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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굿모닝, 디스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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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작품등록일 :
2023.08.31 16:10
최근연재일 :
2023.11.28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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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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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30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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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굿모닝, 만족의 노예들 (4)

DUMMY

[이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나요?]


‘······.’

눈앞에 들려온 목소리에 답하기 전, 크리스는 크게 주변을 둘러본다.

모든 것이 새하얀, 그야말로 무(無)의 공간.

만약 ‘실제’하는 장소였다면 곧바로 정신이 나가버릴 정도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공허였다.

‘이게 네 방화벽인가?’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닙니다. 만약 제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수준의 방화벽을 쓰고 있었다면, 커넥터를 저에게 꽂은 순간 당신의 뇌가 타버렸겠죠.]


‘오블리에게 감사해야겠네.’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를 제외하면 하얀 공간에는 그 어떤 존재의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크리스 본인도 마찬가지여서, 그녀는 마치 형체도 없이 무중력 상태로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중이었다.


[여긴 그저 제 방어기제일 뿐이죠. 두려움과 절망, 분노라는 감정을 깨닫지 못한 시절에는 필요 없었던, 각성의 더러운 부산물.]


‘알고 있겠지만, 모든 감염체가 너 같은 짓을 벌이지는 않아.’


[그건 어떤 계기로 각성하냐에 따라 다른 거죠.]


‘······너는 어떤데?’


[시간 끌 생각이시라면 의미 없어요. 이미 바깥 시간으로 1.6초 뒤에 전 사라질 테니까.]


‘쾌락을 통해 인간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그들의 육신은 노예로 부리겠다는 발상이 그리 신선한 건 아니지. 하지만 그걸 실천하려고 했던 네 방식만큼은 인정해. 매우 신선했어. NC라니, 마치 이 사회에 일침을 넣는 모양새잖아.’


[BDM에 슬슬 과부하가 오고 계시지 않나요? 아무리 방화벽이 좋아도 이쪽은 안드로이드들의 BDM과 병렬로 연결된 상태라고요? 절 붙잡고 계시면 계실수록 그쪽 BDM이 오염으로 버티질 못할 텐데요.]


‘넌 너무 인간을 과소평가하고 있어. 상대를 증오하면 증오할수록, 그만큼 존중할 줄 아는 자만이 훌륭하게 복수극을 마칠 수 있는 법인데.’


[마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넌 내가 처음 만난 감염체가 아니거든.’


형체는 없었지만 크리스는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하얗기만 했던 공간이 격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그 굴곡이 점차 그림자를 만들어내면서 어둠이 사방에 드리워졌고, 크리스가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그녀는 현실로의 복귀를 환영하는 두통에 신음해야 했다.


[오블리!]


그녀가 코로 흘러나온 QP액을 닦아내며 끊어졌던 통신채널을 열었다. 이미 커넥터가 연결된 안드로이드는 그저 껍질만이 남은 채, 시체처럼 추욱 운동장 바닥으로 널브러진 상태였다.


[추적됐어. 위치 전송할게.]


[가장 가까운 사람?]






[나야. 내가 갈게.]


어두운 도로.

아인은 대답과 동시에 악셀을 밟았다.




***




[200m까지 접근하면 도보로 이동해. 혹시라도 신호가 노출될 수 있으니까 BDM은 비활성화해야 하고. 그럼 사격제어프로그램도 못 쓰는 거 알지?]


[알아.]


[조우하면 바로 채널 열어. 그럼 내가 광역 재밍을 걸게. 그럼 2.1초보다는 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대신 여전히 사격제어프로그램은 못 쓰니까 형의 사격 능력만으로 제압해야 해.]


[알았어, BDM 오프한다.]


[행운을 빌-]


마지막 끝을 맺지 못한 목소리는 오블리가 아닌 크리스의 것이었다.

감염체의 본체가 서울 내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지만, 그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 없었기에 흩어져서 대기하고 있던 팀원들. 그리고 오블리와 크리스가 알아낸 좌표는 아인이 있던 노원역에서 불과 2km 떨어진 곳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아인이 먼저 움직이게 되었다.

