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아히체님의 서재입니다.

오늪의 이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아히체
그림/삽화
@jo_9o
작품등록일 :
2015.10.03 15:53
최근연재일 :
2016.02.20 09:13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17,253
추천수 :
59
글자수 :
288,708

작성
15.12.30 18:05
조회
416
추천
1
글자
21쪽

원추리 연가 _ 16. 제박

DUMMY

[3등입니다. 올해의 우승자! 우리들의 꼬마 부부! 3등을 차지하셨습니다!]


진행자의 격양된 목소리와 함께 구간마다 설치된 동그란 박 안에서 색색의 종이꽃과 반짝이는 가루가 터져 나왔다. 곧이어 경음악을 배경으로 악기를 하나씩 꿰어찬 악단원들이 한 명 한 명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의 행진에 따라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음식점의 요리사와 꽃집의 여사장, 옷가게의 점장들까지 저마다 약속된 악기를 연주하며 가게 밖으로 뛰쳐나와 긴 줄을 이어나갔다.


[지금 보라 길에서는 우승자를 위한 축하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2부 행사는 끝이 난 게 아니니 남은 30분 동안 최선을 다해서 임해주시길 바랍니다!]


거대한 축하행진은 어린 부부를 에워싸고 기쁨의 연주를 울렸다. 그리고 그들에게 휩쓸린 세로와 모루는 어느새 남성 참가자의 출발지였던 파란 광장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참가자가 모두 출발한 뒤 재단장을 한 모양인지 시상을 위한 무대와 꽃장식, 구경꾼들을 위한 자리까지 배치되어 축제의 마무리를 준비 중이었다. 세로와 모루는 진행요원의 안내에 무대 정중앙에 갖춰진 단상 위의 자리에 가 앉았다.



원추리 연가 _ 16. 제박



"해냈구나! 3등이야."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광장 한쪽에서 폴짝거리던 루가가 경음악 반주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며 무대 위로 올라온다.


"전국 일주 티켓이랑 상금은 아깝게 됐지만."


세로는 길목에서 만난 파스다가의 세 자매를 떠올렸다. 서슬이 시퍼런 그녀들의 의욕을 이기는 건 그 누구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파인의 비명이 세로의 귓전에 맴도는 것만 같았다. 그 노골적인 구애 장면에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근데 너네 정말로 키, 키쑤웁하하하하하하했냐?"


루가는 씰룩거리는 입술을 털어내며 폐 속까지 삼켜온 웃음을 뿜어냈다.


"어땠어? 좋아?"


"귀찮게. 저리 안 가?"


"에헤! 세로님 얼굴이 빨간 건 더운 탓인가요? 응?"


결국, 세로에게 꿀밤 한 대를 얻어맞은 루가였지만 감정을 드러내는데 인색한 그를 놀리는 게 재미있는지 두 번 오기 힘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세로를 골려댄다.


"정말로 놀라운 경험이야.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축하받는 건 처음이라네."


한껏 상기 된 모루는 꿈꾸는 듯한 얼굴로 광장을 둘러보았다. 무대 맞은편에 늘어선 좌석은 이미 만석이었다. 자리를 채운 사람들은 모두 웃은 얼굴로 환성을 보내고 있었다.


루인의 기억을 통틀어봐도 환호의 주체가 자신이 된 건 전무후무했다. 언제나 빛은 의자매인 도하야크의 몫이었기에 양면의 그늘을 맡는 것에 충실해 왔던 그녀였다. 감격의 빛이 어려있는 소녀의 얼굴을 들여다본 루가는 씨익 웃었다.


"늘 모든 것에 통달한 현자처럼 굴지만, 너도 어린애라고. 어린애답게! 가끔은 좋잖아?"


"맞아요. 일찍부터 너무 많은 걸 짊어지면 그 시절에만 볼 수 있는 기쁨을 놓치게 된답니다. 가끔은 그 짐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세요. 훨씬 더 행복해질 거에요."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모루와 루가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저택의 아가씨?"


"뮤 씨."


