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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히체님의 서재입니다.

오늪의 이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아히체
그림/삽화
@jo_9o
작품등록일 :
2015.10.03 15:53
최근연재일 :
2016.02.20 09:13
연재수 :
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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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61
추천수 :
59
글자수 :
288,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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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09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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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원추리 연가 _ 19. 붉은 바위 너머 비밀

DUMMY

말의 둔한 움직임에, 세로와 모루는 마차에서 내려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기동성은 피로에 묶이고 공격성은 독에 취해 누웠다. 문득 이 최악의 상황에 털끝 하나 보이지 않은 도적단의 행보가 괴이하게 느껴진다.


"이상한데. 지금까지 한 번도 황야의 망나니들이 나타나지 않았어."


"이것 때문인가?"


모루는 마차 앞을 에워싼 반짝이는 빛 몽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치 반투명한 무언가에 보호받는 것처럼 빛 몽우리는 그들의 걸음과 함께 했다. 그 모습에 무언가가 떠오른 세로는 마차 뒷칸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키치르라고 했나? 너. 이젠 이야?"


"네? 혹시 이젠 싫으…세요?"


키치르는 몸을 움츠리며 공포에 질린 눈동자로 조심스럽게 세로를 내려다보았다. 차별과 학대의 후유증을 고스란히 머금은 어린 소년의 가긍한 반응에 세로는 하려던 말을 놓쳐 버린다.


"아니야 아니야. 세로님은 이젠 차별주의자가 아니야. 나도 이젠 인걸."


말문이 막힌 세로를 대신해 루가가 그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소년의 떨림은 쉽게 멎어지지 않는다. 세로는 마른 침을 삼키고 말을 다듬었다.


"긴장하지 마.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도적단의 습격이 없던 게 혹시 네 능력이야?"


"아…."


가득 차오른 눈물을 닦아내며 키치르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빛의 굴절. 이거 최고의 가림막이군."


세로의 옆에 선 모루가 중얼거린다.


"덕분에 어젯밤과 오늘 오전은 편하게 보냈어. 나이도 어린데 계약의 힘 없이 이렇게 광범위하게 사용하다니 굉장한 재능이네."


생각지 못한 세로의 칭찬에 키치르의 물기 어린 뺨 위로 쑥스러움의 빛이 차올랐다. 슬픔의 눈물도 고통의 공포도 칭찬의 기쁨도, 가릴 것 없이 온몸으로 표현하는 소년은 순수하고 솔직했다. 지금껏 키치르에게 불안의 눈길을 떼지 못했던 모루는 그제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저 아이들의 말을 믿는가?"


"별다른 방법이 없어. 루가를 저대로 놔둘 수는 없잖아. 그리고…."


저 아이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싶지 않아. 들릴락 말락 한 감정 어린 세로의 뒷말은 실바람에 실려 옅게 흩어졌다. 눈꺼풀 안쪽에 깊게 새겨져 눈을 감을 때마다 생생하게 그려지는 먼 옛날의 한 장면이 세로의 머리 한구석을 어지럽힌다.


'오늘도 와줘서 고마워. 나 금방 나을 수 있을 것 같아. 몸이 좋아지면 숲에 꼭 데려다주는 거야. 잊지 마.'


느닷없이 불쑥 튀어나온 불편한 추억을 끊어내려 세로는 고개를 거칠게 내저었다. 어느덧 메마른 바위산이 그들의 머리 위로 다가선다. 멀리서 스치듯 바라본 바위산은 잿빛 언덕처럼 보였지만, 눈앞에서 웅장하게 하늘로 솟구쳐 오른 바위 더미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붉은 생기가 맴돌았다.


"아. 조금만 더 옆으로 가야 해요."


"옆?"


아무리 둘러보아도 입구나 동굴 비슷한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소년의 능력으로 감춘 것이리라. 키치르는 성한 한쪽 팔을 뻗어 가로로 길게 그었다. 울퉁불퉁한 바위 사이로 드러난 가파른 협곡의 틈새가 입을 벌렸다.


