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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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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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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03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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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글자
35쪽

122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3) *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33.

전속력으로 달린 루시엔은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에 도착했다. 정확하게는 조금 거리를 두고 멈춰선 것이었다.

루시엔이 beadsman 비장의 스킬을 사용하면, 저 늑대머리를 한 거인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하지만 치명상을 입히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 직후에 적절한 유효타를 먹여야 끝장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거인과 싸우는 사람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려야 했다.

그래야 저 사람도 계획을 세우고 대비를 할 게 아닌가. 그냥 들입다 성금함을 투척하고는, 혼자 만족스러워 하며 어~시원하다~하고서 돌아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루시엔은 나무위로 기어올랐다. 일단 이곳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정도만 인식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늑대머리 거인과 싸우는 사람은 좀처럼 루시엔을 바라봐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사람의 전투 방법은 끊임없는 히트 앤 런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늑대머리 거인이 공격한 자리마다 불이 옮겨 붙어 활활 타올랐다. 벗어나지 않으면 계속해서 데미지를 입을 건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벗어나면 또 다시 공격이 날아든다. 이게 반복되다 보니, 때리고 이동하고 때리고 이동하는 정신없는 전투가 될 수밖에 없다.

이래서야 연계는 불가능하다.

“그럼 소리라도 질러서 ‘나 여기 있어요’라고 알려야 하나?”

헛기침을 하며 목청을 가다듬던 루시엔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늑대머리 거인의 채찍이 맨땅을 내리칠 때마다,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오고 바윗돌이 하늘을 날았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전투는 박력이 지나쳐, 루시엔의 간은 쭈그러들었다.

“소리라도 질렀다간 저런 공격을 받을 거야.”

루시엔은 건너편 나무로 자리를 옮겼다. 채찍공격이 점점 가까워져 이곳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눈먼 공격에 맞을세라 허겁지겁 뒤로 물러섰지만, 조금 전보다 간격이 좁혀졌다.

그 때문일까. 늑대머리 거인과 싸우는 사람의 모습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지금까지 화염을 뿌리며 현란한 움직임으로 늑대머리 거인을 상대하는 사람은, 짧게 자른 머리카락을 가진 유저였다.

레벨은 높아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느냐면, 상대가 초보 아처의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보아처의 옷은, 명중률을 높여주는 고정 옵션이 붙어 있다.

그래서 아처가 아니더라도 많은 유저가 게임 초반에 한번쯤은 거쳐 가는 복장이다. 하지만 그리 멋있는 건 아니라서, NPC들은 아무도 이 옷을 입지 않는다. 이제 막 활을 잡은 어린애도, 이 옷은 안 입는다. 왜냐하면 이 옷에 사용된 색상은 노랑과 초록이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색의 조화는, 촌스러움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인공지능을 가진 NPC들이 기피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루시엔은 단박에 상대가 유저, 그것도 낮은 레벨의 유저라는 걸 알아보았다.

더불어 성별까지 파악해냈다.

“여자라고?”

머리카락이 짧아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초보아처 세트의 구성을 보니 짧은 원피스와 반바지. 그리고 짧은 망토다.

상대가 여자임을 확인하니, 루시엔은 이제까지 보여준 저 움직임이 다르게 느껴졌다.

“여자치고는 터프한데?”

리얼한 게임그래픽과 뛰어난 인공지능 때문에, 게임 속 전투는 더욱 사실적으로 변해갔다. 이러한 경향은 가상현실게임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그 결과. 냉병기를 사용해 코앞의 적과 싸우는 전투는, 어지간한 배짱으로는 감히 엄두도 못 내게 되었다. 그래서 여성유저들은 근접공격을 하는 직업군보다,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직업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이건 모든 가상현실게임에서 드러나는 여성유저들의 경향이다.

그런데 저 여성유저는 몸을 사리지 않고 최대한 가까이 붙어보려고 애쓴다.

“나이트나 방패전사도 아니면서, 근접전이라니……. 대단해.”

그것만으로도 투지가 느껴진다. 게다가 보면 볼수록 저 움직임은, 순수한 육체적 능력만 가지고는 구현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저것도 스킬이란 건데……그렇다면 암살자나 도적 계열인 건가?”

그때 루시엔의 눈이 반짝였다. 지금 막 채찍질을 하려고 한쪽 팔을 들자, 여성유저의 머리위로 그림자가 졌다. 여성유저의 모습은 훅 꺼지듯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늑대머리 거인의 겨드랑이 근처에서 튀어나온 여성유저가, 허공에서 몸을 틀어 발차기를 먹였다. 허리의 회전력을 실어 먹인 현란한 내려 차기.

