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55B

금성의 사무라이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전쟁·밀리터리

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1.05.16 10:51
최근연재일 :
2021.06.29 10:00
연재수 :
39 회
조회수 :
4,725
추천수 :
138
글자수 :
158,650

작성
21.06.16 10:00
조회
79
추천
5
글자
19쪽

21. 접신

DUMMY

선다.

그리고 나 자신조차도 모를 때 즈음 뽑힌다.


발도부터 첫 자세를 위해 모든 것이 빠르게 흐르다가 칼끝이 상대를 향해 서는 순간은, 아주 시나브로 천천히... 정지한다. 몸 자세가 완성되면 이제 움직이지 않는다.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다. 누구도 뭐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선 자세가 끝나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나도 모른다. 산새건 벌레건 한 줄기 바람이건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자연스레 난 움직인다. 아무 소리도 움직임도 없지만, 자세가 끝날 때도 온다. 그것을 시간의 흐름으로 내가 수를 세거나 하면 안 된다. 언제 끝나는지 기다린다. 그걸 기다리는 것이 수련이다. 더는 막을 수 없을 때 움직인다.


다만, 힘들다고 나를 속이면 안 된다.


[한번 뽑으면 베라. 찔러서 끝내라. 내리쳐서 잘라라. 발도와 삽도 중간에 잎사귀 하나가 떨어진다. 칼집에 삽도가 되면 넌 산 것이고, 영원히 삽도가 안 되면 넌 이미 죽은 것이다. 나에게 저승 따위는 묻지 마라. 그런 거 생각하면 무사 아니다.


무사는 살인이 아니라 승부다. 더 못 움직이는 상대는 공격할 필요 없다. 죽고 싶으면 쉽사리 움직여라. 힘들다고 움직여라. 내가 아들이 죽는다고 슬퍼할 것 같으냐. 너 자신을 죽이는 시초는 네가 만든다. 한숨 자고 나올 때까지 그대로 있어라. 너 자신을 속여 봐.]


이 자세 하나가 한 명을 이긴다. 날 죽이려 하는 놈 하나를 이 자세로 제압한다. 물론 부친의 말이지 내 말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고 팔 어깨 다리 장딴지 발바닥, 그리고 얼굴. 어디에 힘이 들어간 지가 보인다. 알 것 같다. 하지만 아직 베거나 찌르지 않았다. 않았다. 내려치면 머리가 쪼개진다. 다만 호흡이 강하건 약하건 (빠르건 느리건) 올바른 호흡이어야 한다.


[네가 가만히 있으면 상대가 움직인다. 기다려라. 움직인다. 기다려라. 움직인다. 움직이고 싶은 마음을 감춰라. 바위처럼 서라. 영원히 안 움직인다고 생각해라. 그래야 너의 눈에서 상대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다. 제아무리 검법이 좋아도, 칼의 거리는 비슷하다. 무식한 사람을 죽여도 무식한 사람 칼에 상처는 입는다. 누구나 첫 공격을 무서워한다.]


‘아버지, 이게 싸움도 아니고 뭡니까.’


‘이게 싸움이다. 쳐야 싸움의 시작이 아니다.’


‘그냥 이렇게 가만히 있어유?’


‘움직이면 작대기로 정신이 번쩍 나게 해준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슈.’


‘저 나무에 걸린 별이 보이지? 그 별이 나무에서 떨어질 때까지.’


‘별이 어떻게 떨어집니까?’


‘여기서 시작한다니까. 이 새끼가 자꾸 주둥이를.’


