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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또 다른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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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152 회
조회수 :
23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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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9
글자수 :
1,674,356

작성
14.02.15 15:32
조회
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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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글자
22쪽

4. 고통을 먹는 자 (8)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8.

시에니투스에서 불과 1㎞ 떨어진 숲.

이따금씩 바람이 나뭇가지를 쓸고 지나갈 때마다 울리는 사락사락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린다. 풀벌레조차 울지 않는 고요함. 가지에 앉은 산새도 침묵을 지켰다.

사람들이 발걸음을 죽여 움직이고 있었다. 다양한 무기로 무장하고, 방어구도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회색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바하르칼 용병이었다.

이들은 비밀 회담이 이루어질 장소에서 사람들을 내쫓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원래 인적이 드문 장소였기에 실제 유저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조용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이들에게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 그러니까, 그 놈들 때문에 오히려 이쪽에서 인명피해가 발생했다고?

- 그래! 특히 쫓기는 녀석! 수단과 방법을 안 가려!

- 그렇다면 차라리 죽여 버리는 게…….

- 안 그래도 지금 안티 바하르칼 연합이 너무 빨리 결성돼서 숨 막히는데, 적을 늘릴 셈이냐?

- 그렇지만 위쪽에서 내려온 명령은, 죽여도 된다지 않았나?

- 대신 바하르칼 용병인 걸 들통 나선 안 되지.

- 뭐가 문제지? 부대장급이 직접 나서서 죽이면 되잖아?

- 빈사상태에 빠졌다.

- 뭐?

- 부대장이 빈사상태에 빠졌다고.

머슬가이는 순수한 의미에서 놀랐다. 부대장급은 실질적인 무력면에서 부대원의 3배정도 강한자로 선발된다. 부대장이라면 임무수행을 위해 목숨을 바칠 자들이지, 어정쩡하게 피해만 입고 물러설 자들이 아니다. 그런 자를 죽인 것도 아니고, 빈사상태에 빠뜨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 그렇게 대단한 자야?

- 타이밍이 너무 나빴어. 부대장이 풀숲에서 일어나 방패로 때려눕히려 했는데…….

- 했는데?

- 한발 앞서 풀숲에 뛰어들더니, 진각으로 머리통을 찍어버렸어.

- …….

- 다른 조들도 마찬가지야. 이쪽에서 뭘 할라치면 그런 식으로 당해버려. 게다가 뒤쫓는 녀석들은 더 골치야.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시끄럽게 군다고.

- 그러고 보니 뭔가 시끄럽긴 하군.

- 이제 너희들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 녀석들을 멈춰줘.

- 믿고 맡겨라.

머슬가이는 채팅을 마치고 명령을 하달했다.

“이쪽으로 불청객이 온다. 다들 신분을 숨기고 흩어져 요격한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벗겨진 망토들이 인벤토리로 빨려 들어갔다. 망토를 고정시켜주던 금속장식도 함께. 그것뿐인데도 이들의 제멋대로인 무장 때문에, 겉보기에는 바하르칼 용병과 연관이 없어보였다.

머슬가이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망토와 금속장식을 떼어냈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경고메시지가 떠올랐다.


<경고! 신분을 증명하는 장비를 해제합니다.>

<경험치의 30%가 소멸합니다.>

<모든 스탯이 (-30)이 됩니다.>

<마이너스 된 스탯은 봉사활동을 통해 원상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용병신분으로 악행을 저지를 경우엔 패널티를 받기 때문에, 이렇게 신분을 감추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이 정도다. 그것도 원래대로라면 부대장이 혼자서 감당해야 할 패널티다. 하지만 사안이 심각하다고 판단한 머슬가이는 자신의 조원 모두에게 같은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신분을 숨긴 상태에서는 범죄를 저질러도, 그건 유저 개인의 문제가 된다. 그렇기에 조원들의 반응은 조심스러웠다. 잘못하면 카오틱이 될 수도 있으니.

“대응은 어느 정도 수준으로 할까요?”

“일단은 제압. 실패할 경우엔 목을 친다. 칼은 내가 쥔다.”

칼을 쥔다는 표현은, 죽이는 역할은 자신이 직접 맡겠다는 은어다. 부대장인 머슬가이가 카오틱이 되는 불이익을 감당하겠다는 의미. 그 말을 듣자 조원들이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더 오션이 오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터진 인육만두 사건 때문에, 아직까지 카오틱 사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카오틱 상태로 게임하기는 어렵다.

