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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또 다른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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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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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22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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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9)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19.

신전 앞 공터에 천막이 세워졌다. 간밤의 추위에 환자들이 건강을 해칠까 염려한 가족들의 배려였다. 텐트 숫자를 보면 엔틸리움에 찾아온 환자 전원이 이곳에 몰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저 때문에 모였다는 겁니까?”

신전 앞 광장에 펼쳐진 모습은, 검문강화로 생겨났었던 천막촌을 연상케 했다.

“그렇소.”

자신을 투스카르라고 소개한 성기사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들은 스스로를 위태롭게 하고 있소.”

“그게 무슨 소리죠?”

“다른 나라 같았으면, 감히 저렇게 모여 불만을 표시하는 것조차 못했을 거요. 모든 민란은 저렇게 불만을 가진 자들이 한데 모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니까.”

위즈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 나라 바하가 아무리 신성왕국이고, 지금 서 있는 곳이 신전이라지만……민란을 대충 처리할 리 없다. 아무리 신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불쌍한 사람을 가엾게 여기라 해도. 나라를 뒤흔들 불온한 세력에는 단호하게 대처하는 법.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일단 지켜볼 생각이오. 하지만 저들이 엉뚱한 마음을 먹는다면, 바하를 지키는 성기사로서 가만있을 수는 없겠지.”

“이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은, 제게 바라는 게 있기 때문이로군요.”

“그렇소.”

“무력을 쓰지 않고, 저 많은 사람들을 해산시키는 것. 맞죠?”

“정확하오.”

투스카르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일단 지금 상황은 수도에 알려두었다. 교황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도 예상하고 있다.

불과 어제만 하더라도 엔틸리움은 중급 마족이 출현하여, 도시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그 때문에 전직 성기사들이 소집되어, 일시적으로 바하의 군사력이 증강되었다. 바하르칼에 보낼 원정군까지 계획 중이다.

이럴 때 다른 곳도 아닌 엔틸리움에서, 그것도 신전 앞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제 2의 마족 소환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차례 크게 당한 뒤라 교황들은 강경한 입장을 취할 가능성이 높았다.

“엔틸리움에 해를 끼치려는 무리가 아직까지 남아있어, 대중들을 선동하려 한다고 할 거요. 아마 무력으로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리겠지.”

“증거가 없잖아요. 게다가 사람들이 모인 이유는 저 때문이잖아요?”

위즈가 만능조제 스킬로 가루약을 만든 건, 더 큰 분란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노력이 무색하게, 당장이라도 피바람이 불 것 같지 않은가.

“그건 신전의 모두가 알고 있소. 나 역시 사람들을 해하고 싶진 않고. 그래서 부탁하는 거요. 사람들을 해산시켜주시오. 수도에서 명령이 내려오기 전에 저들이 자진해산한다면, 아무도 피해보지 않고 끝날 수 있소.”

위즈는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풀려난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풀려나면, 신전 앞에 모여든 사람들이 납득하고 돌아갈까.

‘그럴 리 없지.’

저들은 자신들에게 약을 만들어준 돌팔이 치료사가 체포된 것에 분개하여 신전 앞에 모였다. 하지만 그건 구실에 불과하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 위즈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한(恨). 대상을 특정 짓지 못할 만큼 끈적거리며 부정적인 감정.

가족이 병에 걸렸다. 온갖 수를 써서 가족을 치료하려 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 그래서 신성왕국으로의 여행길에 올랐다. 그 과정이 순탄했을 리 없다. 환자의 약한 몸은 여행을 견디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렇지만 무사히 신성왕국에 도착했다.

이걸로 모든 게 다 해결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기대를 배신하듯, 약초가 부족해져 치료도 못 받을 상황에 놓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급마족까지 소환되었다. 잇따라 들이닥친 절망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마모되어간다.

마족 문제는 아무 일 없이 잘 해결되었고, 약초부족 문제도 곧 해결된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어도 마모된 마음은 원상복구 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도 신께서는 도와주지 않아.

혹시 신에게 버림받은 것일까.

한때 가졌었던 자포자기의 심정이, 신에 대한 원망이.

지금 터져 나오려 하고 있다.

“저 많은 사람들을 말로 설득할 수 없어요. 아니 설득할 상대가 아니에요.”

“그렇게 완고하단 말이오? 그럼 수도로부터 내려올 명령에 따르라는 거요?”