발 디딤과 첫 자세를 가르쳐준 후에, 부친은 발도만 하루 천 회를 시켰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하게 했다. 맨 처음 칼을 뽑을 때는 아주 천천히... 중간에 빠르기가 덜컥... 하는 부분이 나오면


‘다시 넣어. 똑같은 속도로 나와 겨누는 칼로 정지해라’


일갈에 일갈. 발도만 할 때는 어깨를 뜨거운 인두로 지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계속했다. 칼을 뽑는 연습만으로도 누웠다, 코 두 번 골면 아침이다. 조금 더 빨리 뽑는 것은 중간에 덜컥!...이 없어야 하고, 그러다 속도가 붙었다. 아주 부드럽게 잡티 없이 뽑아야 한다. 자세를 잡았다가 삽도할 때는 눈으로 안 보고 할 때까지... 왼손 엄지 검지를 백 번도 넘게 베였다. 정확히 말하면 삽검인데, 한쪽 날만 있는 삽도는 누워서 떡먹기다.


그렇게 삽검 발검, 삽검 발검. 검과 도, 두 가지가 있었는데 도는 발도 삽도... 반복에 반복.


[어쭙잖은 놈들은 이 칼을 뽑아 첫 자세를 취하는 것부터 오금이 저린다. 이미 뽑는 자세에서 모든 것이 시작한다. 칼을 가벼이 여기고 마구 뽑으면서 으스대는 놈들은 꼭 자기 칼에 다친다. 자기 칼에 죽는 놈도 심지어 있다.


베고 찌르는 건 나중이다. 그리고 베고 찌르는 것도 이 자세와 똑같이 훈련할 거다. 어느 수준이 되면, 상대를 보고 가만히 초연하게 있었는데 어느 순간 칼이 뽑혀 겨누고 있는 너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다. 발도 삽도는 인사처럼 가볍고 부드럽게 이미 하고 있어야 한다.


앞에서 보기에 그게 얼마나 무서운 줄 아니? 무서울 거라고 하는 건 아니지. 똑같은 방식으로 베기도 그렇게 하게 된다. 처음에는 아주 천천히. 동작이 완벽해지면 그때 점차 빠르게 한다. 어떻게? 그 빠르기를 자기가 감당할 수준으로. 이것을 느리게 하면 춤이고, 빠르게 하면 무술이다. 무용과 무예는 사실, 하나다.]


뽑았으면...

내가 움직일 것을 내가 기다리면 안 된다. 난 가만히 있을 뿐이고, 움직일 때가 되면 알아서 움직인다. 그러면 상대를 베고 찌를 허점이 보인다. 내가 가만히 있으며 상대가 움직이게 마련이니까.


[숨이 거칠어지면, 힘이 들어가면, 날이 상대를 정확히 향하지 않고 비틀어진다. 비틀어진 상태로 치거나 때리면 철 작대기밖에 안 된다.]


별이 나무에서 떨어지고, 버티다 버티다 한번 긋고, 삽도 발도. 이어 다음 자세가 시작된다. 주로 밤에 수련을 시킨 이유는 흐르는 틈의 길이를 느끼기 어려워서다. 서기 자세 네 개, 베기 상하좌우, 찌르기 두 개, 막기 상하좌우 네 개. 이것이 끝나면 회전에 들어간다. 이 정지 자세가 너무 길었다. 두 해를 넘겼다. 칼끝에 가랑잎도 떨어지고 눈도 나렸다.


“그들을 보기 전에, 네가 실력이 좀 늘었다고 싸움을 시작하면, 넌 머지않아 죽는다. 넌 답답하고 힘겹겠지만 기다리는 법을 터득해봐. 너는 싸우고 싶어 한다. 칼을 쓰고 싶어 하지. 하지만 그들이 와서 보기 전에, 그들이 끄덕끄덕 너를 인정하기 전에 시작하면 넌 죽는다.”


부친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어려서부터 부친은 작대기로 날 때렸다. 이유 없이 때렸다. 마음을 편하게 놓으면 작대기가 내 머리 어깨 팔에 사정없이 떨어진다.


“욕 나오지? 넌 왜 곧이곧대로 맞냐?”


그리고 난 피하기 시작했다. 피하라고 때린 거다. 난 뒤에서 미세하게 변화하는 바람 소리만 듣고도 피하게 된다. 아무도 안 보일 때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 때) 부친이 때린다는 걸 알았다.