그 틈새 속으로 마차가 온전히 모습을 감추자, 다시 모여드는 빛 몽우리로 인해 입구가 희미하게 일렁이며 사라진다. 마차는 아슬하게 지나갈 정도로 좁은 협곡 사이를 느리게 나아갔다.


아이들을 향한 안타까움에 어느 정도 마음이 누그러진 세로와는 달리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모루는 창을 굳게 움켜쥐었다. 곧 협곡의 길 끝에서 새어 나오는 강렬한 햇살이 그들을 덮쳤다.



원추리 연가 _ 19. 붉은 바위 너머 비밀



서서히 빛의 장막이 걷히고 평평한 평지 위로 바위산이 품은 작은 협촌이 드러났다. 마을이라 해도 나지막한 높이의 집 다섯 채가 전부였다. 사방을 둘러싼 산의 그늘을 피해 생활의 흔적은 중앙에 모여 있었다.


우물을 중심으로 띄엄띄엄 자리 잡은 밭은 작물이라도 가꾸는 듯 구역을 나누어 잘 정돈 되어있었지만 대지 위로 솟아 오른 푸른 생명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밖에서는 산 안에 이런 곳이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


세로는 순수한 감탄을 내뱉었다. 바위산 속 생활이 가능케 한 가장 큰 요소인 우물로 다가가 밑을 내려다보았다. 물을 찾아 깊게 파고든 모양인지 그 속이 쉽사리 보이질 않는다.


"이 밑에 지하수가 흐르는 건가?"


"우물 덕분에 물이 모자랄 일이 없었어요."


세로는 두레박을 내려 물을 한 통 끌어올렸다. 제일 먼저 지친 말의 물통에 물부터 부어 넣었다. 지붕의 그늘이 닿는 공터에 말을 매어두고 건초를 채워 준 후, 키치르가 안내하는 가장 안쪽 건물로 들어섰다.


진귀한 광경을 빠짐없이 두 눈에 새기던 모루는 건물 지붕 아래에 새겨진 빛바랜 문양을 발견했다. 건물의 얼굴에 해당하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는 건 이름있는 큰 가문의 문장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 갈라진 벽체로 인해 반으로 쪼개져 버렸다. 마치 아이들만 남은 폐허의 마을을 상징하는 듯.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집의 외관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붕의 반은 뜯겨 나가 있고 거센 공격이라도 맞은 양 한쪽 벽체는 부서져 집의 형태만 간신히 이루고 있었다.


남겨진 두 아이의 고되고 외로운 삶을 대변하는 양 유리가 깨진 창문은 을씨년스럽게 끼릭거린다. 빛바랜 커튼이 겨우 외부와의 단절을 맡고 있지만, 그것조차 성하지 않고 온통 찢겨 스산함을 풍긴다.


"그나마 이 건물이 제일 나아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키치르는 쑥스럽게 말을 덧대었다. 소년은 곧 부엌에서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의자 두 개를 찾아 꺼내어 왔다. 하지만 제대로 디디고 서 있지 못하는 가구를 밀어내고 결국 맨바닥에 손님을 앉히고 만다.


"나름대로 살아보려 애썼지만,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어요."


"이 정도도 충분히 대단해. 의지할 데도 없었을 텐데 혼자서 잘해냈어."


세로의 한마디 위로에 모든 고생을 인정받은 기분이라도 들었던 걸까. 키치르의 또다시 눈가가 빨갛게 물들었다. 충분히 어리광부리며 뛰어놀 나이에 아픈 동생들을 돌보고,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을 눈앞의 작은 아이가 저보다 더 커다랗게 느껴진다.


감격한 루가는 다리를 뻗어 키치르의 목을 감아 끌어안았다. 그 나름의 다독임이었지만 보는 이들에게는 마치 격투기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뭐하는 짓이야!"


잠에서 설 풋 깨어난 작은 아이는 제 눈을 의심했다. 밝아지는 시야에 담긴 첫 장면이 바로 그러했으니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다. 아이는 루가를 향해 삿대질을 퍼부었다.


"키치르에게서 안 떨어져? 이번에야말로 진짜 죽일 거야!"


"진정해 쿠키. 나 괜찮아."


루가의 품속에서 키치르가 난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짓을 날렸다. 그를 따라 루가도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대꾸한다.


