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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또 다른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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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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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29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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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6)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6.

1대륙과 레미라 사이의 바다는 현재 해적들이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각 왕국의 해군병력이 바하르칼로 출정했기에 일시적인 공백상태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1대륙의 서부해안에 있는 해군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재빨리 움직이고는 있다지만 열흘은 넘게 걸린다.

결과적으로 레이스 단의 프로미넌스를 막을 건 없었다.

한 차례 태풍이 지나간 바다 역시 잔잔했다. 거기다가 조류와 순풍의 도움까지 받자, 레미라로 갔을 때보다 훨씬 빨리 돌아올 수 있었다.

위즈와 렌틸이 1대륙에 도착한 건, 항해 나흘째.

렌틸의 손녀 아이린에게 약을 만들어 건넬 시간은 앞으로 6일밖에 남지 않았다.

두 사람은 신성왕국-바하의 국경을 향해 움직였다.

아이린은 이곳에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국경 지역에서 연락을 받고 만났을 테지만……약 먹을 때를 놓쳤으니 대도시 쪽으로 움직였을 거네.”

위즈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 신성왕국은 말 그대로 성직자가 득시글거리는 곳이다.

신성왕국-바하의 병사들은 전원 성기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촌장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은 유사 신관들이다. 심지어 이곳의 평신도조차 작은 상처정도는 스스로 치료할 정도다.

그런 신성왕국에 렌틸의 손녀가 있다면, 어째서 이곳에서 치료를 받지 않는 것이냐는 것이다.

“불치병을 치료하는 건 신이 내려준 힘이 아니야. 오히려 인간들의 치료술이지.”

“하지만 성직자들은 뭐든지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까?”

“모든 생명은 하늘이 내린 수명만큼을 살아가네. 만약 불치병에 걸려 20살에 요절하게 되어 있다면, 그런 환자에게는 성녀의 치료조차 소용없다네.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게 되기 때문이지.”

“잔혹하군요.”

“잔혹하다? 자네는 신께서 잔혹한 존재라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습니까.”

“신께서 잔혹한 존재라면, 아이린을 연명시킬 약이 세상에 존재하진 않았겠지. 하지만 그 조제법은 할아버지 손에 있지. 감사할 일이야. 신께서 아이린에게 짧은 수명을 주셨지만, 그걸 극복할 수 있는 길마저 막은 건 아니니까. 적어도 신께서는 인간이 자기 손으로 운명을 개척할 기회를 열어주었다고 생각하네.”

“아무튼 디바인 파워는 만능이 아니란 말이군요. 그래서 신성왕국에서는 그 대안으로 치료술이 발달한 겁니까?”

“보다 근본적인 문제때문이지.”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디바인 파워는 신에게서 부여받는 것. 신에게 선택받지 못하면 한줌도 쓰지 못할 힘이지. 아무리 바하가 신성왕국이라 불려도, 모든 국민이 신에게 선택받을 수 있는 건 아니라네.”

“그렇다면 신성왕국에서 성직자처럼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라는 겁니까?”

“전체 인구의 1/4이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보면 굉장히 높은 수치이긴 하나, 달리 말하면 그것이 한계라는 뜻이지.”

“그래서 디바인 파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치료술을 배웠군요.”

“나 역시 이곳에서 기본부터 배웠었지. 치료술을 배우는 자에겐 이곳이 성지나 마찬가지야.”

위즈는 국경을 넘으려 길게 늘어선 인파를 둘러보았다. 상당히 긴 줄이었음에도 금세 짧아져 대부분이 성벽을 넘은 상태였다.

“어째서 사람들이 저렇게 붐비는지 알겠군요.”

“맞네. 저들은 모두 환자와 그 가족들이네. 바하가 저들에겐 마지막 희망이지.”

드디어 위즈와 렌틸의 차례가 되었다. 위즈는 크레센토 왕국을 빠져나올 때 사용한 통행증을 내밀었다. 정확하게는 물건을 운송하는 임무를 받은 위임장이지만, 모든 국경을 넘을 수 있고, 그 기간에 제한이 없었기에 사실상 프리패스나 다름없었다.

