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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의 사무라이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전쟁·밀리터리

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1.05.16 10:51
최근연재일 :
2021.06.29 10:00
연재수 :
3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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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65
추천수 :
135
글자수 :
158,650

작성
21.06.15 10:00
조회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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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11쪽

19. 패잔

DUMMY

“오이, 너, 피가 뭐야....”


침묵이 조용히 깨진다.


"못 알아들어?”


셋 중, 동행하면서 패잔병 오치무샤의 대장 역할을 하게 된 자가 묻는다. 구석에 둘과 떨어져 혼자 앉아 있던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들었다. 그리고 그 눈이 물어본 오치무샤의 눈을 본다. 그러나... 이러면 안 된다는 걸 곧 깨달은 남자는 다시 멍청한 표정으로 얼굴 근육을 풀면서 고개를 숙인다.


“혈통이 어디냐니까. 시라기(신라)? 고구리? 쿠다라?”


[쿠다라 : 백제. ‘큰 나라’라는 뜻. 일본사서의 지칭.]


혼자 앉은 남자는 생각한다.

‘생각보다 책권을 읽은 사람이야?...’


오치무샤는 남자가 말을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거 몰라? 우리도 고장에 따라 혈통을 따지는데 내륙인은 그런 거 없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다른 오치무샤가 나선다.


“못 알아들으면 넌 가만히 있어. 내지 출병도 안 해 본 놈이.”


“뭐라고? 내지 전쟁이 갔다 왔던 거야?”


“너, 같은 오치무샤라고 입이 험하구나.”


“관동 사투리를 쓰니까 내가 몰라봤지.”


나이 먹은 오치무샤가 젊은 오치무샤를 노려본다.


“사람은 다... 말로 죽는다. 더 말할 거야?”


“...... 아니.”


대장 격 오치무샤는 일어서 남자에게로 간다.


“이봐. 난 오사카에서 자란 놈이야. 끌려가서 이 번주의 갑을 입고 있지. (가슴을 툭툭 친다) 주인을 읽었으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나? 그래. 모를 수도 있지. 내지인이 여기 이야기를 어떻게 알아. 오사카는 이 땅의 왕국이 처음 생겨난 곳이야. 그리고 난 아마도 쿠나라 피가 있을 수도 있어.”


“헛소리 그만하고 우리 살길이나 찾자고. 저 새끼는 내지에서 끌려온 놈이야. 하급무사도 아니고 그냥 졸이라고. 우리와 격이 달라. 우리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고, 이 산중에서 우리가 목을 친다고 아무도 뭐라지 않아. 우린 조선에서 이겼고, 내 이런 말 안 하려고 했지만, 우리 시중이나 들어야 할 놈이야. 도자기 가마에 불이나 지피던 그런 거겠지.”


공기가 싸늘해진다. 연장자 오치무샤는 젊은 오치무샤를 노려보지만, 젊은 쪽은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다.


“내가 두 번째로, 입에서 나오는 말에 관해 너에게 다짐한다.”


한마디만 더 하면 죽인다는 소리다.


고개 숙인 남자는 말을 않지만, 오치무샤는 안다. 남자의 등을 보면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을.


“이봐. 난 널 모르지 않아. 넌 다른 대의 무리에 속해 있었지만, 혹시 나 기억 안 나? 넌 하급 창병인데, 내가 다른 짓을 널 봤어. 이해하건 말건 난 말하고 있다. 싸움 이틀 차에, 해가 중천에서 서쪽 들판 지평선의 딱 중간에 이르렀을 때, 우린 다 죽었지. 다 죽을 뻔했지.


그때 우린 모두 알았어. 싸우다 죽거나, 일렬로 무릎을 꿇고 차례대로 목이 잘리거나. 우린 보상금 받고 팔릴 몸이나 신분이 아닌 데다가, 우리와 직접 붙었던 건너편 번주는 우리 번주의 원수였지. 여기서 지면 어차피 다 죽는다는 걸 알았어. 하늘을 보니 이게 마지막이다 싶었어...


그때 널 봤어. 혼전. 고함과 비명. 먼지. 피... 나도 기다렸어. 난 조선에서 칼을 몸에 받아봤어. 죽는 줄 알았지만 살았어. 깨어보니 살았다는 걸 알았지. 배를 더듬어 보니 내장이 안 터져 있더라고. 큰 싸움에서는 내가 누구에게 찔렸는지도 몰라. 하늘이 노래지면서 빙그르르 정신이 나가. 나 그때, 삶을 마무리 지으면서 처지를 비관했지. 남을 위해 싸우다 죽네... 그래, 솔직하여지자. 내가 먹고사는 것과 전쟁이 무슨 상관이야. 내 주군도 아냐. 난 처자가 있어. 얼굴을 못 본 지 또 오래.


