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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의 사무라이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전쟁·밀리터리

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1.05.16 10:51
최근연재일 :
2021.06.29 10:00
연재수 :
39 회
조회수 :
4,706
추천수 :
135
글자수 :
158,650

작성
21.05.19 10:00
조회
672
추천
6
글자
8쪽

1. 선조의 들판 1

DUMMY

1. 선조의 들판



어깨까지 감싸는 긴 풀 속에서 앉아 있던 사내는 고개를 돌린다. 지친 남자 귀에 소리가 이상했다.


잠시 후, 수풀 사이 사람의 검은 형상이 보이고, 이상한 모자를 쓴 머리가 성큼성큼 위로 솟는다. 그리고 하나가 아니다. 모자 두 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라온다. 가던 길을 멈추고 다리를 쉬던 남자는 생각한다.


가만히 있어야 할까? 아니다. 보일 것 같다. 이 자리 수풀에 엎어지거나 누우면 안 보일 것이련만, 여기 누가 자신을 알 것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아닌 데다 굴복적인 행동이라 생각이 들어, 그냥 그대로 앉아서 보기로 했다.


설마 여기까지 자신을 쫓아왔을 리는 만무하다. 산등성이 근처 50자나 될 아담한 풀밭. 점차 발이 풀을 밟고 스치는 소리, 스윽 스윽 장딴지가 풀을 가르며 오고 있다.


남자는 긴장되기 시작했다. 턱! 챙!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칼집이 몸에서 떨어졌다가 붙으면서 때려 - 칼집 안에서 날이 출렁이며 때리는 철 소리. 당연히 철 소리는 칼이다. 허리띠에 금속 장신구가 있는 사람들이 내는 소리. 그런데 그 챙! 소리 무게가 작지 않다. 긴 칼을 차고 온다.


남자는 소리를 듣자마자 허리춤 칼자루에 손을 덮고, 시선을 다가오는 그들로 향한다. 외진 산야에서 누구를 믿는가.


다시, 남자는 덮은 손에서 칼자루를 잡는 손으로 바꾼다. 자기에게 어떤 해를 끼칠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남자는 놀란다. 다가오는 둘은 옷이 화려하고 이상하다. 처음 보는 옷이기도 하다. 아무리 떠올려도 자기가 봤던 것과 겹치는 게 없다. 수풀에서 바라보는 남자의 옷은 남루하기 짝이 없다.


옷은 한때 위세를 풍기던 병복(兵服)이지만 많이 헤지고 색깔이 변해 복식이 아니라면 나라를 구분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걸 병복이라고 알아볼 사람도 근처에 없을 거로 생각한다. 행색이 초라해서 집이 보여도 다가가기 힘들었다. 남자는 보름 이상을 해가 지는 방향의 좌측, 다시 말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다.


문득, 남자는 아차! 싶다.

벌레가 어느 틈엔가 입을 닫고 침묵한다는 걸 깨달았다!


‘매복은 아니지만, 매복의 섭리를 위배했다.’


그가 긴장했듯이, 걸어오는 둘도 섬뜩하더니 다가오는 속도가 느려진다. 수풀의 남자는 앞서 걷는 자와 눈이 마주친다. 앞사람이 뒷사람보다 화려했지만, 그렇다고 뒷사람이 그저 그런 건 아니다. 뒷사람 색상만 어두울 뿐 역시 값싼 옷이 아니다. 둘 다 가벼운 집안이나 직책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남자 몸에 힘이 들어간다. 앞서 오는 사람이 자신을 보고 심상치 않은 눈빛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위엄을 담은 눈이었는데, 얼굴이 풀로 반쯤 가려진 남자 또한 그런 눈에 눌릴 사람이 아니었다.


남자는 한 자루 창과 맨몸으로 전쟁을 겪으며, 무슨 옷을 입었건 어떤 무기를 들었건 쉬이 죽기는 매한가지인 다 그런 인간임을 안다. 신분 높은 사람이 가까이서 불귀의 객이 되는 것을 목격했고, 죽는 것은 병졸과 다를 바 없었다.


이제 남자는 자기 손의 칼만 있으면 기가 죽지 않는다. 이제 창이 아니라 칼이다. 위압의 상징 긴~ 칼. 종종 신분이 높아 보이는 사람도 남자와 마주치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멀어지곤 했는데, 저 이상한 옷의 사람은 눈을 돌릴 기색이 전혀 없다. 남자는 귀를 열어 사방을 살피지만, 그 둘 외에 다른 건 없어 보인다.


남자는 씁쓸한 표정으로 변한다. 자신에게 조아리길 바라나? 묻고 싶었다. 넌 몇을 죽여봤냐. 허리에 채운 칼을 좀 다루느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데 습관적인 허세야. 칼을 많이 쓴 사람으로 안 보이는데? 볼살도 뽀얗고 도톰하니 완력은 아니야. 저 사람이 갑옷을 벗은 장군 같은 거라면 내 금방 알아보지. 장수는 눈이 다르고, 갑을 벗으면 어깨에 떡살이 보여. 저 사람은 그저 아랫사람에게 소리만 치던 문장 쟁이야...


남자는 아주 천천히 일어난다. 천천히...란, 언제든지 검을 안정되게 뽑도록 왼손과 오른손이 검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로, 검은 어떻게 안정적으로 뽑는가에 따라 첫 합(合)을 좌우한다. 손은 칼을 잡고 하체는 디딤발을 평평하니.


