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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또 다른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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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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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4.05.14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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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2)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12.

악령의 존재를 확인했지만, 위즈는 그것들을 피하겠다고 도망 다니진 않았다. 너무 가까이 붙지 않는 한, 악령이 먼저 달려들 일은 없기 때문이다.

망자와의 친화력 덕분이다.

실제로도 망령들은 가까이 있는 위즈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동류인 악령을 보는 듯 무심히 지나쳐갔다. 하지만 그 거리가 너무도 가까워 위즈는 위협받는 기분이 들었다.

만약 구울이라면 진즉에 알아보고 덤벼들었을 거리다.

‘악령은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구나!’

위즈는 성기사가 말해주었던 악령의 정체를 떠올렸다.

영혼 같은 게 아닌, 극단적인 감정이 담긴 사념체.

그렇기에 언데드로 분류되면서도 능력이 떨어진다.

객관적으로 보면 크게 두려워할 적은 아니다. 그럼에도 성기사들이 경계했던 이유는 빙의 때문이다. 빙의는 흔히들 말하는 귀신에 씌는 현상을 말한다. 그렇기에 정신력이 강한 이들은 빙의되지 않는다. 유저들 중에서도 집중력과 근성이 높은 경우, 빙의현상에 저항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곳은 신성왕국 바하.

이곳을 찾는 이들은 병자와 그 가족이다. 긴 여행으로 피곤해진데다가,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린 몸과 마음으로는 빙의에 저항하지 못한다. 그건 병구완을 하려고 따라온 환자의 주변인들도 마찬가지. 보살핌 받는 환자나 보살피는 사람이나 고생하는 건 똑같다.

‘어쩌면 내가 찾아야 할 사람들도 이미 빙의 당했을 지도 몰라.’

병든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는 건, 스스로를 지치게 만드는 일이다.

그 병을 낫게 하려고 이것저것 다해보고 안 되자,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신성왕국까지 찾아온 이들은 특히나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그런 이들이 약초부족을 겪게 되었을 때, 이들은 어떤 선택을 했는가.

가게에 약초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는가, 아니면 직접 약초를 찾아 움직였는가.

약초를 구하지 못했다고 실망해서 돌아갔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약초를 훔쳐서라도 얻으려 했는가.

정신적인 극한에 몰린 이들은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이들은 복면까지 쓰고서 약초를 빼앗으려 했다.

그렇게까지 마음이 병든 자들에게, 악령의 빙의를 뿌리칠 정신력과 근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마 힘들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위즈는 무턱대고 숲속에 들어온 게 후회되었다.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것 시체라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확인하지 않으면 찜찜해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큰소리 땅땅 치면서 아들을 찾는 노인에게 헛바람을 넣은 당사자가 위즈 아닌가.

위즈는 악령을 자극하지 않으려 조심스레 움직이며 귀를 기울였다.

숲은 디멘션 게이트에서 흘러나온 어둠에 집어삼켜졌다. 그 모습은 마치 짙은 안개에 휩싸인 것과 같았다. 그래서 시각보다는 청각에 의지해 움직일 생각을 한 것이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숲속은 너무도 조용해서, 위즈는 장롱 속에 틀어 박혀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릴 적 숨바꼭질의 기억을 떠올린 위즈는 그때와 달리 이 고요함이 기분 나빴다. 한마디로 귀신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허나 다행이도 악령들은 귀신 우는 소리 같은 걸 내지 않았다. 위즈는 그 점을 위안 삼았다.

이런 곳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린다면, 그건 노인의 아들을 비롯한 세 사람일 것이다.

청각에 집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소리가 숲속의 어둠을 가르며 전해졌다. 나무에 부딪쳐 왜곡된 소리는, 바람으로 착각할 정도로 작아서 무심코 넘길 뻔했다.

‘확실히 사람의 목소리와는 거리가 멀어.’