“가까워지는군. 모두 흩어져라. 아처들은 제압사격을 하고, 나머지는 포위망을 구축한다.”

누군가 고래고래 목청을 높이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정확히 이쪽으로 오고 있다.

조금 전 다른 조원과 나눈 채팅을 떠올리며 머슬가이는 긴장의 끈을 바싹 조였다.

‘정확히 우리를 노리는 자다. 그렇지 않고서야 부대장들이 모조리 당할 리 없지.’

잠시 후 헐레벌떡 뛰어오는 자가 있었다. 한손엔 활을 들고, 갈색과 짙은 녹색이 섞인 옷을 입는-전형적인 아처였다. 아처가 가까워지자 머슬가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청객의 얼굴이 어쩐지 낯이 익었던 것이다. 그때 조원 하나가 급히 채팅을 걸어왔다.

- 빌헬름텔입니다!

머슬가이는 눈을 치떴다. 낯이 익은 건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최초로 집단공격기를 성공시킨 유저로서, 한때 센세이션을 일으킨 장본인이 빌헬름텔이다.

‘한 달이나 게임방송에 이름이 오르내린 유명인이니 낯이 익을 수밖에.’

게다가 유저들 사이에서도 인망도 높다. 그런 자가 같은 유저에게 사살당한다면, 이런 저런 시끄러운 일이 생길 것이다. 이제 곧 레미라 침공이 이루어질 텐데, 그런 잡음이 생기면 곤란한 건 이쪽이다. 아무리 신분을 숨겼어도, 이 근처에서 바하르칼 용병들이 자주 활동했던 건 사실. 빌헬름텔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나오면, 안티 바하르칼의 결속은 더욱 견고해지리라.

“그렇겐 안 되지! 다들 빌헬름텔님을 보호하라! 뒤쫓는 자에게 제압사격!”

명령이 내려지자마자 화살이 날아들었다. 빌헬름텔의 뒤편으로 뛰어든 전사들은, 등에 짊어진 타워실드를 바닥에 쿵 소리가 나게 찍었다. 빌헬름텔을 추격하던 자들은 몸을 돌려 도망쳤다. 그때 빌헬름텔이 활을 높이 쳐들었다. 곡사로 날아간 화살이 떨어지면서 도망자 하나의 다리를 맞혔다.

“우악!”

빌헬름텔은 방향을 틀어 방패전사를 지나쳐 달렸다. 그리고 허리춤에 걸어둔 작은 석궁을 겨누었다.

“꼼짝 마!”

허벅지에 화살을 매단채 꿈틀꿈틀 바닥을 기던 사내의 동작이 멈췄다. 억지로 삐걱대는 목을 움직여 뒤를 돌아본 사내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에……헤헤. 좋은 날씨죠?”

“닥쳐라…이 노상강도 놈아.”

빌헬름텔은 거친 손놀림으로 화살대를 부러뜨렸다. 그리고 노상강도의 상처에 발을 올리더니 지그시 힘을 주었다.

“캬악! 잠깐잠깐! 거긴……흐헉!”

노상강도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빌헬름텔의 발에 매달렸다. 빌헬름텔은 노상강도의 머리를 한 대 걷어 차주고 물러섰다. 어느새 주변은 유저들로 포위되어 있었고, 빌헬름텔이 가까이에서 석궁을 들이대고 있다. 노상강도는 얌전히 두 손을 들어보였다.

“항복.”

빌헬름텔은 인벤토리에서 밧줄을 꺼내더니 노상강도의 몸을 꽁꽁 묶었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유저들을 둘러보았다.

“리더가 누구요?”

상황이 정리된 듯하자 머슬가이가 나섰다.

“접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와주시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습니다.”

“허허. 그렇습니까?”

머슬가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여기까지 오면서 부대장급 용병을 교묘하게 밟아놓은 자다. 게다가 레드 오션에서부터 유명세를 떨친 샤프슈터. 그런 실력자가 노상강도 따위를 상대로 애 먹었을 리 없다.

‘무슨 꿍꿍이냐, 빌헬름텔.’

그러나 속마음과는 달리 머슬가이는 활짝 웃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그 유명한 빌헬름텔님이셨다니. 제 다른 동료들은 카오틱 유저인줄 알았다더군요. 그래서 공격하려고 했었는데.”

“여기까지 오면서 숨어 있던 사람을 몇 만났는데, 그들도 일행이었습니까?”

“네. 같은 길드지요.”