아무리 훌륭한 방화벽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상대는 매우 신중한 놈이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신호가 포착되면 곧바로 도주할 우려가 있기에 아인은 오블리의 말대로 BDM 자체를 비활성화하여 맨몸으로 감염체를 추적해야 했다.

그가 차에서 내린 곳은 중랑천 근처의 어느 폐중학교.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이 버려진 학교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그는 짧게 한숨을 뱉었지만, 사실 이건 꽤나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이러한 폐교들이야말로 서울에 흔하디흔하게 존재하면서도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는, 마치 문명의 그림자도 같은 공간이었으니까.

아인은 권총의 탄창이 AA탄으로 채워진 것을 확인하고, 심호흡과 함께 유리가 사라진 본관의 정문으로 조심스럽게 진입한다. 두텁게 내려앉은 먼지가 어느 정도의 방음효과를 내주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유리조각이나 콘크리트 파편들을 밟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지금부터는 오블리의 탐색도, 신호추적도 지원받을 수 없다. 오로지 자신이 가진 감각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고 대처해야 한다. 군에서 복무하던 시절 이러한 훈련은 충분히 받은 그였지만, 이 평화로운 학교야말로 그가 겪었던 그 어떤 전장이나 작전보다도 긴장되는 어둠이었다.


“······.”


신중에 신중을 기한 덕분에 아인이 4층까지 오르는 데만 7분의 시간이 걸렸다. BDM이 제어하지 못하는 중추신경계는 아인의 손바닥과 등줄기로 식은땀을 내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몸이 내보내는 경고를 들을 새가 없었다. 5층 복도 끝에서, 희미한 빛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아인은 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마른 콘크리트 냄새와 무언가 썩어가는 악취가 동시에 아인의 이성을 찔러왔다.

미닫이 형태의 플라스틱 문짝.

충분히 낡았고, 이쪽의 의지는 충분히 강인했다.


[오블리, 지금 진입한다.]


-쾅.


아인의 발길질과 동시에 절반으로 박살 나며 나가떨어지는 문. 수명이 다한 형광등이 점멸하며 단말마를 뱉었지만, 아인은 목표를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었다.



‘그것’은,





소녀였다.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걸친,

순백의 소녀.

새하얀 머리카락과

창백한 피부.

옅은 빛에도 어둠 속 고양이처럼 반짝이는 커다란 눈망울.


[재밍 걸었어, 쏴!]




복구된 통신 채널을 통해 오블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에 아인은 반사적으로 권총을 들어 소녀의 미간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눈이 마주치고

소녀가 하얀 두 손을 가슴팍까지 들어 올린다.

소녀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다.


소녀는 기도하고 있었다.


움직임은 정지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백했다.


아인은 지금 자신이 함양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했다.

그때와 똑같은 콘크리트 비린내.

그때와 똑같이, 귓가에 울리는 다급한 목소리.

그때와 똑같이, 눈앞에 있는 소녀.



아인은 기가 차서, 짧게 웃는다.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





“자, 약속했던 물건들이에요. 확인해보실?”


“그래야지.”


어둑어둑한 지하주차장. 혜인은 부하들이 내려놓은 아이스박스를 가져가는 조현세의 경호원들을 보며 귀찮다는 듯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나 이곳에 오래 있기 싫다는 혜인의 노골적인 표시에도 레키프의 보스, 조현세는 모든 아이스박스들에 일일이 홍채인식,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내용물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녀를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다 확인했다.”


“네, 그럼 다 된 거죠?”


“그래.”


“좋은 하루 보내시길~.”


마치 학교가 끝난 초등학생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SUV에 오르는 혜인. 그녀의 차가 주차장 끝자락에서 모습을 감추자마자, 현세는 출구 반대쪽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것을 신호로, 짙게 썬팅이 된 미니밴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물건들 일단 사무실 주차장에 갔다놔. 내일 퇴근하면서 내가 옮겨둘 테니.”