발차기가 시작된 시점에서부터, 넘실거리는 화염이 발끝을 따라 풀려나왔다. 발차기의 궤적을 따라 그려진 화염은, 초승달 모양의 참격이 되어 늑대머리 거인의 겨드랑이에 틀어박혔다. 그러자 늑대머리 거인의 겨드랑이가 타들어가며, 까맣게 변한 살점이 떨어져 내렸다. 곧 거인의 겨드랑이 부근에 뼈가 하얗게 드러났다.

“세, 세상에!”

무기를 들고 가한 공격이 아닌. 맨몸으로 사용한 순수 스킬로 이룬 결과다.

여성 유저는 이 잠깐의 공격에 우쭐대지 않고, 즉시 자리를 피했다. 그 선택은 옳았다.

늑대머리 거인이 고개를 돌려 입을 벌렸다. 루시엔은 분노의 외침이라도 튀어나올 거라 생각했지만, 그보다 더 살벌한 것이 나왔다. 늑대머리 거인의 크게 벌린 아가리에 시커먼 화염이 일렁거렸다.

이윽고 토해진 화염은 화염병 수백 개를 터뜨린 것처럼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열풍이 몰아치며 주변의 풍경이 일그러진다. 엄청난 초고열의 화염이다.

채찍질로 간간히 옮겨 붙는 불길과는 비교도 안 되었다. 드래곤의 브레스나 마찬가지인 공격을 퍼붓는다면, 단순한 몬스터가 아니다. 아마 이름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름을 가진 네임드 몬스터는 준 보스몹 취급을 받는다.

“괴, 굉장해. 준 보스몹 수준을 지금까지 혼자서 상대하고 있었단 말이야?”

저 여성유저는 멋대가리 없는 초보아처의 복장을 하고 있지만, 이렇듯 거대한 적을 상대로 거침없이 전투를 이어가고 있다. 남자 못지않은 저돌성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실력도 가지고 있다.

같은 여자가 봐도 너무 멋있다.

남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루시엔이 흥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임방송에서 이름난 랭커들의 PVP를 봐도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여성유저가 벌이는 싸움은 성직자인 루시엔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성금함 투척의 타이밍을 상의해야 할 텐데…….”

루시엔이 발을 동동 굴릴 동안, 여성유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나무 위였다. 루시엔이 올라탄 나무와도 그리 멀지 않았다. 잠시 뒤로 물러서 재정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성유저는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마시고, 허공에 손가락을 놀려 명령어메뉴를 터치했다. 그러면서도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때 사나운 눈초리가 번득이며 루시엔에게 와 닿았다. 루시엔은 한쪽 손을 흔들어보였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드디어 발견되었다는 안도감에 젖어 손이나 흔들 때가 아니다.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루시엔은 성금함을 탁탁 두들겼다. 성금함을 가리킨 루시엔의 손이, 늑대머리 거인을 향했다. 루시엔은 beadsman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정도면 알아들을 거라 생각했다.

제 아무리 마왕이라도 다리몽둥이 정도는 부러뜨린다.

이게 성금함 투척에 붙은 스킬설명이다.

게임이 해킹되기 전. 이 게임이 ‘레드 오션’일 당시엔 많은 유저들이, 이 스킬에 혹하여 beadsman을 키웠었다. 하지만 이내 다른 성직자보다 전반적인 능력이 떨어진다고 판단. beadsman은 사장되다시피 했다. 그렇지만 이 성금함 투척이 굉장히 유용한 스킬이라는 것만은 변하지 않는다.

한방으로 보스몹을 자빠뜨리는 스킬은 흔치 않다.

루시엔은 저 여성유저도 그 점을 잘 알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곧 연계공격을 제의할 거라고 기대했다. 실제 그녀가 보인 몸짓도 그걸 의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성유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신의 겨드랑이를 가리킨 뒤, 늑대머리 거인을 가리켰다.

“겨드랑이를 보라고?”

여성유저의 손가락을 따라 늑대머리 거인을 본 루시엔은 혀를 찼다.

조금 전의 공격으로 늑대머리 거인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친 부분은 온데간데없이 도로 멀쩡해져 있다. 엄청난 치유능력이었다. 이대로 가면 소모전일 뿐이다.

“상성이 안 좋아.”

그렇다면 단순히 부상을 입힐 뿐인 공격은 의미가 없다. 루시엔은 시무룩해졌다. 그녀가 쓰려는 성금함 투척이야말로, 그냥 치명상을 입힐 뿐인 스킬이 아닌가. 후속공격으로 확실하게 끝맺음을 하지 못하면 헛되이 성금함만 날리는 꼴이다.

여성유저는 다시 몸을 날려 접근전을 걸었다. 그러자 늑대머리 거인은 조금 전과 달리 팔을 크게 휘둘러 채찍을 펼쳐내지 않았다. 무형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채찍도 어느 새 짧게 줄어들어 있었다. 그 대신 스커지(Scourge) 타입으로 변했다.

