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추리 연가 _ 3. 여행의 시작(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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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룸."
그룸 지구. 동부 아르니카의 끝에 위치하여 동신국에 인접하며, 아르니카를 이루고 있는 15개의 지구 중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유명했다.
"하필 그룸에?"
"그들은 암살의 전문이라네. 소문 하나 남기지 않기로 유명한 은빛 눈동자가 왜 모습을 드러났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유인해 내는 거라네."
"누구를?"
소녀는 고개를 들어 찡그리며 웃어 보였다. 응? 누구? 누구?를 연발하던 루가는 도움을 바라는 눈빛으로 세로를 올려다본다.
"루인의 기억인가."
소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추리 연가 _ 3. 여행의 시작(3)
"어째서 그 위치가 그룸 지구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거지?"
"내가…. 거기서 태어났기 때문이라네."
'어떻게? 무엇 때문에?'
소녀에 대한 이런저런 궁금증을 꾹꾹 눌러 담고 세로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누구나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는 법이거늘 그걸 억지로 짜내는 건 얕은 유대로 묶인 그들 사이에는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서신국의 탈출이라는 큰 도움을 받은 이상 약속을 지키기 위해, 또 자신의 자유를 위해 소녀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기로 굳게 결심했다. 소녀는 아르니카의 끝에 매달려있는 조그마한 지역을 눈으로 훑어 내린다.
아르니카의 남서쪽의 서신국, 북동쪽의 동신국. 이웃나라 대 항류국과 국경이 맞닿은 북쪽은 이레드 제 1가문의 사유지다. 이 세 개의 독립 지역을 제외한 15개의 지구는 아르니카의 중앙을 가르는 판츠 강을 중심으로 서쪽이 서부 아르니카 연합, 동쪽이 동아르 연방국으로 나뉘어 세력을 잡기 위해 으르렁거리고 있다.
서부에서 동부로 넘어가는 가장 빠른 길은 아르니카 영토의 정 중앙이자 판츠 강의 상류에 있는 히아케르츠 지구의 지상로 뿐이었다. 세로의 시선 또한 소녀와 같은 곳에서 멈추었다.
"히아케르츠 지구는 서부와 동부의 전쟁의 피해 지역이다. 그 지역 사람들은 이제 외부인에겐 절대 길을 열어주지 않아. 마차를 빌려 타고 상디어 상업지구까지 가서 배로 판츠 강을 건널 수밖에 없겠어. 지금 남은 돈은 60만 아크. 여비로는 턱도 없이 부족해. 이렇게 환율이 크게 차이가 나서야 낡은 짐마차 하나도 구할 수 없어. 게다가 다른 지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행권이 필요해."
"난 행권 없이도 몰래 산을 넘어 잘 다녔어."
천장을 바라보고 누운 루가가 꼼지락거리며 몸을 뒤집고 지도 가까이 기어왔다. 그의 말투에는 자랑스러움이 듬뿍 묻어났다.
"시간이 걸리지만, 지상이라면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행권 없이 배를 타는 건 힘들어. 둘 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행권을 발급받는 건 무리겠지. 루가는 범죄자이고, 그리고…."
세로는 말을 잠시 멈추고 소녀를 바라봤다.
"이름도 본적도 없는 너에겐 발급 제한이 너무 커."
엎드려 있던 루가가 눈가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점점 시야를 흐리게 만들던 피로를 털어내고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너 말이야. 망령 씨라는 이름으로 평생 살건 아니지?"
"그리고 루인의 망령이라는 말은 어디 가서 쉽게 내뱉지 않는 게 좋겠군."
두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소녀는 두 눈만 껌뻑였다.
"난 어차피 기억이 담긴 그릇에 불과하다네. 어떻게 불리든 상관은 없지만 불편하다면 편한 데로 부르게."
"넌 그릇이 아니라 인간이야. 너를 위해 너를 아는 모든 사람을 위해, 그런 생각은 버려둬."
세로의 말을 곰곰이 곱씹던 소녀는 한참 동안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난비. 라는 이름을 맡아두고 있다네."
"난비…. 라면 브빙가의 이름이잖아? 위험한 이름인데."
단명하는 미인의 대명사인 브빙가. 현대에 와서 그 의미가 변질 되었지만, 과거에는 인간의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고 현재에는 유흥가의 유녀(遊女)를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과거나 현재나 오명의 구정물을 뒤집어쓴 불운한 이름이었다.
"그건 안 돼. 절대 안 돼!"
소녀의 말을 듣고 있던 루가가 갑자기 사정없이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루가. 자네는 브빙가를 아는가."
"그냥…. 좀…. 아는 사람…."
브빙가의 이름이 나오자 그답지 않게 울적한 기색을 띄운 루가는 자신의 말이 끝나자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마도 그는 자신을 숨기고 살 수밖에 없었던 브빙가의 인생을 가까이에서 지켜봤으리라.