“죄송합니다. 그런 줄 알았으면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을 텐데.”

빌헬름텔이 허리를 굽신거렸다. 저쪽에서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나오자, 머슬가이는 마음이 약간 누그러졌다.

‘유명인사에게 사과 받는 기분도 나쁘진 않군.’

하지만 그런 기분을 만끽할 여유는 없었다. 시야 한구석에 보이는 시계는, 비밀 회담까지 10분도 남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머슬가이는 서둘러 빌헬름텔을 돌려보내기로 했다.

“이미 벌어진 일은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빌헬름텔님의 입장에서야 그럴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에게 협조를 해주셔야겠습니다. 저희는 지금 길드원들 간의 친목을 다지기 위해, 이벤트로 술래잡기를 하던 중입니다. 이제 곧 술래가 나올 시간이 되어 가는데, 외부인이 있는 건 좀 곤란하니까요.”

“아! 그래서 숨어들 계셨던 거구나! 제가 눈치가 없었군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어……그런데, 한 가지 부탁 드려도 되겠습니까?”

“뭡니까?”

“이 노상강도를 나무에 매달아놓을까 하는데, 다른 분들이 건드리거나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머슬가이는 의아해했다. 죽이지 않고 꽁꽁 묶어 놓기에, 끌고 가려는 건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 두고 가다니?

“실은 제 일행이 이 녀석에게 당했지 뭡니까. 조금 전 전화가 왔는데, 이 녀석에게 꼭 분풀이를 하겠다고 난리입니다. 하지만 이 근처에는 감옥 같은 것도 없고, 시에니투스 같은 중립지대에 들어가면서 묶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게다가 저는 내일쯤 되어야 접속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설명을 들은 머슬가이는 사정을 이해했다.

요컨대, 빌헬름텔은 술래잡기(사실은 비밀회담)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피해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 시간동안 데리고 다니기 힘드니, 이곳에 묶어놓고 가겠다는 뜻이고.

“그런 이유라면 괜찮습니다. 단, 저 녀석에게 재갈을 물리고 복면을 씌워야 합니다. 귀도 막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러분들께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빌헬름텔은 인벤토리에서 초보자 옷을 꺼내 찢더니, 노상강도의 입에 천 조각을 물렸다. 그리고 아예 머리통을 둘둘 감아 매듭지어버렸다. 게다가 밧줄을 더 꺼내들더니, 노상강도의 몸을 미라처럼 친친 감아버렸다. 숨은 제대로 쉴 수 있을까 의문스러울 정도.

하지만 노상강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읍읍읍! 읍읍읍읍!”

“그래그래. 내 동료가 부활하면 귀여워해줄 테니까,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라.”

살벌한 내용을 중얼거리며 빌헬름텔이 손을 탁탁 털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머슬가이에게 죄송하다며 사과를 하곤 떠났다.

“방향은 시에니투스로군. 혹시 모르니까 따라가 봐.”

조원 하나를 지목해 빌헬름텔에게 붙인 머슬가이는, 보고를 위해 채팅을 켰다. 잠시 후 머슬가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까이에 있던 조원이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W와 함께 있던 자가 빌헬름텔인 것 같더군.”

“그럼 노상강도에게 죽은 동료란 게?”

“정황상 그런 것 같다.”

답변하는 머슬가이는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오랫동안 함께 손발을 맞춰온 조원들은 그 기색을 눈치 챘다.

“어째서 안드리크가 아닌 시에니투스로 간 건지 궁금한 거로군요?”

“맞다. W는 아직 시에니투스를 밟지 못했어. 그렇다면 부활지점은 안드리크다. 그런데 어째서 안드리크로 가지 않느냔 말이다.”

“뭔가 계획이 있어서겠지요. 이제 더 이상 상관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노상강도는 저렇게 단단히 묶어두었고, 빌헬름텔은 멀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동영상까지 찍어두었습니다. 나중에 허튼 수작을 부리면, 이걸 솔티워터 같은 사이트에 올려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조원들이 찍어둔 동영상에는 빌헬름텔이 잘못을 시인하는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죄 없는 일반유저를 일방적으로 공격한 사실이.

이 내용이 퍼져나가면, 빌헬름텔은 위선자로 낙인찍혀 게임에서 많은 이에게 경원시 당할 것이다. 원래 100가지 착한 일을 해도, 1가지 나쁜 일을 하면 그게 큰 오점으로 남는 법.

부하의 말이 맞다.