난 내 기질이 칼을 쓰는 무사란 부친의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상한 사람이다 참. 난 착하니까. 이 착한 사람에게 뭔 싸움 기질이 있다는 둥, 연습하다 밤에 누가 올 거라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한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다 그렇게 시작했다’ 독심술도 쓴다.


그들은 보고 싶어 한다


너른 풀밭, 징개맹개는 아니라도 꽤 너른 풀밭.


다른 날에 비하여 바람도 선선하니 달도 동그랗게 꽉 차서 기운이 나는 밤. 부친은 내가 수련하는 것을 누가 보면 안 된다고 했고, 남에게 자랑이라도 했다간 경을 칠 거라고 했다. 그러니 난 조금 외롭게, 친구도 없는 처지에 밤에, 그 누가 이걸 힘겹다 말하지 않겠는가.


그날.

나무에서 별이 두 번 떨어졌을 때 그들이 왔다.


회전에 들어가 칼이 돌기 전에 시선이 먼저 반대편으로 돌았는데, 세 명이 서 있었다. 난 너무 놀라서 그 순간 칼을 들어 그들을 내려칠.... 것이라고 남들은 생각하겠지. 아니다. 그걸 보면 자연히 알게 된다. 그들은 내 상대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일 뿐이다. 나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하던 걸 계속해야 함을 찰나에 느꼈다.


그러면서 그들을 신경 쓰지 않을 수도, 대놓고 신경을 쓸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묵묵히 서서 나를 바라보는데, 내가 계속 검술을 수련하길 기대하는 것이다. 그들은 나보다 뛰어난 존재임이 분명하고 나는 선을 보여야 함을 당연히 알게 된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렇게 무섭지는 않다. 그들은 그냥 편한 자세로 서서 날 보는데, 뻗정다리로 시비를 걸듯이 무섭게 보는 것은 아니고, 팔짱을 끼기도 하고 짝다리를 짚기도 하고 편하게 본다.


그들은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다. 서로 친구도 아니다. 국가도 달라 보인다. 나중에는 여섯까지 늘어났는데, 제와 라는 뭐가 좀 이상해도 알아볼 수는 있다. 의복의 연원이 있어 보이고 얼굴만 봐도 제와 라는 ‘맞구나’ 감이 온다. 라는 머리 모양이 길쭉하다. 그 나머지는 아마도 려가 섞여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난 직접 본 일이 없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망한 국가니까. 하지만 부친은 내 피가 ‘려!’ 임을 강조하셨고, 그중에 려가 있기를 바랐다. 분명히 있었다. 특히 체구가 큰 무사들... 체구가 크고 수염도 좀 이상하게 기르고 복식이 말을 타는 복장.


난 그들을 대놓고 볼 수 없다. 스치는 인상만 본다.


내가 그들을 자세히 보면 그림자처럼 사라질 것 같고, 그들도 내가 흘겨본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해. 계속해.’


말없이 강요하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부담을 이겨보라는 뜻도 있고, 그것이 강요라고 꼭 말하기 뭐한 것은, 그들 서로가 친해 보이지도 않고 대화를 나누는 인상도 없는 각각의 별개로 보였다.


나의 내심이 가장 깜짝 놀란 것은 더 오래된 사람이다. 그는 짐승의 가죽을 쓰고 있었고 가지고 있는 검도 짧았다. 날이 내 팔뚝 길이보다 길어 보이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유령, 혼령이다.

다만 난, 그들이 왜 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부친은 그들이 날 보러 올 것을 알았다.

이는, 부친도 그들을 봤다는 뜻이다.


“넌 어떤 사람을 봤니?”


이 질문은 놀라웠다. 부친은 말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봤다는 걸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모른다.


“어떻게 아십니까?”

“꽤 칼질이 늘었어. 아주 많이.”