내가 두 놈을 치고 나자빠졌을 때, 말하자면 이제 죽는 거지. 그때 널 봤어. 넌 무례한 행동을 했어. 아무리 무사가 죽어 나자빠져도 넌 그 칼을 잡으면 안 돼. 사람이란 각자 위치에 맞게 처신해야 하기에 그 칼을 잡으면 넌 죽은 무사를 모욕하는 거야.


헌데 넌 잡았어. 알았지. 싸우다 죽겠다 그거. 게다가 사로잡혀도 넌 신분이 인정되지 않 아. 넌 없는 인간이야. 살아도 내지인으로 밝혀졌을 거야. 그 이전에도 넌 이상했어. 뼈가 굵고 키도 우리 머리 위로 올라와. 저런 놈이 왜 창병 대열에 있나? 궁금했었지.


하여간 그때 네가 칼 쓰는 걸 봤다. 난 누워서 고개만 돌린 채 넋을 잃고 봤어. 그래서 네가 우리와 동행하게 됐을 때 널 허락한 거야. 칼을 쓰던 널 기억했지. 우린 둘이었고, 농민들에게 오치무샤가리를 당하게 되면 너 같은 사람이 도움이 되니까. 딱 봐도 넌 여기 사람이 아냐. 이마에 ‘내지인’ 써있지. 내가 왜 알겠어. 응?


조선에서 많이 봤으니까. 한양에서 더 북 쪽으로 올라가면 너 같이 생긴 얼굴과 기골들이 많아져. 말 잡아먹는 여진족 피를 받았는지, 무식하고 아무 기술이 없지만 큰 돌을 던지고 사람을 집어던지고 그런 굵은 인간들. 무표정으로 앞뒤 없이 달려들던 조선 놈 같지 않은 조선 놈. 만주나 대륙의 차가운 놈들.


어쩌면 난 네 덕분에 살았어. 자존심이 있기에 그때 일어난 일을 다 말하진 않겠다. 그것은 진실이고 넌 알고 있으니까. 대체 그런 칼 쓰는 법을 난 조선에서도 본 적이 없어. 우리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조선 장수가 쓰는 칼질과도 다르고.


대게, 그런 방식으로 싸우면, 알겠지만 칼은 부러진다. 베기는 우리 것이 훨씬 훌륭하지만, 조선의 철이 우리 것보다 나쁘지 않아. 어쩌면 더 좋아. 여긴 시마니까. 시마 안에서 가장 좋은 걸 대장장이들이 쓸 뿐이니까.

내 말이 너무 긴가? 못 알아듣나?“


“왜 저런 고려인한테 사람 대접을 하고 그래.”


순간이었다.

젊은 오치무샤의 칼이 서 있는 연장자 오치무샤의 목에 들어왔다.


“자, 세 번째 말을 해봐. 다짐이 뭐 어떻다고?”

“......”


“조선도 갔다 왔다고? 대단하신데! 조선 출병을 했었다는 사람이 아마도 한 기만 명은 될 것 같아. 죄다 갔다 왔다고 구라를 쳐. 그리고 그걸 떠나. 나이 좀 찼다고 날 무시했어. 떡은 인간이 못 되지만 인간을 떡처럼 다져줄 수는 있어. 네 몸뚱이를 절여서 우리 집 개나 좀 줄까?


네가 나이가 좀 많기로서니, 신분에서 다른 것이 무엇인데? 오사카 출신이라고? 서국(관서) 출신이다 이거지? 그래 난 동국(관동)에서 밭고랑 갈던 사람이다. 내 칼을 피해 봐. 반격해봐. 물론 네가 병기에 손을 대면 바로 네 목은 날아가. 목이 반이나 베인 채 도망가는 개를 봤어?


난 봤어. 곧 제풀에 꺾여 뒈지더라. 내가 사무라이는 아니거든. 아니지. 뒤통수치는 데는 사무라이처럼 능통한 사람들도 없지. 죽인 놈이 이긴 놈이고, 이긴 놈이 사무라이다... 그게 사무라이 아냐?”


“이 칼 안 치워?”


“왜? 오치무샤는 모욕도 참는 거야? 난 안 되겠는데?”


“말은 알아듣고, 창피하지만 네 처지도 알아는 듣겠는데, 그렇다고 내가 목을 보전하기 위해 너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것으로 생각하냐?”


“오사카 출신이라선가 말이 격은 있네. 그래. 사과를 바란다.”


“사과하면 네가 칼을 거두냐?”

“내 맘이지.”

“넌 그래도 날 칠 거야.”

“내가 얕아 보여?”

“그럴 것인데 뭐.”


“그래서... 죽어도 미안하다 소리는 못 하겠다?”


“그래. 목을 그어라.”


“이 미친 새끼 아냐? 빠가야? 말 한마디면 되잖아.”


