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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히체님의 서재입니다.

오늪의 이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아히체
그림/삽화
@jo_9o
작품등록일 :
2015.10.03 15:53
최근연재일 :
2016.02.20 09:13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17,254
추천수 :
59
글자수 :
288,708

작성
15.11.29 02:10
조회
509
추천
3
글자
9쪽

원추리 연가 _ 2. 여행의 시작(2)

DUMMY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상점가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가득 들어찬 은행 안은 들어서자마자 답답함이 훅 끼쳐왔다. 밖에서 기다리겠다는 루가를 소녀에게 맡겨두고 세로는 창구로 다가갔다.


"안 코스웰 제을의 계좌. 세온 하빌리스의 이름으로 맡겨진 금액을 전부 찾고 싶습니다."


"세온 하빌리스 본인입니까?"


"동생입니다."


세로는 장갑의 주머니에서 행권을 꺼내어 내밀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동그란 원판의 앞면에는 발급지역을 상징하는 문양이, 뒷면에는 이름과 인적사항이 적혀있는 이 행권이라는 물건은 왕국의 멸망 이후, 지구 단위로 재구성된 아르니카의 지역들을 넘나들 때 꼭 지녀야 하는 여행자의 신분증이었다. 세로가 서신국에 잡혀 들어갔을 때 장갑 속에 넣어 제일 먼저 숨겼던 물건이기도 했다.


몇 가지 수속을 거친 후 안내원은 돈을 꺼내왔다.


"100만 아크. 나왔습니다."


돈 꾸러미를 받아든 세로의 얼굴 위로 시커먼 구름이 내려앉는다. 불안은 현실로 다가왔다. 돈의 흐름에 민감 코스웰이 시세를 빤히 알면서 에폰이 아닌 아크로 보낸 건 무슨 심보일까.


늙은 점쟁이의 짓궂은 장난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머릿속을 긁어 봤자 속 시원한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었다. 눈 앞에 펼쳐진 어두컴컴한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세로는 물먹은 솜보다 더욱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짜냈다.


"에폰으로 환전이 가능한가요?"


"린카 지구의 모든 은행에서 환전 가능한 아크는 천만 단위부터입니다."


안내원은 샐쭉 웃어 보였다. 세로의 얼굴에 낀 구름이 더 짙어진다.


"왜. 뭐가 잘 안됐어?"


반 뼘은 더 가라앉아버린 세로의 어깨를 향해 냅다 달려든 루가가 매달렸다. 그를 떼어낼 기력도 없는지 세로는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어떻게든 서신국에서 멀어져야 하는데."


"그거야 기동차 타고 가면 금방이지!"


호쾌한 목소리로 답을 던진 루가는 칭찬을 기다리는 눈빛으로 세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금색 눈동자에 비친 맥없는 얼굴의 주인은 생각했다.


'이 녀석. 탈출하면서 머리를 다친 거 아냐?'


"루가. 도망 다니는 입장에서 그렇게 포위가 쉬운 이동수단은 위험하다네. 게다가 그 어마어마한 승차 비용은 아마…."


소녀는 지쳐 보이는 세로를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세로는 한숨을 몰아 내쉬고 덤덤하게 대답했다.


"… 말을 빌리러 가자."


"에이. 말 타고 가는 거야?"


불만의 표시로 목소리를 늘어뜨리는 루가의 코를 쥐어 잡고 세로는 걸음을 내디뎠다.


"아야야야. 아파."


"말이라도 타면 다행이지! 지금 돈으로는 노숙은 필수야. 작은 짐마차라도 빌려야겠어."



원추리 연가 _ 2. 여행의 시작(2)



관광객이 많은 지역답게 커다란 마구간은 서신국 시내의 것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초롱초롱한 맑은 눈과 우아한 갈퀴, 윤이 나는 털과 다부진 다리 근육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끌어냈다.


타 지구에 대리점을 두루 갖춘 말 대여소는 그림의 떡인 리블리엘 기동차와 달리 일반 서민들이 주로 사용하는 에포니엄의 장거리 이동수단이었다.


루가는 말의 갈퀴를 쓰다듬으며 순수한 감상과 배고픔 등 여러 가지 의미가 섞인 의성어를 마구 내뱉았다. 하지만 감동도 잠시. 아르니카의 화폐는 또 한 번 그들의 발목을 붙잡는다.


"우리 집은 아크는 안 받는다네."


"그러지 말고 가격을 4배 더 쳐 드릴 테니 제일 늙은 말이라도 한 필 빌려주세요."


"아 거참.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아크를 꺼내는가. 이건 자네도 손해도 나도 손해일세."


주인은 곰방대의 끝으로 미닫이문을 홱 닫아버렸다.


"내일 또 올 테니 한 번만 더 생각해주십시오."


마구간을 나서는 세로는 얼마 남아있지 않은 힘마저 모두 쭉 빠져나가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세로?"


