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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히체님의 서재입니다.

오늪의 이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아히체
그림/삽화
@jo_9o
작품등록일 :
2015.10.03 15:53
최근연재일 :
2016.02.20 09:13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17,256
추천수 :
59
글자수 :
288,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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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13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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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원추리 연가 _ 20. 별을 헤는 아이들

DUMMY

어린아이의 매끈한 팔뚝과 어울리지 않은 죽음의 그늘에 눈길이 닿은 모루는 쿠자인에게 다가가 팔목을 낚아챘다.


"이 손 놓지 못해?"


쿠자인은 단단히 붙잡은 하얀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 나이답지 않은 날렵한 손놀림으로 모루의 목을 그었다. 하지만 바닥에 놓인 창 밑으로 집어넣은 발을 들어 올려 재빨리 일으켜 세운 모루가 먼저였다. 쿠자인의 손은 창에 부딪혀 제 등 뒤로 날아가 숨었다.


씩씩거리며 콧김을 뿜어내던 쿠자인은 잔뜩 약이 오른 표정을 지었다. 희번덕 돌아가는 아이의 눈동자는 이번엔 푸른색으로 침식되어가고 있었다. 모루는 아이의 변화를 단 한 부분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안돼. 쿠키 제발 그러지 마."


두 사람의 충돌에 옆으로 밀려난 키치르는 쿠자인의 두 팔을 제 품에 가두었다.


"진정해. 쿠키."


"저 자식이 내 팔을!"


"괜찮아 괜찮아."


번뜩이는 새파란 손톱이 서서히 숨이 죽어가자 본래의 새까만 눈동자로 돌아온 쿠자인은 키치르의 가슴께에 파고들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그 아이도 병에 걸렸는가."


모루의 질문에 키치르의 어깨가 흠칫 떨린다.


"쿠키는 곧 나을 수 있을거에요. 이곳에서 제일 건강했고 또 제일 강하니까요."


눈물 섞인 소년의 대답은 마치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듯 간절하고 구슬프게 울렸다.



원추리 연가 _ 20. 별을 헤는 아이들



"왜들 싸우고 그래."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건물 안에 누워서 꼼짝도 못 하던 루가가 텃밭의 고랑 사이에 몸을 반쯤 파묻은 모습으로 고개를 들었다.


"루가 형. 어떻게 나왔어요?"


"아. 이제 어느 정도 원하는 방향으로 구를 수 있어서 말이야. 답답해서 나와봤어."


그는 자랑스럽게 대답했지만, 밭의 고랑 사이에 낀 몸을 앞으로도 뒤로도 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괴상한 이동을 한심스럽게 바라본 세로는 루가의 다리를 붙잡고 길가로 끌어냈다.


"가만히 누워있는 게 돕는 일이다. 루가."


"이것 봐. 나 이런 것도 할 수 있다?"


그는 몸을 움츠리는 듯싶더니 그 상태로 온몸으로 바닥 위를 튕기어 솟구쳤다. 곧 발로 땅을 짚고 앉아 무릎과 허리의 힘을 이용해 벌떡 일어선다.


"휴우."


그 짧은 행동 하나지만, 루가는 그 어느 때 보다 진중하게 온 힘을 다 쏟아부었다. 독으로 신경 정보가 뒤틀린 탓에 팔다리를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뒤바뀐 규칙을 찾아냈다.


예컨대 오른팔을 들어 올리려고 하면 왼쪽 다리가 접히는 것이었다. 모두가 밖에 나가 젤리를 위한 작은 장례를 치를 때, 홀로 남은 루가는 온몸에 조금씩 힘을 주어 신경과 반응을 맞춰본 결과였다.


"약을 먹으면 바로 나을텐데 굳이 그런데 머리 굴릴 일이 있나?"


"그건 절대 안 먹을 거야. 그래도 이대로라면 곧 발가락으로 수저도 쓸 수 있지 않을까?"


곁에서 모루도 혀를 찼다.


"차라리 약 먹는 게 나아 보인다네."


"절대 싫어!"


