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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의 사무라이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전쟁·밀리터리

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1.05.16 10:51
최근연재일 :
2021.06.29 10:00
연재수 :
39 회
조회수 :
4,722
추천수 :
138
글자수 :
158,650

작성
21.06.17 10:00
조회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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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18쪽

23. 잡놈

DUMMY

마당에 저마다 가부좌로 앉아,


수북이 쌓은 집단의 묶음을 풀고, 손에 침을 퇘퇘 뱉으면서 양손으로 새끼를 꼬기 시작한다. 양손을 비비면서 엄지를 폈다 감았다는 반복하는 것이 기술이다. 추수가 끝난 들에서 마른 짚을 꼬아 새끼줄을 만들고 새끼줄로 짚신을 만든다. 겨울이 오기 전에...


짚신은 국가이며 새끼줄은 관, 흩어진 낱개의 짚들은 사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지푸라기 하나인 줄 모르고 살아간다. 한 해 두 해 ‘원래 이런가보다, 더는 없는가보다’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백성. 먹고 살기도 힘든데 ‘생각’까지 안 한다.


생각을 해봤자 양반과 급제한 사람들 못 따라간다. 싸워봤자 책에 나온 유명한 선인들의 경구가 이어지면 역시 난 무식해 포기할 것이다. 그러니 모른다. 모르려고 한다. 그 가만히 있음이 자기가 짚신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유다.


생각을 안 한다는 뜻은, 여기 어떤 발이 들어와서 이 짚신을 신는가이다. 물론 한 국가의 백성 모두가 세상 다 똑똑할 순 없다.


그 짚과 시기를 같이 하여... 낫이 잘려 습기를 머금을 때까지는 그래도 배를 채우나, 짚이 마르고 새끼로 꼴 때쯤이면 배를 곯기 시작한다. 백성은 겨울이 무섭다. 곡식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백성들에게 모자란다.


사람들은 짚신에 들어오는 그 발이 아마도 ‘우리’였을 거로 생각했다. 햇볕에 그을려 주름이 파이고, 상투도 없이 위로 뭉쳐 쩌맨 머리, 죽기 직전의 소 힘줄처럼 뚜렷하게 드러난 힘줄과 검은 얼굴, 국수같이 핏줄 뚜렷한 팔뚝이 하얀 소매 밖으로 흔들리며 걷는다. 종종 이유 없이 주먹을 쥐게 된다.


그래, 우린 짚신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신고 있다.

그런데 ‘생각’이 필요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왕이 도망갔다.’


물론 ‘왕. 도망갔다’는 관원이 없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도망이란 자신들을 버리고 갔다는 말, 군주가 설마? 농부들은 예의 그 ‘아무 이유도 없이 웃는’ 얼굴로 뜻을 난감해한다.


그 웃음은 얼굴에 길이 들어 슬퍼도 웃고 기쁘면 약간 더 웃고, 관청에 출입하거나 길바닥에 행차가 있으면 고개를 숙이고 - 혹 얼굴을 마주친다고 할 때 예의 그 웃음을 일단 짓고 본다. 나는 귀하에게 구부린다.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도포가 바람을 저으며 지나가면 눈을 내리며 길을 지키고, 피치 못해 얼굴을 마주하면 그 표정.


‘안녕하시온지요.’


신분이 귀하지 못하다고 다 그 표정을 짓는 건 아니다.


‘너 그러지 마라. 나서면 죽는다.’

‘요만히 작은 것을 먹고 싸니 간이 줄었소?’

‘천민의 난은 사람 씨를 말린다.’

‘누가 난을 일으킨댜.’


‘과거, 국가가 고려일 때 노비의 난에 난동했다가 고장에 씨가 말랐지.’


‘노비가 난을 일으켰다고?’

‘실로 있었던 일이다.’


‘누가 난의 장군이었는데?’

‘실지로 있었던 일이라니까.’