자랑스러웠다.


“본 것을 말해봐.”


내가 설명을 하자 부친은 약간 놀랐다.


“짐승 가죽?”

“네.”

“난 그 정도까지는 못 봤는데.”

“아버지도 보고 나도 본 것인가요?”

“아니, 그분들은 같은 사람들이 아닐 거야.”

“똑같은 사람들이 아니란 뜻입니까?”

“너와 나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야.”

“네. 네. 남의 집 아버지 같아요.”


“딱히 너와 나를 각별히 생각해서 오는 것이 아니야. 우린 특별한 존재가 아니야. 그들을 보게 되는 무사 수련자는 꽤 있을걸. 우리가 전부가 아냐. 그들은 심심해서, 아니 그보다는 궁금해서 보러 오는 거야. 네가 어떤 기운과 검술을 쓰고 있는지 그게 궁금해서 보러 오는 거라고. 네 실력이 향상되지 않으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려. 그들은 항상 강자를 찾으러 다니니까. 그게 궁금한 거야.”


“그들은 내가 마음에 들면 수호신 같은 것이 됩니까?”


“이 새끼 간이 붓는구나. 무사는, 무사는! 본질적으로 남을 돕지 않아. 그들은 네가 죽건 말건 상관하지 않아. 그저 볼 뿐이야. 그들도 싸우다 죽었어. 그 혼련 중에 노인이 있디? 없을 거야. 없어! 무사는 일찍 죽어. 칼 든 자는 일찍 죽어.”


“근데 왜 나한테 이걸 시켜! 아들 죽으라고?”

“이 자식이 덜 맞았나.”


“이젠 다 피해. 만 대는 더 맞았어. 진짜 아버지 맞아? 당신?”


“이 새끼야. 넌 반드시 칼을 들게 돼 있어. 네가 아무리 밭을 갈고 논을 갈아봐라. 넌 결국 도인이 되게 돼 있어. 그리고 칼을 드는 순간 습관 때문에 이기고 습관 때문에 남의 칼을 받아 죽는다. 특히 처음 배운 습관이 평생을 간다. 아니 평생을 못 가도록 걸림돌이 되어 죽는 거지.”


“아버지는 아직 안 죽었잖아! 왜 나더러 일찍 죽으래!”


“네가 내 나이까지 살려면 이것이 필요하다니까!”


놀랐다. 나도 모르게 대들었을 때, 피떡이 되도록 부친에게 맞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날 이후 날 때리지 않았다. 말대꾸해도 때리지 않아 깜짝 놀랐으나 내심을 숨겼다. 난 이미, 누가 때리려 할 때 막는 동작을 취하지 않는 능력이 있었다. 상대가 진짜로 때릴 때까지 충분히 시간은 나에게 길어졌다.


그날 깨달았다. 커 보이던 아버지와 내 눈높이는 같았으면 내 몸과 장딴지와 팔뚝은 강한 힘줄에 사로잡혀 터질 것 같았다. 내가 크고 강해졌기에 부친이 날 안 때리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 부친과 나는 정말 목숨을 걸고 싸울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 징후는 보지 못했지만, 만약 부친의 검술이 더 강해도, 나와 싸우면 날 죽이지 않고 칼을 받았으면 받았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내 자식새끼를 낳고 나서 알았다.


“내가 널 못 죽일 거 같냐?”

“당신은 내 부친이 아니야!”

“부친이 자식을 죽이는 조건이 있다.”


“뭔데!”

“내가 왕이고 네가 왕자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왜.”

“권력은 나눌 수가 없는 놈이거든.”


“난 힘겨운 것이 싫어. 왜 맨날 놀지도 못하고 칼만 들래. 형에게는 안 시키잖아. 형은 책만 보잖아. 차별하는 거야? 난 사람이 아니야? 난 병졸이고 형은 판서야?”


“넌 형을 보호해야 해.”

“뭐라고?”


