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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히체님의 서재입니다.

오늪의 이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아히체
그림/삽화
@jo_9o
작품등록일 :
2015.10.03 15:53
최근연재일 :
2016.02.20 09:13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17,251
추천수 :
59
글자수 :
288,708

작성
15.11.25 00:06
조회
282
추천
1
글자
11쪽

원추리 연가 _ 1. 여행의 시작(1)

DUMMY

무거운 엉덩이를 산의 언덕배기에 비비고 앉아 잠시 쉬어가는 듯한 시커먼 구름은 한 번만 쿡 찌르기만 해도 한바탕 비를 쏟아낼 것 같다.


그 아래로 삐죽 튀어나온 구불구불한 좁은 길이 산골짜기에서 부터 타고 내려와 길게 늘여져 있었다. 마치 산의 노란 꼬리 같은 그 길 위를 쓸고 지나가는 세 개의 그림자가 점점 커진다.


그들의 발에 엉망진창으로 달라붙은 진흙과 꾀죄죄한 몰골을 보아하니 며칠간 산에서 노숙한 모양이다. 그들 중 유일하게 깨끗한 옷을 입고 있는 맨발의 사내는, 사내라고 단정 짓기가 모호한 앳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움직이기 불편할 정도로 끼여 보이는 웃옷과 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있는 발목이 훌쩍 드러나 보이는 단이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바지 또한 그의 몸에 맞지 않은 지 토실토실한 엉덩이는 곧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뒤뚱뒤뚱 걷는 걸음걸이는 매우 웃기지만 사내…. 아니 소년의 표정은 사뭇 비장해 보였다.


"세로님. 마을까지만 가면 정말 새 옷 사주는 거야. 말 바꾸기 없기다."


"세로님이라고 부르지 마. 루가."


"사준다는 거야, 안 사준다는 거야."


"사준다니까."


"제일 비싼 걸 고를 테다."


그에게 세로님이라고 불린 또 다른 한 명의 소년은 고난을 극복해내려는 루가의 희망찬 눈빛을 애써 외면했다. 사정없이 뻗친 다갈색 머리를 가진 그는 소매가 너덜너덜하게 찢긴 셔츠 위로 얼룩이 묻은 옷을 살짝 걸치고만 있을 뿐 팔을 꿰어 입지는 않는다.


두 사람의 머리꼭지 위로 십(十)자 모양을 한 막대기가 삐죽 솟아올라 있다. 그들의 뒤로 누런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작은 소녀가 기다란 막대기를 소중하게 품에 안은 채 천천히 걷고 있었다. 녹이 슨 쇠막대기의 지나치게 긴 길이 때문에 밑단이 바닥에 질질 끌려 그들의 발걸음 뒤로 지나온 행적이 길게 그려졌다.


소녀는 루가의 씰룩거리는 엉덩이에 웃음을 참기 힘든 모양인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정면에서 풍겨오는 고문을 참아내기가 힘들어 결국 이상한 웃음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루가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소녀를 째려봤다.


"웃지 마!"


소녀는 목구멍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웃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갈림길의 중앙에 박혀있는 커다란 게시판을 향해 달려갔다.


게시판을 꾸미고 있는 기와로 된 지붕 위에 얹어진 <린카 지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라는 글자가 제일 먼저 시야에 쏙 들어온다. 지붕의 끝에는 방향 표시가 길게 빼어져 그 밑에 내걸린 나무푯말에 마을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오른쪽이 유라 마을. 왼쪽이 로보 마을."


뾰로통해 보이는 루가는 게시판에 붙어있는 각종 행사의 벽보와 마을 소개 전단을 살펴보는 소녀를 내버려 둔 채 제멋대로 왼쪽 길로 들어서 버린다.


"웃어서 삐진 모양이군."


소녀의 옆으로 다가온 세로는 게시판을 둘러보았다. 유라 마을의 결혼축제를 알리는 화려한 벽보가 중앙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서신국과 서부 아르니카의 소식란을 훑어보는 세로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지금쯤이라면 회담을 끝내고 참관 나라가 돌아왔을텐데."