위즈는 좀 더 그 소리에 집중했다. 단서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하지만 이미 소리는 뚝 그쳐 들리지 않게 되었다. 위즈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시작부터 방향을 잡는데 실패하면, 이 숲을 헤매다 마물에게 당하기 때문이다.

‘잘못 들은 것일까?’

포기하려던 찰나, 다시 한 번 그 소리가 들렸다. 너무도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의 울림. 이번엔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의미 없이 ‘어어어어’ 하고 허밍처럼 울리는 소리. 이건 다수의 개체들이 내고 있다.

그리고 가끔씩 개과 동물이 으르렁대는 소리도 들린다.

‘누군가 싸우고 있다!’

디멘션 게이트가 작동하기 시작한 뒤로, 숲속에는 이미 악령이 쏟아져 나온 상태.

그렇다면 다른 마물들 역시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위즈는 모자손에 마력을 밀어 넣으며 시동어를 외쳤다.

“라이팅!”

모자손에 은은한 빛이 어리며 숲속의 어둠이 밀려났다. 주변을 날아다니는 악령의 모습도 잘 보였다.

레미라의 어밴던드 폴리스에서 신성왕국까지 오는 동안, 위즈는 놀고 있지 않았다. 톨네스에게 받은 무한의 서에 담긴 초급 마법서의 내용을 보며 마법을 익혔다. 모르는 것이 생기면 동행하는 렌틸에게 물어보았다.

그 결과 위즈는 마법사가 아님에도, 라이팅 정도는 성공시킬 수준이 되었다.

“쓸 술 아는 게 라이팅과 배리어 뿐이지만, 이것들이야말로 구명줄이지.”

탐지를 쓸 수 있다면 사람들을 찾는 게 더 쉬워질 테지만, 탐지는 배리어가 익숙해져야 배울 수 있는 것이었다. 아쉬운 대로 위즈는 가끔씩 들려오는 소리를 찾아 이동을 시작했다.


◇◇◇◇◇◈◇◇◇◇◇◇◈◇◇◇◇◇◇◈◇◇◇◇◇


숲이 끝나는 지점에서 마법진들이 떠오르고, 그것들이 모여 거대한 관문을 형성할 즈음.

그 관문을 향해 퍼부어지는 주문이 있었다. 폭음을 동반한 공격이 가해지고 흙먼지가 피어오르자 베베노를 비롯한 세 사람은 환호를 내질렀다.

“레미라 마법사들이야!”

고막이 먹먹해지는 걸 보아 꽤 높은 수준의 주문이 분명했다.

“이거 우리가 괜한 걱정을 한 게 아닐까?”

“맞아. 이대로 마법진이 사라져버리면 좋겠는데 말이야.”

하지만 곧 이들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흙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것은 마법진이 모여 이루어진 관문.

관문의 안쪽에서 시커먼 어둠이 본격적으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저건 어떻게 되먹은 거야?”

“에드란 작자 하나가 인신공양 했을 뿐이잖아? 사람 하나 목숨으로 저런 게 만들어진다고?”

“혹시 조금 전 공격. 겉보기에만 그럴 듯 하고, 사실은 무지 약한 주문 아닐까?”

“마법사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저 불길한 기운을 느낄 거 아냐? 아무렇게나 대충 갈긴 것이겠나?”

“하긴 내가 마법사였다면 가장 센 주문을 썼겠지.”

그걸 버텨냈다는 게 문제다. 이들은 생각보다 일이 위험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다.

“어쨌거나 마법사들과 합류해야만 해. 서둘러!”

이들은 어둠이 뒤덮인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행동은 이들의 평생을 통틀어 저지른 실수 중에서도, 가장 멍청한 짓거리였다.

디멘션 게이트 속에서 새어나온 어둠은 안개처럼 바닥부터 낮게 깔리며 천천히 숲을 장악해갔다. 어둠 자체는 해가 없었으나, 그 어둠 때문에 대낮에 나타날 수 없었던 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욱!”