렌틸에게도 미리 만들어둔 통행증이 있었다.

손녀의 치료문제로 매년 신성왕국을 방문한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다.

통행증의 검사는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국경을 지키던 기사는 그저 한번 쓱 훑어보고는 두 사람을 통과시켜주었다.

위즈는 통행증을 챙겨 넣는 렌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너무 설렁설렁 보는 거 아닙니까? 위조된 건지 아닌지 확인도 해봐야 할 텐데요?”

“몇몇 주요 도시를 제외한 나머지 영토에는 출입을 자유롭게 하는 게 바하의 방침이네. 그리고 신성왕국이라면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지 않나?”

“네에?”

“신앙이란 건 본래 자애로움과 떨어질 수 없네.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구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평소에도 많은 이들이 빨리 치료받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만 해도 크나큰 선행이라 생각하지 않나?”

“그거야 그렇지만……그래서는 이 나라의 치안이 어지럽혀지지 않겠습니까? 지금 국경을 통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다른 나라 사람 아닙니까?”

“걱정할 것 없네. 바하에는 10만의 성기사가 있으니.”

“다른 나라에도 그 정도의 병력은 있지 않겠습니까?”

“자넨 성기사의 무서움을 모르는군.”

성기사는 전투 직업군임에도 반은 성직자와 같은 존재.

사악한 존재를 물리치는 힘과, 상처를 치료하는 힘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런 성기사들에게 언데드란 그야말로 아무렇게나 꺾어버릴 수 있는 허수아비와 다를 게 없다. 그런데 더 오션에서는 모자란 병력을 네크로맨서가 일으킨 소환물로 보충하는 게 일반적이다. 유지비도 안 들고 인명피해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성기사와는 상성이 나쁘다.

게다가 각종 축복과 버프를 받는 성기사는, 쉽게 지치지 않으며 오랫동안 전투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언데드보다 더 끈질기다.

“어느 정도냐면 팔 다리 하나 둘 잘리는 정도로는 결코 죽지 않는다네. 몇 시간이 지나 쌩쌩해져서 다시 싸우러 나오지. 게다가 성기사 100명이 모이면 집단공격기인 ‘천멸’을 사용할 수 있네. 이건 말 그대로 신께서 내리는 징벌. 이 땅을 어지럽히는 자들은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게 되네.”

끊임없이 내리치는 벼락.

손에 닿는 모든 음식물의 부패.

그리고 불면증.

이 삼박자는 천벌의 대상이 된 인간을 소모시킨다. 이렇게 체력이 다하고, 심력까지 소모한 사람들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위즈는 천벌의 정체를 듣고 한 단어를 떠올렸다.

“저주 아닙니까.”

“원래 점잖은 사람이 화나면 더 무서운 법이지.”

“그래도 명색이 신이라면서 저주라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위즈는 아주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현실의 카톨릭은 대외적으로는 사랑이니 자비를 강조한다. 하지만 성경에는 신의 저주를 받은 자들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불교에는 따로 분노한 형상의 부처가 존재하며, 파괴신으로 알려진 힌두교의 시바는 창조의 영역과도 닿아있다.

‘더 오션의 신도 마찬가지란 건가?’

렌틸은 입을 다문 위즈를 보고 아직도 성기사에 대해 염려하나보다고 여겼다.

“천멸이 사용된 것도 항마전쟁 때뿐이고, 사람에게 사용된 적은 없으니 걱정 말게.”

“힘으로 위협하는데 마구 날 뛸 사람은 없겠지요. 치안 걱정은 없겠네요.”

“그걸 위협이라고 생각하는 하는 사람은 없네. 사람들은 오히려 바하 사람을 존경하지.”

“힘을 가지고 있는 게 존경받을 일이라니……이곳 사람들은 의외로 거친 면이 있군요.”

