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폭렬천사의 셸터

또 다른 셸터

웹소설 > 일반연재 > 게임, 판타지

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152 회
조회수 :
231,422
추천수 :
5,519
글자수 :
1,674,356

작성
14.06.05 17:43
조회
974
추천
31
글자
23쪽

117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8)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28.

아침 해가 막 떠오르는 시간, 시장골목에 위치한 대부분의 상점들은 이제 막 문을 열고 있었다. 평소보다 늦은 개점이다. 어제의 축제 때문에 절제 없이 들이킨 술이 원인이었다. 그중 잡화점 주인은 상태가 많이 안 좋아보였다. 숙취가 가시지 않은 노란 얼굴이 느릿느릿 가게 문을 열고, 상품진열대를 덮은 뚜껑을 치웠다. 이 모든 작업은, 나무늘보가 갑자기 부지런해진 정도의 속도로 이루어졌다.

“좀 빨리 빨리 움직이면 안 됩니까?”

레미라 마법사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내가아……아지익…해장도 안 해서 그렇수다.”

“말린 과일은 어디 있소?”

“그건 창고에서 꺼내 와야 하는데에……. 기다리쇼.”

“끄응!”

잡화점 주인의 느려터진 움직임만큼이나 느긋한 목소리는, 레미라 마법사들의 속을 잔뜩 긁어놓았다. 그렇다고 직접 창고에 들어가서 물건을 꺼내오겠다고 하진 못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정 급하면 가게일 좀 도우라는 눈치인데, 레미라 마법사들은 그냥 물건만 사고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데서 발목 잡혀 있을 틈은 없었다.

“보아하니 다른 가게들도 별 차이는 없어 보이는군요.”

근처 푸줏간에서 말린 고기를 구입하기로 되어 있는 마법사 역시, 주인을 닦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도둑처럼 생긴 푸줏간 주인 역시 숙취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기, 기다리쇼! 가게 문만 연다고 물건을 팔 수 있는 게 아니요! 물건도 진열하고, 금고도 열어야지!”

시장에서 레미라 마법사들이 인내심을 기르고 있는 동안, 몇몇 사람들은 먼저 엔틸리움 밖에 나가 암살자들을 감시하기로 했다.

위즈 일행이 엔틸리움을 떠나기로 한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이 계획은 느긋하게 아침을 먹은 뒤, 여행물자와 말을 준비해 떠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간밤에 제압한 암살자들의 행방이 묘연해진 지금은, 계획대로 느긋하게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각자 역할 분담을 하여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레미라 마법사들은 여행물자를 준비했고, 그동안 위즈와 크레센토 왕국에서 온 사서 일행들이 엔틸리움 밖을 정찰했다.

위즈의 경우는 섀도 런을 이용하면 숲속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고, 숨바꼭질-공을 이용하면 은신한 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라미즈를 비롯한 사서 일행들은, 기본이 마법사였으니 탐지스킬로 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엔틸리움 인근은 마법사들이 샅샅이 훑고, 보다 먼 거리는 위즈가 기동력을 살려 살핀다.

이 계획대로라면 엔틸리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암살자들을 미리 감지할 수 있다. 하지만 30분이 넘도록 숲을 헤집어도, 암살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엔틸리움이 까마득해질 때까지 멀어지자, 여행 중인 민간인들만 보였다.

노쇠해진 사람을 수레에 싣고 이동하는 모습을 본 위즈는, 그들의 구성이 암살자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환자와 그 가족들이로군. 엔틸리움은 약재부족의 영향에서 벗어났으니, 여기로 오는 것도 당연한 일인가.’

다시 엔틸리움으로 돌아온 위즈는 사서 일행과 합류했다.

“어떻습니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아요. 적어도 은신술 같은 걸로 숨어 있는 건 아니에요.”

“민간인 중에 변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은?”

“그렇게 보기엔 터무니없이 숫자가 적어요. 다 합쳐봐야 달랑 10명 정도라고요. 라미즈님은 찾으셨어요?”

“이 근처엔 우리들 말고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 암살자들은 아직 엔틸리움에 있다고 봐야겠군요.”

아이린이 떠나기 전, 암살자들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암살 시도를 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성기사들이 눈을 번뜩이는 대낮의 엔틸리움은, 암살을 하기에 적당한 장소가 아니다.