“그래. 동영상이 있으니까. 허튼 수작은 못 부리겠지.”

빌헬름텔을 미행하도록 시킨 조원의 보고까지 들어오자 머슬가이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 빌헬름텔이 여관에 짐을 풀었습니다. 사흘간 묵는다며 여관비도 선금으로 치렀습니다.


◇◇◇◇◇◈◇◇◇◇◇◇◈◇◇◇◇◇◇◈◇◇◇◇◇


여관에 들어선 빌헬름텔은 파티채팅을 열었다.

- 어떻게 됐습니까?

- 눈치 못 채더군요.

- 그럼 지금부터 계획대로 하는 겁니다. 일단 여관의 마스터에게 접선하십시오.

- 혼자서만 여관에 편히 있으니 미안해지네요. 갑갑할 텐데.

- 괜찮습니다. 서바이벌 마스터리나 수련하고 있겠습니다. 어차피 이거 레벨 못 올리면, 빠져나가는 건 힘들지 않습니까.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채팅을 끈 빌헬름텔은 즉시 카운터로 가서 주인을 찾았다.

“네. 무슨 일이십니까, 손님?”

여관의 주인은 풀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파리한 안색의 노인이었다. 가끔씩 잔기침을 했지만, 대화중에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객실에 유령이 나오는 것 같더군요.”

빌헬름텔이 꺼낸 말은 약속된 암호의 첫 구절. 하지만 노인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무슨 헛소리냐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벌건 대낮에 유령이라니. 재밌으신 분이로군요. 그 유령이란 건 어디서 나왔습니까?”

“엎지른 물 컵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유령이 뒤집어 쓴 보자기는 무슨 색?”

“몰라요. 눈에 안보이니까 유령이죠.”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점원을 불렀다.

“갈레온! 여기 손님께 욕실 안내해드려라!”

탁자를 닦던 소년이 뛰어왔다. 낡고 해진 옷을 입은 소년은 헤헤 웃더니, 카운터 뒤편의 문을 열고 앞장섰다. 그곳은 작은 창고 같은 곳이었다. 아무리 봐도 욕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빌헬름텔이 멀뚱거리는 사이, 소년은 부지런히 움직여 상자를 구석에 치웠다. 높이 쌓인 상자가 자연스레 쪽창을 가려서 방이 어두워졌다. 그러자 소년이 낡은 램프를 가져와 불을 붙이고는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나보고 저기 가라고?”

소년은 말없이 램프를 쥐어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빌헬름텔은 소년이 가리키는 구석을 노려보았다. 입구 비슷한 것도 없는데 들어가라고 하니 황당할 따름이다. 하지만 곧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램프 속의 불꽃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뒤였다.

빌헬름텔은 소년이 가리킨 벽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아무런 저항 없이 손가락이 쑥 들어간다. 벽의 모습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거였군.”

빌헬름텔은 몸을 쑥 들이밀었다.

“간만의 손님이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자가 의자를 밀어주었다.

“앉지 그래?”

빌헬름텔은 사양하지 않고 엉덩이를 걸쳤다. 램프는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려놓았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후드까지 눌러쓰고 있는데 부득불 얼굴 좀 보자며 보챌 이유는 없다.

“당신이 정보 상인?”

“그럼 누구라고 생각하나? 알고 찾아왔겠지만, 여긴 정보시장이다. 대금은 선불로 한 번에 지급해야 하고, 설사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해도 돌려받지 못한다. 이해했나?”

빌헬름텔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홧김에 무력을 행사하면 넌 죽는다. 혹시라도 이방인이라 죽여도 부활하는 점을 믿고 까분다면…… 몇 번이고 죽여주겠다. 이방인은 죽는 횟수를 거듭 할수록 약해진다더군.”

“지루하군. 본론으로 넘어가지. 난 정보를 팔러 왔다.”

“뭐?”

“정보를 팔러 왔다.”

“장난하지마라.”

“하지만 사실인 걸. 난 정보를 팔러 왔다.”

스르릉. 폭이 넓은 칼이 빌헬름텔의 목에 겨누어졌다. 두께도 새끼손가락만큼이나 두텁다.

커틀라스. 베기에 특화된 날붙이로, 주로 해적들이 사용하는 무기다.

“너무 성급하군. 나 같은 건 언제든지 죽일 수 있잖아? 그렇다면 일단 얘기나 들어보는 게 어때?”

“곧 죽을 놈 장단에 어울려 달라는 거냐? 그런 취미는 없다.”