서신국 소식란에는 <미스티아 공동묘지의 괴물이라 불리는 이로 추정되는 괴한의 마을 출현으로 인해 1급 경계령 발동. 다수의 보안대원 부상 및 교외를 잇는 다리의 폭파 등등 보안상의 문제로 축제가 중지되었다>고 적혀있었다. 그 밑에는 <축제를 싫어하는 참관 나라로써는 서신국의 행사를 대폭 축소할 수 있는 반가운 사건. 혹시 그가 꾸민 일이 아닐까?> 라는 지역 기자들의 어처구니없는 사족이 덧붙어져 있다.


은빛 눈동자와 루인의 오신석은 물론이거니와 루가 디아브의 탈옥, 심지어 휴조 로니얼의 살인 소식마저 언급되지 않고 있었다.


"빨리 안 가? 엉덩이 터질 것 같단 말이야."


벌써 저만큼이나 멀어진 루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서신국 소식지를 한 부 집어 든 세로는 느리게 걷기 시작한다. 누런 종잇장 위로 드넓게 펼쳐진 하늘이 유난히 검다.


"왠지 불안한 예감이…."


세로의 중얼거림은 소녀의 커다란 웃음소리에 덮여 버린다.


"으하하하! 루가. 엉덩이 터졌다네."



원추리 연가 _ 여행의 시작 (1)



린카 지구의 숲 속에 있는 작은 마을- 로보 마을은 산에 둘러싸이다시피 한 지리적 접근성에 비례하지 않아 보이는 많은 관광객과 커다란 시장을 자랑하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소리가 길가까지 타고 나와, 마을에 들어서기 전부터 일찍이 신난 루가가 덩실거리며 춤을 췄다. 지친 몸을 뉘일 숙소도 구하지 못하고 루가에게 붙들려 곧바로 상점가로 나간 세로는 그가 이끄는 대로 무거운 발걸음을 터벅터벅 옮기고 있었다.


북적북적한 상점가를 거닐고 있는 사람 중 절반 이상이 자신들처럼 외지사람들인지, 저마다 가게의 특산품을 둘러보기 바빠 보인다. 그 중 단연 돋보이는 건 불편해 보이는 옷을 입고 보자기를 머리에 둘러 쓴 특이한 걸음걸이의 남자다. 세로는 루가에게서 한걸음 물러섰다.


그들이 지하 미궁을 벗어난 직후. 맞닥뜨린 가장 큰 걸림돌은 루가의 죄수복이었다. 마른 체구인 세로의 옷은 루가에게 너무 벅찼다. 그걸 입을 바에는 벗고 다니겠다며 버럭버럭 화를 내지르는 루가를 어르고 달래서 마을에 도착한 것까지는 다행이었다.


하지만 얼굴을 가린 보자기의 틈새사이로 빼꼼 드러난 루가의 두 눈은 심상치 않게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루가는 모래밭에서 지폐라도 찾은 듯한 미소를 띠며 세로를 팔을 잡아끌어 어느 가게로 들어섰다.


어두운 복도를 타고 안쪽으로 걸어가니 네 면의 벽에 옷이 빽빽하게 걸려있는 큰 공간이 나왔다. 세로는 벽에 걸려 있는 다양한 옷을 보며 눈이 휘 동그래졌다. 빛깔과 소도구는 가지각색이었지만 그 옷들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각기 다른 문양이 새겨진, 허리와 팔목을 두르고 있는 금장이었다.


"신관복?"


그것은 고대 전설 속의 쌍둥이 여신과 정령 오신을 모시는 지역 신관의 상징이었다. 저쪽 구석에서 가게 주인과 이야기를 하는 루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른 나라 신관복은 없어?"


"여기 들어와 있는 외국의 신관복은 항류국의 신관복뿐입니다."


"그거야. 대 항류의 신관복!"


첩첩이 줄지어 늘여져 있는 비슷한 옷들을 보고 있노라니 울렁증이 일어난 세로는 손에 들린 소식지에 얼굴을 파묻었다. 보안본국 안에서 그렇게 큰 소란을 일으켰는데, 다른 건 몰라도 루가 디아브의 탈옥은 쉬쉬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가늠할 수 없는 참관의 속셈에 세로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세로님. 많이 기다렸지?"


루가의 목소리에 세로는 생각을 걷고 고개를 들었다. 루가는 날개뼈 아래까지 내려오는 하늘색 망토와 청록색 옷을 맞춰 입고 가죽 장화를 신고 있었다. 번쩍거리는 금장에는 덩굴의 줄기와 비슷해 보이는 무늬가 새겨져 있다.