언제 옷을 갈아입었는지 거짓 신부의 예복을 벗은 뮤는 틀어 올렸던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리고 정장을 갖추어 입고 있었다. 그녀는 한 아름 가득 안고 온 꽃다발을 모루의 품에 안겨주었다.


"우승을 축하합니다."


"자네야말로. 파혼. 축하한다고 말해도 되겠지?"


뮤는 발그레한 두 뺨을 손바닥 아래에 감추고 수줍게 웃어 보였다. 꽃보다 아름다웠던 신부의 모습 때보다도 훨씬 더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모루 씨가 등 떠밀어 주시지 않으셨다면 저에게도, 아당크에게도, 저와 혼인을 올린 그분께도 평생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습니다."


"근데 아땅크 씨는 어디 가고?"


왠지 허전해 보이는 뮤의 곁은 눈치챈 루가가 그녀의 그림자와 같았던 아당크를 찾는다.


"아당크는 지금 의무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답니다."


간절히 품고 있었던 마음이 동한 이후, 긴장이 풀린 탓인지 그대로 하반신이 풀려 버린 아당크는 들것에 실려 의무반으로 옮겨졌다는 웃기고도 슬픈 전설을 남기고야 말았다.


[여러분. 즐거우셨습니까?]


잦아드는 호루라기 소리와 확성기의 음성이 어느 순간 뚝 멈추었다. 축제의 시간은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걸로 2부 행사의 종결을 고합니다. 오늘의 최종 결과. 2쌍의 본식 부부의 성공과 5쌍의 새로운 인연이 이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내년에 또 만날 수 있는 거죠? 그렇죠?}


[곧 파랑 광장에서 시상식이 열리니 마지막까지 놓치지 말고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네츠.]


{그리고 해설에 울프라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진행을 마친 만담 꾼 형제는 금세 파랑 광장으로 달려와 시상식까지 함께했다. 발본 가문의 큰 마님이 축하인사와 함께 상금을 건넸을 때야 비로소 세로는 굳은 인상을 풀고 미미한 미소를 짓는다.


"근데 새신랑 얼굴이 왜 그렇게 어두워."


무대를 내려오는 세로의 옆에 붙어 재잘거리던 루가는 아무래도 평소보다 더 가라앉은 그의 반응에 걱정스레 물었다.


"서신국의 추적자를 만났어."


"뭐?"


그 말에 지금껏 해맑던 루가의 얼굴에 그늘이 스며들었다. 그는 서둘러 목 뒤로 넘어간 가면을 고쳐 쓰고 분잡스럽게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그는 참관 나라가 우리의 움직임을 완전히 다 파악하면서도 방관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참관의 목적을 알 길이 없군."


"그래서 정신이 딴 데 팔려있었던 건가."


늘어뜨린 드레스 자락을 조심스럽게 끌어 쥐며 뒤따르던 모루가 세로의 등을 찬찬히 두드렸다.


"너무 앞서 걱정하지 말게. 자네 말대로라면 당장 우리를 서신국으로 끌고 갈 속셈은 아닌 것 같으니."


"그렇긴 하지만…."


"계속 숨어서 지켜볼 수 있었던 걸 굳이 나타나서 목적을 밝힌 걸 보니, 머지않아 다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걸세."


"맞아. 지금 인상 써봤자 달라질 게 없잖아? 닥쳐오면 그때 힘으로 해결해도 늦지 않아. 세로님이 그렇게 예민하니까 여기 신부들보다 팔뚝이 더 가늘지."


세로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추격자와 마주했던 보라 길을 돌아보았다. 그때, 파스다가의 자매와 함께 모습을 감춘 파인의 모습은 그 뒤로 찾아볼 수 없었다.






흥겨웠던 대 축제가 막을 내린 다음 날 오전, 제작을 부탁한 위조 행권을 받기 위해 판들 영감을 찾아간 세로와 떨어져 루가를 맡은 모루는 전망대에 올랐다. 큰 행사를 주관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을의 행정일까지 보고 있는지, 발본 가문 소유의 중앙 전망대는 관청의 역할까지 맡고 있었다.