“존경받는 건, 힘이 있는데도 마구 휘두르려 하지 않는 점 때문이네. 조금 전 설명했다시피 신성왕국의 성기사들은 쉽게 지치지 않고, 팔다리가 잘려나가면 알아서 붙이고 다시 싸우러 나오네. 전선이 쉽게 붕괴되지 않는단 말일세. 유지력이 남다르니까. 게다가 신의 힘을 빌려 저주를 날릴 수도 있지. 그런 군사를 가진 바하가 이제껏 한 번도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지 않았다면 믿을 수 있겠나?”

“주변 왕국들하고 한 번도 다투지 않았다고요?”

“국경 지역이라면 다투기야 했겠지. 그렇지만 전쟁까지 간 적은 한 번도 없다네.”

“왜요?”

“그야 신성왕국이기 때문이지. 신께서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지, 서로 반목하며 불화하라고 하진 않았으니까.”

결국 더 오션의 사람들, 즉 NPC들은 신성왕국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강성한 군사력을 보유했으면서도, 침략전쟁을 하지 않고 자제하는 모습 때문이다. 게다가 치안 악화를 감수하며 국경의 통제를 일부러 느슨하게 해주는 아량까지 베풀었다. 덕분에 환자들은 입국절차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보다 빨리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신성왕국의 결정은 다른 왕국들을 감동시켰다.

사람을 죽이는 건 칭찬받기 힘들어도, 사람을 구하는 건 칭찬받기 쉬운 법.

다른 왕국들은 자발적으로 불가침 협정을 맺었고, 신성왕국 근처에서는 노상강도는 물론 산적들조차 활동하지 않았다. 어차피 바하로 향하는 자들은 쇠한 몸을 이끌고 가는 병자들. 이들을 털어봐야 얻을 이익도 없고, 설사 털어서 한몫 챙긴다 해도 대륙의 공분을 사기 딱 좋다.

“그래도 안 보이는 곳에서야 강도질 하는 녀석들이 있겠죠. 신성왕국 안에서 그런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밖에서 그러는 것이니…….”

“그게 그렇지가 않네.”

예전에 어느 애송이 노상강도단이 상인을 턴 적이 있었다.

지병 때문에 바하를 방문했던 상인은 겨우 목숨만 건져 국경까지 도망쳤고, 이후 대륙의 모든 기사단이 문제의 노상강도단을 쫓게 되었다. 바운티 헌터들 역시 눈에 불을 켜고 이들을 찾아다녔다.

현상금 때문이 아니라 터부를 범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

“터부요?”

“사람이 가장 서러울 때가 어떤 때라고 생각하나?”

“타향에서 배가고파 쓰러졌을 때?”

“그것도 틀리진 않지만, 굶주림은 참으려면 참을 수는 있네.”

“그럼 어떨 때 가장 서러운데요?”

“병들어 아플 때이지.”

“아하!”

질병이 되었든 부상이 되었든, 최상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신성왕국-바하.

오랫동안 바하는 환자들의 마지막 희망으로 남아 있었다.

그 희망으로 향하는 여정에 공격을 받는다면, 다음에는 자신과 가족이 같은 일을 당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이제까지 누려온 것을 빼앗겼을 때 사람은 분노해 일어선다.

바하로 향하는 환자는 건드리지 마라.

오랜 터부를 깬 대가는 집요하고 광범위한 추적으로 번져갔다.

기사단들과 바운티 헌터만이 아니었다. 산적들과 노상강도들 세계에서도 터부를 범한 자들을 찾았다.

결국 상인을 턴 노상강도들은 2년을 못 넘기고 잡혀 교수대에 걸렸다.

‘신성왕국이 거대한 종합병원 비슷한 곳이란 건 잘 알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기를 쓰고 지키려 한다고?’

위즈는 렌틸의 말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국경을 넘자마자 곧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님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노환이라는데 유난을 떠는구먼.”

“그냥 여행하는 셈 치시지요. 신전에서 기도도 드리고요.”