"이게 다 쿠키, 네 독 때문인 거잖아."


"그렇게 부르지 마!"


"쿠키 맞잖아."


"그런 간지러운 이름으로 부르지 마! 난 어린애가 아니야. 쿠자인이라고 불러!"


"그래그래. 알았어. 쿠자인."


젖살이 포동포동한 볼에 솜털까지 뽀송뽀송 뒤덮은 눈앞의 이 귀여운 꼬마는 일부러 험한 말투를 골라 쓰고 매시간 인상을 구겨도 마냥 귀엽기만 했다.


하지만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루가의 반응에 더 열이 뻗친 쿠자인은 길길이 날뛰었다. 어른이고 어린아이라 할 것 없이 왁왁거리며 시끄러운 두 사람에게서 등을 돌린 세로는 예상치 못한 샛길의 목적을 잊지 않고 되뇌었다.


"그래서 약은 어디에 있지?"


"여기서 만들 수 있어요. 간단해요."


키치르는 선반 제일 위에 놓인 삼각 플라스크 병을 꺼내왔다. 연분홍빛 액체가 담긴 그 병의 입구에는 중화제라고 적인 명찰이 붙어 있었다. 어서 달라는 듯 루가가 입술을 쭉 내밀고 삐죽거렸다. 하지만 병은 루가에게가 아니라 쿠자인에게로 향한다.


"일단 이 중화제를 루가 형이 아니라 쿠자인이 먹고."


제 앞에 주어진 병을 불만스럽게 흘겨보던 쿠자인은 키치르의 부탁에 못 이겨 중화제를 한입에 몽땅 비워냈다.


"그리고…."


그 후 가슴을 부풀리던 쿠자인은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눈동자는 이전에 루가를 공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보랏빛으로 서서히 뒤덮인다. 눈동자의 색이 온전히 물들자, 턱밑에 가져다 댄 빈 병 안으로 입속 가득 머금고 있던 액체를 토해냈다.


"이것이 바로 쿠키의 몸속에서 다시 만들어진 해독제에요."


키치르는 해맑은 얼굴로 병을 들고 흔들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얼굴은 퍼렇게 시들어가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음…. 약을 제조하는 방법이 좀…."


세로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모루는 루가의 어깨를 토닥이며 조용히 방을 빠져나간다. 쿠자인의 행동에 덩달아 토기가 올라온 루가가 울상인 얼굴로 병을 밀어냈다.


"됐어! 차라리 영원히 발로 밥 떠먹으며 살 거야!"


"그래. 평생 그렇게 살아라!"


입가에 묻은 보라색 타액을 소매로 훔쳐내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높히며 쿠자인이 대꾸했다. 키치르의 부탁으로 제 속을 헤집어 약까지 만들어 줬건만 성의 없는 반응에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다시 독을 뱉어낸 충격으로 휘청거리는 작은 몸을 키치르가 단단히 붙잡았다. 쿠자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키치르는 루가의 걱정을 하나 덜어주었다.


"영원히 가진 않고 일주일 정도 지나면 슬슬 원래대로 돌아올 거에요."


"그런 건 일찍 말하라고."


"흥. 그때 내 손톱이 더 깊이 들어갔으면 지금쯤 빌면서 저 약을 먹게 되었을걸!"


긴장이 풀렸는지 허기가 올라 루가의 뱃고동을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이지만 아직 첫 끼니도 채우지 못했다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 떠오른다.


"배고프다. 아직 아침도 못 먹었어."


"아까 길에서 먹은 감자는 뭐냐."


세로의 대답을 한 귀로 흘려낸 루가는 반짝이는 눈으로 키치르를 응시했다.


"뭐 먹을 거 없어? 이왕이면 따뜻한 걸로."


루가가 거부한 약병을 선반의 제일 윗칸에 되돌려두며 키치르는 조그맣게 대답한다.


"먹을 게 있었으면 애초부터 형네 마차를 습격하지 않았어요."


그 말에 문득 보답 거리가 생각난 세로가 창밖에 보이는 그들의 마차를 가리키며 키치르를 불렀다.