모루는 숨을 고르고 테이블 위에 놓인 하얀 종이와 마주했다. 그 모습은 마치 신성한 전투를 앞둔 전사의 기백과 닮아있다. 곧 조그마한 손이 종이 위를 오간다.


-모루난비


이제 제법 익숙해진 제 지칭을 또박또박하게 힘주어 눌러썼다. 그리고 그 뒤로는 친우의 비밀스러운 이름이 뒤따랐다. 봄꽃만큼이나 해사했던 그녀의 얼굴이 기억 위에 잠시 떠올랐다가 사그라진다.


"다 됐다."


책장에 기대 단잠에 빠져있던 루가가 모루의 기척에 찌뿌둥한 어깨를 두드리며 허리를 똑바로 폈다. 그는 고개를 빼 들고 모루의 손에 들린 하얀 종이 위를 쓱 훑었다.


"축하해 모루난비. 이제 정식으로 유부녀가 되었구나?"


또다시 시작되려는 루가의 놀림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해준 모루는 홀로 외롭게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아당크에게 다가가 혼인 신고를 위한 서류를 내밀었다.


"축제는 끝이 났는데 아직도 가면 놀이 중이십니까?"


두 사람의 목 뒤에 매달려 있는 동물 가면을 발견한 아당크가 농담을 건넨다. 추격자와의 조우를 염려한 세로의 대비책이었지만 일상에서의 가면이 훨씬 더 눈에 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아땅크 씨 오늘은 혼자야?"


"아당크 입니다."


"그런데 자네 얼굴은 왜 그런가."


주먹만큼 부풀어 오른 눈두덩이에 파묻힌 아당크의 눈은 제대로 형상을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반대쪽 뺨은 피멍이 들어있고 입술 또한 피딱지가 덕지덕지 내려앉은 얼굴은 정말이지 만신창이었다. 축제가 끝난 후 의무실로 실려 갔다고 하더니 걷지 못해 안면으로 기어왔나 싶을 정도였다.


"이건 마을 청년 1부터 20까지에게 습격을 받아서…."


그는 말끝을 흐렸다. 진심으로 뮤의 행복을 바라왔던 마을의 청년들은 아당크 의 생각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부분에서 뮤의 결혼을 문제 삼아왔었다. 그 결혼을 물릴 수 있었던 건 그들로서는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아당크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마을은 뒤집어졌다. 청년들 모두를 보호자로 둔 아가씨를 상대로 제대로 된 한 남자로 거듭나기 위해 밤새도록 정신단련이란 이름의 응징을 받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아가씨가 없네?"


"아가씨는 지금 큰 마님과 함께 린카 본가에 가 계십니다."


"파혼 문제 때문에 골머리 앓겠군. 아무래도 큰 집안끼리의 결혼은 가문과 가문을 잇는 계약문제나 다름없을 텐데."


"정작 당사자인 신랑은 아직 행방불명이라고 하니 그쪽 집안 심기가 더욱더 불편하겠죠."


아당크는 다리를 절룩이며 자리를 벗어나 모루와 루가 앞에 다가와 섰다.


"늦었지만, 결혼을 축하합니다. 모루 씨가 아니었으면 저는 아가씨를 평생 잃을 뻔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는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뭔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대해왔던 지난 시간과는 반대되는 모습에 루가는 몸을 배배꼬며 부끄러워한다.


"이거 적응 안 되는데? 아땅크 씨. 그냥 하던 대로 해주면 안 될까?"


루가의 호들갑에 허리를 다시 꼿꼿하게 세운 아당크가 눈을 흘기며 그를 장난스레 째려보았다. 루가의 환호성을 뒤로하고 아당크는 다시금 공손하게 말을 이었다.


"마을 떠나시기 전, 세로 씨와 함께 다시 한 번 들러주시겠습니까? 아가씨와 함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모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망대를 나섰다. 세 광장과 세 개의 길에 중앙에 솟은 전망대로 시끌시끌 하루를 열어가는 상점의 활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저기. 세로님 보인다."


