 1 9쪽
10 미궁의 빛 _ 4. 탈출의 전야제(1) 15.11.01 402 0 12쪽
9 미궁의 빛 _ 3. 시연의 뜰 15.10.31 342 0 15쪽
8 미궁의 빛 _ 2. 새장 속 소년(2) 15.10.30 296 3 12쪽
7 미궁의 빛 _ 1. 새장 속 소년(1) 15.10.28 287 2 12쪽
6 하빌리스의 형제 _ 6. 하빌리스의 형제 15.10.25 407 1 16쪽
5 하빌리스의 형제 _ 5. 미친 예술가의 사학(2) 15.10.23 277 0 13쪽
4 하빌리스의 형제 _ 4. 미친 예술가의 사학(1) 15.10.21 367 0 14쪽
3 하빌리스의 형제 _ 3. 재회 15.10.18 220 0 13쪽
2 하빌리스의 형제 _ 2. 안내인 15.10.17 376 2 14쪽
1 하빌리스의 형제 _ 1. 북문 입국소 15.10.15 431 1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