스커지는 하나의 손잡이에 여러 가닥의 짧은 채찍이 달린 형태.

늑대 머리거인이 작은 움직임으로 후려쳐도 무수한 채찍이 휘몰아쳐 넓은 공간을 찢어놓았다. 이제까지 사용한 긴 채찍이 면에 가까운 선의 공격용이라면, 스커지는 그야말로 공간 자체에 뭐가 있든 날려버렸다.

긴 채찍이 접근전에서 빈틈을 만든다는 걸 깨닫고 바꾼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여성 유저는 이제까지보다 훨씬 움직임에 제약을 받았다. 어떻게든 가까이 붙어 스킬을 사용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하니 덤볐다가 물러서기를 반복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성유저의 얼굴은 전혀 곤란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인벤토리에서 활을 꺼낸 여성유저는 즉석에서 화살을 걸었다. 화살촉이 있어야 할 자리에, 유리병이 달린 기묘한 화살이었다.

“저건 화염병을 매단화살?”

무게가 지나치게 앞으로 쏠린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밸런스가 좋지 않아, 20미터 이상 날리지 못한다는 화살이다. 실전에서는 잘 사용되는 물건이 아니다. 루시엔도 실제 본건 처음이다. 그 화살이 루시엔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루시엔은 깜짝 놀라 화살을 피했다. 그런데 나뭇가지에 부딪쳐 깨진 유리병에서는 불길이 터지지 않았다. 대신 짤랑대는 소리와 함께 빛나는 금속조각들이 튀어 올랐을 뿐이다.

은화였다.

화살에 은화를 실어 보낸 의도. 그걸 모를 루시엔이 아니다.

조금 전 성금함을 보여 주었으니, 자신이 beadsman인 걸 알고 버프를 부탁한 것이다.

“하지만 난 타락해서 디바인 파워를 쓰지 못하는데…….”

막상 은화를 줍고도 멍하니 있자, 다시 한 번 화살이 날아왔다. 이번에도 빈 화염병에 은화가 담겨 있었다. 혹시라도 돈이 부족해서 그런 거냐는 독촉 아닌 독촉이다.

루시엔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녀는 원래 성금함 투척 한방으로 beadsman 캐릭터를 정리할 생각으로 여기에 왔다.

그런데 거인과 싸우는 여성유저는 beadsman으로서 함께 싸우길 바라고 있다.

사실상 beadsman인 그녀를 전력에 포함시켜 앞으로의 전투를 이끌어나갈 계산인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루시엔은 여성유저가 바라는 역할을 해줄 수 없었다. 그걸 알리지 않으면 여성유저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캐릭터의 사망.

“어차피……난 도움이 안 돼.”

루시엔은 숨을 가다듬었다. 여기서 큰소리를 내면 늑대머리 거인의 표적이 된다. 조금 전보다 짧아진 채찍이었지만, 그래도 루시엔이 있는 곳까지는 충분히 닿는다. 그래도 알려야만 했다.

저 여성유저가 자신을 성직자로 착각하는 한, 승리는 요원할 뿐이었다.

“전 성직자가 아니에요! 타락했다고요!”

목청 높여 소리치자마자 보라색 잔상을 그리는 물체가 루시엔 쪽으로 날아들었다.

늑대머리 거인이 들고 있던 스커지다.

그냥 손목의 스냅만으로 꺾어 친 것이지만, 그 반동에 딸려 휘둘러지는 십여 가닥의 채찍은 나무를 상대로 충분한 위력을 과시했다.

나무들은 가운데의 굵은 몸체를 제외한 그 윗부분, 브로콜리처럼 뻗어나간 나뭇가지들이 송두리째 깎여나갔다.

루시엔은 예전에 스커지의 실물을 박물관에서 본적이 있었다. 그 옆에는 스커지에 얻어맞은 흑인노예의 사진도 전시되었었다.

노예의 등짝은, 흡사 악마가 손톱으로 후벼 판 것처럼 끔찍했다. 그 상처가 어찌나 깊은지, 살점이 뜯겨져 나간 곳에는 갈비뼈까지 드러났다. 그리고 이 같은 폭거를 저지른 스커지의 채찍 가닥에는, 노예로부터 긁어낸 살점이 매달려 있던 걸로 기억한다.

루시엔이 보고 있는 광경도 다르지 않았다.

늑대머리 거인이 들고 있는 스커지 끝에는, 숲속의 나무들로부터 긁어낸 생 나뭇가지가 매달려 있다가, 불길에 휩싸이며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떨어져 내린 불길 때문에 어두운 숲속이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그 때문에 늑대머리 거인의 몸체는 흡사 피 칠갑을 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거인이 불길 속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은 감히 범접치 못할 박력을 내뿜고 있었다. 노예를 괴롭히던 악덕지주가 보았다면, 조용히 자신의 스커지를 등 뒤로 감췄을 광경이다.