베베노 옆에서 뛰던 사냥꾼 아르길이 갑자기 신음을 흘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베베노와 또 다른 사냥꾼 브롬이 다가와 아르길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르길은 온몸을 뒤틀며 이상한 소리를 주절거렸다.

“흐……흐헤헤…듀그믄…이막 여얼…내아……큭 클클클!”

아르길은 정상이 아니었다.

“이봐! 정신 차리라고!”

베베노는 솥뚜껑 같은 손바닥으로 아르길의 뺨을 갈겼다. 한차례 호되게 뺨을 맞은 아르길의 입이 꾹 다물렸다. 아르길이 베베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제 정신이 드나?”

“크아아아!”

아르길이 눈을 까뒤집고 베베노에게 달려들었다. 단검을 빼들고 단숨에 베베노의 목을 노리는 아르길. 베베노는 허리춤의 평범한 도끼를 내밀어 단검을 막아내고, 비어있는 손을 뻗어 단검을 쥔 아르길의 팔꿈치를 밀어 쳤다.

팔꿈치는 손에서 힘이 풀리게 되는 급소.

아르길은 단검을 떨어뜨렸다. 베베노는 혹시나 주울까봐서 멀리 걷어차 버렸다. 하지만 아르길은 허리춤에 단검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사람이다. 무기를 놓치게 만든 건 헛짓거리에 불과했다.

“꼭 그렇지만도 않군.”

아르길은 그 많은 단검을 내버려두고 바닥에서 돌을 주워들었다.

“이 남자 뭔가에 씌었어!”

마구잡이로 베베노에게 돌을 휘두르는 모습을 본 브롬은, 품속에서 손가락만한 청동조각이 달린 목걸이를 꺼냈다.

“악령이여 물러가라!”

브롬이 목걸이를 손에 둘러 감고 아르길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그러자 파직파직 정전기 같은 게 튀면서 아르길이 쓰러졌다. 베베노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죽일 필요까지는…….”

“안 죽였어! 비껴 때렸다고! 숨 쉬고 있잖아!”

“살짝 때렸는데 기절이라고? 어떻게 된 일이지?”

“보다시피 악령에 씌었어.”

“악령?”

베베노는 안력을 돋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지만 유령 비스무리 한 형태는 보이지 않았다.

“내 주변에도 있나?”

“성기사라면 볼 수 있겠지. 그리고 난 성기사가 아니네.”

악령이 존재하지만 볼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악령이 호시탐탐 인간의 몸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기분 나쁜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자네와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아르길 저 친구가 단순히 운이 나빴던 건가?”

브롬은 손에 감긴 목걸이를 풀어 아르길의 목에 걸어주었다.

“내 생각엔 이것 때문인 것 같군.”

“목걸이? 난 그런 건 가지고 있지 않은데?”

“혹시 주머니 같은 데 넣어둔 거 아닌가?”

“그럴 리가? 난 남우세스러워서 그런 건 산 적도 없어. 남자가 목걸이라니 최악이지 않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혹시나 싶어 베베노는 옷 위를 더듬었다. 잠시 후, 목깃을 더듬던 손길이 멈췄다.

“이건?”

“알만하군. 가족이 몰래 옷 속에 꿰매어 넣었겠지. 원래 사내놈들은 부적 같은 건 질색을 하니까. 나도 내 마누라가 꿰매놓은 부적이 있어. 속옷에 하나. 겉옷이랑 주머니에도 하나씩 들어 있지. 자꾸 빼내버려도 계속 넣어두니까 반쯤 포기했는데, 그 덕을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아버지…….”

베베노가 목깃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브롬은 아르길의 몸을 부축해 일으켰다.

“살아서 돌아가면 마누라가 좋아하는 호박파이라도 사다주어야겠군. 끙!”

“나도 아버지께 더 잘 해드려야겠어.”

“물론 그래야지. 그 전에 아르길 이 친구를 부축하는 게 먼저야. 말라깽이가 왜 이리 무거운지 모르겠군.”

“이리 주게.”