“형은 무력의 재질이 없어. 전혀. 내 부친, 그러니까 네 할애비도 말했다. 형제 중 꼭 하나만 그런 기질을 타고난다고. 내 형제 중에는 나고, 내 자식 중에는 너다. 네가 바로 려의 기질을 타고났다.”


“려는 무슨 려야. 고구리가 있었다는 건 아버지도 말만 들었잖아. 그런 게 어딨어. 북쪽에 그런 게 있다고? 그건 책에나 써있는 거야. 있지도 않은 핏줄을 강요하고. 형은 항상 앉아 있고 나는 항상 서 있거나 뛰고 있어. 고장으로 따지면 내가 제지 려야!”


“너 이 새끼. 말에 문자가 섞여 있다. 너 책 봐?”


“봐.”


“네 놈이 어떻게 문자를 알아!”


“형이 가르쳐줬어!”


부친은 말을 잊으셨다.

처음이었다. 그렇게 부친에게 대들기는. 맞아 죽을 각오로 말을 터트렸다. 그러나 부친은 날 때릴 생각을 요만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충격적인 말을 하셨다.


“달빛수련의 와중에 오는 그분들. 그중에 우리 조상이 있다. 우리 핏줄의 조상. 나도 너처럼 부친에게 반항했다. 하지만 조상신이 한 명을 찍는다고 하셨지. 하기 싫으면 오늘부터 말아라. 하지만 우리 핏줄의 조상과는 끊어진다. 그것은 네가 무사가 되고 만의 문제가 아니야. 또 네가 접신하는 무당도 아니야. 그런 종류가 아냐. 하지만 수련을 형제 중 한 명이 하지 않으면 조상신과 끊어진다. 네가 본 사람 중에, 네 조상이 있다. 난 누군지 않다.


무사마다 접신, 그래 접신이라고 하자! 그 수련접신 중 하나는 꼭 조상이 낀다. 그게 무사 집안이다. 하지만 너도 알 것이다. 그들 중 누구를 자세히 보려 하면 그것은 흩어져 사라지고, 어쩌면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그분은 대가 이어지고 있는가. 이놈이 어디 가서 한 방에 목이 달아날 것인가, 그걸 보러 오는 거다.”


“아버지... 내가... 꼭 내가 그걸 해야만 해?”


“그래. 올바르지 않은 말이 아니다. 그리고 나도 부친에게 그 말을 했다.”


“아버지도 나와 똑같았다는 거야?”


“그래. 사람이 어려서 작대기로 칼쌈을 하고 그러지만, 그건 피가 솟구치는 나이라 그럴 뿐이야. 하지만 진짜 사람의 목을 쳐봐라. 사람 목을 치고 부끄럼이 없는 것은 오랑캐다. 우린 오랑캐가 아니다. 지나인들은 우리를 오랑캐라고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동이는 ‘잘 알 수 없는 수상한 존재’란 뜻도 있어. 실제로 해 보면 어릴 적 꿈은 산산이 부서져. 내가 사람 죽이는 것이 취미인 줄 아느냐.”


“... 몇 명을 상대했는데. 몇 명을 죽였는데.”


“무고한 사람 몸에 칼을 댄 적은 없다. 칼을 든 사람에게만 칼을 들었다. 싸움을 건 사람과만 싸웠다.”


“아버지는 농부야. 무슨 싸움을 해.”


“나도 그런 줄 알았다. 난리가 났을 때 난 창병이었다. 군졸이 될 생각도 못 하다가 끌려나갔다. 그리고 거기서 깨달았다. 네 할애비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너도 깨닫게 된다. 너도 자식을 낳고 보면 어느 놈이 대를 이을 건지 갓난아기 때부터 알게 된다. 행동이 다른 놈과 완전히 다르다. 아기라도 눈빛부터 다르다. 그리고 그놈은 피하고 싶어도 꼭 무사와 검객의 길을 가게 된다.”