"내 고향의 예비 신관복이야."


남부끄러운 옷에서 해방된 기쁨과 고향의 옷을 입은 감동이 교차한 루가는 커다란 눈망울을 글썽이며 세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져 시선을 떨구자, 넉살 좋아 보이는 주인장의 얼굴이 쑥 들이밀어 졌다.


"15만 에폰 되겠습니다."


세로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의 손에 지폐가 네 장 만져진다.


"아크로 하면 얼마인가요?"


"아크라... 아르니카의 화폐는 거래를 안 합니다만…. 타국의 신관복은 잘 팔리지도 않으니 50만 아크만 주고 가져가십쇼."


세로와 루가의 눈이 동그랗게 치켜떠 졌다.


"50만 아크요?"


아르니카 왕국의 화폐인 아크와 에포니엄 전체 통합 화폐인 에폰은 비슷한 환율로 사용되었던 에포니엄 화폐계의 양대 산맥이었다. 1년 동안 빛의 탑에 감금되다시피 지냈던 세로와 3년 동안 지하 미궁에 갇혀 지냈던 루가는 비슷하지만 각기 다른 이유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이 세상에 소외되어 있었던 짧은 시간 동안 땅바닥으로 떨어진 아크의 화폐 가치에 놀란 세로와는 달리, 단지 환율 차이가 지나치게 커서 껑충 뛰어 올라버린 가격에 놀란 루가였다. 또 그 엉덩이가 찢어진 바지를 입으라고 하면 어쩌지. 한번 껴입고 보니 절대 벗고 싶지 않은 고향의 옷이다.


"큰일인데."


역시나…. 세로의 안색을 물끄러미 살피던 루가는 치밀어 올라오는 억울함에 소리를 빽 내질렀다. 그럴 줄 알았어!


"뭐? 약속했잖아. 아무리 비싸도 사주겠다고!"


"지금 네 옷이 문제가 아니라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폴짝이며 가게 밖으로 뛰어나온 루가는 벽에 기대서서 관광지도를 열심히 살펴보던 소녀의 주변을 몇 바퀴나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던 소녀가 입을 열자 그제야 그 자리에 멈추어 선다.


"…. 루가. 정말 잘 어울리는군."


"그렇지? 그렇지? 우리 집은 대대로 신관을 지냈었어. 아버지가 입던 옷이야."


그리움이 담긴 얼굴로 루가는 배를 쓱쓱 문질렀다.


"게다가 세로님에게 그런 면이 있었는지 미처 몰랐어. 세로님은 에누리의 천재야."


10만 아크를 팍팍 깎아내려 가던 세로의 신들린 혀 놀림을 재현하려는 루가의 말을 끊으며 세로가 그사이에 끼어들었다.


"루가. 이만 얼굴을 가려."


그는 가게에 들어가기 전보다 더욱 지쳐 보였다. 엄습하는 불안감이 세로의 머릿속을 옭아맨다.


"은행은 어디지?"


소녀는 손에 들린 마을 관광지도를 내려다보고 고개를 들어 한 곳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말없이 걸음을 옮기는 세로의 뒤를 그의 몫까지 열심히 입술을 털어대며 루가가 바쁘게 뒤쫓았다.


"세로님은 정말 대단해!"


"알겠으니까. 세로님이라고 부르지 좀 마."


루가의 입장에서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큰둥하게 루가 디아브라고 꼬박꼬박 성까지 붙여서 불렀던 세로에 대한 소심한 복수를 하는 것이리라. 그의 하늘색 신관복은 소녀의 두 눈에 가득 차올라 넘실거렸다.