‘이름이라도 알아야 할 것이 아니여?’

‘망이 망생이.’

‘한 놈이란 것이여, 두 놈이란 말여?’

‘형제라지.’


‘그딴 거이 이름이여?’

‘노비의 이름이 아니겠느냐.’


‘워디 써 있대유? 이름에 뜻은 있남?’


‘어른 말 못 믿냐! 기록에 남기느라고 알맞은 한자를 골라 썼는 것이 맞을 것이여.’


‘아니 걸 믿어? 다 겁 줄려고 하는 소리지.’


‘이놈아. 다른 곳도 아니고 공주성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지미. 도만 같지, 그리 뭔 곳을 같은 곳이라고 묶어 겁을 주나? 공주성 일이 우리랑 뭔 상관인가. 기백 년도 다 지난 일인데. 그리고 우리가 노비야?’


‘그거나 저거나 양반 빼면 다 도루묵이지 뭐.’


‘오늘따라 왜 그러쇼. 고운 말만 잡숫던 분이?’


‘이놈아... 임금이 북으로 행차하셨단다.’


‘...뭔 말여. 날씨가 더워지니까 차분 데로 찾아가셨나?’


‘들리는 말로 왜놈들이 떼로 왔단다.’


‘아니 또 배를 몰고 왔나? 노략질로?’


‘음, 동래에 상륙하여 충주를 거쳐 한양으로 갔단다.’


‘또 겁을 주구만. 우리가 암껏도 못 봔데?’


‘충주성에서 큰 싸움이 있어 사람 많이 죽었다 이놈아.’


‘대체 어서 들은 말이오? 뜻을 모르겄네.’


‘봐야 믿니? 왜가 무척 잔인하다는 것이여...’


‘어?... 그럼 세를 이제 안 내야도 되는가?’

‘없다고 의를 배신하면 되냐, 이놈!’


‘이래서 사람이 책권을 읽으면 머릿속이 요물이 된다니까, 지미럴. 요만히 작은 걸 먹고 싸는 것은 그럴싸한디, 왜 우리는 한 대 치면 넘어갈 비실한 놈들에게 조아리고 눈을 깔아야 하우? 지들은 똥 안 싸? 먹는 것은 보았으나 싸는 것을 못 보았으니 것도 못 믿나? 왜 우린 그래야 해?’


‘우리보다 씨알이 귀하기 때문이다.’


‘뭔진 모르지만 씨벌 아주 자알 됐구먼. 버릇 좀 고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어지러운 풀들은 봄마다 싸질러야 혀. 그래야 시커머니 논밭 갈기도 편해지고, 장딴지에 풀이 안 걸려 거치적거리지 않고, 지가 풀인지 모르는 놈들 속도 시커멓게 한번 타고 이. 싸질러야 풀도 다시 잘 자라. 암, 그러지. 잡초도 사라져서 허리 끊어져 가며 피(잡초) 뽑을 일도 줄어들고. 잡초가 온산을 덮기 전에 한 번 싸지르는 것도 괘안아. 오늘 날씨 따따아~앗하니 배나 불러서 한숨 드루눠 자고 싶네. 임금이나 왜것들이나 울가 뭔 상관여.’


밟아도 일어나는 들풀처럼.

눌려 죽어가면서도 씨앗을 뿌리는 들풀처럼.


수레를 끌고 가는 놈이 높은 소리, 도마에서 작은 무를 부엌칼로 탁탁탁 치는 것 같은 소리를 지른다. 물러서라는 것도 아니오, 죽이겠단 소리도 아닌데, 아무래도 이 자들이 무시하는 기분이 든다. 별 잡것들이 어디 감히 대꾸해! 말끝마다 손이 자루를 잡아 칼을 뽑으려 한다. 죽고 싶냐! 죽고 싶냐!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아니 그도 그럴 것이라고 말할 것도 없는 것이, 화가 난 이유를 정작 본인들은 모른다. 하지만 화가 난 것은 분명하다. 그런 고압적인 자세를 처음 보는 건 아니다. 그 화는 저잣거리에서 고함을 치는 것과 조금 달랐다. 그 화는 누구 눈치도 채기 전에 있는 듯 없는 듯 슬슬 올라온다. 화는 이해가 안 되는 답답함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것을 처음 본다. 처음.