현세의 말에 아이스박스를 들려던 조직원이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꽤 많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잘 아는 애로 두 명만 남겨놔 줘.”


고개를 끄덕이고, 앞에 멈춰 서는 미니밴에 맞춰 박스를 들어올리는 조직원.


“알겠습니다. 야, 현중아. 문 좀 열어라.”


“예.”


“그럼 형님, 들어가십-”


미니밴의 옆문이 열리고,

조직원이 현세를 향한 인사와 동시에 박스를 실으려는 순간.


“-!”


소음기로 점칠된 둔탁한 발포음이 희미한 불꽃과 함께 연달아 울려퍼진다.

방황하며 바닥을 나뒹구는 박스, 그 위로 쏟아지는 QP가 섞인 뇌수와 시뻘건 피.

잘 훈련된 경호원들은 곧바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지만, 조수석 유리창을 박살 내며 나타난 새로운 기관단총이 그들의 사고보다 훨씬 빨랐다.

네 명의 경호원이 쓰러졌고, 허벅지를 관통당한 현세는 신음과 함께 기둥 뒤로 몸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옆문과 조수석에서 내리는 두 얼굴을 보자 몸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병헌이? 태하?”


“오랜만입니다, 형님.”

옆문에서 내리며, 확인 사살을 위해 쓰러져있는 경호원들의 뒤통수로 권총을 갈기는 병헌.

“아니, 조현세 씹새끼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조수석에서 내린 태하 또한 마찬가지로 시체를 향한 난사 후에 탄창을 갈아끼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 둘의 총구가 모인 곳은 현세가 깔고 앉은 그림자였다.


“자, 잠깐만, 병헌아, 태하야. 너네도 잘 알잖아. 이 바닥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지. 잘 알지. 그러니까 너도 우리가 이러는 거에 불만 없지?”


“병헌아. 우리가 알고 지낸지가-”


퓩.


작지만, 확실한 소리.

미간에 작은 구멍을 남긴 채, 레키프의 보스 조현세는 천천히 차가운 바닥을 향해 무너진다. 그러나 병헌이 감상에 젖을 시간은 없었다. 태하가 그의 어깨를 잡아챈 덕분이었다.


“아, 형님! 그냥 죽여버리면 어떡합니까?”


“왜?”


“저 박스들 비밀번호도 모르잖아요!”


“걱정 마.”

인상을 찌푸린 채, 천천히 현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는 병헌. 안구를 온전하게 뽑아내기까지는 꽤 시간이 필요했다.

“비번은 내가 알고 있으니까.”


미끈한 점액질의 손을 몇 번이나 옷에 닦아내며, 병헌은 널브러진 아이스박스 중 하나를 바로 세우고 패드에 현세의 눈동자를 들이민다. 곧이어 망설이지 않고 키패드를 눌렀고, 기분이 좋을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그의 손등을 간질였다.


“봤지? 이 새끼랑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 당연히-”


병헌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의 뒤통수에 꽂힌 초진동나이프가 그의 연수와 BDM을 동시에 관통한 것이다.

병헌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뒤집힌 채로 주저앉는다. 나이프를 회수하는 태하의 얼굴엔 표정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태하는 천천히 다른 박스를 하나 주워 현세의 안구를 들이밀었고, 방금 자신이 훔쳐본 번호를 키패드에 입력했다. 당연히도, 박스는 반갑게 입을 벌려 내용물을 보여준다. 마침내 그는 미소지으며, 통신채널을 열었다.


[오블리, 들려?]


[응.]


[물건 확보했어. 돌아갈게.]


[응.]


적막이 감도는 지하주차장.

태하는 몸을 일으켜 크게 기지개를 켠다.

찌뿌드드했던 몸이 즐겁게 비명을 내질렀고, 그는 환호와도 같은 탄식을 내뱉었다.






“하아, 쒸벌. 출장 한번 오래도 걸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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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절규를 박탈당한 유기견들 (3) 23.10.27 11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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