“네가 칼을 내렸을 때, 내가 널 칠 거라고 넌 생각하잖아. 그러니 날 죽이지 않고는 못 배기지. 아니면 날 묶어 놓고 도망가면 해결이 될 수도 있고, 하지만 이 상태에서 네가 날 묶는다고? 내가 고분고분? 알면서 왜 그래? 넌 날 안 죽이고는 이걸 해결하지 못해. 어차피 죽을 거, 내가 왜 사과를 해. 사과가 흔한 집안에서 자랐니? 네 말처럼 너 같이 무식한 놈한테. 못 해. 너 글 못 읽지?”


“미친 건 너야!”

“이런 말 듣고도 왜 목을 안 긋냐?”


“난 사무라이가 아냐!”


“사무라이가 아니면 칼을 거두고 공손하게 죄송합니다. 해야지.”


“나더러 그러라고?”

“지난번에도 그랬잖아.”

“지난번에 뭐!”


“너 숨었지? 은근슬쩍 앞 대열에서 빠지는 거 봤어.”


“눈이 몇 개길래 저놈도 보고 나도 봤단 말야.”


“봤어... 야비한 놈.”


“같은 오치무샤끼리 이러지 말자.”

“목을 치던가 말을 공손하게 해봐.”

“우리 이러지 맙시다.”


“그러니까 니가 사무라이가 아닌 거야. 네가 무서운 건 나뿐이 아니라 저 사람이지? 저 사람이 가만히 있을지 모르겠지?”


“칼은 아직 목에 있다. 말조심해라.”


연장자 오치무샤는 그래도 떨고 있었다.

하지만 떨고 있어도 구부리지 않는 것을 택했다.


연장자는 밤하늘의 별을 본다.

패잔. 어디 하소연할 수 없는 처지.

이제 곧 민가의 의복을 훔쳐 갈아입어야 한다.


별똥이 사선을 그으며 떨어진다.

문득, 연장자 오치무샤는 시선을 땅으로 내렸다.


그리고...

오치무샤는 두 개의 그림을 연거푸 보았다.

하나는,

모멸과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칼을 내 목에 댄 자의 눈.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체구 큰 남자의 서 있는 그림자.

젊은 놈의 눈. 그 눈이 사라지고

갑자기 앉아 있던 남자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그 그림자에

그 남자 손이 크게 보였다.

뭘 잡고 있었다.


두 장면 사이에

뻑!!!

돌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호박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뻑!!! 소리 후에 그림자는 여전히 서 있었고,

이내, 손에서 두툼한 덩어리가 떨어졌다.

돌이 지면과 충돌하며 쿵! 떨어졌다.


땅을 보니, 칼을 잡은 놈이 눈을 뜬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


시선을 남자에게로 향하니...


남자는 천천히 오치무샤에게 등을 보이며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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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25. 산성에서 21.06.29 132 2 17쪽
38 24. 탈곡 21.06.17 96 3 12쪽
37 23. 잡놈 21.06.17 85 4 18쪽
36 22. 동검의 무사 21.06.16 80 3 17쪽
35 21. 접신 +1 21.06.16 79 5 19쪽
34 20. 옹진의 살수 21.06.15 82 5 15쪽
» 19. 패잔 21.06.15 67 4 11쪽
32 18. 손들의 싸움 21.06.14 79 4 14쪽
31 17. 옹진 큰물 21.06.13 77 4 8쪽
30 16. 유언 21.06.12 70 3 7쪽
29 15. 옛날 옛적 그 자리 2 +1 21.06.11 72 4 8쪽
28 15. 옛날 옛적 그 자리 1 21.06.10 110 3 7쪽
27 14. 눈이 결정한다 2 21.06.08 88 4 7쪽
26 14. 눈이 결정한다 1 21.06.05 97 3 8쪽
25 13. 그 사람은 멋졌다 2 21.06.04 90 3 7쪽
24 13. 그 사람은 멋졌다 1 21.06.03 80 4 7쪽
23 12. 물 건너편에 2 21.06.02 83 2 7쪽
22 12. 물 건너편에 1 21.06.01 90 2 7쪽
21 11. Intermezzo 21.05.31 92 3 9쪽
20 10. 입신양명 3 21.05.30 104 3 7쪽
19 10. 입신양명 2 21.05.29 85 3 7쪽
18 10. 입신양명 1 21.05.28 89 2 7쪽
17 9. 계루에서 사는 법 2 21.05.27 97 3 9쪽
16 9. 계루에서 사는 법 1 21.05.26 91 3 8쪽
15 8. 목경 2 21.05.26 79 3 7쪽
14 8. 목경 1 21.05.25 94 3 7쪽
13 7. 세상은 비만이 지배한다 2 21.05.25 85 3 7쪽
12 7. 세상은 비만이 지배한다 1 21.05.24 105 4 7쪽
11 6. 검은머리 짐승 3 21.05.24 93 4 8쪽
10 6. 검은머리 짐승 2 21.05.23 92 4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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