‘저것은 사람이 아닌 거여?’


얼마 남지도 않은 곡식과 가축을 탁탁 털어 끌고 가는 것은 칼 때문이라 하여도, 연장자를, 나이도 많은 할머니 노인을... 때려? 할미는 그저 ‘이거 내 손주 먹일 것이다!’


더욱 화를 부추긴 것은 소. 국법에 의해 잡아먹지도 못하고 거의 인간 취급을 받는 녀석. 여물을 먹이고 말도 하고, 하도 오래 지내다 보니 실제로 말도 알아듣는다. 녀석들이 기력이 약해지면 뱀이라도 잡아 잎사귀에 싸서 아가리를 벌려 쑥 넣어준다. 일이 힘겨워 소가 힘들어하면 쇠죽을 끓일 때 좋은 것도 챙겨 가족 대접 비슷하게 받는다. 그런데 그 소가...


‘누렁이가 운다. 저 녀석이 울어. 죽는 걸 안단 말여. 저 불쌍한 것이...’


누렁이가 울자 곧바로 아이들 볼에 눈물이 따라 흐른다.


‘아부지. 쟈를 왜 데려가? 판 거여?’


게다가,


문자 읽는 양반은 아니나 아주 오랫동안 이 땅에서, 나이가 많으면 구부리고, 허튼 충고를 하여도 이 노인장 집에나 들어가 한숨 주무시라 생각한다. 욕을 바가지로 먹어도 집으로 모셔다드리는 것도 법도이고, 어른들 귀가 달아나라 떠들던 아이들은 노인장 지팡이가 땅을 쿵쿵 찍으면 도망가고, 잽히면 머리를 수그리고 호통을 들어야 한다.


나이는 위엄이며 이를 거스르면 개망나니가 된다. 신분이 바닥이라도 가부장이 수저를 들어야 먹으며, 중대사는 연장자나 촌장에게 묻고 그 말을 듣는다. 화가 난다고 같은 청년 여럿을 이유 없이 때려도, 노인 하나 때린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수령은 노인을 수모한 것에 엄청 대노하며 동원 옥창에 처박아 허리가 굽을 때까지 엄죄로 다스리리라.


할머니가 자빠진다.


‘저, 저, 씨이-벌 넘은 애비 앰시도 읎어?’


저것이. 저것들이...


괴이한 놈들이다. 명나라와 만주의 종족과 다르다. 여진의 종족들은 대범하게 맺고 끊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물러난다. 명나라는 맺고 끊는 것은 인정하나 가진 것을 모두 내놓으면 가겠다고 한다.


지금 저들은 돌아갈 생각도 없고 여길 아예 점령하여 자기 땅으로 만들겠다는 심산. 고로 이미 자기 땅의 주인처럼 행세한다. 이를 더 자세히 설명하면, 임자 없는 땅에 너희들이 살고 있는데 여긴 원래 우리 거다.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이 어디서 까부느냐.


말로만 듣던 왜와는 많이 다른 모습. 사타구니에 천 조각 하나 걸치고 휘어진 칼을 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처음 보는 갑을 입고 투구를 썼다. 열댓에 칼을 찬 장수가 하나.


수레를 끄는 소를 몽둥이로 사정없이 내려친다.


‘칼을 찼으니 위치는 높아 보이지만 호로 잡놈이구만.’


싹 긁어간다. 이제 모내기가 끝나고 밭 좀 갈아볼까 하는데 싹 긁어간다. 빼앗긴 자들은 한 해 영근 놈을 관에 납부하고 남은 것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근근이의 정점이 바로 지금이다.


