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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권 님의 서재입니다.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9,230
추천수 :
927
글자수 :
790,487

작성
22.08.2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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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적격 심사

DUMMY

나는 그것의 머리카락을 잡아, 잘려 나간 상반신을 들어 올렸다. 그건 아직 말을 할 수 있는 상태였다.


"우리는 초면이 아니지. 사월의 컨테이너에서 한 번 만났어."

"이엘 알체이라."

"모르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아리나딘의 사자, 맞나?"


모르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환영이다. 이번에야말로 알아내야 할 게 산더미처럼 쌓였으니까. 그것의 눈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뒤에서 유리오가 으, 하고 질색하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만에 만나는 건데, 이런 지저분한 모습이나 보여줘야 한다니. 하지만 이건 진짜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안을 더듬다 보니 단단한 돌 같은 조각이 만져졌다. 힘을 주어 끄집어냈다.


"잘 지냈나 보네."

"뭐야, 그 어색한 대사는?"


만나자마자 이런 질타를 들을 줄이야. 나는 들고 있던 그것의 상반신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 안에서 뽑아낸 돌 조각만 있으면 충분했으니까.


"일단 여기서 나가자."

"어떻게 나가?"

"저 위로."


내가 가르고 들어온 위쪽의 균열을 가리켰다. 다행히도 유리오는 다친 데 하나 없이 멀쩡해 보였다. 문제는 저쪽 가로등 앞에 쓰러져 있는 남자인데.


정말 남자친구인가?


하긴, 남자친구든 남자친구의 할아버지든 일단 살려서 데리고 나가는 게 중요하겠지만.


"다시 물어봐야 할 거 같은데, 어떻게 나가?"

"음~ 그러니까. 그냥 나가면 되는데···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하늘, 그러니까 하늘처럼 보이는 곳에 나 있는 균열은 내 검으로 만든 것이었다. 놀랍게도 제국 사냥꾼들의 전성기에는 안전사냥부에서 직접 무기를 지급해 주고는 했다. 나는 그때 검을 골랐다.


마법적인 존재를 파괴하는 검.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없는 나에게는 이게 가장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으니까.

이렇게 강한 결계에도 먹힐 줄은 몰랐지만.


"여기는 가짜 공간이야. 그건 알지? 허공을 걷고 싶다고 생각하면 걸을 수 있어. 내가 저 위에서 뛰어내렸는데도 어느 한 군데 부러지지 않았다는 걸 보면 알잖아."

"안 본 사이에 말이 많아졌네, 이엘."

"원래 나이를 먹으면 말이 많아진단다."


나는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정도로 앳된 소년이었다. 왼쪽 눈을 안대로 가리고, 피 묻은 옷을 입고 있었다. 숨은 붙어 있었지만, 의식이 없는 모양이었다. 혼자 저 위로 올라가라고 할 수는 없겠군.


"아까 대답을 못 들은 거 같은데, 남자친구냐?"

"아니. 나한테 할 말이 그거밖에 없어?"


나라고 이런 말을 하고 싶었겠어. 좀 더 멋지고 감동적인 말을 하고 싶었다고. 하지만 이게 나라는 인간인 걸 어쩌겠어?


나는 남자의 검을 풀어 유리오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그를 대충 등에 둘러멨다.


"시범 보여줄 테니까, 잘 따라 해."


저 하늘 위로 난 균열을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내가 걸음을 옮기면 거기에 길이 존재했다. 돌아보자 유리오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팔짱을 끼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


마지못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걸 보고 나서야 다시 발을 뗐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이 공간이 곧 무너지려 한다는 뜻이었다.


"서둘러."


나와 유리오, 그리고 이름 모를 소년. 세 사람은 이공간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 우리는 아레인스터로 가는 대로에 서 있었다. 주위는 방금까지 우리가 있었던 곳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이었다.


"제대로 나온 게 맞아?"

"그래, 확실해."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비가 오잖아."


그 말을 신호처럼 나와 유리오는 달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 커다란 아레인스터의 정문이 보였다. 그 아래까지 가서야 겨우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우리는 정문 안쪽의 넓은 벽에 기대 나란히 섰다. 금방 그칠 비처럼 보였다.


"안 무거워?"

"안 무거워."


허세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 레몬을 업었을 때는, 솔직히 중간에 집어 던지고 싶었는데.


"다친 데는 없구나."


내가 그렇게 말하자 유리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 애는 눈썹 언저리를 씰룩거리더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가만히 눈을 내리 깐 그 옆얼굴은 내가 얼마 전에 도달에게 받았던 사진과 꽤 비슷했다.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뭐?"

"그리고 그건 또 뭐였어?"


"그게 스스로 아리나딘의 사자라고 소개하지 않든?"

"그런 말을 한 것 같기도 해."