주황 길을 밟아 바쁘게 걸음을 옮기던 세로를 향해 루가가 팔을 흔들었다. 그날 오후, 상금으로 위조 행권의 대금을 치르고 늙은 말을 한 필과 짐마차를 빌려 온 세로는 빠르게 짐을 꾸려 떠날 채비를 마쳤다.


"어서 오세요."


뮤와 아당크는 전망대 밖으로 나와 낡은 짐마차를 맞이했다. 갓 태어난 연인의 꼭 붙잡은 손은 그간 외면했던 시간을 보상 받으려는 양 굳게 연결되어 있었다.


"벌써 떠나시는군요."


"갈 길이 멀어서요. 린카 본가에서의 일은 잘 보고 오셨나요?"


세로의 질문에 뮤는 변함없는 미소로 화답하며 세 사람을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린카 가문에서 위로금과 공식 사과를 요구한 것 빼고는 큰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당크의 얼굴 위로 불만이 가득 부풀어 오른다.


"주변 상인들의 목격담에 의하면 그 집 도령도 2부 행사 도중에 만난 금발의 미녀와 마을을 빠져나갔다고 하니 크게 트집 잡지 못하는 거겠죠."


그런 한량인 줄 꿈에도 모르고 소중한 제 아가씨의 행복을 맡기려고 했다니 마을 청년들의 걱정이 기우가 아니었다. 아당크는 우매했던 자신이 너무나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그의 말에 루가는 덮어놓았던 기억 속 한 장면을 번뜩 떠올린다.


"금발의 미녀라니…."


그날 주황 길에서 아이힌의 손을 맞잡고 길목을 벗어나던 한 신랑의 뒷모습이 생생하다. 루가는 이마 위로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냈다.


"왜 그래. 루가."


"아니. 난 아무것도 몰라. 그런 여자 따위, 절대 알고 싶지 않아."


그는 홀로 깨달은 진실에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상대는 린카 지구의 제1 가문입니다. 양쪽 모두의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잘못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죄를 물을 겁니다. 곧 압박이 들어오겠죠."


불만과 자책의 굴곡을 거친 아당크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앞으로 겪게 될 풍파에 대한 책임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짓눌러온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홀로 짊어질 문제가 아닙니다. 아당크."


축쳐진 아당크의 어깨를 토닥여주던 뮤가 그의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였다. 순간 아당크의 귓가가 발갛게 달아오른다. 그 흐트러진 모습을 놓칠 루가가 아니었다.


"우와. 아땅크 씨. 완전 숙맥. 그렇게 좋으면서 어떻게 참았대."


"아, 아당크 입니다. 놀리지 말아 주십시오."


얼굴 전체가 붉게 타올라 터지기 직전인 아당크는 허둥지둥 서류철을 꺼내어 테이블 위로 늘려놓으며 주어진 소임에 최선을 다해 매달렸다.


"여, 여기. 결혼 증명서와 시민등록증, 발본 가문에서 보증하는 신원 보증 증명서입니다. 두 분 다 미성년이지만 법적 보호자가 없는 관계로 저희 발본 가문에서 두 분의 보호자 대행을 맡게 되었습니다. 여기다가 서명하시고 받아가십시오."


뮤는 서랍 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어 와 모루에게 건네주었다. 상자 안쪽에는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원형의 펜던트 두 개가 들어있었다. 모루는 그것을 조심스레 꺼내어 들었다.


"행권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죠?"


짙은 빛깔의 나무를 곱게 깎아놓은 고리의 중앙에는 상아로 만든 달을 형상으로 한 조형물이 빨간색, 파란색 명주실로 매어져 있었다. 그것이 린카 지구를 상징하는 문양이라는 건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지겹도록 보아온 터라 설명을 듣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모루는 목걸이를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내렸다. 그것을 뒤집으니 고리의 뒷면에 이름과 나이, 출신 지역과 발급 날짜를 적은 글귀가 둘러져 깊게 박혀있다.


-세로 트리놀

-모루난비 트리놀


"트리놀?"


이름 끝에 뒤따르는 낯선 성에 모루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다.