"키치르. 우리 마차에 감자와 당근이 있어. 동생이 먹고 싶어 했다고 하지 않았나? 필요한 만큼 가져다 써도 돼."


"주시는 거에요? 정말 감사해요! 젤도 기뻐할 거에요."


소년은 펄쩍펄쩍 뛰며 밖으로 달려나갔다. 키치르를 도와 쿠자인의 자그마한 팔 안에도 감자가 한가득 안겨졌다.


"요리 도와줄게."


"아니에요. 이건 제 감사의 표시이니 잠시만 기다려줘요."


소년은 꽤 익숙한 몸놀림으로 부산스레 부엌을 오간다. 곧 따끈한 김을 모락모락 피워낸 전골냄비가 바닥에 놓였다.


"어때요? 오랜만에 제 최고의 실력을 끌어냈는데."


유일하게 루가와 쿠자인 만이 성실하게 수저를 옮겨 입안으로 부어 넣고 있었다.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맛이었다. 감자가 들어갔던가. 그런데 왜 감자의 맛이 나지 않는 것인지. 이 미묘한 흐름 속에 지나치게 솔직한 루가가 결국 폭탄을 뱉어놓는다.


"맛…. 없어."


"아. 역시. 젤을 위한 깜짝 선물이었는데. 실력이란 너무 잔혹해요."


이미 예상했던 대답인 듯 키치르는 겸연쩍게 웃었다.


"동생은 괜찮아?"


제 말과 다르게 엎드린 채로 수프 그릇에 코를 박고 마시고 있던 루가가 발가락을 까딱이며 물었다. 그가 가리킨 곳은 비어있는 자리 위에 놓인 그릇이었다. 키치르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쟁반에 수프를 받쳐 들고 방 밖을 나섰다. 불편한 키치르의 팔을 대신해 세로가 받아 들었다. 소년의 파란 눈동자가 세로를 올려다보았다.


"네 동생에게 인사해도 될까?"


"물론이죠."


키치르의 걸음은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향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실내의 채광으로 여기기엔 과한 햇볕이 쏟아졌다. 곧 세로의 의문은 곧 말끔히 해소되었다. 2층의 천장은 반 이상 날아가고 없었던 것이다.


"잘도 이런 곳에서…."


"이쪽이 저희 동생. 젤리에요."


키치르의 말에 세로는 훤한 대낮의 따스함을 한몸에 받으며 덩그러니 놓인 침대를 바라보았다. 침대에 누운 가냘픈 소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먹먹한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새하얀 백지장 처럼 핏기가 가신 아이의 얼굴은 마치 인형처럼 생명의 기운이 조금도 깃들여 있지 않았다. 키치르는 침대의 모서리에 걸터앉아 아이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늦어서 미안해. 젤. 네가 좋아하던 감자 수프야. 최선을 다해 만들었지만, 여전히 맛이 없어. 그래도 넌 마지막으로 이게…. 먹고 싶었다니…."


키치르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토해냈다. 주위의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소녀의 손등은 점박 무늬처럼 회색 점이 번져있었다. 키치르는 그 손을 어루만지며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었다.


"여기 아이들은 모두 같은 증상으로 앓다 죽었어요. 남은 건 쿠키와 저뿐이에요."


소년의 목소리에는 상실의 깊은 아픔이 묻어있었다. 하나의 병 앞에서 줄줄이 무너지는 생명에 어린 자신은 너무나 무력했다. 치료는커녕 지금은 젤리에게 깊은 휴식을 주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


"제 팔이 이래서 젤을 묻어 줄 수가 없었어요."


"…내가 도와줄게."


세로는 들썩이는 키치르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다.


"고마워요. 세로 형."






어느새 몸을 숙인 해는 붉은빛을 토해낸다. 건물 옆 공터에는 봉긋하게 쌓아올린 낮은 흙더미가 줄을 맞춰 나란히 서 있었다. 햇볕이 따스한 손길로 어루만지는 트인 길목이었다. 비석의 역할을 가진 평평한 돌을 위에는 저마다 사과, 해님, 파랑새, 기차, 구슬 등등의 글씨가 삐뚤빼뚤 못난 필체로 적혀 있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이름이군."