그때 루시엔은 당연한 의문을 떠올렸다.

“어째서 난 멀쩡한 거지?”

그녀가 올라간 나무는 물론 주변의 숲이 통째로 뭉개진 상태다. 살아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뒤늦게 의문을 떠올린 그 순간, 루시엔의 눈에 파란 하늘이 들어왔다.

고개를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보이는 화창한 하늘.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감각이다.

“확실히 이 부유감은…….”

루시엔은 고개를 내렸다. 정말로 하늘을 날고 있다.

정확히는, 높이 던져졌다가 다시 낙하하는 중이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다. 여성유저가 자신을 붙들고 있었다.

“이봐요!”

하지만 여성유저의 눈이 풀려 있다. 강한 타격을 받았을 때 찾아오는 그로기 상태에 빠진 것이다.

여성유저가 자신을 안은 힘도 그리 강하지 않다. 혹시라도 손이 풀릴까싶어 루시엔은 양손을 뻗어 여성유저의 허리에 두르고 깍지를 꼈다.

“왜 이 사람이 날 안고 있지?”

루시엔은 스커지가 자신을 향해 떨어지던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무수한 채찍이 덮쳐들어오는 순간.

한발 앞서 여성유저가 나타나더니 수인을 맺었다.

공격을 받는 순간과 동시에 파르스름한 막이 펼쳐졌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거센 흔들림이 루시엔을 밀쳤다.

그 결과가 지금의 동반낙하.

여성유저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어째서 싸우다 말고 날?”

타락판정을 받은 성직자를 감싸는 것은 무익한 행위이다.

그건 스탯의 손실양이 크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들의 경우엔 그래도 힘이나 민첩 지능처럼, 어디에나 통용될 스탯들을 찍지만, 성직자는 그렇지 않다. 성직자에게는 신앙심이라는 특수한 스탯이 존재하는데, 언제나 이 신앙심을 다른 스탯보다 높게 유지해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디바인 파워가 제대로 발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생존을 위해 민첩에 100을 찍었다면, 신앙심에는 최소한 101의 포인트를 분배해야 했다.

루시엔은 그렇게 찍은 신앙심이 200가까이 되었다. 하지만 전직해버리면, 신앙심 스탯에 찍은 포인트가 싸그리 날아 가버린다.

그러니 타락한 성직자는 전직을 해서 다른 직업을 찾느니, 차라리 새로이 캐릭터를 파서 게임을 하는 게 더 낫다.

“그걸 알면서도 왜?”

여성유저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구했는지는, 본인이 알려주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고민해봐야 소용없어.’

루시엔은 당장 직면한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반탄주벽!”

루시엔이 외치자 그녀의 등 쪽에 매미날개와 같은 얇은 막이 수 없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여러 번 접은 종이마냥, 겹겹이 중첩되며 루시엔의 등을 단단히 감쌌다. 뒤이어 여성유저를 안은 루시엔의 몸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땅이 움푹 패어 들어가면서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이정도 충격양이면 체력이 낮은 캐릭터는 사망, 체력이 높다 해도 빈사상태에 빠지고 만다. 하지만 루시엔은 죽지도 않았고, 빈사상태에 빠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충돌로 피어오른 흙먼지를 헤치고 튀어나와, 근처의 나무로 펄쩍 뛰어올랐다. 여전히 여성유저를 껴안은 상태임에도, 그 움직임은 기민하기만 하다.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모습이다.

늑대머리 거인이 성큼 다가와 그런 루시엔을 노리고 스커지를 휘둘렀다. 루시엔은 등을 돌려 달아나며 다시 스킬을 사용했다.

“반탄주벽! 해체!”

이번엔 루시엔의 등을 감싸고 있던 얇은 막이, 역으로 크게 확장되면서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떨어져 나간 막은, 스커지에서 뻗어 나온 한 가닥의 채찍과 부딪쳤다. 얇은 막과 부딪친 채찍은 방향을 바꿔 튀어 올랐다. 보랏빛 기운을 내뿜는 짧은 채찍 몇 가닥이, 늑대머리 거인의 팔에 틀어박혔다. 갈고리 모양의 끝이 박히자마자 거인의 팔에서 피가 솟구쳤다.

크워어어어!

자신의 공격을 돌려받은 꼴이 된 늑대머리 거인이 주춤대며 한 발짝 물러났다.

그 틈에 루시엔은 거리를 벌려 멀어졌다.

“후욱! 허억. 허억.”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한 루시엔은 여성유저를 내려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성유저가 꿈틀거렸다.

“정신이 들어요?”

“의식은 진즉 돌아와 있었어요. 체력이 너무 깎여서 몸이 안 움직여진 거지. 근성 스탯이 낮은 것도 아닌데 너무 오래 뻗어 있었네요.”