"저희 발본 가문에서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두 분을 도와드리려 합니다. 두 분 다 고아라는 설정이셨죠?"


뮤의 말에 세 사람은 화들짝 놀라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걸 어찌…."


"두 분의 결혼 행사 참가신청 후, 베데아의 모든 광산에 신원 조회를 의뢰했었답니다. 사실 신원세탁을 위한 위장결혼은 비일비재한 일이거든요. 무례를 용서하세요."


"그래서 집사의 반응이 그토록 차가웠던 거군."


모루의 말에 아당크는 가슴을 두드리며 큰 목소리로 당부한다.


"어른의 세계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 그냥 놔두신 건가요?"


"두 분께 말 못할 사연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어요. 과거를 이야기하는 세로 씨의 얼굴이 굉장히 비장해 보였거든요. 결혼식 전날 밤 모루 씨와 대화하며 확신했습니다. 적어도 당신들의 유대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요. 그리고 그 판단 덕에 제 인생 최고의 행복을 손에 넣게 되었어요."


"사실 아가씨는 거리의 아이들을 위해 몇 번이고 가문의 이름을 내주었습니다만 그 이름에 먹칠하는 사건도 많았습니다. 아무리 배신을 당해도 다시 정을 베푸시니 아가씨는 작은 마님의 인성을 너무나 쏙 빼닮은 게 문제입니다."


평소와 같은 말투로 아당크가 작게 투덜거렸다. 여전히 그녀를 향한 자랑스러움이 묻어나는 불평이었다.


"트리놀이라는 성은 저희 발본 가문에서 신원을 보증하는 이름이랍니다. 현재 대부분 발본 가문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에게 부여된 이름이긴 하지만 적어도 린카 지구 내에서는 발본 가의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요."


"10년의 유예기간 동안 별사건 없이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다면 더는 발본 가의 보증 없이 자연히 독립하게 되는 겁니다. 다만 문제가 생기면 바로 파행되니 유의하여 주십시오."


뮤의 말에 아당크가 설명을 덧붙인다. 그러고 보니 그 역시도 아당크 트리놀이었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들의 깊은 배려에 세로는 상체를 깊히 숙였다. 세로의 인사를 만류하며 뮤는 덩달아 고개를 주억거린다.


"저야말로 어떻게든 감사함을 표하고 싶은데 이게 전부네요. 앞으로 두 분의 앞날에 신좌의 가호가 가득하길 기도하겠습니다."


어느덧 저물어가는 노을빛이 전망대의 창문을 타고 실내로 흘러들어왔다. 뮤가 작은 선물이라며 준비한 식료품들을 짐칸에 실어 나른 후 세로는 마차에 올랐다. 이제 마을을 온전히 떠날 시간이 되었다. 짐칸에 앉은 모루와 루가에게 작별인사를 마치고 고삐를 쥔 세로를 향해 되돌아온 뮤는 그에게만 들릴만한 목소리로 작은 조언을 풀어놓는다.


"모루 씨는 멋진 여성으로 자랄 겁니다. 놓치지 말고 꼭 붙잡으세요."


그녀의 음성에는 너그러운 웃음이 배어있었다.




뮤와 아당크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는 마을 외곽의 길을 향해 달려나간다. 길이 고르지 못한 탓에 이리저리 튀어나가려는 식료품 포대기를 제 몸으로 눌러 고정한 루가와 모루는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임에도 아릿한 고통에 엉덩이를 부여잡아야 했다.


포대기 위로 기대어 눕다시피 한 모루는 노을빛에 적셔진 샛노란 뭉게구름을 배경으로 손에 든 동그란 목걸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모루난비. 모루난비 트리놀."


"마음에 들어?"


"나쁘지 않다네."


시큰둥하게 대답했지만 행권을 만지작거리는 두 손은 거두어지지 않는다. 루가는 주머니에 쑤셔놓은 봉투 안에서 공예가 영감이 빗어낸 자신의 새로운 행권을 꺼내 들어 모루의 손에 들린 것과 번갈아 살펴보았다.


"정말 똑같다."