“애초부터 발상이 틀렸어요. 저 사람들은 불순분자가 아닙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병든 사람들이라고요. 무언가를 따지러 온 게 아니에요. 아픈 몸을 치료사들에게 맡기듯, 저 사람들은 아픈 마음을 신전에 맡기려 온 거에요. 헌데 마족의 출현을 이유로 성기사들만 북적거리니, 불만을 품을 수밖에요.”

신성왕국에서 이루어진 최근의 변화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자극했다.

위즈는 그 사실을 지적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성기사들을 물릴 수도 없다. 중급 마족에게 위협받은 사실만은 틀림없었으니.

“그럼 어떡하란 말이오?”

“투스카르님. 축제를 벌이죠.”

“축제?”

“말로 힘들다면 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수밖에요.”


◇◇◇◇◇◈◇◇◇◇◇◇◈◇◇◇◇◇◇◈◇◇◇◇◇


파랗게 새벽동이 텄다. 육중한 소리가 차가운 새벽 공기를 긁었다.

사람들이 천막 속에서 기어 나왔다. 이대로 잠을 자기엔 철문의 경첩에서 나는 소리가 너무도 시끄럽다.

“뭐지? 아직 새벽이잖아?”

신전은 해가 떠오를 때 문을 연다. 하지만 아직 해도 뜨지 않았건만 신전이 열리고 있다. 게다가 열린 문에서 나오는 성직자의 숫자가 상당하다. 그냥 문을 열려고 나온 게 아니다.

“다들 뭔가를 들고 있는데?”

맨 앞의 성직자들은 기다란 장대 묶음 같은 걸 들고 있었다. 잠시 후 그것을 펼치자 높다란 사다리가 되었다. 그들은 신전의 공터에 세워진 오벨리스크에 사다리를 걸쳤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성직자가 두꺼운 이불뭉치로 보이는 것을 건네주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성직자는 이불뭉치를 펼쳐 오벨리스크에 한쪽을 묶었다. 맞은 편 오벨리스크에도 같은 작업이 이루어졌다.

“현수막? 지금 오벨리스크에 현수막을 걸어둔 거야?”

오벨리스크는 ‘여기서 부터는 성역’이라는 의미로 세워둔 건축물이다.

경건하기까지 한 건축물을 고작 현수막 거는 기둥으로 사용한 것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하지만 놀랄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저 사람들……성직자가 아냐.”

“뭐? 신전에서 나왔잖아? 일반인이 신전에서 밤을 보낼 수는 없잖아?”

“저 덩치를 보라고. 육체를 단련해온 전사의 몸이잖아?”

“어? 그러고 보니 정말이네? 성직자가 아니라면……성기사?”

갑옷을 입지 않았지만, 불끈불끈한 근육이 어딜 봐도 그렇게 보인다.

성기사들은 전부 삽과 곡괭이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신전 앞 공터를 파기 시작했다. 조금 전 새벽의 공기를 울리던 게 신전의 문을 여는 소리였다면, 지금은 단단한 땅에 곡괭이가 찍히는 소리로 바뀌었다.

다들 힘이 좋아서인지 땅파기는 금세 끝났다. 구덩이를 여러 개 파낸 성기사들은 벽돌을 가지고 와 구덩이 주변에 쌓았다. 그리고 진흙을 두텁게 바르고 불을 지폈다. 화기와 연기 때문에 진흙은 단단하게 굳어갔다.

“아궁이다. 아궁이를 만든 거야.”

“대체 무엇 때문에? 신전에도 주방은 있을 거 아냐?”

그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누군가 오벨리스크로 다가갔다. 그리고 현수막의 글자를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었다.

“중급 마족 퇴치를 기념하며. -오늘은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깁시다- 이게 뭐야?”

“먹고 마시고 즐겨? 왜?”

“중급 마족 퇴치를 기념한다네요.”

“아니……그러니까 왜 그걸 기념하는 건데요?”

“낸들 압니까.”

현수막의 글을 읽은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어리둥절해 했다.

그때 신전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성직자의 복장을 하지도 않았고, 성기사만큼 덩치가 좋지도 않았다. 키가 작고 어깨도 좁아 더 왜소해 보이는 사내는, 그냥 평범한 이방인이었다.

“아! 잡혀갔던 돌팔이 치료사다!”

“풀려난 건가?”