루시엔은 궁금한 것을 물었다.

“어째서 절 구했지요? 타락 판정을 받은 성직자가, 무슨 생각을 할지는 잘 알 거 아니에요?”

“질문은 제가 하고 싶군요. 어째서 멀쩡한 성직자가 타락했다고 하는 거죠?”

“멀쩡하다고요? 제가?”

루시엔은 여성성직자 특유의 복장을 가리켰다. 살짝 부풀려진 디자인의 어깨부분에는 디바인 마크가 달려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엔틸리움에서 성기사가 확인해주었다고요. 전 타락했어요. 이제 beadsman도 뭣도 아니에요.”

“그럼 지금까지 보여준 그 움직임은 뭔데요?”

“움직임이라니요?”

“성직자계열 직업 중에 가장 이동속도가 빠른 게 beadsman이잖아요. 나무도 혼자서 잘 타고. 사람을 안고서 여기까지 뛰어온 것도 그렇고. 그건 패시브 스킬이 발동한다는 뜻이잖아요. 안 그래요?”

여성유저가 반박하는 말을 들고 보니 맞는 말이다. beadsman의 빠른 이동속도는 디바인 파워가 가진 권능에서 비롯된다. ‘질주’나 ‘정령강화(바람)’ 같은 것과는 아무관련이 없다.

그래서 루시엔은 혼란에 빠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디바인 마크를 달면 부서져버렸는데……. 성기사도 날 보고 타락했다고……. 맞아! 마도로스社 직원한테도 확인했다고요. 난 타락한 게 맞아요.”

루시엔이 그리 말하자마자 여성유저는 성금함을 뺏어들었다.

“그럼 그 제스처는 단순히 성금함 투척을 사용하겠다는 거였나요? 이미 타락했으니까, 성금함이고 뭐고 날려버린 다음 접겠다는?”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아요.”

이미 결심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제 3자의 입으로 듣고 보니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루시엔은 성금함을 돌려달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여성유저는 중얼중얼 대더니 인벤토리에서 은화를 꺼냈다. 그리고 성금함에 집어넣었다. 헛돈 쓰는 일이었지만, 루시엔은 말리지 않았다.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루시엔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곧 고개를 쳐들고 성금함을 쳐다보았다.

“비, 빛?”

성금함이 환하게 빛나고 있다. 여성유저가 성금함을 돌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beadsman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돈을 넣자마자 반응한다면……아직 타락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 말을 들은 루시엔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처음 겪는 일이 아니다.

‘바로 어제. 축제가 벌어진 날에도 난 부상자를 치료 했었어.’

그때는 돌팔이 약제사의 요청이 있었다. 그녀는 평소 때처럼 헌금함에 돈을 넣고, 그 액수만큼의 힘을 사용했다.

지금 상황은 그때와 똑같았다. 다만 도움을 요청한 사람이 바뀌었을 뿐.

어쩌면 타락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아직 포기하기에 이르다는 생각에 루시엔의 두 눈이 활활 불타올랐다.

루시엔은 아까 여성유저가 화살로 쏘아 보냈던 동전들을 꺼내들었다. 그것까지 전부 성금함에 집어넣자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이, 이럴 수가…….”

이로서 더욱 확실해졌다. 디바인 파워가 다시 회복된 것이다.

“으, 은화 38개 받았습니다. 어, 어떤 걸?”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일을 겪고 있음에도, 돈 계산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여성유저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리를 가리켰다.

“각력을 강화하면, 다리로 가하는 공격도 강해지나요?”

“전사들이 자주 사용하는 진각 같은 경우 위력이 더 세지더군요.”

“이동속도도 빨라지고요?”

“그렇죠. 하지만 이동속도를 직접 향상 시킨 것에는 못 미치죠.”

“그렇다면 각력을 강화시켜주세요. 지속시간은 얼마나 되죠?”

“각력강화는 은화 10개로도 할 수 있는 거라……지속시간이 30분은 넘을 것 같은데요. 3배 넘는 금액을 받았으니.”

“그럼 보너스 효과도 걸리겠군요. 뭐, 좋습니다.”

말을 마친 여성유저는 활을 집어넣고, 단검을 두 자루 꺼냈다.

상점에서 파는 싸구려 물건. 흔히들 투척용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루시엔도 호신용으로 두 자루 가지고 있다.

“설마 그걸로 싸울 생각이에요?”

“가능 합니다. 어서 버프를.”

“알았어요. beadsman, 루시엔. 은화 38개 확인했습니다.”

성금함을 짤랑이며 루시엔이 양손을 높이 쳐들었다. 루시엔의 양손으로부터 생겨난 빛의 고리가 퍼져나갔다.

“신이시여! 여기 당신께 바치는 공물이 있습니다! 사악한 존재에 홀로 맞서는 용자에게 힘을!”