-루가디 허그


"근데 세로님 작명은 정말 최악."


마부석에서 변명 어린 자그마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달그락거리는 마차의 소음에 금세 파묻힌다.


"이 조그만게 50만 에폰이라니 정말 비싸. 차라리 나도 뮤 씨한테 부탁해 이름 하나 얻을 걸 그랬나?"


"아서게. 자네는 사형수에 탈옥범 아닌가. 자칫 잘못했다간 뒤를 봐준 발본 가문을 풍비박산 낼 수도 있어."


"나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닌데."


"하지만 자네 이름은 에포니엄 최고의 공포니까."


"뭔가 슬픈걸."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등 뒤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부석에 앉은 세로는 두 사람의 머리꼭지를 슬쩍 돌아보았다. 보자기를 뒤집어쓴 루가와 비 오는 로브 마을에서 사용했던 세로의 방수모자를 눌러 쓴 모루의 뒤통수가 나란히 모여있었다.


"근데 그거 세로님 모자 아니야?"


"써도 된다고 했다네."


"비도 안 오는 데 언제까지 쓰고 있을 거야."


"뭐 언젠가 오지 않겠는가."


루가의 호기심에 나른하게 대꾸한 모루는 모자의 챙을 눈 위로 끌어내렸다.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도, 그 기운이 내려앉은 대지도 청록의 어둠 속에 덮어진다. 그래도 지워지지 않는 선명한 글씨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모루난비 트리놀."


소녀의 목소리는 노래하듯 제 이름을 어루만진다.






마차 바퀴가 길을 패어놓고 지나간 자리 위로 세 개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노을을 등에 업고 있는 세 사람인지라 그 모습은 음영에 가리어져 있지만 그들의 목걸이만은 밝게 빛이 난다. 양쪽의 붉은 목걸이 사이에 선 파인은 두 사람의 닦달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고작 꼬마들 놀라게 해주려고 우리를 여기까지 소집한 건가."


"우리더러 방에서 꼼짝 말라고 하더니 정작 자기는 축제에 놀러 나가서 애인이나 만들고. 진짜 더럽다."


"흠흠. 그건 그냥 임무의 일환으로…."


파인은 붉어진 볼을 긁으며 목을 갑갑하게 에워싼 옷깃을 펄럭였다. 그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울긋불긋한 진한 입술 자국에 왼쪽의 남자가 노발대발 언성을 높인다.


"이것 봐! 업무태만이야!"


"어찌 되었건. 잊지 마. 성공하면 붉은 목걸이 신분을 한 단계 갱생시켜주기로 한걸."


"참관께서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해주시길 바랍니다."


파인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오른쪽의 남자는 입꼬리를 슬그머니 치켜세웠다.


"좋아."


"갱생이고 뭐고 난 필요 없어. 그자를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줘서 무진장 고맙다. 이거야."


왼쪽에 선 낮은 그림자의 주인은 뱃속 깊숙이에서 솟구치는 분노를 억누르며 중얼거린다. 그는 점점 멀어지는 마차의 뒤 꽁지를 잔인하게 일그러진 눈동자 위로 새기 듯 박아 넣었다.