콧소리가 간드러진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그 음성에 세로의 뒷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세온이 걱정하던데. 여기 있었어?"


굽이 높은 구두 때문에 비슷해진 눈높이에 예쁘게 말린 그녀의 속눈썹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늘씬한 몸매의 굴곡이 한눈에 드러나는 검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고양이를 닮은 그녀의 눈매가 매력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여자에게서 재빨리 등을 돌린 세로의 머릿속은 온통 암전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이름에 작은 촛불 하나가 피어오른다. 그는 무겁게 고개를 돌렸다.


"세온을 만났어?"


"그럼. 널 만나야 한다고 부탁하기에. 서신국에 몇 번 데려다줬지."


순진한 세온이 이 여자에게 얼마만큼의 빚을 떠안게 되었을지 떠올리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꾸역꾸역 밀려 들어왔다.


"그러는 너는 왜 여기에 있지?"


"물론 관광이야."


도박관광이겠지. 세로는 혀끝까지 튀어나와 맴도는 비아냥을 입안으로 껄끄럽게 씹어 넘겼다.


"일이 잘 안 풀려 보이는데 내가 좀 도와줄까?"


"너한테 도움받았다가 배로 갚긴 싫어."


"부탁해 보자. 말을 못 빌리는 것보단 낫잖아."


세로의 뒤에 서 있던 루가가 그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


"어머. 세로의 친구들? 너한테 친구가 있다니."


그녀는 두 눈을 곱게 접으며 웃었다. 뽀얀 살결을 타고 내려오는 황금빛 곱슬머리가 여자의 분위기를 더욱 화려해 보이게 했다.


여자는 한쪽 팔로 허리를 감고 우아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 손짓에 그녀의 얇은 손목에 걸려 있던 두 개의 은팔찌가 서로 부딪히며 맑은소리를 낸다.


"안녕. 난 아이힌. 세로랑 아주아주 가까운 사이야."


"난 루가 디...."


루가의 입을 급하게 틀어막은 세로가 대충 손짓을 하며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세로의 뒤를 쫓으며 소녀는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숨이 막혀 켁켁 거리던 루가는 세로의 손을 밀어 내리며 그의 어깨에 가려 보이지도 않은 뒤를 보기 위해 버둥거린다.


"누구야? 저 미인은?"


"루가. 하나 명심해 둘 게 있는데. 여긴 서신국과 아주 가까운 마을이다. 넌 탈옥수야. 네 이름을 말할 때 그 사실을 잊어버리지 마."


"알았어. 잘못했어…."


루가는 말꼬리를 내리며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세로를 슬쩍 곁눈질한다. 마을에 들어선 이후 그는 굉장히 지쳐 보였다.


루가 나름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느낀 세로는 손으로 그의 눈을 가리며 가볍게 뒤로 밀었다.


"그 여자에 관해서는 직감이 틀리지 않는군. 어서 여길 뜨자. 휘말렸다가는 정말 위험해."


"세로님. 비 온다네."


머리 꼭대기에서 느껴진 차가운 기운에 가만히 손바닥을 내밀자 투명한 것이 그 위로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불안불안 하던 검은 하늘은 이내 굵은 빗줄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구멍 뚫린 하늘을 올려다보는 세로는 기가 막힌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 이대로는 안되겠다. 일단 근처에서 아크로 빌릴 수 있는 방을 찾자."


화폐의 가치가 바닥을 뒹구는 아크는 어딜 가나 찬밥신세인지라 그들은 차가운 빗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녀야만 했다. 일곱 번의 허탕 끝에 어렵게 얻어낸 여관방의 문을 힘겹게 열자, 지하 미궁에서부터 쌓아온 피로가 배로 밀려온다. 새 옷이 젖지 않도록 기운차게 뛰어다녔던 루가는 벌써 방의 중앙에 대자로 뻗었다.


"아까 그 여자 조심하는 게 좋아. 나중에 혹시나 마주치면 도망쳐 알겠어? 특히 루가. 넌 이 마을에서는 절대 어둠을 부리지 마. 이 마을에서만 아니라 절대 사람을 해쳐서도 안 돼."


거듭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세로를 보며 루가는 누워있는 상태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꼬대 같은 말투로 웅얼거렸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그의 말에 소녀가 고이고이 접힌 관광지도를 꺼내어 펼쳐 든다. 안내도를 뒤집어 바닥에 내려놓자 그 면에 그려진 아르니카의 전국 지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있는 곳이 여기. 린카 지구. 세로님의 말대로 서신국에 접해있는 지역이니까. 아직은 조심하는 게 좋겠지."


너까지 세로님이라고 부르지 마라니까. 라고 세로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지만 금방 묵살 당했다.


"그렇다면 루인의 오신석은 어딜 향하고 있는 거지?"