“음……그것 괜찮구나.”

대화를 나누는 아들은 아무리 봐도 신성왕국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털가죽 옷을 걸치고 무거운 도끼를 등에 진 모습이, 시에니투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범적인 무법자였다.

‘저건 용병 나부랭이가 아냐. 확실해.’

시에니투스에서 무법자들과 만나고, 해적들과도 한동안 부대껴보았기에 위즈는 특유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 산적인지 노상강도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노인의 아들은 분명 범죄자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조금 전 국경검문에서 저들을 들여보내주었다.

“저들의 표정을 보게나.”

평소라면 남을 겁박하느라 흉하게 일그러져 있을 얼굴 가득 떠오른 것은 환한 웃음이었다.

그가 범죄자인 건 맞다. 하지만 지금은 병든 아비를 모시고 신성왕국을 찾는 수많은 환자의 가족 중 하나일 뿐이다.

“과연 그렇군요.”

위즈는 납득했다.


◇◇◇◇◇◈◇◇◇◇◇◇◈◇◇◇◇◇◇◈◇◇◇◇◇


신성왕국 내부에는 크고 작은 도시와 수많은 마을들이 있다.

이러한 거주 지역들은 여행으로 약해진 환자들을 배려하여, 일정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환자의 상태가 나빠지면 언제라도 쉴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일행에 환자가 없는 위즈와 렌틸은 마을들을 그냥 지나쳤다.

렌틸의 손녀를 생각한다면 한가롭게 여관에 들어앉아있을 시간이 없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렌틸은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당연하겠지. 주변을 둘러보면 다들 환자와 가족이 함께 다니는데, 아이린은 혼자서 움직이고 있다.’

환자 따로 가족 따로 움직이는데다가, 시간에 쫓기고 있다. 누구라도 초조할 것이다.

그래서 위즈는 가급적 대화를 하지 않고, 말을 달리는데 집중했다. 하지만 그렇게 쉬지 않고 말을 달리다보니 죽어나는 건 말이었다. 말의 몸뚱이에 흐르던 땀이 부글거리며 하얗게 거품이 되어 맺히고, 말의 스태미나 게이지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러다 큰일 나겠군.’

위즈는 렌틸을 앞질러가 길을 막아섰다. 어쩔 수 없이 멈춰선 렌틸이 형형한 눈길을 보내왔다.

“무슨 일인가?”

“말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말이 더 버티지 못합니다.”

렌틸은 마법사이지만 치료술도 익힌 사람. 그는 자신이 탄 말을 한차례 살핀 것만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까딱하면 말을 죽일 뻔했군.”

렌틸은 서둘러 말에서 내리고는 길가의 나무에 고삐를 매어두었다. 위즈 역시 말에서 내려 똑같이 따라했다. 물을 먹인 말은 알아서 나무그늘로 들어갔다.

위즈는 렌틸에게 물과 빵을 건넸다.

“렌틸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린을 만나기도 전에 지쳐 쓰러지면 누가 약을 만듭니까?”

“면목 없구먼.”

렌틸은 양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너무 서두르면 일을 그르친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마음은 벌써 아이린 곁에 가 있군.”

“아직 마법사들과 접선도 못했습니다. 약의 핵심재료가 되는 약초-‘라르리르고’도 가져가야지요.”

“그래서 더 마음이 급해졌네. 일단 다른 재료들이라도 구해놔야겠다고 생각해서.”

렌틸의 머릿속에는 손녀와 약 생각밖에 없었다. 위즈는 쉬는 동안이라도 다른 얘기를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만 생각하고 몰두하는 게 얼마나 사람을 피 말리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손녀에 대해 이야기 해주시겠어요? 원래 만나는 곳이 국경이라고 하신 걸로 봐서는 신성왕국에 사는 것 같진 않은데…….”

“아이린은 펠젠 왕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네. 하지만 1년 내내 돌아다니기 바쁘지.”