이제 곡식의 싹이 노랗게 변할 때까지 밭에서 일군 것으로 배를 채우며 버텨야 한다. 이것저것 넣고 죽 쒀서 버텨야 한다. 철마다 밭에서 씨를 넣고 다지고 물을 주어 여물게 한다. 흙 안에서 녹색 싹이 나오고 무엇이 맺힌 걸 먹으며 버텨야 한다.


그나마 겨울은 벗어나 풀을 뜯어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저마다 조금씩 감추어 곡기를 유지하려 한다.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노란 싹을 베고 말려 터는 한가위. 떡. 떡도 먹을 수 있다.


열 개도 넘는 수레에 바득바득 긁어다 실었다.


사람들에게 화를 돋운 것은 입으로 들어갈 곡식만이 아니다. 인지상정. 장유유서. 작대기로 땅에 쓰지는 못해도 입에서 말로 할 줄은 안다. 그리고 그 뜻도 안다. 아이도 귀에 못이 박여 안다.


한마디 했다고 노인 목에 칼을 겨누고, 손찌검을 거리낌 없이 한다. 섬찟 충격이 오고 당한 자의 자식 가족은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처음에는 그게 뭔지 몰랐다. 구부림에 능숙한 사람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상이함이었다. 화에 못 이겨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모욕을 준다. 말은 모르지만, 모욕이 분명하다. 동네의 두레와 장유유서를 깨트렸다.


‘어... 어...’


그리고 드디어 칼로 사람을 쳤다.

피 묻은 칼로 사람들을 주르륵 가르키며 경고한다.

이제 뜻을 알아듣는다. 놈은 왜놈 말로 하고 있다.


‘이렇게 해야 너희들의 처지와 신분을 알아?’


하얀 치아까지 드러내고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수레가 지나가자 아낙들이 모여 쓰러진 남자를 추스르며 곡을 한다. 창자가 드러났다. 그리고 가한 자들은 아무 감흥도 없이 갈 길을 재촉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있을 수 없는 것, 생전 처음 보는 것.


‘개 아들놈의 자식들. 봐라 이...’


구석에서 고개를 숙이는 척 눈만 들어 노려보는 남자. 어느 집 싸리문에 팔을 얹고 보고 있는 남자. 그를 따르는 듯 그 주변의 다른 남자들. 남자는 마치 두목처럼 고개를 돌려 남자들을 본다. 당신이 어떤 모르는 외딴 마을을 갔을 때 이런 남자들을 마주하면, 조속히 마을을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남자는 아예 양팔 싸리문에 올리고 다시 멀어지는 수레들을 본다.


‘우리가 죽는다고 누구 알겠냐 만은... 너희들이 죽으면 우리가 알지. 우리가 보게 되지. 우린 그 쌀이 필요하다. 그걸로 죽을 끓여서 시절을 나아야 해. 그게 없으면 애들이 곯아. 죽어. 비실비실하다가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아 죽어! 나이 지긋한 연장자 노인네에게 미안하다 인사는 못 할망정, 어찌 그 가느다란 노인을 후려쳐?’


남자는 당장 달려가 집에 있는 칼을 개오고 싶었다.

남자가 담장으로 땅에 꼽힌 나무 꼬챙이를 뽑았다.

엄청난 기력. 남자가 땅에 묻혔던 부분을 들어 보니, 제법 뾰족하다.


‘깨구락지 배때지를 확!’


그러자 그를 따르던 젊은 남정네 여럿이 가까운 집들로 들어가 하나씩 손에 쥐고 나온다. 남자가 저 앞으로 턱을 들어 따라와! 앞장선다. 그러자 그 뒤에... 보다 나이가 있는 남정네 또 여럿이 농구를 들고나와 따르기 시작한다. 괭이, 낫, 호미. 두툼한 넉가래 나무 몽둥이.