“그렇다면 짧게 말해야겠군. 시에니투스에서 많은 이들이 죽어나갈 것이다.”

정보상인은 킬킬거렸다.

“어이가 없군. 협박을 해? 미친 거냐? 그런 거냐?”

시에니투스는 무법자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서로를 조심하며 몸을 사린다. 그래서 생겨난 룰이, 살인은 절대 안 된다는 것. 다른 곳에서 도살자로 악명높은 자도, 이곳 시에니투스에서만큼은 자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법자들에게마저 공적으로 몰려 척살 당하기 때문.

그런데 빌헬름텔은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죽는다고.

“협박도 아니고, 미친 것도 아니다. 난 정보를 팔러왔다.”

빌헬름텔은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았고,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 여기서 정보를 팔겠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인 걸 알면서도 직접 찾아온 배짱이 정보상인의 마음을 움직였다.

“어디……죽기 전에 말이나 해봐라.”

“만약 이 정보가 진짜라고 확인되면, 충분한 대가를 치르기 바란다.”

“흐흐흐……과연 그럴까?”

빌헬름텔은 인벤토리에서 작은 수정구를 꺼냈다. 여관에 들르기 전, 잡화점에서 구입한 원거리 통신용 수정구다. 흙을 한줌 꺼내어 바닥에 깐 빌헬름텔은 수정구를 조심스레 올려두었다. 그러자 수정구가 한 차례 깜빡거리더니 영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원거리 통신용 수정구(중급)이 발동되었습니다.>

<동영상을 전송합니다.>

<부가기능-30분 분량의 동영상이 저장됩니다.>


수정구 속에 사람들이 떠올랐다. 한쪽은 회색망토를 걸쳤고, 나머지 무리들은 험악한 인상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눈 지 시간이 제법 흐른 것 같았다.


- 내용을 다시 확인하지. 먼저 우리가 건넨 마법시약의 재료들은 시세의 3배로 매입해준다. 그리고 시에니투스로부터 반경 10㎞의 땅을 우리에게 준다.

- 맞습니다.

- 각 왕국에서 소요를 일으키는 대가로,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그리고 사상자 1명당 금화 한 개씩의 위로금을 지급한다.

- 맞습니다. 계약은 이행될 것입니다.

- 좋아. 문서로 남기지.

- 서로의 입장이란 게 있으니, 계약은 단체가 아닌 이름으로 합니다.

- 바라는 바다.


이후로도 다른 자들이 나서서, 비슷한 내용의 계약을 맺었다. 대략 10여분이 지나자, 모든 이들이 손에 계약서를 쥐게 되었다.


- 그럼 오늘저녁 7시까지 물건을 가지고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는 걸로 하지.


나중에 또 봅시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밀실의 정보 상인은 이를 갈았다.

“붉은갈기는 그렇다 치고, 로터스 녀석들까지 움직일 줄이야.”

“아는 얼굴이 많은가보군.”

빌헬름텔은 수정구를 집어 들었다.


<원거리 통신용 수정구(중급)이 정지되었습니다.>

<부가기능-12분 분량의 동영상이 저장되었습니다.>


수정구를 던졌다 받으며 빌헬름텔이 입을 열었다.

“시에니투스는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다더군. 그런데 저들은 이 도시를 거래하고 있었다. 여긴 중립도시가 아니었나? 내가 잘못 알았나?”

“…….”

“이거 필요하지 않아?”

그가 따지자 정보상인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알았다……상당히 유용한 정보임을 인정하지. 얼마를 원하나?”

“내게 정보를 살 기회를 2번 제공하라. 물론 지금 넘기는 정보 이외에 추가요금 없이.”

정보상인은 순순히 계약서를 작성해 넘겨주었다.

“대가는 지금 받을 건가?”

빌헬름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을 보는 눈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나?”

“이 세계의 신화와 관련된 책을 구해 읽어라. 고대로부터 존재하던 진(眞)족들은 그 자체로 마력을 보는 눈을 가진 자들이라고 전해진다. 그들 대다수가 뛰어난 마법사인 이유는 거기에 있지. 우리 인간들은 그 힘을 모방하여 하나의 공통 스킬을 개발해냈다. 그것이 마력을 보는 눈이다. 하지만 300년 전의 항마전쟁을 끝으로 소실되었다. 마법사들이 너무 많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게 끝인가?”

“이게 전부다. 또 원하는 정보가 있나? 기회는 아직 한 번 더 남아 있다.”