뜻밖의 얘기를 들은 위즈는 놀랐다.

“아니 아프다면서 왜 돌아다니는 건데요?”

“그 아이의 병은 1년에 한번 발작을 일으키는 것뿐이야. 평소에는 아픈 곳 없이 쌩쌩하지. 그래서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이고.”

“혹시 손녀도 자신의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서 여행을?”

“그 애는 공부 때문에 한 곳에 붙어있지 못하는 것뿐이네.”

위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부란 원래 한 장소에 진득하게 붙어서 하는 게 아니던가. 그러라고 교육기관이 존재하는 것이다.

“아이린이 배우는 건 마법공학이라네.”

“아……마력포-루인 블레스터 같은 걸 다루는 기술 말이군요!”

“잇페인의 일은 미안하게 되었네.”

“아뇨. 아뇨. 지금 그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니까요. 아무튼 손녀분이 마법공학을 배우고 있다고 하셨죠? 그거 엄청 어렵다고 하던데 학교에 다니진 않나요?”

“마법공학은 정식으로 인정받는 학문이 아니네. 왜냐하면 아직 제대로 된 성과가 없기 때문이네. 당연히 가르치는 곳도 없지.”

“성과가 없어요?”

위즈는 손에 장착된 건틀릿을 들어보였다. 손목에 모자챙과 같은 테두리가 달려 있는 이 건틀릿은 모자손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테두리 부분에 걸린 공간마법으로 인해 아이템포켓의 역할을 겸한 모자손은, 초보적인 마법공학 아이템에 속했다.

“이런 물건이 돌아다니는 걸로 보아서는 아주 성과가 없다고 생각은 안했는데요.”

“모자손의 경우는 구조가 비교적 간단해서 모방이 쉬웠지. 하지만 마력포 같은 복잡한 물건은 도면이 없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게 현실이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유적을 끊임없이 발굴해내어 보다 많은 자료를 수집하는 방법밖에 없네. 문제는 유적을 발굴할 때마다 필요한 게 떨어지진 않는다는 사실이지. 게다가 발견해봐야 유물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니…….”

“그럼 손녀 분은 유적을 찾아다니느라 여행을 계속하는 거로군요? 따로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으니 홀로 깨우치려고.”

“그렇지. 많은 마법공학자들이 그렇게 배우는 실정이네. 아마 손녀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빛을 보기 어려운 학문이라고 생각하네.”

“손녀 분은 참 씩씩한 소녀일 것 같네요. 앞이 막막한 일에 그렇게나 열정적으로 뛰어드는 걸 보면.”

“고집은 지 부모를 닮아서 그렇지.”

픽 웃으며 렌틸은 그리운 표정을 지었다. 위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들도 충분히 쉰 것 같으니 다시 달리죠.”


◇◇◇◇◇◈◇◇◇◇◇◇◈◇◇◇◇◇◇◈◇◇◇◇◇


꼬박 하루 동안을 더 달린 끝에 도착한 곳은 신성왕국의 도시 중 하나인 엔틸리움이었다.

정해진 시간 내에 국경에서 약을 받지 못했을 경우, 렌틸의 손녀가 머물러 있기로 약속한 도시다.

다른 도시들을 놔두고 엔틸리움을 고른 까닭은 다름이 아니다.

이 엔틸리움에서는 질병의 진행을 늦추는 약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손녀 분은 어디에 있나요?”

“초원의 식탁이라는 여관이네. 그 전에 시장에 들러야 할 것 같군. 약에 필요한 재료들을 구해야 하니까.”

렌틸의 손녀가 먹을 약은 미리 만들어두면 약효가 감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재료는 가급적이면 바로 구해다가 써야 했다.

엔틸리움의 시장은 확실히 약재를 구하기 쉬웠다. 세상의 모든 약재가 신성왕국을 한 번씩은 거친다는 말이 헛소리는 아니었다.

“이상하군.”

약초를 구입하던 렌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말입니까?”