온몸을 푸드덕대던 루가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결국 다시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는 땅에 코를 박고 구슬피 울음 지었다.


"아아. 아프다. 힘들다. 배고프다. 흙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 근데 키치르. 이거 네가 가꾸는 밭이야?"


"네. 아무리 심어도 나지 않는 작물이라 늘 물배를 채우지만요."


두 아이가 꾸리기엔 꽤 그럴싸하게 정돈된 밭을 둘러보며 모루가 되묻는다.


"뭘 심을 줄 아는가?"


"사실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책에서 본 걸 흉내 내 봤지만, 씨앗만 축내고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어요."


소년의 목소리는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자네는 이젠이지 않은가. 이젠의 기운은 여린 것들의 생명력을 흩트려놓아 작물을 시들게 한다네. 체질적으로 농사는 무리야."


"전혀 몰랐어."


덩달아 루가도 멍하게 중얼거렸다.


"왜 이젠 선별 검사를 치를 때 어린잎을 따서 손에 쥐는 항목이 있지 않은가."


발밑에 삐죽 솟은 잡초 한 줄기를 뜯어낸 모루가 두 아이의 손에 한쪽 잎씩 내려놓았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키치르는 소중한 보물을 쥐고 기도 하듯 두 손아귀에 품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땐 쿠자인의 것과 달리 그 녹색의 청량함이 빛을 잃어 있었다.


"우와. 진짜네."


"루가도 그러하지만, 특히 너처럼 이젠의 기운이 강하면 농사는 더욱더 무리라네. 같은 이유로 요리도 마찬가지지."


"모루 누나 대단해요! 책보다 더 똑똑해요!"


"뭐 이 정도로."


"다른 이야기도 해주세요!"


소년은 신이나 방방 뛰었다. 집안에 남겨진 책만이 세상의 전부였던 키치르에게 있어 모루의 말들은 재미를 넘어선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모루가 가진 이야기는 전해져오는 역사를 벗어나 광대했다. 세로와 루가 또한 소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대지 위에 태어나는 모든 것들에는 상극이 있지. 오신이 빛이라면 그 상극인 젠은 어둠이야. 인간은 딱 중간. 그 모든 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네."


"이젠은요?"


"이젠은 어떨까? 음에 치우쳐진 반쪽짜리 인간은 음기를 내뿜어."


그렇기에 오신과 젠이 사라지고 인간과 이젠만 남은 현재, 한쪽으로 치우쳐 어긋난 균형은 결국 대지를 죽음으로 이끌고 있어. 모루는 뒷말을 씁쓸하게 삼켰다.


어느덧 붉은 노을 또한 완전히 어둠에 좀 먹혀들어가 짙은 푸름을 남기고 완전히 그 기세를 감춘다. 바위산 속에서의 밤은 너른 광야에서보다 훨씬 짙었다. 조명용 리블리엘이 있을 리 없는 아이들의 낡은 집 응접실에는 작은 촛불 하나가 밝게 피어 올랐다.


"오늘은 특별히 손님이 오셨으니 꺼내온 거에요."


"이렇게 어두운데 밤에 불 없이 생활한단 말이야?"


"어쩔 수 없어요. 이게 마지막 초거든요. 오늘 밤 자고 내일 갈 거죠?"


손가락 세 마디 길이 정도만 남은 초를 가련하게 내려다보던 세로는 창밖에 뿌리내린 짙은 어둠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대로 걸음을 재촉해 나선다 해도 야영과 보초로 인한 피로에 얼룩질 뿐이다.


"그래. 내일 일찍 출발해야겠어."


"야호. 신난다! 모루 누나. 또 재미있는 이야기 많이 해줘요."


세로가 다시 만든 감자 수프로 따뜻한 저녁 식사를 마친 그들은 일찍이 자리에 누웠다. 그들의 동생 젤의 침대가 있던 지붕 없는 2층 방에 다섯 개의 이부자리가 나란히 깔렸다.


"이러니 옛날 생각나네요. 그렇지? 쿠키."


"난 별로."


