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추리 연가 _ 6. 함정
마치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듯한 착각을 주는 굵은 빗줄기를 뚫고 붉은 나무 우산이 나아간다. 아이힌의 걸음은 어제 들렸던 마구간을 거쳐 그 뒤로 난 좁은 길로 계속 이어졌다.
드문드문 보이는 길목의 상점들은 하나같이 유리창이 깨지거나 문이 떨어져 나가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바쁘게 다리를 움직이던 루가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돈 꾸러미를 꼬옥 안았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거야?"
아이힌은 외길의 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 언덕 너머에 말 농장이 있어."
"말 농장이라니. 나 처음 가 봐!"
"근데 너희는 어디로 가고 있니?"
붉은 지붕 아래 아이힌의 목소리가 청아하게 울린다.
"그룸 이래."
"아주 먼 곳으로 가네? 이거 굉장히 튼튼한 말이 필요하겠는걸."
"맞아! 좋은 말을 구해야 할 텐데."
어느덧 붉은 우산은 오래된 건물 앞에 멈추어 섰다. 그곳은 부서진 의자와 테이블이 굴러다니는 야외 테라스가 있는 단층 목조 건물이었다. 루가는 우산 밑에서 나와 지붕 안쪽으로 들어갔다. 지붕의 안쪽이라 해도 건물의 외관이 낡은 탓에 군데군데 뚫려 있는 구멍으로 빗물이 그대로 새어 들어왔다.
"여긴 옛날에는 주점이었어. 외관은 좀 낡았지만 이 안을 개조해서 사무실로 쓰고 있거든. 바 테이블 안쪽에 있는 사람에게 돈을 건네주고 기다리면 돼."
"넌 어디가?"
"내가 도와준 걸 알면 세로가 쑥스러워하거든. 그리고 이곳 주인장에게 빚이 좀 있으니까 나에 대한 건 비밀이다?"
아이힌은 예쁜 웃음을 날리며 길을 돌아 사라진다. 그녀의 붉은 우산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배웅한 루가는 행여나 소중한 돈 꾸러미가 비에 젖을까 고쳐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 위로 '유킨스 사채업 사무소' 라고 흘림체로 휘갈겨 놓은 간판이 스산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원추리 연가 _ 6. 함정
딸랑- 문에 달린 작은 종이 가냘프게 울었다. 희뿌연 담배 연기가 가득 찬 실내에 제각기 퍼져있는 수십 개의 눈동자가 예고 없는 손님을 향해 모여들었다. 텁텁한 매연에 루가는 코를 쥐어 잡고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중앙으로 난 복도를 두고 네 개의 소파와 두 개의 탁자, 그리고 각종 서류가 꽂혀 있는 대여섯 개의 서랍장이 너른 공간 안에 옹기종기 들어차 있었다. 그 너머로 아이힌이 설명했던 긴 테이블이 보였다. 주점을 고쳐서 만든 사무실이라 그런지 술집 분위기에 고스란히 젖어 있었다.
"여기는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가 놀러 오는 곳이 아닐 텐데."
지저분한 수염을 달고 있는 남자가 탁자 위로 담뱃불을 지져 끄며 루가를 친절하게 맞이한다.
"말을 구하러 왔어."
루가는 아이힌이 일러준 대로 가게 안쪽의 바 테이블로 다가가 테이블 너머에서 유리잔을 닦고 있는 남자에게 돈 꾸러미를 내밀었다. 그는 움직이는 손을 멈추지 않고, 바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날렵해 보이는 사내에게 눈짓을 보냈다.
작은 덩치의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루가의 손에 들린 돈 꾸러미를 낚아채어 코를 후비던 손가락으로 그 안을 뒤적거린다. 루가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밀며 중얼거렸다. 으악, 더러워.
"뭐야? 아크잖아."
"그래도 이건 세로님의 전 재산이라고! 좋은 말 없을까?"
"좋은 말이라고? 크흐흐흐. 하루 이자도 안 되는 휴지 쪼가리를 들고 와서 좋은 걸 찾겠다? 적어도 담보 정도는 빵빵하게 챙겨 와야 건강한 몸으로 여기서 나갈 수 있을 텐데 말이지."
덩치 작은 사내가 다리를 뻗어 루가의 무릎 뒤를 걷어찼다. 악! 외마디 비명을 짧게 남기고 루가의 모습이 테이블 밑으로 쑥 꺼져 들었다. 사내의 손이 꾸러미를 털어내자 도하야크 초대 왕비의 초상화가 그려진 1만 아크 짜리 지폐가 팔랑팔랑 떨어진다.
"이게 무슨 짓이야!"
루가는 허둥지둥 팔을 뻗어 주변에 너부러진 지폐를 쓸어 모았다.
"그딴 쓰레기 화폐는 여기에서는 휴짓조각에 불과하지. 뭐 이 정도의 술값은 되겠군."
사내는 루가가 모아 놓은 지폐 위로 술병을 기울이며 낄낄거렸다.
'이 마을에서는 절대 어둠을 부리지 마. 이 마을에서만 아니라 절대 사람을 해쳐서도 안 돼.'
마치 주문처럼 세로의 목소리가 귓가에 일렁였다. 루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내는 볼이 쑥 들어갈 정도로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고는 검지로 꽁초를 튕겨냈다. 불씨가 살아있는 담배꽁초는 그대로 지폐 위로 추락한다. 값비싼 땔감은 머금은 술의 기운으로 이내 화르륵 타올랐다.
당황한 루가가 맨손으로 내리쳐 불꽃을 제압해보려 애썼지만 어림도 없었다. 가게 안은 사내들의 비웃음 소리로 가득 찼다.