"그래, 말 그대로야. 그건 아리나딘이라는 신을 모시는 사자야. 그게 이 근처에 있다는 건 네 친구라는 사람이 알려줘서 안 거고."


유리오가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반가운 소리를 들은 사람의 눈빛이었다.


"친구라니, 누구?"

"흰옷을 입고 커다란 후드를 쓴 여자. 아실카 시칼트라 학장을 찾아왔던데."


하지만 설마 유리오가 그 일행과 함께 행동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들어야 할 이야기가 한둘이 아니었다.


"서비. 서비는 어디 있어? 다른 사람들은?"

"아마 별일 없다면 시칼트라 학장의 집에 있겠지. 성물을 가지러 가겠다고 학장을 찾아온 거니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적당한 말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혹시라도 파리스가 위험에 처할까 봐 곁을 지키고 있었다. 충돌이 발생하면 내가 개입해서 해결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아, 맞다."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등에 둘러멘 소년은 아직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죽는 건 아니겠지? 차라리 비를 맞으면서라도 안전한 곳에 옮겨 놓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여자친구랑은 헤어졌어?"

"뭐? 무슨 여자친구?"


어떤 여자친구를 말하는 거지? 잠시 고민했지만, 결론은 쉽게 나왔다. 유리오가 기억할 만한 내 여자친구라면 실비나밖에 없었으니까.


"헤어진 지 오래됐는데."

"아실카 시칼트라라는 이름을 들으니까 그 기억이 났어. 그 여자가 맨날 시칼트라인지 뭔지 욕하던 게 떠올라서."

"너 사람 이름 되게 잘 외우는구나."


나랑 반대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학장 집까지 걸어 올라가려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의무실 같은 데가 있다면 맡겨야겠어."


나와 유리오는 산드린을 처음 만났던 커다란 지도 앞에 섰다. 다행히 의무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우리는 어색한 분위기를 헤치며 걸었다.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을 건네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뭘 위해 이 애를 찾아다녔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대답할 말은 있었다. 하지만 막상 살아 움직이는 유리오의 모습을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이 애를 집으로 데려갈 자격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런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내 스승에게도 없을 거라는 생각.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뭐, 그래. 이엘도. 원한을 사서 암살당하거나, 어디 한 군데 못 쓰게 되거나, 그런 일이 없어서 다행이네."


"왜? 내가 암살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음."


유리오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이엘을 암살할 만한 사람이 떠오르지가 않아."

"너무 과장 아냐?"


"아닌 것 같아."

"왜?"

"아까 그거 있잖아. 난 그게 나와 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어. 그런데 이엘은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두 토막 내더라고."


의무실에 도착해서 소년을 맡기고, 파리스에게 통신을 연결했다. 거의 바로 연결됐다.


"네, 이엘 씨."

"두 사람은 확보했습니다. 한 명이 상태가 좋지 않아서 정문 근처의 의무실에 와 있어요. 일단 여기서 소견을 들어볼 생각입니다. 다른 일행은요?"

"음. 말하자면 긴데, 대표라는 분이 학장님과 독대하고 계세요. 다른 분들은 응접실에 계시고요."


학장과 독대라. 아무래도 이야기가 그리 쉽게 끝나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정문 근처의 의무실이면 아마 남쪽 탑이겠네요. 거기라면 시즈리안이 잘 봐줄 겁니다."

"마무리하고 그 근처로 가겠습니다, 일단은."

"그러시죠."


옅은 녹색의 머리칼을 길게 풀어 내린 의사가 소년을 보고 있었다. 문득 모모가 마법 의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법 학교에 있는 의사들이라면 당연히 마법 의학을 공부했겠지.


사월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외상이 없는데 빈혈기가 있네요. 의식을 찾지 못하시는 건···마력 신경계를 다쳤기 때문이고요. 이건 약을 드리죠. 한 시간 안에 깨어나실 겁니다. 이틀 정도는 아침저녁으로 약을 먹고, 마법을 사용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소마법이라고 해도요."


이 소년은 마법사였나. 솔직히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저 커다란 검을 메고 다니는 것 하며, 복장이나 소지품조차.


나는 의사가 챙겨준 약을 받았다. 그리고 몸이 좋지 않은 학생들이 누워 쉰다는 침대에 소년을 남겨두고 나왔다.


"어떻게 할래, 여기 두고 갈까? 아니면 여기 남을까."

"으음."


물론 둘러메고 다른 일행들이 있다는 곳까지 가는 방법도 있지만. 유리오는 잠시 고민하더니, 복도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다리자."

"그래, 그러고 싶다면."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4년은 어린애가 어른이 될 수도 있는 시간이지. 내가 찾던 건 집 나간 어린애였는데, 다시 만난 건 한 명의 어른이었다.