이에 더해 노인이... 그냥 들어가 있으라고 해도 노인이 따라 나온다. 동그란 천을 들고, 걸어가면서 그 천을 푼다. 저 노인이 저 동그란 것을 거꾸로 꺾을 힘이나 있나... 게다가 화살이 세 개뿐.


남자들은 따라오고, 두목 같은 남자가 뒤돌아서고, 사람들을 향해 재 너머 고개를 가리킨다. 사람들은 여기 길이 훤하다. 무슨 말인지 발써 알아들었다. 재로 올라가는 길목 어디 어디가 적당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가 오솔길로 빠른 걸음 들어선다.


“우아래도 없는 이 천하의 호로 새끼.”


남자의 담장 꼬챙이가 목을 향해 찌른다... 들어간다... 왜놈이 그 꼬챙이 자루를 손으로 쥔다. 다른 손으로 남자를 밀어내지만 역부족.


“힘... 쓴 거여? 쓴 거여?”


친구가 다가와 돌빡으로 뒤통수를 뻑! 갈긴다.


“잔인한 건 아무나 다 해. 안 할 뿐이지. 이 개구리 새끼야.”


사방에서 고함과 비명이 터진다. 호미로 왜군의 목살이 파이고, 괭이로 머리를 내려치고, 쓰러져 아리까리한 놈은 돌을 들어, 내려찍는다. 커다란 돌이 몸일 찍어 왜놈의 가슴이 주저앉았다. 노인은 화살 두 발을 갑주 입은 몸에 적중시켰다.


화를 가누지 못하는 한 남자는 머리가 깨져 모양을 잃어감에도 여전히 몽둥이로 친다. 두목 남자와 비슷하게 꼬챙이를 든 남자들은 찔렀고, 부러지지 않은 놈은 생각보다 쉽게 몸통으로 쑤욱 들어간다. 죽창으로 전쟁을 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맨날 자기 전에 자기 손으로 만지는 배였지만 해 보기 전에는 상상한 모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루가 지나고 달포가 지난다.

열린 장독대 뚜껑은 닫히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제 예전의 사람들이 아니다.


허나 아차, 하던 사이 노인이 왜군의 긴 칼을 잡았다. 그 순간 끝났다. 노인이 그 칼을 누구에게 주기 전에는 달라 못한다. 그의 것이 된 것이다. 두목은 이빨을 간다.


“으이구... 저거...”


도망치다 잽힌 놈이 얼굴 반을 피 칠로 하고 잡혀 왔다.


“워쪄 이거.”

“살려주면 돌아가서 일르는 거 아녀?”


“그래. 자고로 수급을 쳐야 왜눔이 진 거로 받아들일 걸 아마.”


“아이구 어르신까지 왜 그류.”

“이 화살이 투구를 뚫겄냐 모더건냐.”

“모르죠. 영감님은 인제 그만 혀.”


“그럼 세워봐. 남은 하나를 쏴볼게.”

“아 진짜 왜 그러십니까.”

“그러니까 쟤를 냅두라고. 해보게.”

“죽일람 그냥 빨랑 죽여요.”


“어느 누가 그러셨다. 왜는, 이 왜놈들은 하나라도 더 죽여야 나중에 후환이 없다고. 우리 후대를 위해 최대한 싹을 쳐야 한다고. 그래야 다음에 노략질하러 오는 시간이 벌어진다고. 봐주면 우습게 말고 또 온다고. 얘네들이 한두 해 온 줄 아냐. 느그들은 이놈들을 처음 보니까 인륜 어쩌고 허지.


그걸 떠나서... 느뜰이 이 평생 이 동네를 떠나지 않아서 모르는 거여. 세상은 우리 두레 같지 않아. 왜놈들이나 북에서 내려오는 놈들이나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낭패를 보게 하지 않음, 심심할 때 또 내려와. 그것이 진짜 세상이여. 느뜰은 신라 백제 고서 읽어봤냐? 이름도 못 들어봤지? 업보이면 죽는 거여.