“가격 말일세. 지금 산 건 ‘산들 숙주’인데, 이건 밖에서는 한포기에 동화 50닢에 살 수 있네. 그런데 지금 여기선 얼마에 샀는지 아나?”

“비싸게 주고 샀어요?”

“동화 30닢이네.”

“싸게 사셨네요.”

“그게 아니지. 신성왕국의 시세대로라면 동화 10닢짜리네. 그런데 무려 세배나 값이 뛰다니.”

“잠깐만요. 신성왕국에서는 그렇게까지 약초가 싼 편이었습니까?”

“환자를 치료하려면 많은 약초는 필수. 대량으로 물건을 떼어오니 가격이 저렴할 수밖에.”

렌틸의 말대로라면 지금의 가격은 비정상적이다.

“혹시 지금 약초가 생산될 시기가 아니라거나…….”

“산들 숙주는 1년에 두 번 수확하는데, 한 달 전이 출하시기였지.”

“다른 약초들도 한번 살펴봐요.”

두 사람은 시장을 돌아다니며 약초들의 가격을 확인했다. 하나같이 평소보다 가격대가 높게 형성되어 있었다. 아직까지는 폭리를 취할 만큼은 아니지만, 이상 현상에 사람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어째서 약초 값이 뛴 거지?”

“그걸 내가 아냐. 그나마 가격대가 신성왕국 바깥과 다를 게 없어 다행이야.”

“조금 무리해서 많이 사둘까?”

“흠…아직까지는 안정권이지만 혹시 모르니까.”

몇몇 사람들은 필요량 이상으로 약재를 구입했다. 조용한 열기가 시장에 퍼져나갔다.

위즈는 사람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좋지 않군요. 이거.”

“약재가 넘치는 신성왕국에서 사재기라니…….”

렌틸은 평소와는 다른 시장의 분위기에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시장에 미리 들르지 않았다면, 다른 재료들을 구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여관으로 가서 손녀 분을 만나도록 하죠.”


◇◇◇◇◇◈◇◇◇◇◇◇◈◇◇◇◇◇◇◈◇◇◇◇◇


‘와아! 할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하고 매달리는 소녀의 모습을, 위즈는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관에 도착해서 본 렌틸의 손녀는 침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기…….”

“쉬잇.”

렌틸이 손가락을 세워 입에 가져다댔다. 렌틸은 말없이 방을 빠져나왔다. 뒤따라 나온 위즈가 물었다.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는 건 좀 그렇지만, 먼 길 달려와서 이렇게 그냥 물러나는 건…….”

“그게 아니네.”

렌틸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보여주었다. 작은 찻잔 크기의 도자기 병이었다. 렌틸은 그것의 마개를 열고 내용물을 손등에 쏟아 부었다. 몇 방울 남지 않은 내용물이 똑똑 떨어졌다.

“이건 병의 진행을 늦춰주는 약이네.”

“아! 이게 그 약이로군요!”

“그런데 이상하군. 약의 성분이 미묘하게 어긋나있어. 특정 재료들이 덜 들어간 느낌이야.”

“그냥 보는 걸로도 알 수 있는 겁니까?”

“당연하지. 조제법을 알고 있으니까.”

“재료가 적게 들어갔다고 하셨지요. 혹시 시장에서의 일과 관련이?”

“아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네.”

“그럼 큰일이로군요. 마법사들과 접선도 아직 못했으니, 제대로 된 약이 만들어지려면 한참은 걸릴 텐데. 그때까지는 병의 진행을 늦추는 약으로 버텨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약초가 부족하다면…….”

“안 되겠군. 다시 시장에 가봐야겠네. 사재기 같은 행위는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가능한 한 약초를 긁어모아야겠네.”

“저도 돕겠습니다.”

두 사람은 흩어져서 필요한 약초를 모으기 시작했다. 위즈는 조금 전 들렀던 가게에 들어섰다가 깜짝 놀랐다. 렌틸과 함께 왔을 때 한포기에 동화 30닢짜리인 산들 숙주가, 그 사이 동화 50닢으로 가격이 뛰어올라 있었다.