<각력강화 버프를 받았습니다.>

<발을 사용하는 공격에 ‘평소 데미지의 20%’ 추가>

<이동속도가 소폭 향상 됩니다.>

<넉넉히 지급한 돈 때문에 추가효과가 붙습니다.>

<35분간 신성력에 의한 보호를 받습니다.>

<혼돈의 기운으로 인한 데미지 경감. (기존의 50%만 받습니다.)>


금액을 초과해 지불한 경우에는 간간히 이런 식으로 추가적인 효과가 부여되었다. 꽤 드물지만 아주 없는 일은 아니기에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난생처음 보는 단어가 루시엔의 관심을 끌었다.

“혼돈의 기운? 이게 뭐죠?”

“저 늑대 머리통을 달고 있는 놈의 정식 명칭은, ‘혼돈의 짐승’입니다. 지금은 2차 각성 상태지요. 저 녀석이 몸에 휘감고 있는 보랏빛 기운이 그겁니다. 화염돌격 스킬을 사용해서 화염저항력100%인 상태인데도, 데미지가 들어오더라고요.”

루시엔은 늑대머리 거인이 휘두르는 채찍에 맞은 나무가 불타던 모습을 기억해냈다.

“그래서 숲이…….”

혼돈의 기운이란 게 그렇게 위험한 거라면 근접전이야말로 자살행위였다. 불길을 두른 상대를 단검으로 공격했다간 화상을 입게 될 테니까.

루시엔은 여성 유저를 말렸다.

“아처이시니까 차라리 활로 공격하는 건 어때요? 아까 보니까 잘 쏘시던데.”

여성유저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화살로는 소용없어요. 화살에 디바인 파워를 걸어서 수백 명이 쏘아대면 모를까……아니, 그것도 안 통할 것 같네요. 워낙이 덩치가 크니.”

“하지만 단검이라고 화살보다 나을 건 없잖아요. 차라리 이제까지처럼 피하면서 시간을 끄는 건 어때요? 지금쯤이면 엔틸리움의 성기사들도 눈치 챘을 거예요. 여기로 오는 중일지도 몰라요.”

“물론 성기사들이 오겠죠. 하지만 그것만 믿고 안일하게 대처할 수는 없어요. 시간이 없거든요 시간이. 무엇보다 갑자기 저런 괴물이 나타난 게 수상쩍거든요. 그러니 일단 제 선에서 해결해야죠.”

“수상해요? 뭐가 수상한 건데요?”

“소환.”

“당연히 소환했겠죠. 여긴 신성왕국 바하라고요. 사악한 기운을 내뿜는 거인 같은 건 없어야 정상이에요.”

“문제는 왜 하필이면 이런 변두리 쪽에 소환되었냐는 것이지요.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그것도 하필이면 중급마족이 소환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게 나타났냐는 것이죠. 여기 누가 있어서 그랬을까요.”

“누군가 당신을 노린다는 건가요?”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노리는 것 같지만……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저게 거치적거린 다는 겁니다.”

크아아아아!

늑대머리 거인이 가까워지는지 땅이 흔들렸다. 숲 사이로 채찍을 휘두르는 거인의 모습이 보였다. 보랏빛이 섞인 검은 기운으로 이루어진 채찍은 다시 길게 늘어나 있었다. 스커지형태로 바꾸었다가 팔을 다쳤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피가 뚝뚝 떨어지던 팔뚝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이쪽이 불리한 건 마찬가지였다.

‘대체 이 여자는 뭘 믿고 이렇게 자신만만하지?’

여성유저는 방어가 아닌 근접전투용 버프를 걸어달라고 하고, 무기는 싸구려 단검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거인의 존재가 거치적거린다며 투덜거리기까지 한다.

이 사람은 긴장이란 걸 하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루시엔은 곧 생각해냈다. 이 여성유저가 지금까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싸웠다는 사실을.

‘나한테 반탄주벽이 있듯이, 저 사람에게도 비장의 한수가 있겠지.’

땅의 흔들림이 멎었다. 그리고 기묘한 정적이 숲을 감쌌다.

이게 뭘 의미하는 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두 사람 모두 잘 알았다.

여성유저는 땅을 박차고 나갔다. 루시엔도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에 아름드리 고목만한 굵은 채찍이 떨어지며 주위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조금 전보다 한층 위력이 강화된 공격이다.

루시엔은 여성유저의 싸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거리를 벌리는 한편, 어떻게 늑대머리 거인을 상대하는지를 지켜보았다.

여성유저는 지금까지 해오던 치고 빠지는 식의 공격을 하지 않았다. 직선 일변도로 빠르게 달려들었다. 여성유저의 옆으로 채찍의 궤적이 잔상을 그렸다. 루시엔이 걸어준 버프가 이동속도까지 늘려준 덕분이다.