실제로 암살자들을 잡아들이지는 못했기에 성기사들은 싱숭생숭해 있다. 그 증거로 밤샘 근무를 마친 순찰조들이, 아직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지하수로를 중심으로 남은 흔적들을 더듬어나가고 있었다.

지하수로에서부터 시작된 악취 섞인 발자국이 그것이다.

그 발자국은 위즈 일행의 것이었기에, 발자국을 따라 움직여봐야 신전 ․ 치료사 길드 ․ 여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 세 장소에는 다른 곳보다 성기사들의 밀도가 높았다. 이것은 의도치 않은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사실상 아이린이 성기사들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게다가 상급암살자인 던컨이 아이린 옆에 붙어 있으니 완벽한 철벽 수비다.

이 때문에 엔틸리움에서 아이린을 노리는 건 매우 어렵게 되었다.

“한시적이지만 성기사들이 주변에 얼쩡대니 걱정될 건 없어요. 암살자들이 밖에서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지 않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우리들은 충분한 성과를 얻은 거예요.”


◇◇◇◇◇◈◇◇◇◇◇◇◈◇◇◇◇◇◇◈◇◇◇◇◇


해가 완전히 떠오르자, 엔틸리움이라는 이름의 기계장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새벽부터 움직이던 시장골목이 활기찼다.

숙취에 시달리면서도 용케 가게를 연 상점 주인들은, 숙취로 띵한 머리를 짚으며 점원들을 닦달했다.

“이놈아! 어제 하루 쉬었다고, 굼벵이가 되어버린 것이냐? 사람이길 포기한 그 둔한 손놀림은 뭐냐? 나무늘보냐? 엉? 나무늘보야? 정신 차려! 난 사람을 고용했지, 나무늘보를 고용한 기억은 없다!”

“그, 그게 아직 숙취가…….”

“숙취, 그깟 것 때문에 사람 죽었다는 소리 들은 적 없다. 어서 빨리 움직이지 못해!”

“에이…….”

점원이 투덜거리며 상자를 들고 몸을 돌렸다. 팔꿈치가 상품진열대를 건드리며, 물건이 담긴 작은 상자들이 우르르 바닥에 쏟아졌다.

“이 노옴……불만 있다 이거지이?”

“그게 아니라 진짜 숙취 때문에 실수한 겁니다.”

점원이 변명을 해보지만, 상점주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건을 나르다 쏟아버린 점원의 등짝을 후려치며 상점 주인이 으르렁거렸다.

“그럼 나는 해장한 뒤라 쌩쌩한 거냐? 그래서 꼭두새벽부터 가게 문 열었고?”

“흐헉! 아뇨! 아닙니다!”

두꺼운 쇠 주판을 손에 탁탁 쳐대는 상점 주인을 보며 점원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을 본 상점 주인은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해장에 해물탕이 좋다기에, 배달시키는 김에 네 녀석도 사주려 했더니 안 되겠구나. 너는 혼자 시켜먹던가 말던가 알아서 해라.”

“크흑…공짜 해물탕이……해물탕이….”

가게점원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도시의 활기는 상점가에서만 시작되지 않았다. 아침을 먹으려는 사람들이 식당가의 맛집으로 몰려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긋하게 맛을 음미하며 음식을 맛보았지만, 그저 연료를 공급하는 것처럼 억지로 음식을 쑤셔 넣는 사람도 있었다.

“큭. 이 가게의 명물인 모닝스프에서 아무 맛도 안 느껴지다니…….”

“침이 말라서 빵도 안 삼켜진다.”

이들은 치료사들이었다. 축제전날, 약성강화법을 이용해 약을 증산한 후 치료사들은 그대로 뻗어버렸다. 철야작업으로 깎여나간 체력이며 정신력을 추스르려고, 이들은 본의 아니게 축제날 모두 휴업하게 되었다. 그랬으니 푹 쉬었다면 좋았겠지만, 어제 저녁에 약초를 가지고 방문한 사람들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차라리 놀다가 지친 거면 억울하지나 않지.”

이건 치료사의 숙명과도 같은 것. 하나둘 일어서서 길드로 출근하는 치료사들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치료사들과 마찬가지로 피로에 절어 있는 부류는 성기사였다.

하지만 이들은 전사의 강인한 체력과, 성직자의 강한 정신력을 고루 갖추었다.

뎅뎅뎅.

“신전의 종이 울린다. 엔틸리움 성벽의 문을 연다.”