사람들은 이방인을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 저 깐깐한 성기사들에게 붙잡혀 밤새도록 시달렸을 거라 생각하니 절로 동정이 간다. 길을 열어준 건은 그래서였다. 하지만 이방인은 나갈 생각이 없는 듯하다. 이방인은 사람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러분들! 잠시만 제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즐비하게 늘어선 천막에서 사람들의 머리가 쏙쏙 튀어나왔다. 아직 새벽녘이라 춥다며 밖에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침부터 땅 파는 소리,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 때문에, 잠은 이미 달아나버린 상태.

“새벽부터 언놈이 지랄이야? 지랄이?”

“조용히 하세요, 아버지. 그 돌팔이 치료사가 할 말이 있대요.”

“으응? 벌써 풀려났어?”

사람들이 깨어난 것을 본 이방인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안녕하십니까? 엔틸리움의 주민 여러분! 그리고 환자와 함께 힘든 여행을 계속해 오신 여러분! 저는 이방인 W라고 합니다!”

말을 마친 W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제가 처벌 받을까 염려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걱정해주신 덕분에 저는 가벼운 처벌을 받고 풀려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엥? 처벌을 받았다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이상하군. 돌팔이 치료사는 원래 흔하잖아. 평소엔 단속도 잘 안 하고, 처벌도 안 했는데?”

“저 이방인이 만든 가루약 먹고 죽은 사람도 없잖아. 그런데 왜 벌을 받아?”

이방인 W는 사람들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사람들은 W가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 눈치이자 입을 다물어주었다.

“저에게 내려진 처벌은, 여러분들과 축제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갑작스레 축제가 언급되자 사람들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저 현수막과 관련된 것인가?”

이방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어째서 갑자기 축제를 열자는 겁니까?”

“다들 너무 뻣뻣하니까요.”

“그게 무슨…….”

“저기 뒤에서 삽질하고 벽돌 나르는 사람들 보이지요? 원래 뭐하는 사람들 같습니까?”

“성기사 아닌가. 저 덩치만 봐도 알겠구먼.”

“왜 저들이 아궁이를 만들고 있을까요?”

“아까 축제라고 했으니…요리할 곳이 필요한 모양이지.”

“맞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보기엔 저 성기사들 너무 형편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얼굴에 쩍 소리가 나며 금이 갔다.

“아, 아니…성기사들에게 잡혀갔으니 좋은 감정을 품는 게 이상하겠지만, 그렇다고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이방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진짜 형편없습니다! 덩치만 크지 형편없습니다. 아궁이를 보세요!”

W는 성큼성큼 완성된 아궁이로 가서, 말라붙은 진흙을 발로 찼다. 한번 찼을 뿐임에도, 진흙이 깨지며 안쪽에 쌓은 벽돌까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진짜 형편없습니다. 이게 뭡니까? 이래가지고 요리는커녕, 젖은 옷도 못 말리겠습니다.”

W는 바로 옆의 아궁이에도 발차기를 했다.

“여기도, 여기도, 여기도! 전부 겉만 그럴듯하지 쓸모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안절부절 못했다. 이방인은 지나치게 성기사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누가 봐도 시비를 걸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무반응이다.

W는 근처의 성기사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의 안색이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이, 이봐. 그러다 다시 잡혀 들어간다고.”

사람들이 목소리를 낮추며 손짓 발짓을 해댔다. W가 그만둬 주길 바라는 이들의 간절한 몸짓은 간단히 묵살되었다.

“당신들, 성기사들도 너무 뻣뻣해요!”

지목을 받은 성기사는 그냥 팔짱을 꼈을 뿐, 화를 내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여기는 신성왕국이잖아요. 신의 말씀을 받드는 교국이라면서요?”

“그렇다. 뭐가 문제지?”

“지금 그 말투! 말투부터가 뻣뻣해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내가 높여 부를 존재는 오직 신밖에 없다.”

“높임말은 쓰지 않더라도 그 말끝마다 ‘다’로 끝나는 거. 너무 딱딱하고 접근성이 떨어지잖아요?”

“룰이 그렇다. 어쩔 수 없다.”

“그럼 그건 넘어가도! 이런 엉터리 아궁이를 만들어 놓고 잘도 뿌듯해 하는군요!”

“발로 차지 않았으면 부서지지 않았을 거다.”

“신전 내 주방의 아궁이도 발로차면 부서지나보죠?”

성기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필요하다고 말을 하라고요! 입 놔뒀다가 뭐 할 거예요?”

“우리들끼리도 충분히…….”

이방인은 이마를 짚었다.

“아아……틀렸어. 당신들은 분명히 날 엿 먹이려고 이러는 거야. 내가 축제준비를 못하게 하려고. 맞지?”