위즈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렇게나 빨리 가격이 오르는 건, 담합이 아니면 진짜 재고량이 부족해서다. 그리고 신성왕국에서 장사하는 사람이 담합으로 돈을 벌려는 악덕상인일 리 없으니, 약재의 가격이 뛰는 이유는 당연히 후자다. 렌틸이 쥐어준 돈으로는 어림도 없어서, 위즈는 사비까지 털었다.

“말린 퍼플웜의 씨앗 1킬로그램, 하시하코네 300그램, 벨랑코 10개 주세요.”

“에…… 하시하코네와 벨랑코는 합쳐서 은화 3개 되겠습니다.”

“퍼플웜의 씨앗은요?”

“그건 재고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구할만한 곳이 또 있을까요?”

가게주인은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더니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겼다.

“엔틸리움과 가까운 마을이라면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들 대도시로 모이는 경향이 있으니, 마을 쪽의 약재는 비교적 소모량이 적을 겁니다. 하지만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약재의 재고량이 떨어지기 시작한 건 한달 전부터였으니까요.”

가게에서 나온 위즈는 마침 어디론가 달려 나가는 렌틸과 마주쳤다.

“렌틸, 아무래도 퍼플웜의 씨앗은…….”

“자네도 구하지 못했나?”

“네.”

“그렇다면 어서 근처의 마을을 돌아보세.”

“역시나 결론은 그거로군요.”

두 사람은 다시 말에 올라탔다.

“한 달 전부터 약재의 재고량이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으십니까?”

“어쩌면…바하르칼 놈들 짓일지도 모르네.”

위즈는 시에니투스에서 겪은 일을 떠올렸다. 바하르칼 용병들과 결탁한 무법자들이 짐수레를 넘겨주던 것을. 그 속에 든 건 마법 시약에 사용되는 재료들, 즉 약초와 광석가루였다.

그 같은 거래가 한번으로 끝났을 리 없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 여파는 아직까지 남아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작가의말

2014.11.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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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121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2) +3 14.06.26 695 24 30쪽
123 120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1) +2 14.06.17 1,106 20 31쪽
122 119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0) +2 14.06.14 682 18 26쪽
121 118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9) +2 14.06.09 1,603 91 28쪽
120 117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8) +2 14.06.05 974 31 23쪽
119 116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7) +2 14.05.31 1,615 96 23쪽
118 115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6) +1 14.05.30 970 22 25쪽
117 114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5) +3 14.05.29 2,017 39 31쪽
116 113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4) +2 14.05.28 1,235 32 29쪽
115 112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3) +8 14.05.27 1,909 59 30쪽
114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2) +3 14.05.26 810 23 23쪽
113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1) +2 14.05.24 1,954 40 25쪽
112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0) +4 14.05.23 1,838 33 23쪽
111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9) +3 14.05.22 1,721 44 24쪽
110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8) +5 14.05.21 1,660 60 22쪽
109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7) +4 14.05.20 2,273 40 24쪽
108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6) +5 14.05.19 1,633 50 25쪽
107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5) +6 14.05.17 1,089 32 30쪽
106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4) +2 14.05.16 1,785 33 25쪽
105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3) +2 14.05.15 2,361 130 26쪽
104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2) +2 14.05.14 1,059 23 25쪽
103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1) +2 14.05.13 927 28 25쪽
102 99화...5.혼돈을 비추는 거울 (10) +2 14.05.12 1,548 34 29쪽
101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9) +3 14.05.07 1,749 106 19쪽
100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8) * +2 14.05.03 1,527 34 34쪽
99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7) +4 14.05.01 1,135 22 25쪽
»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6) +2 14.04.29 1,003 30 23쪽
97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 +2 14.04.25 1,529 29 27쪽
96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 +1 14.04.24 1,214 22 25쪽
95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 +2 14.04.21 1,135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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