보통 一二 합에 목숨이 떨어지거나 위중하게 다친다. 첫 합에서 상대를 베거나 균형을 흐트러트려야 자기가 산다. 얼어붙은 마음을 기백과 고함으로 과장해도 첫 합을 이루지 못하면 고스란히 칼에 맞는다. 도적이나 군병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대체로 기세 싸움이고 기술은 없다. 완력만 믿고 힘차게 휘둘러 제압하려 한다.


상대 자세가 물렁해 보이면 과감히 측도로 치거나 사선으로 긋는다. 만약 자세가 예사지 않으면 - 거리를 두고 있다가 벼락같이 발을 좁혀 손을 치고, 손에 상처가 나서 움찔하면 상대 칼 거리 안으로 들어가 과감하게 베거나 찌른다. 벤 크기가 크면 클수록 금방 죽는다. 그보다 더 강한 놈은 내 칼로 앞의 칼을 툭툭 치며 힘을 견주어본다.


하지만 저 북쪽 추운 곳의 오랑캐들은 그런 거 없다. 냥 달려든다. 둘 중 하나 죽는 것 외에 관심이 없다. 게다가 떼로 말을 타고... 죽음의 사자처럼 달려든다.


저 치는 어떤 것인가.

‘이거 봐. 세검으로 피를 닦아보지 않았으문 조아릴 마음 없으니 가.’


남자는. 눈과 양손은 움직이지 않은 채 천천히 일어나 발을 당당하게 어깨너비로 딛고 섰으며, 발바닥이 안정적으로 디디도록 좌우 밖으로 비틀어 밀고, 마지막으로 발가락을 차례대로 들었다 땅을 누른다. 가슴을 펴고 턱을 들어 상대를 거만하게 본다. 대신, 칼자루를 잡았던 오른손은 풀어 내리고 왼손으로 칼집만 잡는다. 공격 의사는 아니지만, 네가 공격하면 바로 뽑을 수 있다는 화해도 공격도 아닌 자세.


앞서 다가오는 화려한 자는 눈에 노기까지 떠오르기 시작했고, 남자는 더욱 불쾌감이 마음속에서 비집고 나온다. 이 크지 않은 풀밭에서 화려한 남자가 잠시 시선을 거두고 비켜 지나간다면 아무 문제 없다. 그러나 다가오는 화려한 자는 그런 비굴함을 택할 수 없고, 오히려 남루한 남자가 그런 행동을 해야 한다는 듯이 걸음이 팔자로 당당하게 벌어진다.


남자는 싸움터에서 느꼈던 검기와 살기를 느끼고 비켜나야 하는지 고민한다. 이 땅에서 저 사람은 높다. 그러나 더 고민할 것도 없다. 의복이 남자의 나라 것이 아니다. 남루한 남자는 여기 이방인이며, 자신이 도망자라는 걸 누가 알 리도 없다. 그걸 떠나 이 인적 없는 곳에서 무슨 상관인가.


산길을 가다 보면 바로 이러한 불콰함 때문에 죽어 자빠진 패자들을 보곤 한다. 둘 중 하나가 비켜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산속에서 마주칠 때 좀 위험해 보이는 부류는, 칼을 두 개 찬 사람이다. 칼은 적지 않은 셈을 쳐주는 재물이고, 이긴 자는 쓰러진 자의 칼을 보통 가지고 간다. 달포 비를 맞으면 녹이 슬어 인간에게 쓸모가 없어진다.


인적 없는 곳에, 누군가 엎어져 있네.

아니, 칼도 주인 곁에 떨어져 있구나 .

이긴 자는 승부만을 원했구나.

무서운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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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25. 산성에서 21.06.29 134 2 17쪽
38 24. 탈곡 21.06.17 97 3 12쪽
37 23. 잡놈 21.06.17 85 4 18쪽
36 22. 동검의 무사 21.06.16 80 3 17쪽
35 21. 접신 +1 21.06.16 79 5 19쪽
34 20. 옹진의 살수 21.06.15 82 5 15쪽
33 19. 패잔 21.06.15 68 4 11쪽
32 18. 손들의 싸움 21.06.14 79 4 14쪽
31 17. 옹진 큰물 21.06.13 77 4 8쪽
30 16. 유언 21.06.12 71 3 7쪽
29 15. 옛날 옛적 그 자리 2 +1 21.06.11 74 4 8쪽
28 15. 옛날 옛적 그 자리 1 21.06.10 111 3 7쪽
27 14. 눈이 결정한다 2 21.06.08 89 4 7쪽
26 14. 눈이 결정한다 1 21.06.05 98 3 8쪽
25 13. 그 사람은 멋졌다 2 21.06.04 92 3 7쪽
24 13. 그 사람은 멋졌다 1 21.06.03 80 4 7쪽
23 12. 물 건너편에 2 21.06.02 85 2 7쪽
22 12. 물 건너편에 1 21.06.01 93 2 7쪽
21 11. Intermezzo 21.05.31 92 3 9쪽
20 10. 입신양명 3 21.05.30 104 3 7쪽
19 10. 입신양명 2 21.05.29 86 3 7쪽
18 10. 입신양명 1 21.05.28 89 2 7쪽
17 9. 계루에서 사는 법 2 21.05.27 98 3 9쪽
16 9. 계루에서 사는 법 1 21.05.26 92 3 8쪽
15 8. 목경 2 21.05.26 80 3 7쪽
14 8. 목경 1 21.05.25 95 3 7쪽
13 7. 세상은 비만이 지배한다 2 21.05.25 85 3 7쪽
12 7. 세상은 비만이 지배한다 1 21.05.24 107 4 7쪽
11 6. 검은머리 짐승 3 21.05.24 94 4 8쪽
10 6. 검은머리 짐승 2 21.05.23 93 4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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