쿠자인은 등을 보이며 홱 돌아누웠다.


"이 방에 다 함께 모여 잤나 보네."


"네! 다 저보다 어린 동생들이라 매일 같이 내일은 아프지 않을 거야. 곧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다독이는 게 잠들기 전의 일과였지요."


키치르는 이불 밖으로 하얀 팔을 꺼내어 들고 하늘 가득 촘촘히 박힌 별빛을 그러모았다. 방을 가득 채운 이부자리가 하나씩 줄어들 때도, 젤이 하늘의 별이 되었던 그 날 밤에도, 하늘의 흐린 별빛은 변함없이 포근하게 비쳐들고 있었다.


"드넓게 펼쳐진 하늘을 보며 매일 밤 별을 세다 잠이 들곤 했어요. 저 수많은 별의 숫자는 머지않을 미래에 만날, 우리가 사랑하고 또 우리를 사랑해 줄 사람들의 숫자라고 주문을 걸었지요."


별빛은 꿈꾸는 소년에게로 쏟아져 그 눈동자 안에 머물렀다.


"전 이젠 보안대가 되고 싶었어요. 제 힘으로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해주는 거예요. 나쁜 범죄자들과 싸워서 평화를 지킬 수 있다면 그것보다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요?"


"이룰 수 있을 거야. 네 능력은 지구력도 있고 안정적이야. 앞으로 내구성만 다지면 대적할 상대가 몇 없을지도."


세로는 조금의 과장도 섞이지 않은 본심을 꺼내어 소년의 꿈에 힘을 실어준다.


"내일 우리와 함께 이곳을 나가자. 직접 데려다줄 수는 없지만 서신국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줄게."


소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조잘거리던 맑은 음성대신 작은 흐느낌이 남실거린다. 세로의 손이 키치르의 이불 속에 파고들었다. 조심스레 붙잡은 손의 온기에 안도하며 소년은 서서히 잠에 젖어간다.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아 밖으로 나온 세로는 우물가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군청색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은 곧 하얀 달과 수많은 별들을 한 번에 삼키어 어둠을 뿌렸다. 보호해줄 어른의 울타리도 없이 죽음의 곁에서 힘겹게 살아갔던 아이들의 생활터전 또한 그늘에 먹혀들어간다.


"은근히 어린아이들한테 마음이 약하군. 고향에 두고 온 형제 생각이라도 나는 건가."


구름의 그늘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온 모루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소녀의 여린 목소리는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난 동생 없어!"


모루의 말에 세로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고 만다. 하지만 지나치게 어색한 상황을 깨달았는지 그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붉어진 얼굴을 암흑의 밤 속에서도 온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모루는 설핏 웃었다.


"세로님 그거 아는가? 전부터 느낀 건데 자네 거짓말 정말 티나. 정 숨기고 싶으면 그냥 입을 다물게."


"…."


"자네는 이 땅의 근원을 아는가."


모루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난 세로는 의자를 양보하고 우물에 기대어 섰다. 그 자리를 두고 의자 뒤로 돌아간 모루는 등받이를 짚고 세로가 한참 올려다보고 섰던 하늘을 응시했다.


"왕족의 외척에 해당했던 뼈대 깊은 이젠 가문. 자이나 일족은 한토의 습격 이후 왕족이 와해되자 제집 걸쇠를 걸어 잠그고 숨어버린 또 다른 외척 히아케르츠 일족과 달리 필사적으로 왕실복구운동을 벌였지. 하지만 서부 아르니카의 진짜 권력자는 그들도, 왕가도 아닌 론드리몬 가문이었다네. 반정이니 뭐니 이런저런 사유를 붙여 자이나 일족을 핍박하고 유폐시킨 건 자네들의 역사책에도 잘 나와 있을 거야."


모루는 건물 위를 장식한 문양을 가리켰다. 구름이 토해낸 달빛이 서서히 차올라 아이들이 잠들어있는 집을 비추었다. 건물의 중앙에는 지평선 위로 떠오른 해를 상징하는 동그란 도형 밑에 자이나 지구를 대표 지역인 해야 평원을 의미하는 다섯 줄의 작대가 간격을 띄워 굳게 박혀있다.