모루는 종이로 접은 꽃 한 송이를 내려놓았다. 젤리와 쿠키도 그러하듯 이름 없는 아이들에게 저들이 좋아하는 명칭을 붙여 부르던 연유였다. 싸매어진 이불 속에서 깊은 단잠에 들어 있는 여자아이를 구렁 속에 내려놓은 세로가 삽을 들었다. 키치르의 흐느낌은 점점 짙어져 간다.


새로 생겨난 작은 무덤에는 '젤리'라고 적힌 돌 비석이 놓였다. 세로는 고개를 들어 석양에 적셔진 공터를 휘둘러 보았다. 아이들의 묘지와 동떨어진 바위산 아래에는 태양 아래의 작은 묘지와는 달리 응달의 어둠이 서린 네 개의 무덤이 솟아있다.


"저기도 아이들의 묘인가?"


"아니요. 이곳에 있던 어른들의 무덤이에요."


"어쩌다 이런 장소에 아이들만 남게 되었지?"


키치르는 눈물을 훌쩍이며 바위산 바깥으로 나가는 문 쪽을 돌아보았다.


"저 역시 잘은 모르지만 어느 날 갑자기 하얀 옷을 입고 나타난 초록색 목걸이의 어른들은 외부 손님이었다고 들었어요. "


"초록색 목걸이?"


다 큰 어른이 하나 같이 같은 색의 목걸이를 맞춰 지니고 있다면 세로가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이젠을 구속하는 계약의 리블리엘. 이 묘한 사건의 중심에는 그들이 있었다.


'초록색이라니. 서신국인가.'


"그때의 저는 더 어렸으니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다만 마을 어른들이 모두 떠나버렸다는 것과 우리가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외부의 사람들을 빼고는 어린 애들만 이곳에 남게 된 거에요."


어째서 외부의 이젠들이 원래 땅의 주인들을 쫓아내고 아이들만으로 채웠던 걸까. 그들의 행보는 정상과 거리가 멀었다. 거기에다 바위산 속 작은 협촌의 구성원치곤 작은 무덤의 수가 터무니없이 많은 게 묘했다. 생존을 위한 척박한 땅에서 필요로 하기에는 아이들은 너무나 연약한 존재였다.


"원래 이곳 아이들은 아니었을 거에요. 선생님들이 밖에서 한 명 씩 데리고 오곤 했어요."


세로의 의문에 키치르는 더욱더 큰 의문을 끼얹는다.


"산 밖을 나간 선생님들이 돌아오지 못하면서 우리의 생활은 건물 지하의 방으로 옮겨졌어요.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밖으로 나오고 보니 마을이 이렇게 부서져 버렸어요."


"남은 선생님이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지?"


"그 선생님들은…."


키치르는 불안한 기색을 띄우며 말끝을 흐렸다. 축 늘어진 소년의 손을 감싸 쥔 건 쿠자인이었다. 쿠자인의 눈은 분노를 숨기지 못하고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눈길은 큰 무덤을 향해 쏘아진다. 힘이 들어가 점점 파고드는 그 손조차 행여나 차갑게 시들어져 갈까 봐 키치르는 따스하게 고쳐잡았다.


"죽였어요. 아이들 빼고 전부다."