소녀 역시 그랬다. 그렇기에 자신의 유일한 친구가 새 출발을 하려고 할 때, 정체성의 길을 잃지 않게 그 이름을 맡아 두었다. 소녀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방 안이 고요 속에 잠기자 세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 쌓여있던 이불을 양팔로 안아 들었다.
"이름은 잘 생각해봐. 그 의미도 말이야."
세로가 이불을 펼쳐 깔자,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루가가 뒹구르르 굴러 와서 몸을 늘어뜨린다. 두 눈을 감은지 얼마나 됐다고 금세 색색거리며 얌전해진 루가의 턱밑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고 세로는 한숨어린 말을 내쉬었다.
"행권문제는…. 어쩔 수 없이 그 여자의 도움을 받아야겠어."
"아이힌이라고 했나. 그 이름이야말로 정말 위험한 이름인 것 같군."
아르니카 왕족의 마지막 핏줄. 제아히힌 공주의 이름으로 자신을 지칭한다는 건. 왕족에 대한 신앙심이 깊은 아르니카에서는 상당히 악질적인 범죄에 속했다.
"하지만 정말 마녀 아이힌이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여자지."
매캐한 담배 냄새가 자욱한 홀은 온전히 남자들의 세상이었다. 저마다 소파와 테이블에 널브러져 머리 위로 뻐끔뻐끔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카드를 퉁기며 판돈을 올리는 거친 목소리만이 간간이 적막을 헤칠 뿐이다.
그 규칙적인 소음 사이로 삐거덕거리는 나무문의 긴 비명이 파고 들었다가 이내 사라진다. 굽이 높은 젖은 구두 옆에 살포시 내려앉은 우산 꼭지에서 물방울이 똑똑 흘러내렸다. 작은 물웅덩이를 뱉어내는 우산을 뒤로한 채, 구두는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점점 멀어진다.
"아이힌 왔는가?"
아이힌은 그녀를 반기는 목소리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가게 중앙의 게시판을 향해 걸어가 허리를 굽혔다. 입가를 감싼 기다란 손가락은 습관처럼 입술 주변을 두드렸다. 그녀는 곧 아랫부분에 붙은 쪽지 하나를 떼어냈다.
[명일 마구간 청소원 모집. 청소용품 지참 바라며, 식사 드립니다.
-만물상 엔-]
쪽지를 문지르던 아이힌의 손가락이 붉게 달아오르자, 종이는 이내 화르르 불타 사라진다. 아이힌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한참 카드 판이 벌어진 테이블에서 다시 한 번 그녀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도대체 돈은 왜 그리 빌리고 다니는 거야? 유킨스 사채업 패거리들이 지금 널 잡겠다고 난리던데."
"뭐. 그것도 이제 끝났어."
인사를 건넨 테이블을 향해 돌아서던 찰나, <현상금 정보 게시판>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의 글귀에 눈길이 머물렀다.
[행방을 찾습니다.
남자 16~23세가량. 금발 머리에 금색 눈동자.
남자 16~19세가량. 다갈색 머리에 초록색 눈동자. 마른 체구.
여자 12~16세가량. 연한 갈색 머리와 동일색 눈동자.
함께 다니는 세 사람을 보신 분은 연락 주십시오. 사례하겠습니다.
-실종 소년소녀 보호위원회-]
쪽지를 떼어내어 코앞까지 바짝 갖다댄 아이힌은 의아한 듯 눈썹을 찡긋거렸다. 전의 쪽지와 마찬가지로 인위적인 냄새가 폴폴 풍겨왔다. 그녀의 직감은 위험한 방향에서는 틀리는 법이 없었다.
"이거 언제 붙은 거야?"
"글쎄.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요즘 벼래 별것이 다 올라와. 여기가 만능 심부름센터라도 된 줄 아는가 보지."
남자가 카드를 던지듯 퉁기며 대꾸했다. 기억을 되짚어 무언가를 떠올리던 아이힌은 쪽지를 접어 주머니 안쪽에 밀어 넣었다.
"나도 한판."
"왜 이래. 빚쟁이 아니었어?"
"내일부터는 아니야. 그러니 오늘까지만 빚으로 놀아볼까."
아이힌은 배시시 웃었다. 비어있는 의자에 앉으며 테이블 구석에 놓인 얼음이 반쯤 들어있는 빈 컵을 들어 흔들자, 누군가가 술병을 내밀어 주황빛 액체를 가득 부어준다. 노란 불빛의 조명과 그녀의 뜨거운 열기에 의해 얼음은 순식간에 형체를 잃고 사그라졌다.
"뭐 좋은일 있어?"
"우훗. 곧 큰 수입이 생길 것 같거든."
그녀의 곱디고운 붉은 입술이 예쁘게 호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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