남겨진 문양은 낡고 부서졌지만 오랜 세월 동안 아르니카 왕국의 튼튼한 왕실의 오른팔이었던 자긍심은 그 안에 영원히 살아있었다. 훌륭한 왕비를 여럿 배출한 이젠 명문 가문. 자이나의 문양이었다.


"그럼 여기가 자이나 일족의 유배지라는 소리야?"


"이곳이 고향 땅이라고 말하는 그 이젠 소년 또한 자이나의 마지막 후손이겠지."


"그럼 죽은 아이들이나 쿠자인은 무엇 때문에 이 유배지로 오게 된 건지…."


"사정은 모르겠지만, 그 꼬마는 달라. 키치르와 달리 확실한 인간 아이야. 아까 자네도 보았겠지만 손에 쥐었던 잎도 전혀 시들지 않았어. 하지만 눈동자의 색이 달라질 때, 그는 독을 다루는 이젠의 힘을 끌어내지. 이게 뭘 뜻하는 걸까."


세로는 비슷한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서신국을 탈출하던 축제의 밤. 아카데미 뒤뜰에서 신좌의 보좌관 호일 박사를 공격하던 동급생 휴조가 딱 그러했다. 인간 부모 밑에서 인간의 육체를 물려받고 태어나 인간으로 살아왔지만, 복수를 위해 이젠의 힘을 얻게 되었다는 그 또한 비윤리적인 실험의 결과물이었다.


'휴조의 눈동자는 어땠지?'


탈출에 정신이 쏠려있었던 탓에 그날의 상황이 명확히 생각나지 않는다.


"이런 숨겨진 땅에서 그 선생이란 작자들은 아이들을 모아놓고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세로는 몸서리쳐지는 혐오감에 이를 뿌득 갈았다.






이윽고 새벽해가 밝아와 잔잔하게 깔린 어둠을 몰아냈다. 바위산의 하루는 그 어느 곳 보다 이르게 열리고 있었다. 본디 적막뿐이었던 집 안에서 느껴지는 바쁜 기척에 문득 잠이 깬 키치르는 깨끗이 접혀있는 옆자리의 이부자리를 보고 잠이 확 달아났다.


계단의 입구에 붙어 잠들어있는 헝클어진 금발의 머리통을 조심히 지나 계단을 내려오니 활짝 열린 현관문 밖으로 마차를 정비하는 세로의 뒷모습이 보인다.


"세로 형. 벌써 일어나신 거에요?"


"그래. 조금 있다 깨우려고 했는데 너무 시끄러웠나 보네."


"아니에요. 그런데 모루 누나는요?"


"잠깐 저쪽 건물을 살펴보러 갔어."


세로의 시선은 바위산 입구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직사각형의 하얀 집으로 가 닿았다. 그 시선을 따라 멍하게 하얀 집을 바라보던 키치르의 귓전을 조곤조곤한 세로의 목소리가 두드린다.


"아침을 먹고 바로 떠날 거야. 키치르. 함께 나가자."


웃는 듯 우는 듯한 애매한 미소를 띠며 키치르는 전날 밤과 마찬가지로 세로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달지 못 했다.


"잠시 모루 누나한테 다녀올게요."


그저 그 자리를 도망쳐 나올 뿐이다. 울음 섞인 긍정의 답이 터져오려던 제 입을 쥐어잡고 쉼없이 달렸다.


한달음에 건물 안으로 들어선 키치르는 아직 어둑어둑한 긴 복도에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한가운데에 침대가 놓인 좁은 방의 풍경은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설치된 유리창이 복도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복도 유리창 너머 방들은 주인을 잃은 지 오래지만 제 코를 괴롭히는 각인 된 약품 냄새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온다.


키치르는 다닥다닥 붙은 방들을 지나 복도 끝의 계단을 밟았다. 2층에 들어서자마자 모루 대신 그 품에 항상 머물러 있었던 기다란 십(十)자 모양 창 하나가 저를 반기고 있었다.