“아버지는 검객의 길을 가지 않았잖아.”


“내가 평생 농사만 지은 줄 아니?”


“아니라고?...”


그들을 매일 보는 건 아니다. 한번 보고 관심이 없으면 영원히 안 나타난다. 볼만한 것이 보여야 보러 온다. 오늘 올 것으로 생각하면 안 온다. 그저 내가 수련하는 것에만 땀을 흘리며 최고로 집중하고 있을 때 어느 순간 나타난다.


그리고 그 순간은 나도 모르게 실력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일이다. 실력은 눈에 안 보인다. 나는 모르고 다른 사람이 본다. 난 같은 걸 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인데, 옆에서 보면 칼이 돌아다니는 길이 달라진다.


내 실력이나 검술이 무척 나아졌을 때 나타난다. 볼 것이 없는데 왜 보러 오는가. 어른이 되면 그들도 오지 않는다. 어려서 무사의 입문처럼 온다. 그들이 몇 번 오고 나면 내가 무사에 입적하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무적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 모두는 싸우다 일찍 죽었다. 다만, 죽는 나이를 그들은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이 마지막에 왔을 때 알았다.

두 가지를 알았다.


첫 번째.

[내일 죽더라고 세상의 최고 검객이 되겠다.]

모든 칼 쓰는 놈들이 내 발아래 있어야 한다.


둘.

그중 조상이 누군지 알았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날, 어느 한 혼령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내 평생을 통틀어 가장 온화했다.


열일곱 이후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열일곱에 처음, 진짜로 칼을 썼다.

난 싸움을 걸지 않았다.


상대가 날 업수이 여기고 싸움을 걸어왔다.

일(一) 합에 끝났다. 묻어주는 게 더 힘들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금성의 사무라이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9 25. 산성에서 21.06.29 134 2 17쪽
38 24. 탈곡 21.06.17 97 3 12쪽
37 23. 잡놈 21.06.17 86 4 18쪽
36 22. 동검의 무사 21.06.16 81 3 17쪽
» 21. 접신 +1 21.06.16 80 5 19쪽
34 20. 옹진의 살수 21.06.15 83 5 15쪽
33 19. 패잔 21.06.15 68 4 11쪽
32 18. 손들의 싸움 21.06.14 80 4 14쪽
31 17. 옹진 큰물 21.06.13 78 4 8쪽
30 16. 유언 21.06.12 71 3 7쪽
29 15. 옛날 옛적 그 자리 2 +1 21.06.11 74 4 8쪽
28 15. 옛날 옛적 그 자리 1 21.06.10 111 3 7쪽
27 14. 눈이 결정한다 2 21.06.08 90 4 7쪽
26 14. 눈이 결정한다 1 21.06.05 98 3 8쪽
25 13. 그 사람은 멋졌다 2 21.06.04 92 3 7쪽
24 13. 그 사람은 멋졌다 1 21.06.03 81 4 7쪽
23 12. 물 건너편에 2 21.06.02 86 2 7쪽
22 12. 물 건너편에 1 21.06.01 93 2 7쪽
21 11. Intermezzo 21.05.31 93 3 9쪽
20 10. 입신양명 3 21.05.30 105 3 7쪽
19 10. 입신양명 2 21.05.29 86 3 7쪽
18 10. 입신양명 1 21.05.28 89 2 7쪽
17 9. 계루에서 사는 법 2 21.05.27 99 3 9쪽
16 9. 계루에서 사는 법 1 21.05.26 93 3 8쪽
15 8. 목경 2 21.05.26 80 3 7쪽
14 8. 목경 1 21.05.25 96 3 7쪽
13 7. 세상은 비만이 지배한다 2 21.05.25 85 3 7쪽
12 7. 세상은 비만이 지배한다 1 21.05.24 108 4 7쪽
11 6. 검은머리 짐승 3 21.05.24 95 4 8쪽
10 6. 검은머리 짐승 2 21.05.23 93 4 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