“어떻게 해석하면 그런 뜻이 되는 건가. 우리 성기사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자기 힘으로 안 될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대기도 하고 그러라고요!”

이방인은 천막촌의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건축업에 종사하신 분 있나요? 하다못해 훈제용 화덕이라도 만들어본 경험이 있어도 상관없어요! 그것도 아니면, 내가 만들어도 저것보단 낫겠다 싶은 분?”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눈만 멀뚱거렸다. 이게 뭔가 싶은 표정들이다. 그들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적응을 못하는 동안, 이방인은 계속 다그쳤다.

“정말 아무도 없어요? 이 많은 사람들 중에 기술자 한명이 없는 거예요?”

그때 천막에서 노인하나가 밖으로 나왔다.

“훈제 연어 만드는 화덕 정도는 만들어보았지. 물론 화덕은 겨우내 부서지지 않고 잘 버텼고. 이 정도면 됐는가?”

“딱 좋네요! 자! 성기사 아저씨. 이 어르신이랑 함께 잘해보세요.”

“으음…아저씨라…….”

“도움 주러 나오신 분이니, 뻣뻣하게 굴지 말고요. 쫌!”

“알겠소.”

성기사는 쭈뼛거리며 노인과 함께 부서진 아궁이를 살피러 갔다.

뒤이어 이방인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요리할 사람,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아는 사람 등등을 뽑아냈다.

“자! 그럼 다들 맡은 일을 시작하세요!”

이방인은 짝 소리가 나게 손뼉을 한번 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거야 원…….”

사람들은 어이없어 하면서도 각자 맡은 일을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사람들은 다들 뭔가 한 가지씩 역할을 맡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해?’ 라고 투덜거렸지만, 막상 일에 몰두하다보니 그런 생각은 어느 샌가 날아가 버렸다. 이들 각자가 맡은 일들은 전부 자신들이 좋아하거나, 직업 또는 특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 익숙함 속에 빠진 사람들의 얼굴엔 짜증대신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축제. 설레는 단어다.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들이 준비해야 하는 게 문제지만.

그렇지만 자신들이 직접 만들어나가는 축제는 어떤 모습일까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다.

맛좋은 음식도, 시원한 음료수도, 흥겨운 음악도 아직 준비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축제분위기에 빠져 들어갔다.


◇◇◇◇◇◈◇◇◇◇◇◇◈◇◇◇◇◇◇◈◇◇◇◇◇


신전 앞에 모인 사람들을 말 몇 마디로 해산시키는 건 어렵다. 그래서 위즈는 생각했다.

‘어렵다면 굳이 그럴 필요 없지.’

사람들이 흩어지는 걸 거부한다면, 그냥 모여 있어도 되는 상황을 만들면 된다.

그러자면 엉뚱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면 된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축제.

기왕 모인 김에 함께 놀아라.

그러다보면 가슴에 맺힌 답답함도 해소될 것이다.

이게 위즈의 의도였다. 게다가 축제를 벌이면, 사람들이 신전 앞 공터에 모여 있는 것에 대한 명분으로 써먹을 수도 있다. 혹시라도 나중에 발생할지 모를 문제를 원천봉쇄하는 것이다.

‘축제를 충분히 즐기면 사람들은 알아서 물러갈 거야.’

주객이 전도된 셈이지만, 위즈는 그렇게 믿었다. 축제로 사람들의 마음이 풀리면 충분히 가능한 일.

하지만 무턱대고 축제를 열자고 하면 사람들이 호응해줄 리 없다.

이들이 모인 건, 축제 같은 즐거운 행사 때문이 아니다. ‘돌팔이 치료사’인 위즈가 체포되었기 때문에, 선처를 바라며 무언의 시위를 한 것이다.

그런데 잡혀갔던 당사자가 다음날 풀려나면서 대뜸 축제를 열자고 하면 이를 받아들이겠는가.

이 문제만은 위즈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성기사들과 성직자의 도움을 받았다. 투스카르의 ‘나름 혼신을 다한 연기’를 본 위즈는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어이구. 뻣뻣한 건 말투뿐만이 아니구나!’

투스카르를 비롯한 성기사들이 제대로 한 것은, 일부러 아궁이를 엉성하게 만든 것뿐이었다. 성기사들이 받는 훈련 중에는, 야영이나 진지구축이 들어 있었다. 당연히 아궁이 만드는 법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궁이는 엉터리로 만들어졌다.

위즈는 엉망인 아궁이를 발로 차면서, 사람들 중에 협조해줄 사람을 찾았다. 다행이도 호응해주는 사람이 나왔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쉬웠다.