베베노 쪽이 덩치가 좋았으므로 아르길을 들쳐 업었다. 브롬은 바닥의 돌을 틈나는 대로 챙겨 넣었다. 이렇게 시야가 제한된 상황에선 활을 쏘아봐야 잘 맞지도 않는다. 그는 가급적이면 화살을 아끼고자 했다.

“난 옛날이야기 같은 거 참 좋아했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있었던 건 마물을 잡는 사냥꾼 이야기였어.”

뜬금없는 말이지만 베베노는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 이야기라면 나도 참 좋아했어. 이야기를 들은 날 밤에는 내가 마물 사냥꾼이 되어서, 사람들을 구해내고 부자가 되었지. 하지만 현실은 구울을 만나도 도망쳐야 할 테지.”

“구울이라……당장 그게 나타나도 이상할 건 없어 보여.”

“어째서 그런 생각을?”

“악령이 나타났으니까.”

“보기 흉물스럽고 지저분한 것일수록, 악취가 앞서 코를 괴롭히는 법이라 이건가.”

마물 이야기에는 언제나 광인들이 등장한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대 혼란 속 배경처럼. 언제나, 언제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었지만, 조금 전까지 멀쩡하던 아르길의 발광을 보고 둘은 깨달았다.

옛날이야기는 있는 사실 그대로를 전달한 것이었다.

악령이 씐 인간은 미쳐 날뛰게 된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마물 때문에 패닉에 빠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악령은 다른 마물이 나타날 전조.

부적을 가지고 있으니 악령은 범접치 못하지만, 실체를 가진 마물이 나타난다면 목숨은 장담할 수 없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은 저 관문이야. 저쪽으로 가는 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해.”

“그렇다면 엔틸리움과 반대방향으로 도망쳐야겠군.”

“야단났군.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챙겨오지 않았는데.”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지.”

결정을 내린 즉시 베베노와 브롬은 디멘션 게이트로부터 멀어졌다.

이것이 이들이 저지른 두 번째 실수였다.

사태를 파악하고 도주를 시작했지만 너무 늦은 것이다.

이미 마물들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다.

민감한 후각을 가진 라이칸스로프가 주변을 돌면서 짖어댔다. 하지만 공격을 하진 않았다.

사냥꾼인 브롬은 녀석들이 몰이중임을 알려주었다.

“되다만 개새끼 주제에 사냥개 흉내라니……. 그렇다면 역시 그건가?”

“그래. 녀석들을 부리는 존재가 있는 거다.”

그 존재가 마족이라는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 두 사람은 달리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하지만 사람을 업은 베베노에 보조를 맞추다보니 별로 빨라지진 않았다.

“난 괜찮으니까 앞질러가지 그래?”

하나라도 살아남길 바라는 마음에 베베노가 권했지만, 브롬은 여전히 어깨를 나란히 하고 뛰었다.

“혼자가 되면 저놈들이 덤벼들 거야. 그럴 바엔 여럿이 낫지.”

“나 혼자만이라면 조금 더 속도를 낼 수 있을 텐데. 이 녀석은 언제 깨어나는 거지?”

베베노는 흘러내리는 아르길을 다시 추슬러 업었다. 그 모습을 본 브롬이 물었다.

“여기서 더 빨리 움직일 수 있다고?”

“그래. 난 단순한 노상강도가 아니라고. 개업은 한 번도 못했지만 그래도 어엿한 차기 두목 후보였다고.”

“그렇다면 정령강화를 배웠단 말이야?”

뛰어가던 베베노의 몸이 잠시 비틀거렸다.

“뭐?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지? 설마 너도 정령강화를?”

“맞아. 나도 배웠다. 바하르칼 용병들이 가르쳐주었지. 제대로 배우면 용병단에 끼워주겠다고 했거든. 하지만 성취가 낮아서 그들을 따라나서진 못했어. 듣자하니 그때 녀석들에게 정령강화를 배운 자들은 크레센토로 갔다는 모양이야.”