“라이팅!”

여성유저의 손끝에서 튀어나온 빛의 구가 늑대머리 거인의 눈높이에서 작열하더니 환한 빛을 뿌리며 터져나갔다. 루시엔은 여성유저의 직업을 확인하고는 놀랐다.

“라이팅이라면 마법이잖아? 그럼 저 사람은 마법사였던거야? 가만, 그러고 보니 날 감싸면서 사용한 건 역시 배리어였어!”

여성유저가 마법사라고 확신한 루시엔은, 그녀가 매직 스틱 대신 단검을 들고 있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마법사가 단검을 들고 재미 볼 수는 없다. 검술 스킬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게임이라면 마검사 같은 것도 가능해. 하지만 더 오션은…….”

더 오션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성직자, 전사, 모험가, 생산자, 학자.]로 이어지는 규칙 때문이다.

학자군에 속하는 마법사는 생산자군과 성직자군의 직업을 겸업할 수 있다. 완전히 깊게 들어가는 것만 아니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전사나 모험가 쪽은 전혀 선택이 불가능하다.

“마법사가 어떻게 지금까지 버틴 거지? 그것도 혼자서?”

신성왕국에선 EMP가 미쳐 날뛴다. 이걸 컨트롤 못하면 기껏해야 초급마법 밖에 쓰지 못한다. 하지만 저 여성유저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빠른 몸놀림덕분이다.

“설마 그것도 마법으로?”

하지만 마법사가 자신에게 거는 주문인 퀵스텝은 중급 마법이다.

“설마 중급 마법사?”

루시엔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초보아처 세트 복장을 하고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진짜 중급 마법사라면 지금까지의 전투를 설명할 수 있다.

우위를 점하진 못해도 밀리진 않는. 그리고 기회를 잡으면 확실하게 치명상을 입힌다.

신성왕국에서 싸운다는 패널티를 감안하면, 여성유저는 중급마법사임이 틀림없다.

“유저 중에 벌써부터 중급마법사가 나오다니. 설마 말로만 듣던 랭커인가?”

팬사이트에 랭커의 전투 동영상이 올라오는 일은 흔했지만, 실제 랭커를 만나는 건 힘든 일. 루시엔은 다시 늑대머리 거인 쪽으로 움직였다. 여성유저가 싸우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기 위해서이다.

“왜 다시 돌아온 거예요!”

여성유저가 채찍을 피하며 소리 질렀다. 루시엔도 나무에서 나무로 건너뛰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냥 구경만 할게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이젠 안 구해줘요!”

“네!”

그때 늑대머리 거인의 손에 들린 채찍이 다시 모양이 변했다. 이번엔 손끝을 휘감은 채 길게 자라났다. 손톱이 길어진 모양새다. 이글거리는 시커먼 화염이 방전을 일으키며 여성유저를 찢어놓으려 했다. 그때 여성유저가 소리쳤다.

“섀도 런!”

말 그대로 여성유저의 모습이 바닥에 늘어진 그림자 속으로 훅 꺼져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삽시간에 늑대머리 거인의 팔뚝에 매달려 있었다.

한쪽 단검을 깊숙이 찔러 넣은 채 팔뚝에 달라붙은 여성유저는, 나머지 손에 들린 단검을 휙휙 휘둘렀다. 루시엔의 눈에는 늑대머리 거인의 몸에 닿지 않은 걸로 보였다. 그야말로 아무렇게나 휘둘러댄 모양새. 하지만 여성유저의 칼질은 효과가 있었다.

늑대머리 거인의 손목이 축 늘어진 것이다.

그 틈을 타 여성유저가 힘차게 진각을 밟았다. 그리고 단숨에 목덜미로 올라가더니 마찬가지로 휙휙 칼질을 해댔다. 그러자 늑대머리 거인의 목에서 피가 솟구쳐 나왔다. 늑대 머리 거인이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쩍 벌렸다.

시커먼 어둠이 섞인 보랏빛 화염이 여성유저의 코앞에서 이글거렸다.

여성유저는 당황하지 않고 늑대머리 거인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텀블링을 하며 늑대머리 거인의 턱을 걷어 차버렸다.

빠득!

멀리 떨어진 루시엔의 귀에 들릴 정도로 깊숙이 들어간 발차기다.

늑대머리 거인의 턱이 젖혀지며 상체가 휘청거렸다.

실제 입힌 피해도 적지 않았다.

각력강화 버프를 받은 까닭인지, 늑대머리 거인의 주둥이가 피투성이가 되며 허연 이빨이 튀어 올랐다. 여성유저는 다시 늑대머리 거인의 목을 노리고 단검을 쳐들었다.

“그렇지!”

루시엔은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나다 해도 목이 떨어지면 죽을 것이다. 루시엔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루시엔은 곧 주먹을 부들거리게 되었다.