위즈는 축제를 위해 사람들이 가진 특기나 기술을 사용하도록 유도했다. 그런 것마저 없다면, 평소 흥미를 가지고 있는 쪽의 일을 거들도록 시켰다. 축제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모두가 축제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이 과정을 설명하라면 위즈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순전히 기세만으로 어물쩍 넘어가니까 되던 걸요.

물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거짓말에 거짓말을 거듭했고, 억지에 억지를 반복했다.

‘뭐,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거니까.’


◇◇◇◇◇◈◇◇◇◇◇◇◈◇◇◇◇◇◇◈◇◇◇◇◇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엔틸리움에 도착합니다.”

빌헬름텔은 지금 약초를 짊어진 사람들을 호위하며 뒤따르고 있었다. 지금 운반중인 약초들은, 전부 이웃나라 케이븐에서 내어준 것이었다.

약초부족 사태에 대해 전해들은 케이븐에서는, 자국의 비축분을 털어 신성왕국에 보냈다.

케이븐 말고도 여러 나라에서 약초를 보내왔다. 열흘 정도만 버티면 사실상 약초 때문에 골머리 썩일 일은 없었다.

멀리 엔틸리움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성벽을 본 사람들은 힘을 냈다.

“어서 갑시다! 오늘 아침은 제대로 된 요리를 먹고 싶다고!”

휴식시간까지 아껴가며 강행군을 한 끝에, 해가 완전히 떠오를 무렵엔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엔틸리움에 들어온 사람들은 불과 하루 만에 바뀐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몰라도……사람들이 들떠 보이는 걸?”

“게다가 저 요란한 장식들은 다 뭐야?”

약초를 치료사 길드에 전해준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족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엔틸리움에 축제가 벌어지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걸 할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저런 일들이 벌어져, 우중충한 가운데 축제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만난 가족들은 이미 축제 분위기에 빠져 한껏 들떠 있었다.

“간만에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로 했단다.”

“네에? 아버지 손목이 안 좋으시잖아요? 그보다 바이올린이 어디 있는데요?”

“신전에서 빌리기로 했다.”

이 정도는 양반이었다. 원래 바이올린을 켤 줄 아는 사람이, 간만에 실력 발휘를 하는 거였으니까.

“난 사실 연극배우가 꿈이었어요.”

“여, 여보. 이런 말 하려니 미안한데……당신은 연기 같은 거 잘 못하잖아?”

“실력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꿈이 중요한 거예요. 내 가슴속에 배우의 열정이 아직까지 불타오르고 있는 걸요! 잘 봐요. 이 악당! 감히 바하에서 마족을 소환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아내의 연기를 본 남편은 남편은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만 내쉬었다.

“대체 누가 마누라에게 바람을 넣은 거야?”

이런 일은 엔틸리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엔 반발하던 사람들도, 가족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을 돌렸다. 최근 들어 힘든 일을 겪었으니, 가끔은 기분전환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여기엔 증산된 약이 시장이 풀린 것도 한몫했다.

약초를 가져온 사람들이 늦은 아침을 먹고 있을 때쯤부터, 눈이 퀭하게 변한 치료사들이 식당에 들이닥친 것이었다. 길드에서 작업하고 있을 치료사들이 돌아다닌다는 것은, 약의 제조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알기에, 식당주인은 그들에게 2인분 같은 1인분의 음식을 내주었다.

“으으……밥을 먹긴 먹어야 하는데……졸리네. 흐암.”

“쩝쩝. 드르렁.”

음식을 씹으며 졸다가 접시에 고개를 처박는 자들. 빨리 식사를 마치고 자야겠다며 전투적으로 식사하는 자들. 모두 얼굴에 뿌듯함이 떠올라 있다.

그들 중에는 렌틸도 있었는데, 그 맞은편에는 위즈와 빌헬름텔이. 그리고 주변 탁자에는 레미라 마법사들이 앉아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렌틸.”

“나야 뭐 늘 하던 일이니까 괜찮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렌틸 역시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겨나 있다. 그만큼 일이 고됐던 것이다. 나이 먹고 철야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위즈와 빌헬름텔은 그런 렌틸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반면 레미라 마법사들은 별반 감흥이 없어보였다.

레미라 마법사 하나가 입을 열었다.

“탑에서 명령이 왔다.”

렌틸은 피곤함을 감추지 못하고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당장 잡아오라는 것이겠구려.”