2층의 구조는 아래층과 같았지만, 복도에서 보이는 문은 단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단단히 잠긴 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을 터였다. 소년은 복도 중간 즈음에 아이의 몸 하나가 지나갈 만큼 갈라진 벽 틈 속으로 몸을 끼워 넣었다.


"모루 누나!"


벽을 가득 채운 책장에서 쏟아져 나온 책더미 속에 앉아 책을 넘겨보던 모루는 키치르의 외침에도 조금의 움직임이 없었다. 걸음을 옮길 때 마다 발등 위로 쏟아지는 책을 밀어내며 모루에게 다가간 키치르는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저기, 여기는…. 위험한 곳이에요…."


그제야 고개를 든 모루가 가냘프게 떨리고 있는 소년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래. 여기서 어서 나가는 게 좋겠네. 자네에겐 좋은 추억이 남겨진 장소는 아니겠지."


"있잖아요."


키치르는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며 긴장 어린 목소리로 머뭇머뭇 말을 끄집어냈다.


"사실 여, 여기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네. 이 책들은 모두 바위산 속에서 길러지던 아이들의 연구기록. 그 결과들은 너의 가장 큰 상처겠지."


소년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발등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하나 둘 떨어져 내린다.


"실험에서 제외된 자네는 도적들과의 마찰을 대비해 강제로 이젠의 힘을 연마해야 했겠지."


모루의 말 대로였다. 제대로 된 이젠 교육을 받지 않고 그 능력을 개안시키기 위해서 선생들은 어린 키치르에게 학대에 가까운 훈련을 가했다. 그 정도의 극악한 상황이 아니라면 계약의 리블리엘 없이 자유자재로 능력을 끌어내는 건 불가능했던 것이었다.


"괜찮다네. 제대로 아카데미 수업을 거치면 두 번 다시 그런 힘든 고통을 겪지 않고도 넌 크게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


모루는 자신이 쓰고 있던 어깨까지 내려온 모자의 방수 천 안쪽을 들어 키치르의 눈물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그리고 소년의 등을 입구 쪽으로 떠밀었다.


"나가자. 이 지옥에서."


"누나랑 형들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나쁜 짓을…. 저지르고 도망치는 중이라는 건 믿을 수가 없어요."


키치르는 모루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키치르.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는가."


"네…."


"자네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군."


벽의 틈새로 먼저 발을 내딛던 키치르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그걸 말해 줄 수 없겠는가. 우리가 널 도와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


"하지만. 모루 누나…."


모루를 돌아보는 소년의 얼굴은 괴로운 듯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키치르는 옹송그려문 입술을 뜯으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한글자 한글자 내뱉었다.


"…지금이라도 어서. 도망쳐요."


그 말과 동시에 건물을 뒤흔드는 거대한 소음과 진동이 두 사람을 엄습해왔다. 벌떡 일어난 모루의 작은 몸 위로 책더미가 쏟아져 엉켜 들었다. 모루 주변으로 한층 더 가라앉은 바닥은 곧 깊은 구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소년의 얼굴은 새하얗게 물들었다.


"아, 안돼! 모루 누나!"