성기사 다섯 사람이 바닥에 눕혀놓은 것 같은 수레바퀴 모양의 레버에 달라붙어 힘을 썼다.

“흐압!”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지렁이 같은 힘줄이 꿈틀거린다. 그때마다 레버가 회전하면서 성문이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진다. 성문은 도르래와 연결되어있었고, 이 도르래는 다시 톱니바퀴가 달린 여러 개의 축과 어울렸다. 성기사들이 움직이는 원형의 레버는 이것과 연결되어 있었다.

“대단하다…….”

주변에 늘어서 있던 병사들이 감탄했다. 자신들은 열 명이 달라붙어야 열 수 있는 성문을, 그 절반인 다섯으로 여는 성기사들의 괴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이야 힘들이지 않아서 좋지만……왜 저들은 고생을 사서 하는 거랍니까?”

“저것도 수련이라고 하는 모양이야.”

“우리 같은 말단병사들은 이해 못 할 이야기로군요.”

“뭐 그러려니 해야지.”

성문을 연 성기사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성문 주변에 늘어섰다.

오가는 사람들을 검문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책상과 의자도 준비되어 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인 아침이 시작되려하고…….

“진짜 뻔뻔스럽잖아?”

성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성기사들이 얼굴을 마주보았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사실 저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엔틸리움의 성문은 아침 해가 완전히 떠오를 때 열리고, 달이 완전히 떠오르면 닫힌다.

그 외의 시간에는 굳게 닫힌다. 따라서 다른 도시로 이동하고 싶어도,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이건 대륙의 모든 나라에 비슷하게 적용되는 사항이다.

그래서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사람들은, 성벽에 바싹 붙어 줄을 섰다. 성벽을 따라 줄을 서면 세치기의 걱정도 없었고, 성벽이 드리우는 그늘 아래애서 햇볕을 피할 수도 있었다.

이건 성기사들이 더 잘 아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성기사들은 의아하게 여겼다. 그러다 성기사 하나가 얼굴을 굳히며 일어섰다.

“어쩌면 간밤의 투서와 관련된 것일지도 모른다.”

“암살자가 들어와 있다는 투서 말인가?”

“아직까지 잡히지 않았으니, 장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인은 해봐야하겠지. 놈들이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일부러 소란을 일으킨다면, 그걸 막는 게 우리들의 역할.”

“그렇다면 잠시 바리케이드를 세워놓겠다.”

나무로 만든 바리케이드가 활짝 열린 성문의 좌우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암살자들의 수작일지 모른다며 우려한 성기사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근육질의 사내가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다가오자, 주변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하지만 안쪽에서는 성기사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듯 한창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성기사는 아무 말 않고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를 살펴보았다.

상황은 성직자로 보이는 이방인 여성을, 병을 치료하려고 엔틸리움을 방문한 사람들이 성토하는 분위기였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알려주기 싫으면 비키세요. 다른 곳에 가서 알아볼 테니까.”

“다른 곳? 다른 사람들이라고 다를 줄 아시나본데, 전부 여기와 똑같은 반응일 거요. 대체 왜 그 돌팔이를 찾는 거요?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개인적인 볼일입니다. 당신들에게 알려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비켜주세요.”

성직자 여성은 억지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사람들은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

“헹.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그리고 왜 그 사람이 돌팔이야? 그 작자가 만든 약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고.”

그 말을 들은 성직자 여성이 물었다.

“당신들도 돌팔이라고 부르잖아요?”

“달리 이름도 모르니까 그러는 거 아냐!”

“저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들이랑 댁이랑은 다르지. 우리들은 그 돌팔이 덕을 보았고, 댁은 돌팔이를 시기해서 신고한 거잖아? 틀려?”

“솔직히 시기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만…….”

“그렇지? 그래서 신고한 거잖아? 순순히 인정했으면 이제 그만 떠나라고.”

주변 사람들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 맞아! 사람이 마음을 곱게 써야지.”

“성직자가 되어서 그런 마음먹으면 안 되지.”

성직자 여성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는 그분을 만나야 해요. 길을 열어주세요.”

“적어도 그 돌팔이가 성문을 빠져나갈 때까진 안 되지.”

여기까지 지켜본 성기사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했다. 성직자 복장을 한 이방인 여성은 beadsman이었다. 엔틸리움에 beadsman은 단 한 사람.

‘루시엔이라는 beadsman이 바로 저 여자였군.’