"곧 다시 만나자. 한토의 보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오늪의 이젠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국가 및 용어, 캐릭터 설정집 (업데이트 15.12.20) +2 15.10.08 542 0 -
48 원추리 연가 _ 27. 번뇌 16.02.20 403 2 17쪽
47 공지 16.02.06 255 2 4쪽
46 원추리 연가 _ 26. 악몽의 편린 16.02.03 327 0 15쪽
45 원추리 연가 _ 25. 별을 헤매는 아이들 + 후기 16.01.30 418 1 16쪽
44 원추리 연가 _ 24. 환상 서곡 16.01.27 280 0 18쪽
43 원추리 연가 _ 23. 살인귀의 본능 16.01.23 448 0 18쪽
42 원추리 연가 _ 22. 빛과 어둠의 춤 16.01.20 278 0 18쪽
41 원추리 연가 _ 21. 새하얀 심연 16.01.16 302 0 16쪽
40 원추리 연가 _ 20. 별을 헤는 아이들 16.01.13 347 0 17쪽
39 원추리 연가 _ 19. 붉은 바위 너머 비밀 16.01.09 501 0 17쪽
38 원추리 연가 _ 18. 작은 도둑 16.01.06 255 0 14쪽
37 원추리 연가 _ 17. 황야의 꿈 16.01.02 483 0 14쪽
» 원추리 연가 _ 16. 제박 15.12.30 417 1 21쪽
35 원추리 연가 _ 15. 기적을 위한 한 걸음 15.12.26 333 1 16쪽
34 원추리 연가 _ 14. 사랑은? 전쟁! 15.12.23 278 0 13쪽
33 원추리 연가 _ 13. 사랑은! 전쟁? 15.12.20 177 0 15쪽
32 원추리 연가 _ 12. 태양의 의무 15.12.19 440 0 13쪽
31 원추리 연가 _ 11. 화원의 자장가 15.12.16 267 1 11쪽
30 원추리 연가 _ 10. 결혼 축제(2) 15.12.13 281 0 11쪽
29 원추리 연가 _ 9. 결혼 축제(1) 15.12.12 262 0 11쪽
28 원추리 연가 _ 8. 결의 15.12.12 462 0 12쪽
27 원추리 연가 _ 7. 어둠의 구렁 15.12.09 285 0 10쪽
26 원추리 연가 _ 6. 함정 15.12.06 229 0 10쪽
25 원추리 연가 _ 5. 마녀 아이힌(2) 15.12.03 348 0 11쪽
24 원추리 연가 _ 4. 마녀 아이힌(1) 15.12.01 494 0 11쪽
23 원추리 연가 _ 3. 여행의 시작(3) +3 15.11.29 409 1 9쪽
22 원추리 연가 _ 2. 여행의 시작(2) +2 15.11.29 509 3 9쪽
21 원추리 연가 _ 1. 여행의 시작(1) 15.11.25 283 1 11쪽
20 미궁의 빛 _ 14. 미궁의 빛 15.11.22 366 1 14쪽
19 미궁의 빛 _ 13. 의외의 탈주로 15.11.20 431 1 15쪽
18 미궁의 빛 _ 12. 루인의 망령(3) 15.11.18 243 1 14쪽
17 미궁의 빛 _ 11. 루인의 망령(2) 15.11.17 317 1 11쪽
16 미궁의 빛 _ 10. 루인이 망령(1) 15.11.15 409 1 15쪽
15 미궁의 빛 _ 9. 공동묘지의 소녀 15.11.13 259 2 15쪽
14 미궁의 빛 _ 8. 악마 루아브(2) 15.11.11 298 1 14쪽
13 미궁의 빛 _ 7. 악마 루아브(1) 15.11.08 395 1 14쪽
12 미궁의 빛 _ 6. 가짜들의 싸움 15.11.06 332 2 9쪽
11 미궁의 빛 _ 5. 탈출의 전야제(2) 15.11.04 352 1 9쪽
10 미궁의 빛 _ 4. 탈출의 전야제(1) 15.11.01 402 0 12쪽
9 미궁의 빛 _ 3. 시연의 뜰 15.10.31 342 0 15쪽
8 미궁의 빛 _ 2. 새장 속 소년(2) 15.10.30 296 3 12쪽
7 미궁의 빛 _ 1. 새장 속 소년(1) 15.10.28 286 2 12쪽
6 하빌리스의 형제 _ 6. 하빌리스의 형제 15.10.25 406 1 16쪽
5 하빌리스의 형제 _ 5. 미친 예술가의 사학(2) 15.10.23 277 0 13쪽
4 하빌리스의 형제 _ 4. 미친 예술가의 사학(1) 15.10.21 367 0 14쪽
3 하빌리스의 형제 _ 3. 재회 15.10.18 220 0 13쪽
2 하빌리스의 형제 _ 2. 안내인 15.10.17 376 2 14쪽
1 하빌리스의 형제 _ 1. 북문 입국소 15.10.15 430 1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