"할 이야기가 있는데."

"뭔데?"


유리오는 턱을 괸 채 뚱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볼 게 있나 해서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더니, 그 벽에 걸린 초상화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니 신 말이지. 제국 사냥꾼이 될 때 사냥의 숲에 가서 계시를 받았잖아. 기억나?"

"기억이야 나지."


그것보다는 초상화의 눈동자가 움직인다는 점이 훨씬 더 신경 쓰이지만.


"내 일행은 그 아이니 신을 이 땅에 강림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대."

"그래? 이 땅에 강림시킨다는 건 무슨 뜻인데? 육체가 있는 존재가 된다는 뜻인가? 하늘에서 목소리만 내리는 존재가 아니라."


"아마 그럴걸. 나도 자세히는 몰라. 내 일행은 신관까지 있는 순례자들이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거든. 저 안에 누워 있는 녀석도 신관이야. 그렇게까지는 안 보이지?"


신관보다는 차라리 마법사인 쪽이 훨씬 어울릴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저 소년이 정말 유리오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는 거니까. 괜히 나쁘게 말했다가 정말 사귀는 사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라고.


"그래서 성물 일곱 개를 모으고 있대. 성물 일곱 개와 신의 그릇이 있으면 강신 의식을 위한 준비는 끝나는 거지."

"그런 건 꼭 일곱 개더라."

"나도 그렇게 말했는데 녀석들이 웃더라고. 뭐가 웃긴다는 거야, 난 진지한데."


어쨌든, 이건 이미 파리스를 통해 들은 이야기였다. 내가 궁금한 건 좀 다른 내용인데. 신을 강림시켜서 대체 뭘 할 생각이라는 건지, 그 신의 그릇이라는 건 대체 뭔지. 왜 그 순례자 일행이 유리오와 행동을 함께하고 있는 건지.


그런데 도무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마치 사춘기가 온 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부모가 된 기분이었다. 물론 내가 이 애한테 부모 같은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때는 그 비슷한 존재였다고 말 못 할 것도 없으니까.


"그 신의 그릇이라는 건 인간이니?"


이건 또 무슨 말투야. 그만 혀를 씹을 뻔했다. 다행히 유리오는 웃지 않았다.


"맞아. 순례자들이 나한테 가르쳐 준 바로는, 신을 직접 만났던 사람만이 신의 그릇이 될 수 있다고 했어. 그리고 아리나딘의 사자라는 녀석이 내게 한 가지 사실을 더 알려줬는데."


"뭐였는데?"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 자만이 아이니의 그릇이 될 수 있대."


그럼 일단 나는 탈락인가.


"그리고 아이니는 남자의 몸에 들어간 적이 없대."


뭐야, 사람을 죽인 적이 없어도 탈락이잖아. 유리오는 심각한 표정으로 초상화와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차마 거기에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신의 그릇이 되기 위해 사월을 떠난 게 아닌가 생각했어. 하지만 아리나딘의 사자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엄마는 신이 될 수 없겠지."

"잠깐, 왜 그런 생각을 한 건데?"


"엄마가 그런 말을 남겼거든. 아이니를 찾아서 떠나겠다고."


나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내가 입을 열기 전에 다른 곳에서 대답이 떨어졌다.


"이쉐 알첸브라임이 그런 말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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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왕의 귀환 22.11.23 35 1 12쪽
134 빈틈 +1 22.11.20 74 2 12쪽
133 꽃의 공주 22.11.19 30 2 12쪽
132 신의 부산물 22.11.18 36 2 13쪽
131 진짜 이야기 +1 22.11.17 55 2 13쪽
130 책의 무덤 +1 22.11.16 33 3 12쪽
129 복수 22.10.08 44 3 13쪽
128 맹금류와 작은 새 22.10.07 35 3 13쪽
127 이 싸움이 끝나면 22.10.06 31 3 13쪽
126 마법의 헤어드라이어 22.10.05 37 4 12쪽
125 발라딜로와 기묘한 상자 22.10.04 49 4 13쪽
124 정보 교환 22.10.01 27 4 13쪽
123 금연 구역 +1 22.09.30 40 4 13쪽
122 하산 +1 22.09.29 44 4 12쪽
121 불행에 대하여 22.09.28 49 4 13쪽
120 귀농한 사냥꾼의 삶 22.09.27 38 4 12쪽
119 뻐꾸기 사냥 +1 22.09.26 66 4 12쪽
118 북쪽 끝 +1 22.09.23 44 4 13쪽
117 사자와 사도 +1 22.09.22 51 4 12쪽
116 인질극 +1 22.09.21 75 4 12쪽
115 결코 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 것 +1 22.09.20 50 4 12쪽
114 꼬리 잡기 +1 22.09.18 56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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