레미라 마법사는 고개를 저었다.

“약초부족 사태는 바하뿐 아니라, 대륙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라 결론 내렸다. 그래서 탑에서는 영향권의 모든 마법사들을 동원해, 약초의 수급을 돕기로 했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보유한 양을 긁어모으니 어떻게든 되겠더군. 그래서 우리들은 탑에서 보낸 마법사들의 인솔을 우선순위로 두기로 했다. 렌틸 당신에겐 유예가 주어진 셈이지.”

“그렇다면…….”

“라르리르고를 가진 마법사가 여길 향해 오고 있으니, 손녀의 약을 만든 다음 레미라로 연행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물론 도주를 시도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잡아갈 테지만 말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위즈가 물었다.

“그 결정은 탑의 강경파 마법사들도 동의한 건가요?”

“탑의 결정이란 마스터들의 만장일치가 이루어진 경우를 말한다.”

위즈는 렌틸을 바라보았다. 손녀 아이린의 약에 들어가는 핵심재료-라르리르고가 오고 있다는 말에 렌틸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렌틸의 사정을 들어서 알고 있던 치료사들이 축하해주었다.

“하하하. 일 끝나고 나와 보니 축제라더군요. 축하할 일이 많이 생길 건가 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동안, 위즈와 빌헬름텔은 채팅창을 떠올리고 있었다.

위즈는 빌헬름텔이 없는 동안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을 막 마친 참이었다.

-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나저나 축제를 여는 건 괜찮은 생각 같군요.

- 원래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바깥의 문제를 끌고 들어와 덮는 법이라잖아요. 하지만 여기서는 그럴 건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 내부에서 알아서 처리하는 수밖에 없죠. 고민 끝에 떠올린 건 축제였어요.

- 한 가지 걱정되는 건. 억지로 밀어붙인 거라, 사람들이 얼마나 호응할지 모른다는 겁니다.

- 괜찮을 거예요. 처음엔 다들 쭈뼛거렸지만, 나중엔 사람들 스스로 신이 나서 앞장 설 테니까요. 밖을 봐요. 저기 저글링을 하는 노인 보이나요?

- 네. 보입니다.

- 저 할아버지는 원래 곡예단 출신이었대요. 제가 저글링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다 늙어서 무슨 재주를 부리겠냐며 역정을 내셨어요. 하지만 지금 저 할아버지의 얼굴을 봐요. 지금 억지로 시켜서 하는 것 같나요?

- 억지로 시킨 걸로는 보이지 않는군요. 저 노인. 웃고 있어요.

- 맞아요. 저는 그저 저글링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저 할아버지는 권유에 응한 거예요. 이유가 뭐겠어요? 저 할아버지는 곡예단 시절의 향수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렇기에 지금 저글링을 하는 거고요. 저 할아버지에겐 저글링을 하는 지금 이순간이 가장 빛나는 시간이에요. 지금 엔틸리움 사람들에게도 그런 시간이-휴식과 안정이 필요해요. 축제는 그 기회를 제공할 거예요.


작가의말

연참 10일 째.

1위에서 물러났지만....신경 안 씁니다.

원래 완주가 목표였으니까요.


이번 편은 위즈일행이 잠깐 쉬어가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내일부터는 굴릴까 해요.




2014.11.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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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120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1) +2 14.06.17 1,106 20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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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1) +2 14.05.24 1,954 40 25쪽
112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0) +4 14.05.23 1,838 33 23쪽
»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9) +3 14.05.22 1,721 44 24쪽
110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8) +5 14.05.21 1,660 60 22쪽
109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7) +4 14.05.20 2,273 40 24쪽
108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6) +5 14.05.19 1,633 50 25쪽
107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5) +6 14.05.17 1,088 32 30쪽
106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4) +2 14.05.16 1,785 33 25쪽
105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3) +2 14.05.15 2,361 130 26쪽
104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2) +2 14.05.14 1,059 23 25쪽
103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1) +2 14.05.13 927 28 25쪽
102 99화...5.혼돈을 비추는 거울 (10) +2 14.05.12 1,548 34 29쪽
101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9) +3 14.05.07 1,749 106 19쪽
100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8) * +2 14.05.03 1,527 34 34쪽
99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7) +4 14.05.01 1,135 22 25쪽
98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6) +2 14.04.29 1,002 30 23쪽
97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 +2 14.04.25 1,529 29 27쪽
96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 +1 14.04.24 1,214 22 25쪽
95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 +2 14.04.21 1,135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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