그리고 루시엔은 이틀 전, 무면허 치료행위를 하던 돌팔이를 신고했다.

사실 루시엔이 신고하기도 전부터, 돌팔이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성기사들은 그냥 내버려두었다. 돌팔이가 팔던 약을 들고 가 치료사길드에 분석을 요청했더니, 미미하게나마 질병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눈감아준 것이다.

하지만 같은 성직자가 돌팔이를 신고했으니, 원칙대로 처벌할 수밖에 없었다.

면허 없이 의료행위를 하는 건, 엄연한 불법.

이를 처벌하는 건 이는 정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래서 성기사들은 돌팔이를 잡아들였다.

그런데 조금 전 루시엔은 시기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래서 돌팔이를 신고했다고 한다. 즉, 루시엔은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남에게 해를 끼치려 한 것이다.

이는 성직자가 해서는 안 될 일중에 하나다.

성기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beadsman 루시엔. 디바인 마크는 어딜 간 거요?”

옥신각신하던 사람들이 뒤늦게 성기사를 발견하고 뒤로 물러섰다. 루시엔 역시 뒷걸음질 쳤다. 성기사가 성큼성큼 걸어 루시엔 앞에 섰다.

“디바인 마크는 어딜 간 거요?”

같은 물음을 받은 루시엔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렸다?”

“그렇습니다.”

“듣자하니 어제 디바인 마크를 여러 번 받아갔다던데, 그걸 전부 잃어버렸다는 거요?

“그, 그렇습니다. 제가 덜렁거려서요. 그게 잘못인가요?”

“잘못은 아니오.”

성기사는 자신의 허리띠에서 장식을 떼어냈다. 투박하게만 보이는 장식이었지만, 이 역시 디바인 마크였다.

“beadsman은 흔치 않으나, 그 누구보다 공정하게 힘을 쓰는 성직자. 그런 사람이 디바인 마크도 없이 다니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지. 자, 받으시오.”

루시엔은 성기사가 내미는 디바인 마크를 공손히 받아들었다.

“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뭐, 이런 걸 가지고. 부담가질 필요는 없소이다.”

“그럼 저는 이만…….”

“디바인 마크는 착용하지 않는 거요?”

“나중에 알아서 달겠습니다.”

“성기사의 디바인 마크라 멋이 좀 없어 그런 거요? 그런 거라면 신전에 가서 새것을 받아오리다.”

“아뇨, 괜찮습니다. 이거면 충분합니다.”

루시엔이 빠져나가려 하자, 성기사가 그 앞을 막아섰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면 내가 준 디바인 마크를 어서 착용하시오.”

“다른 곳에서 달겠습니다.”

“조금 전 내가 한말 못 들었소? beadsman이 디바인 마크도 없이 돌아다녀서는 안 되는 법이지. beadsman이라면 스스로 갖는 자긍심도 만만치 않을 텐데, 어째서 서둘러 디바인 마크를 달지 않는 거요? 설마 디바인 마크를 가까이 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 거요?”

그 말을 들은 루시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성기사는 루시엔의 손에서 디바인 마크를 빼앗아들었다. 그리고 루시엔의 어깨에 가져다대었다.

파삭.

디바인 마크는 루시엔의 옷에 닿자마자 잘게 부서져 내렸다.

“뭐지? 어째서 저게 부서지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디바인 마크가 이런 식으로 부서지는 모습을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처음 겪는 신기한 일을 사람들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지켜볼 때, 성기사만이 차갑게 미소 지었다.

“긍지 높은 beadsman이 이렇게 되다니 안타깝군. 루시엔, 내가 네게 할 말은 하나뿐이다. 신성왕국을 떠나라. 타락한 성직자여.”

성기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타락? 타락이라고 했어, 지금?”

“그 뭐시냐……타락이란 게, 그거지?”

“디바인 파워가 완전히 떠나는 거 맞지?”

성직자로서 모든 걸 잃는 타락. 그것은 디바인 파워에 의한 힐링조차 통하지 않는 상태가 됨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마족들처럼 마왕의 가호를 받을 수 있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신이라는 존재가 완전히 관심을 거둬버리는, 사실상의 무시와 방치.

이것이 타락한 성직자에게 내려지는 벌이었다.

“히익! 저리가! 마녀야!”

“이 저주받을 것! 꺼져! 꺼지라고!”