쿠자인의 소매 너머 살갗에 돋아오른 회색 반점이 처연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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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늪의 이젠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국가 및 용어, 캐릭터 설정집 (업데이트 15.12.20) +2 15.10.08 542 0 -
48 원추리 연가 _ 27. 번뇌 16.02.20 403 2 17쪽
47 공지 16.02.06 256 2 4쪽
46 원추리 연가 _ 26. 악몽의 편린 16.02.03 327 0 15쪽
45 원추리 연가 _ 25. 별을 헤매는 아이들 + 후기 16.01.30 418 1 16쪽
44 원추리 연가 _ 24. 환상 서곡 16.01.27 280 0 18쪽
43 원추리 연가 _ 23. 살인귀의 본능 16.01.23 448 0 18쪽
42 원추리 연가 _ 22. 빛과 어둠의 춤 16.01.20 278 0 18쪽
41 원추리 연가 _ 21. 새하얀 심연 16.01.16 302 0 16쪽
40 원추리 연가 _ 20. 별을 헤는 아이들 16.01.13 348 0 17쪽
» 원추리 연가 _ 19. 붉은 바위 너머 비밀 16.01.09 502 0 17쪽
38 원추리 연가 _ 18. 작은 도둑 16.01.06 255 0 14쪽
37 원추리 연가 _ 17. 황야의 꿈 16.01.02 483 0 14쪽
36 원추리 연가 _ 16. 제박 15.12.30 417 1 21쪽
35 원추리 연가 _ 15. 기적을 위한 한 걸음 15.12.26 333 1 16쪽
34 원추리 연가 _ 14. 사랑은? 전쟁! 15.12.23 278 0 13쪽
33 원추리 연가 _ 13. 사랑은! 전쟁? 15.12.20 177 0 15쪽
32 원추리 연가 _ 12. 태양의 의무 15.12.19 440 0 13쪽
31 원추리 연가 _ 11. 화원의 자장가 15.12.16 267 1 11쪽
30 원추리 연가 _ 10. 결혼 축제(2) 15.12.13 281 0 11쪽
29 원추리 연가 _ 9. 결혼 축제(1) 15.12.12 262 0 11쪽
28 원추리 연가 _ 8. 결의 15.12.12 462 0 12쪽
27 원추리 연가 _ 7. 어둠의 구렁 15.12.09 285 0 10쪽
26 원추리 연가 _ 6. 함정 15.12.06 229 0 10쪽
25 원추리 연가 _ 5. 마녀 아이힌(2) 15.12.03 348 0 11쪽
24 원추리 연가 _ 4. 마녀 아이힌(1) 15.12.01 494 0 11쪽
23 원추리 연가 _ 3. 여행의 시작(3) +3 15.11.29 409 1 9쪽
22 원추리 연가 _ 2. 여행의 시작(2) +2 15.11.29 510 3 9쪽
21 원추리 연가 _ 1. 여행의 시작(1) 15.11.25 283 1 11쪽
20 미궁의 빛 _ 14. 미궁의 빛 15.11.22 366 1 14쪽
19 미궁의 빛 _ 13. 의외의 탈주로 15.11.20 431 1 15쪽
18 미궁의 빛 _ 12. 루인의 망령(3) 15.11.18 243 1 14쪽
17 미궁의 빛 _ 11. 루인의 망령(2) 15.11.17 317 1 11쪽
16 미궁의 빛 _ 10. 루인이 망령(1) 15.11.15 410 1 15쪽
15 미궁의 빛 _ 9. 공동묘지의 소녀 15.11.13 260 2 15쪽
14 미궁의 빛 _ 8. 악마 루아브(2) 15.11.11 298 1 14쪽
13 미궁의 빛 _ 7. 악마 루아브(1) 15.11.08 395 1 14쪽
12 미궁의 빛 _ 6. 가짜들의 싸움 15.11.06 332 2 9쪽
11 미궁의 빛 _ 5. 탈출의 전야제(2) 15.11.04 352 1 9쪽
10 미궁의 빛 _ 4. 탈출의 전야제(1) 15.11.01 402 0 12쪽
9 미궁의 빛 _ 3. 시연의 뜰 15.10.31 342 0 15쪽
8 미궁의 빛 _ 2. 새장 속 소년(2) 15.10.30 296 3 12쪽
7 미궁의 빛 _ 1. 새장 속 소년(1) 15.10.28 287 2 12쪽
6 하빌리스의 형제 _ 6. 하빌리스의 형제 15.10.25 407 1 16쪽
5 하빌리스의 형제 _ 5. 미친 예술가의 사학(2) 15.10.23 277 0 13쪽
4 하빌리스의 형제 _ 4. 미친 예술가의 사학(1) 15.10.21 367 0 14쪽
3 하빌리스의 형제 _ 3. 재회 15.10.18 220 0 13쪽
2 하빌리스의 형제 _ 2. 안내인 15.10.17 376 2 14쪽
1 하빌리스의 형제 _ 1. 북문 입국소 15.10.15 430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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