“수정구 속에 등장한 자들, 그들이 누군지 아는 눈치던데…….”

“그들에 관한 정보는 알려주지 않는다.”

정보 상인이 경계하는 것도 당연하다. 변절자라고는 하나 한때 동료였던 자들이다. 게다가 수정구만 보고 결정할 일이 아니다. 이들 나름대로 조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사정은 빌헬름텔이 더 잘 알았다.

“그게 아니라, 만약 그들을 단죄하겠다면 정확한 시기를 알고 싶은데? 내 동료는 목숨 걸고 저 비밀 회담을 지켜보고 있거든? 구해내야 할 거 아닌가?”

“동료? 그렇군. 저쪽에도 수정구를 가진 자가……그런 거라면 알려주겠다. 여관에서 벗어나지 마라.”

“오래 걸리는 건 아니겠지?”

“저녁을 먹기 전까진 결정될 것이다.”

“기다리지.”

빌헬름텔은 다시 여관방으로 돌아왔다.

20분 정도 지났을 때, 여관주인이 문을 두들겼다.

“6시라오.”

빌헬름텔은 시야 구석의 시계에 눈길을 주었다. 현재시각은 5시 45분.

“알겠습니다. 정보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여관주인이 돌아가고 난 뒤, 빌헬름텔은 파티 채팅을 켰다.

- 6시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 시간 딱 맞췄군요. 제 서바이벌 마스터리의 레벨도 3이 되었습니다.

- 다행이군요. 그럼 저는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빌헬름텔은 장비를 챙겼다. 갈색의 낡은 로브를 걸치고, 한 손에는 두 개의 테두리가 달린 특이한 형태의 건틀릿을 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책을 한권 꺼내더니, 차분하게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책에서 돌돌 말린 종이가 튀어나왔다. 10분 정도 작업을 반복하자 방은 종이조각으로 발 디딜 곳이 없게 되었다. 빌헬름텔은 그것들을 반듯하게 펴서 한데 묶은 뒤 다시 인벤토리에 저장했다.

“이제 가볼까?”

빌헬름텔은 소지품을 챙겨 넣고 문을 열었다.

방문을 지나는 순간, 그의 얼굴은 단발머리의 여자로 변했다. 여관을 나서는 그녀를 보며 주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여관에 저런 손님이 묵었던가?”


작가의말

노트북이 맛탱이가 가서 서비스 센터에 다녀왔습니다.

며칠 전부터 블루스크린 뜨더니 결국 애 먹이는군요.

적어도 주 2~3회는 업로드 하려 했는데 죄송합니다.

메모장에 글 쓰는 거 진짜 힘드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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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4) +2 13.11.30 1,026 23 27쪽
33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3) +2 13.11.29 1,153 30 21쪽
32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2) +3 13.11.28 1,052 25 20쪽
31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1) +4 13.11.23 1,525 20 19쪽
30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ED) +1 13.11.22 1,151 22 15쪽
29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8) +1 13.11.19 1,220 24 34쪽
28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7) +1 13.11.16 1,517 29 24쪽
27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6) 13.11.15 1,558 28 23쪽
26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5) +1 13.11.13 1,753 28 21쪽
25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4) +1 13.11.12 1,147 25 14쪽
24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3) 13.11.11 1,138 31 21쪽
23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2) +2 13.11.08 1,565 39 18쪽
22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1) +1 13.11.07 2,194 36 23쪽
21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0) 13.11.06 1,142 36 18쪽
20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9) +1 13.11.05 1,534 31 22쪽
19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8) +3 13.11.02 1,115 23 20쪽
18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7) 13.11.01 1,205 32 23쪽
17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6) 13.10.29 1,153 31 23쪽
16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5) 13.10.28 1,145 27 14쪽
15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4) 13.10.26 1,477 36 17쪽
14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3) +1 13.10.25 1,587 36 16쪽
13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2) +1 13.10.24 2,422 40 21쪽
12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 13.10.22 2,118 32 15쪽
11 1. 계절이 바뀌는 때 (ED) +1 13.10.19 2,876 138 19쪽
10 1. (9) +1 13.10.16 1,915 42 23쪽
9 1. (8) 13.10.14 1,705 29 23쪽
8 1. (7) +1 13.10.05 3,290 60 25쪽
7 1. (6) 13.10.04 2,229 42 22쪽
6 1. (5) 13.10.02 2,269 39 17쪽
5 1. (4) 13.09.29 2,362 4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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