사람들이 짐을 뒤져 꺼낸 소금을 마구 뿌려댔다. 눈처럼 하얀 소금가루가 루시엔의 검은 머리카락에 달라붙었다. 루시엔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그 모습이 처량해 보여 소금을 뿌리던 사람들의 손이 멈칫했다.

“잠깐. 저거 울고 있는 거 아냐”

“뭘 잘했다고 울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사람들은 더 이상 소금을 뿌리지 않았다. 더 뿌리고 싶어도 소금이 다 떨어졌다.

그러는 동안 루시엔은 걸음을 옮겼다. 고개는 푹 수그린 채였다.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감청색 성직자의 옷, 그 위에 쌓인 하얀 소금가루.

흑과 백의 대조적인 이미지의 공존은 타락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여실히 드러내주었다.

사람들은 혹시라도 루시엔에게 닿을까봐 멀찍이 물러섰고, 루시엔은 활짝 열린 길을 걸었다.

모든 상황을 전해들은 다른 성기사들이 바리케이드를 치웠다. 그녀가 활짝 열린 성문을 빠져나가자, 사람들은 그녀가 지나간 길에 침을 뱉었다.


◇◇◇◇◇◈◇◇◇◇◇◇◈◇◇◇◇◇◇◈◇◇◇◇◇


“저희들은 엔틸리움에 더 머물겠습니다.”

던컨과 라미즈 일행은 이곳에서 사람들을 돕다가, 크레센토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아이린을 노리는 암살자를 완전히 뿌리치지 못했기에, 위즈와 렌틸은 아쉬워했다.

전직 고급암살자인 던컨이 함께 해준다면, 아이린은 보다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다. 하지만 원래 던컨은 라미즈 일행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이다. 아이린을 지키자고 라미즈 일행을 내팽개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빨리 레미라로 돌아가죠.”

마법사의 탑에서 아이린을 보호해주겠다고 한 이상, 일정을 앞당기는 게 최선이었다. 사정을 들은 마법사의 탑에서도, 상급마법사인 아라톨이 마중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일행들은 전원 말을 빌려 탔다.

“이랴! 이럇!”

그렇게 하루를 꼬박 달려서 엔틸리움의 거대한 성벽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 위즈 일행을 막아선 존재들이 있었다.

잿빛털이 거칠게 돋아난 몸뚱이.

터질듯 한 근육으로 뒤덮인 팔과 다리.

목덜미에 풍성한 갈기털.

역관절로 꺾인 발목.

희게 번뜩이는 이빨을 드러낸 늑대의 머리통.

바로 라이칸스로프들이다.

길의 앞뒤를 막아선 라이칸스로프만 스무 마리.

하급마물이라고는 하나, 이정도 숫자와 싸우는 건 그리 현명한 생각이 아니다.

“숲으로 피합시다!”

“틀렸소! 숲에도 녀석들이 있소!”

울창한 나무가 얽혀 드리워진 나무그늘 속에,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가 있었다. 노란눈동자는 이쪽을 뻔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 가까이 다가오진 않았다. 그 수는 길을 막은 녀석들과 비슷했다. 길에 있는 놈들을 상대하나, 숲속에 숨어 기다리는 놈들을 상대하나 하나같이 만만치 않다.

그렇다고 길 한가운데에서 미적거릴 시간이 없다.

라이칸스로프가 나타났다는 것은, 아이린의 암살을 위해 네크로맨서가 동원되었다는 뜻.

이곳이 신성왕국이라 그 위력이 반감된다 하여도, 네크로맨서의 장점인 ‘숫자로 밀어 붙이기’는 건재하다. 이렇게 네크로맨서가 시간을 끄는 동안, 제대로 된 암살자가 혼전 중에 아이린을 노리면 지켜내지 못할 수도 있다.

판단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시간이 없으니 그냥 돌파 합시다!”

“뚫고나갈 거라면, 길을 막은 놈들을! 매직 애로우!”

마법사들이 꺼내든 매직스틱에서 생겨난 흰색의 빛다발들이 라이칸스로프들의 몸을 때렸다. 매직 애로우에 맞은 라이칸스로프들은 퍽퍽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려났다. 그때 시커먼 것들이 라이칸스로프들을 뛰어넘으며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레미라 마법사들은 황급히 배리어를 펼치는 한편, 시퍼런 벼락을 쏟아내 달려드는 적을 공격했다.

커헝!