소녀는 말없이 지도 위,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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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원추리 연가 _ 27. 번뇌 16.02.20 403 2 17쪽
47 공지 16.02.06 255 2 4쪽
46 원추리 연가 _ 26. 악몽의 편린 16.02.03 327 0 15쪽
45 원추리 연가 _ 25. 별을 헤매는 아이들 + 후기 16.01.30 418 1 16쪽
44 원추리 연가 _ 24. 환상 서곡 16.01.27 280 0 18쪽
43 원추리 연가 _ 23. 살인귀의 본능 16.01.23 448 0 18쪽
42 원추리 연가 _ 22. 빛과 어둠의 춤 16.01.20 278 0 18쪽
41 원추리 연가 _ 21. 새하얀 심연 16.01.16 302 0 16쪽
40 원추리 연가 _ 20. 별을 헤는 아이들 16.01.13 347 0 17쪽
39 원추리 연가 _ 19. 붉은 바위 너머 비밀 16.01.09 501 0 17쪽
38 원추리 연가 _ 18. 작은 도둑 16.01.06 255 0 14쪽
37 원추리 연가 _ 17. 황야의 꿈 16.01.02 483 0 14쪽
36 원추리 연가 _ 16. 제박 15.12.30 417 1 21쪽
35 원추리 연가 _ 15. 기적을 위한 한 걸음 15.12.26 333 1 16쪽
34 원추리 연가 _ 14. 사랑은? 전쟁! 15.12.23 278 0 13쪽
33 원추리 연가 _ 13. 사랑은! 전쟁? 15.12.20 177 0 15쪽
32 원추리 연가 _ 12. 태양의 의무 15.12.19 440 0 13쪽
31 원추리 연가 _ 11. 화원의 자장가 15.12.16 267 1 11쪽
30 원추리 연가 _ 10. 결혼 축제(2) 15.12.13 281 0 11쪽
29 원추리 연가 _ 9. 결혼 축제(1) 15.12.12 262 0 11쪽
28 원추리 연가 _ 8. 결의 15.12.12 462 0 12쪽
27 원추리 연가 _ 7. 어둠의 구렁 15.12.09 285 0 10쪽
26 원추리 연가 _ 6. 함정 15.12.06 229 0 10쪽
25 원추리 연가 _ 5. 마녀 아이힌(2) 15.12.03 348 0 11쪽
24 원추리 연가 _ 4. 마녀 아이힌(1) 15.12.01 494 0 11쪽
23 원추리 연가 _ 3. 여행의 시작(3) +3 15.11.29 409 1 9쪽
» 원추리 연가 _ 2. 여행의 시작(2) +2 15.11.29 510 3 9쪽
21 원추리 연가 _ 1. 여행의 시작(1) 15.11.25 283 1 11쪽
20 미궁의 빛 _ 14. 미궁의 빛 15.11.22 366 1 14쪽
19 미궁의 빛 _ 13. 의외의 탈주로 15.11.20 431 1 15쪽
18 미궁의 빛 _ 12. 루인의 망령(3) 15.11.18 243 1 14쪽
17 미궁의 빛 _ 11. 루인의 망령(2) 15.11.17 317 1 11쪽
16 미궁의 빛 _ 10. 루인이 망령(1) 15.11.15 409 1 15쪽
15 미궁의 빛 _ 9. 공동묘지의 소녀 15.11.13 259 2 15쪽
14 미궁의 빛 _ 8. 악마 루아브(2) 15.11.11 298 1 14쪽
13 미궁의 빛 _ 7. 악마 루아브(1) 15.11.08 395 1 14쪽
12 미궁의 빛 _ 6. 가짜들의 싸움 15.11.06 332 2 9쪽
11 미궁의 빛 _ 5. 탈출의 전야제(2) 15.11.04 352 1 9쪽
10 미궁의 빛 _ 4. 탈출의 전야제(1) 15.11.01 402 0 12쪽
9 미궁의 빛 _ 3. 시연의 뜰 15.10.31 342 0 15쪽
8 미궁의 빛 _ 2. 새장 속 소년(2) 15.10.30 296 3 12쪽
7 미궁의 빛 _ 1. 새장 속 소년(1) 15.10.28 286 2 12쪽
6 하빌리스의 형제 _ 6. 하빌리스의 형제 15.10.25 406 1 16쪽
5 하빌리스의 형제 _ 5. 미친 예술가의 사학(2) 15.10.23 277 0 13쪽
4 하빌리스의 형제 _ 4. 미친 예술가의 사학(1) 15.10.21 367 0 14쪽
3 하빌리스의 형제 _ 3. 재회 15.10.18 220 0 13쪽
2 하빌리스의 형제 _ 2. 안내인 15.10.17 376 2 14쪽
1 하빌리스의 형제 _ 1. 북문 입국소 15.10.15 430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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