"어이. 가게 안에다 불을 내면 어쩌자는 건가."
바 테이블 안쪽에 있던 남자가 빗물을 받아놓은 양동이를 들고 와 루가의 머리 위로 들이부었다.
"애송아. 이제 그만 꺼져. 제법 웃겼으니 그냥 내보내주마."
머리카락 끝에 맺힌 차가운 물방울이 초점 잃은 눈동자와 멍하게 열린 입을 지나쳐 바닥 위로 떨어져 내렸다. 후끈거리는 뜨거운 손바닥과는 반대로 몸은 싸늘하게 식어간다. 루가의 이성을 붙잡아 놓던 세로의 목소리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창문을 요란스럽게 두드리며 다가온 비바람이 거세게 문을 열어젖혔다. 바람에 흔들려 긴박하게 울려대는 종소리가 정적의 끝을 알렸다. 하지만 그 의미를 아는 이는 이곳에 단 한 명도 없었다.
루가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느린 움직임에 물의 발자국이 뒤따랐다. 가게 안의 남자들은 비아냥이 섞인 웃음소리를 흘리며 루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신명 나게 춤을 추던 조명등 위로 서서히 먹물이 끼얹어진다. 그 검은 먹물은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려 와 바닥 가득히 고여 들었다. 발목까지 차오른 그것의 존재를 눈치채기도 전에, 남자들의 몸뚱이는 바닥으로 끌려 내려왔다.
"이게 뭐야! 저 애송이 놈이 뭘 하는거야!"
어느덧 입구에 도달한 루가는 열린 문의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문은 공간을 찢으며 그들의 세상을 어둠 속에 가둔다.
딸랑- 문이 닫히며 울리는 작은 소리 사이로 단말마의 비명이 섞여 퍼졌다. 그 종소리가 멎어 들었을 때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빗소리만이 적막을 때리는, 마치 열린 적이 없었다는 듯이.
끝이 보이지 않은 빗줄기가 기력을 잃지 않고 여전히 맹렬한 기세로 바닥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선술집의 붉은 발을 걷어 올리며 모습을 드러낸 아이힌은 나무 우산을 펼쳐 들었다.
그녀는 큰길을 건너 종종걸음으로 거리를 벗어났다. 그 걸음이 향하는 곳은 상점가의 반대편, 인가가 드문 동네였다. 아이힌의 뒷모습이 멀어지자 소녀의 말간 얼굴이 선술집 맞은편의 담 위로 빠끔히 내밀어 진다.
'너희 그룸으로 간다며?'
어제 아이힌과 만났을 때 그녀를 경계했던 세로가, 서신국의 추격에 대비해 잔뜩 날을 세운 그가 그들의 행선지를 쉽게 말해버렸을 리 없을 것이다.
온종일 실내에 있었다고 보기엔 과하게 젖은 그녀의 붉은 숄 끝을 보며 소녀는 아이힌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그래서 선술집에서 나온 후 가까운 담 뒤에 숨어 그녀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참이었다. 소녀는 길가의 과일가게에 들어가 주인아주머니에게 아이힌이 향했던 길에 관해 물었다.
"그쪽엔 유킨스 사채업 사무실이 있단다. 그 인간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사나운지 그 근처에는 상점 하나 들어서질 않는구나. 절대로 가까이 가면 안 되는 곳이란다."
소녀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루가와 세로. 행방이 애매한 두 사람 중 누구를 먼저 쫓아야 할 것인가. 그 고민이 끝을 맺기도 전에 저쪽 길 끄트머리에서 한적한 비의 바다 속을 허우적거리며 한 소년이 달려온다.
"세로님."
모루는 팔을 뻗어 흔들며 그를 불렀다. 시야를 가리는 굵은 빗줄기 속에서 겨우 소녀의 모습을 인식한 세로는 축 늘어져 눈앞을 덮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처마 안쪽으로 들어섰다. 물귀신 같은 그의 모습에 인심 좋은 과일가게 아주머니가 걱정스레 마른 수건을 가져다준다.
"분명 방을 올려다보는 살기를 느꼈다고 했지? 이상하군. 이제는 한 명도 보이질 않아."
"혹시 아이힌에게 우리가 그룸으로 간다는 걸 말했었는가."
"아니."
"아무래도 아이힌은 루가와 만난 것 같다네."
'정보의 대가는 잊지 않겠지? 내 방식대로 받을게. 세온의 빚까지 이자를 얹어서.'
마른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내던 세로의 팔이 멈추었다. 아이힌의 축축했던 음성이 불현듯 떠오른다. 닦아내고 닦아내도 쉼 없이 옷 안으로 스며드는 물기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함이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소녀는 계속 말을 이어나간다.
"우리들의 위치를 알고 미끼를 보내 나를 꿰어낸 것도 그녀라고 생각해 두는 편이 진실에 가까울 것 같네."
그 형태가 희미했던 조그마한 불안감은 어느새 눈 더미처럼 커다랗게 불어나 세로의 앞에 제 모습을 또렷이 드러냈다.
"아이힌은 불을 다루는 이젠이다. 불꽃은 어둠을 태우고 빛을 밝히지. 루가와는 상성이 나빠. 게다가 아이힌은…. 한토에게 원한이 있어. 그 둘. 정말 위험해."
두 사람은 맹렬하게 쏟아붓는 폭우 속으로 다급히 뛰어들었다. 온종일 성을 내놓고도 부족한지 여전히 강렬하게 몰아치는 사나운 빗줄기는 쉬이 멈출 것 같지가 않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