직격으로 벼락을 맞은 라이칸스로프들이 고통스러워하며 뒤로 빠졌다.

그 순간 렌틸과 아이린이 함께 탄 말이 울부짖었다.

끼이히힝!

말의 머리에 쿼렐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그대로 두개골까지 뚫어버린 날카로운 일격.

말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고개를 처박고 쓰러졌다. 즉사였다.

“웬 놈들이냐!”

앞을 막아선 라이칸스로프들이 움직여 길을 비켜주었다. 하지만 레미라 마법사들은 감히 그곳으로 통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곳에는 석궁을 들고 몸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든 석궁에는 파르스름한 빛이 감돌고 있었고, 머리카락이며 망토며 옷가지가 미친 듯이 펄럭였다.

“암살자!”

이쪽에는 바람 한 점 없건만, 암살자주변에만 바람이 분다.

마법사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화살에 바람의 정령을 실었는가.”

암살자들은 정령강화를 배운 자들이었다. 그들이 휘파람을 불자 라이칸스로프들이 거대한 늑대 모습으로 변했다. 암살자들은 라이칸스로프들에 올라타더니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제부터 우리들은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 않고 목표물을 노리겠다. 이건 애피타이저에 불과하다!”

암살자들이 남긴 경고가 멀어져갔다. 숲속에 자리 잡은 노란눈동자들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일행들은 누구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숲속에 숨은 녀석들까지 협공했다면, 빈틈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냥 가버린 거지?”

“암살할 타이밍을 만든다는 보장도 없는데, 그런 식으로 마법사에게 던져줄 이유는 없었겠지.”

렌틸까지 합하면 중급마법사만 11명.

이정도 숫자의 중급마법사라면 다수의 적이 뭉쳐서 들어와도 마법으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아니 압도적으로 물리칠 수 있다. 그것도 순식간에.

마법사의 전투 효율은 1:1이 아닌 1:多쪽이 더 우수하니 당연하다.

그 틈을 노려 아이린을 암살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공수전환이 빠른 중급마법사의 방심을 유도하는 건 힘든 일이다.

하지만 같은 물량을 동원해서, 이런 식으로 치고 빠지기만 반복한다면 일정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연이은 습격은 마법사들의 피로를 가중시킨다.

“장기전으로 끌어갈 속셈이로군.”

사람들은 깨달았다. 암살자들이 보다 확실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라는 것을.


작가의말

연참 끝나고

사흘간 충분히 쉬었으니 다시 시작합니다.



2014.11.08 수정

[10,328 => 10,370]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또 다른 셸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24 121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2) +3 14.06.26 696 24 30쪽
123 120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1) +2 14.06.17 1,106 20 31쪽
122 119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0) +2 14.06.14 683 18 26쪽
121 118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9) +2 14.06.09 1,603 91 28쪽
» 117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8) +2 14.06.05 975 31 23쪽
119 116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7) +2 14.05.31 1,615 96 23쪽
118 115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6) +1 14.05.30 970 22 25쪽
117 114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5) +3 14.05.29 2,018 39 31쪽
116 113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4) +2 14.05.28 1,236 32 29쪽
115 112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3) +8 14.05.27 1,910 59 30쪽
114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2) +3 14.05.26 810 23 23쪽
113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1) +2 14.05.24 1,955 40 25쪽
112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0) +4 14.05.23 1,838 33 23쪽
111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9) +3 14.05.22 1,721 44 24쪽
110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8) +5 14.05.21 1,660 60 22쪽
109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7) +4 14.05.20 2,274 40 24쪽
108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6) +5 14.05.19 1,634 50 25쪽
107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5) +6 14.05.17 1,089 32 30쪽
106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4) +2 14.05.16 1,785 33 25쪽
105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3) +2 14.05.15 2,361 130 26쪽
104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2) +2 14.05.14 1,060 23 25쪽
103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1) +2 14.05.13 928 28 25쪽
102 99화...5.혼돈을 비추는 거울 (10) +2 14.05.12 1,548 34 29쪽
101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9) +3 14.05.07 1,750 106 19쪽
100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8) * +2 14.05.03 1,528 34 34쪽
99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7) +4 14.05.01 1,136 22 25쪽
98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6) +2 14.04.29 1,003 30 23쪽
97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 +2 14.04.25 1,529 29 27쪽
96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 +1 14.04.24 1,214 22 25쪽
95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 +2 14.04.21 1,135 34 2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