“아…….”

여성유저는 원래 의도대로 늑대머리 거인의 목에 무수히 칼질을 했다.

조금 전 먹인 발차기 때문에 늑대머리 거인의 머리는 아직도 홱 돌아간 상태. 불을 내뿜을 주둥이는 엉뚱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양손도 넘어지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리고만 있을 뿐, 여성 유저를 노리고 휘둘러지지 않았다. 목을 노린다면 지금이 기회다. 헌데, 여성유저는 한쪽 팔을 감싼 채 바삐 물러서고 있다.

늑대머리 거인의 목덜미에서 또 다른 머리가 자라났기 때문이다.

새로운 머리가 주둥이를 쩍 벌렸다.

그 아가리로부터 무수히 많은 라이칸스로프들이 튀어나왔다.

“큭!”

밖으로 뛰쳐나온 라이칸스로프들은 진짜가 아니었다.

어둠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모습뿐인 존재.

하지만 그것에 닿는 것만으로도 장비의 내구도가 쭉쭉 닳기 시작했다. 초보 아처 상의는 눈 깜짝할 새에 걸레짝이 되었다. 여성유저는 단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자리를 피했다.

“위험해. 저러다 큰일 나겠어.”

루시엔의 눈에는 여성유저의 체력 그래프가 고스란히 비쳐 보이고 있었다. 치료사가 개입한 플레이어의 상태를 볼 수 있듯, 버프를 걸어준 성직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여성유저의 체력 그래프에는 초록색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거의 붉게 변한 상태.

스치기만 해도. 아니, 누가 옆에서 기침만 해도 죽을 것만 같은 상태다.

즉, 빈사상태는 이미 넘어선 단계.

헌데 여성 유저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다시 근접전까지 펼치면서.

루시엔은 납득하지 못했다. 간당간당한 체력을 한 채 들이 받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같은 수준의 적을 상대로 싸운다 하여도, 체력양은 승패 이전에 생존을 가름 짓는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포션조차 마시지 않고 무작정 들이친다?

루시엔의 눈에는 자살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황당한 것은 늑대머리 거인의 반응이었다.

목덜미에 돋아난 또 다른 머리통은 계속해서, 어둠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라이칸스로프를 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쏟아낸 라이칸스로프들이, 방향을 바꿔 도로 늑대 아가리 속으로 들어 가버린 것이다. 뒤이어 늑대 아가리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흡사 입속에 음식을 잔뜩 구겨 넣은 모양새이다.

자연스레 루시엔은 고무풍선을 떠올렸다. 한도 끝도 없이 바람을 불어 ‘넣는 중인’ 풍선을.

뭔가 털이 아닌 작은 돌기들이 숭숭 돋아난 거대한 머리통에는 고통스러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세상에……사람이 아닌 존재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니?

하지만 저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안면근육이 움찔거리면서 턱을 달싹 거리는 모양은, 당장이라도 땅바닥을 두들기며 탭을 할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아니나 다를까, 목덜미에 돋아난 또 다른 늑대머리는 퍽 소리를 내며 고기조각을 흩뿌렸다.

“뭘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또 치명타를 입혔어. 그래. 이틈에 빠져나오는군. 좋아. 이틈에 재정비를 하고 다시 붙는다면, 당장 위험하진 않겠지.”

어차피 늑대머리 거인은 다친 곳을 재생해버리겠지만, 루시엔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성유저는 성기사가 오기 전에 해치울 생각이었겠지만, 루시엔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다고 여겼다. 준 보스몹을 상태로 소모전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버티기나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루시엔은 이제까지의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늑대 머리 거인의 공격이 어느새 그쳐 있었다.

“끄억! 켁켁! 커어어응!”

늑대머리 거인은 목을 움켜쥐며 괴로워하는 중이었다.

또 다른 머리를 터뜨린 직후부터이다.

아물어도 진즉 아물어야 할 그곳에선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사악한 기운 역시 새어나와 공기 중으로 흩어져 갔다.

늑대머리 거인은 거대한 손가락으로 상처를 틀어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여성유저가 그 몸을 타고 올라 칼질을 했다. 한쪽 팔은 상처를 틀어막고 있기에, 늑대머리 거인은 남은 한쪽 팔만으로 상대해야만 했다.

여성유저는 그만큼 운신의 폭이 자유로운 상태.

늑대머리 거인의 몸에 상처가 늘어가기 시작했다.

재생하는 속도가 못 따라가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꼈는지, 급기야 늑대머리 거인은 여성유저를 견제하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결코 살려 보내지 않을 것처럼 공격 일변도인 이제까지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이거 어쩌면……준 보스를 혼자 잡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루시엔은 기대어린 눈길로 여성유저를 바라보았다.


작가의말

2014.11.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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