키치르의 목소리가 그 밑이 보이지 않은 깊은 구덩이 속을 메아리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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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늪의 이젠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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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원추리 연가 _ 27. 번뇌 16.02.20 403 2 17쪽
47 공지 16.02.06 256 2 4쪽
46 원추리 연가 _ 26. 악몽의 편린 16.02.03 327 0 15쪽
45 원추리 연가 _ 25. 별을 헤매는 아이들 + 후기 16.01.30 418 1 16쪽
44 원추리 연가 _ 24. 환상 서곡 16.01.27 280 0 18쪽
43 원추리 연가 _ 23. 살인귀의 본능 16.01.23 448 0 18쪽
42 원추리 연가 _ 22. 빛과 어둠의 춤 16.01.20 278 0 18쪽
41 원추리 연가 _ 21. 새하얀 심연 16.01.16 302 0 16쪽
» 원추리 연가 _ 20. 별을 헤는 아이들 16.01.13 348 0 17쪽
39 원추리 연가 _ 19. 붉은 바위 너머 비밀 16.01.09 501 0 17쪽
38 원추리 연가 _ 18. 작은 도둑 16.01.06 255 0 14쪽
37 원추리 연가 _ 17. 황야의 꿈 16.01.02 483 0 14쪽
36 원추리 연가 _ 16. 제박 15.12.30 417 1 21쪽
35 원추리 연가 _ 15. 기적을 위한 한 걸음 15.12.26 333 1 16쪽
34 원추리 연가 _ 14. 사랑은? 전쟁! 15.12.23 278 0 13쪽
33 원추리 연가 _ 13. 사랑은! 전쟁? 15.12.20 177 0 15쪽
32 원추리 연가 _ 12. 태양의 의무 15.12.19 440 0 13쪽
31 원추리 연가 _ 11. 화원의 자장가 15.12.16 267 1 11쪽
30 원추리 연가 _ 10. 결혼 축제(2) 15.12.13 281 0 11쪽
29 원추리 연가 _ 9. 결혼 축제(1) 15.12.12 262 0 11쪽
28 원추리 연가 _ 8. 결의 15.12.12 462 0 12쪽
27 원추리 연가 _ 7. 어둠의 구렁 15.12.09 285 0 10쪽
26 원추리 연가 _ 6. 함정 15.12.06 229 0 10쪽
25 원추리 연가 _ 5. 마녀 아이힌(2) 15.12.03 348 0 11쪽
24 원추리 연가 _ 4. 마녀 아이힌(1) 15.12.01 494 0 11쪽
23 원추리 연가 _ 3. 여행의 시작(3) +3 15.11.29 409 1 9쪽
22 원추리 연가 _ 2. 여행의 시작(2) +2 15.11.29 510 3 9쪽
21 원추리 연가 _ 1. 여행의 시작(1) 15.11.25 283 1 11쪽
20 미궁의 빛 _ 14. 미궁의 빛 15.11.22 366 1 14쪽
19 미궁의 빛 _ 13. 의외의 탈주로 15.11.20 431 1 15쪽
18 미궁의 빛 _ 12. 루인의 망령(3) 15.11.18 243 1 14쪽
17 미궁의 빛 _ 11. 루인의 망령(2) 15.11.17 317 1 11쪽
16 미궁의 빛 _ 10. 루인이 망령(1) 15.11.15 409 1 15쪽
15 미궁의 빛 _ 9. 공동묘지의 소녀 15.11.13 259 2 15쪽
14 미궁의 빛 _ 8. 악마 루아브(2) 15.11.11 298 1 14쪽
13 미궁의 빛 _ 7. 악마 루아브(1) 15.11.08 395 1 14쪽
12 미궁의 빛 _ 6. 가짜들의 싸움 15.11.06 332 2 9쪽
11 미궁의 빛 _ 5. 탈출의 전야제(2) 15.11.04 352 1 9쪽
10 미궁의 빛 _ 4. 탈출의 전야제(1) 15.11.01 402 0 12쪽
9 미궁의 빛 _ 3. 시연의 뜰 15.10.31 342 0 15쪽
8 미궁의 빛 _ 2. 새장 속 소년(2) 15.10.30 296 3 12쪽
7 미궁의 빛 _ 1. 새장 속 소년(1) 15.10.28 286 2 12쪽
6 하빌리스의 형제 _ 6. 하빌리스의 형제 15.10.25 406 1 16쪽
5 하빌리스의 형제 _ 5. 미친 예술가의 사학(2) 15.10.23 277 0 13쪽
4 하빌리스의 형제 _ 4. 미친 예술가의 사학(1) 15.10.21 367 0 14쪽
3 하빌리스의 형제 _ 3. 재회 15.10.18 220 0 13쪽
2 하빌리스의 형제 _ 2. 안내인 15.10.17 376 2 14쪽
1 하빌리스의 형제 _ 1. 북문 입국소 15.10.15 430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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