"루가. 어쩌면 자네에게는 힘겨운 여정이 될지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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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국가 및 용어, 캐릭터 설정집 (업데이트 15.12.20) +2 15.10.08 542 0 -
48 원추리 연가 _ 27. 번뇌 16.02.20 403 2 17쪽
47 공지 16.02.06 255 2 4쪽
46 원추리 연가 _ 26. 악몽의 편린 16.02.03 326 0 15쪽
45 원추리 연가 _ 25. 별을 헤매는 아이들 + 후기 16.01.30 418 1 16쪽
44 원추리 연가 _ 24. 환상 서곡 16.01.27 280 0 18쪽
43 원추리 연가 _ 23. 살인귀의 본능 16.01.23 448 0 18쪽
42 원추리 연가 _ 22. 빛과 어둠의 춤 16.01.20 278 0 18쪽
41 원추리 연가 _ 21. 새하얀 심연 16.01.16 302 0 16쪽
40 원추리 연가 _ 20. 별을 헤는 아이들 16.01.13 347 0 17쪽
39 원추리 연가 _ 19. 붉은 바위 너머 비밀 16.01.09 501 0 17쪽
38 원추리 연가 _ 18. 작은 도둑 16.01.06 255 0 14쪽
37 원추리 연가 _ 17. 황야의 꿈 16.01.02 483 0 14쪽
36 원추리 연가 _ 16. 제박 15.12.30 416 1 21쪽
35 원추리 연가 _ 15. 기적을 위한 한 걸음 15.12.26 333 1 16쪽
34 원추리 연가 _ 14. 사랑은? 전쟁! 15.12.23 278 0 13쪽
33 원추리 연가 _ 13. 사랑은! 전쟁? 15.12.20 177 0 15쪽
32 원추리 연가 _ 12. 태양의 의무 15.12.19 440 0 13쪽
31 원추리 연가 _ 11. 화원의 자장가 15.12.16 267 1 11쪽
30 원추리 연가 _ 10. 결혼 축제(2) 15.12.13 281 0 11쪽
29 원추리 연가 _ 9. 결혼 축제(1) 15.12.12 262 0 11쪽
28 원추리 연가 _ 8. 결의 15.12.12 462 0 12쪽
27 원추리 연가 _ 7. 어둠의 구렁 15.12.09 285 0 10쪽
26 원추리 연가 _ 6. 함정 15.12.06 229 0 10쪽
25 원추리 연가 _ 5. 마녀 아이힌(2) 15.12.03 348 0 11쪽
24 원추리 연가 _ 4. 마녀 아이힌(1) 15.12.01 494 0 11쪽
23 원추리 연가 _ 3. 여행의 시작(3) +3 15.11.29 409 1 9쪽
22 원추리 연가 _ 2. 여행의 시작(2) +2 15.11.29 509 3 9쪽
» 원추리 연가 _ 1. 여행의 시작(1) 15.11.25 283 1 11쪽
20 미궁의 빛 _ 14. 미궁의 빛 15.11.22 366 1 14쪽
19 미궁의 빛 _ 13. 의외의 탈주로 15.11.20 431 1 15쪽
18 미궁의 빛 _ 12. 루인의 망령(3) 15.11.18 243 1 14쪽
17 미궁의 빛 _ 11. 루인의 망령(2) 15.11.17 317 1 11쪽
16 미궁의 빛 _ 10. 루인이 망령(1) 15.11.15 409 1 15쪽
15 미궁의 빛 _ 9. 공동묘지의 소녀 15.11.13 259 2 15쪽
14 미궁의 빛 _ 8. 악마 루아브(2) 15.11.11 298 1 14쪽
13 미궁의 빛 _ 7. 악마 루아브(1) 15.11.08 395 1 14쪽
12 미궁의 빛 _ 6. 가짜들의 싸움 15.11.06 332 2 9쪽
11 미궁의 빛 _ 5. 탈출의 전야제(2) 15.11.04 352 1 9쪽
10 미궁의 빛 _ 4. 탈출의 전야제(1) 15.11.01 402 0 12쪽
9 미궁의 빛 _ 3. 시연의 뜰 15.10.31 342 0 15쪽
8 미궁의 빛 _ 2. 새장 속 소년(2) 15.10.30 296 3 12쪽
7 미궁의 빛 _ 1. 새장 속 소년(1) 15.10.28 286 2 12쪽
6 하빌리스의 형제 _ 6. 하빌리스의 형제 15.10.25 406 1 16쪽
5 하빌리스의 형제 _ 5. 미친 예술가의 사학(2) 15.10.23 277 0 13쪽
4 하빌리스의 형제 _ 4. 미친 예술가의 사학(1) 15.10.21 367 0 14쪽
3 하빌리스의 형제 _ 3. 재회 15.10.18 220 0 13쪽
2 하빌리스의 형제 _ 2. 안내인 15.10.17 376 2 14쪽
1 하빌리스의 형제 _ 1. 북문 입국소 15.10.15 430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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