착하게 하면 다음번에 와서 너 말야 지난번보다 들 착하게 하니 기분이 나쁘질라 그러네... 그러는 것이여. 착한 것은, 저 짝이 착하게 나올 때 착하게 하는 것이라니까. 이런 말은 삼강오륜에도 없는 게 난감할 것은 나도 안다만은, 착하다 일찍 죽는다.”


“잠깐 줘봐.”


이렇게 남에게 존댓말을 못 하는 남자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누군지 다...


어느 틈에 두목 남자가 다름질처럼 나와, 말과 동시에 노인이 쥔 칼을 뽑아서 공중을 가른다. 칼이 가른 방향으로 핏방울이 따라간다. 귀에 들린 것은 오로지 붕~~~~


모두 놀라기는 하였으나, 그보다 더 놀란 것은 두목 남자의 칼. 아주 능숙하게 한 칼로 왜군의 목숨을 빼앗았고, 칼에 묻은 것은 왼팔 소매에 닦더니 노인에게 돌려드린다. 남자는 어지간하면 힘쓰는 나에게 이 칼을 넘기시지? 요량을 바라는 눈.


허나 노인은 노인. 노인도 남자.

노인은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며 들판을 달리는 표정,


거만할 정도는 아니지만,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칼을 받아 집에 넣는다.


모두 놀라 멈춰 섰다.

그제야 남정네들은 온정신이 돌아왔다.

서로의 얼굴과 옷에 잔뜩 묻은 시뻘건 것...

우리가 뭔 짓을 한 거야. 이제 우리 어쩌지?

놈들 보복이 오면 어쩌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날은 어둡고 갈 길은 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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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25. 산성에서 21.06.29 134 2 17쪽
38 24. 탈곡 21.06.17 97 3 12쪽
» 23. 잡놈 21.06.17 86 4 18쪽
36 22. 동검의 무사 21.06.16 81 3 17쪽
35 21. 접신 +1 21.06.16 79 5 19쪽
34 20. 옹진의 살수 21.06.15 83 5 15쪽
33 19. 패잔 21.06.15 68 4 11쪽
32 18. 손들의 싸움 21.06.14 80 4 14쪽
31 17. 옹진 큰물 21.06.13 78 4 8쪽
30 16. 유언 21.06.12 71 3 7쪽
29 15. 옛날 옛적 그 자리 2 +1 21.06.11 74 4 8쪽
28 15. 옛날 옛적 그 자리 1 21.06.10 111 3 7쪽
27 14. 눈이 결정한다 2 21.06.08 90 4 7쪽
26 14. 눈이 결정한다 1 21.06.05 98 3 8쪽
25 13. 그 사람은 멋졌다 2 21.06.04 92 3 7쪽
24 13. 그 사람은 멋졌다 1 21.06.03 80 4 7쪽
23 12. 물 건너편에 2 21.06.02 86 2 7쪽
22 12. 물 건너편에 1 21.06.01 93 2 7쪽
21 11. Intermezzo 21.05.31 93 3 9쪽
20 10. 입신양명 3 21.05.30 104 3 7쪽
19 10. 입신양명 2 21.05.29 86 3 7쪽
18 10. 입신양명 1 21.05.28 89 2 7쪽
17 9. 계루에서 사는 법 2 21.05.27 99 3 9쪽
16 9. 계루에서 사는 법 1 21.05.26 93 3 8쪽
15 8. 목경 2 21.05.26 80 3 7쪽
14 8. 목경 1 21.05.25 96 3 7쪽
13 7. 세상은 비만이 지배한다 2 21.05.25 85 3 7쪽
12 7. 세상은 비만이 지배한다 1 21.05.24 108 4 7쪽
11 6. 검은머리 짐승 3 21.05.24 95 4 8쪽
10 6. 검은머리 짐승 2 21.05.23 93 4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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