“날 가르친 두목은 바하르칼 용병들과 자주 어울렸었지. 그렇게 놓고 보면 묘한 인연이로군.”

그렇게 말한 베베노는 등에 업은 아르길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언제까지 자는 척 할 거냐! 망할 자식!”

베베노의 말대로 아르길은 깨어있었다. 아르길은 바닥에 등이 닫자마자 민첩하게 몸을 굴려 충격을 완화했다.

“업고 오느라 땀만 흘렸잖아!”

아르길은 머리를 긁었다.

“아까 공격했던 거……미안해서 얼굴을 볼 용기가 안 났다.”

“진짜 실례되는 건, 편하게 남의 등에 업혀 오면서 땀 한 방울 안 흘리는 그 뻔뻔함이다.”

“미안하다…….”

“쳇. 됐어. 악령인가 뭔가에 씌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니까. 그나저나 언제부터 깨어 있었지? 지금 상황은 알고 있나?”

아르길은 목에 걸린 부적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마물에게 쫓긴다는 것. 그리고 우리들은 모두 같은 구명줄을 쥐고 있다는 것.”

“같은 구명줄? 설마……너도냐?”

“맞아. 나도 정령강화를 쓸 수 있다.”

“그럼 결정됐군. 이대로 거리를 벌리자. 라이칸스로프가 언제까지나 주변을 맴돌기만 하진 않을 테니까.”

베베노, 브롬, 아르길 세 사람이 외쳤다.

“정령강화!”

푸른색의 빛 덩어리가 나타나 이들을 맴돌다 각자의 신발에 깃들었다. 발을 모으고 제자리 뛰기를 해본 베베노가 힘차게 땅을 박찼다. 그 뒤를 브롬과 아르길이 뒤따랐다.

아우우우!

뒤쪽에서 길게 우짖는 소리가 났다. 라이칸스로프들이 전력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 벌려진 거리는 결코 좁혀지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베베노가 중얼거렸다.

“좋지 않군.”

정령강화를 신발에 걸고 뛴다면 분명 따돌릴 것으로 예상했는데, 거리를 유지하는 게 고작이다. 실제 라이칸스로프들이 뛰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뜻이다.

“정령강화가 풀리지 않게 주의해!”

“잘 알고 있어!”

인간을 노리는 라이칸스로프와 세 사람의 추격전은 듬성듬성 바위가 놓인 지형에 이르러 끝이 났다. 바위에 발을 디디자마자 신발이 딱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곳은 아직 디멘션 게이트에서 새어나온 어둠의 영향을 덜 받았으므로, 주변 사물을 자세히 살피는 데 그리 어려움은 없었다. 단검을 바위에 가져다 대본 아르길이 소리쳤다.

“스티키 젤이다.”

바위에는 투명한 젤이 발려져 있었다. 베베노와 브롬 역시 자신들의 신발이 달라붙은 바위가 번들거리는 걸 확인했다.

“던전에 틀어박혀 있어야할 놈들이, 왜 이런데 붙어 있어!”

“저 관문에서 소환된 거겠지.”

짜증을 내면서도 세 사람은 신속히 신발을 벗었다. 스티키 젤로 인해 한번 장비가 들러붙으면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떼어낼 수 없다. 세 사람에게는 그럴 수단이 없었고, 설사 떼어낼 방법이 있다 해도 시간이 부족했다. 뒤에서는 라이칸스로프가 급격히 거리를 좁히고 있다.

일단 급한 대로 풀을 뜯어 발 디딜 곳을 만든 세 사람은, 서둘러 바위를 넘어 갔다.

간발의 차이로 라이칸스로프가 도착했다. 하지만 바위에 걸음을 내디딘 라이칸스로프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컹컹컹!

어떻게든 바위에서 떨어지려고 라이칸스로프가 다른 앞발을 바위에 올리고 몸을 뒤로 젖혔다. 하지만 달라붙은 발이 떨어지기는커녕, 다른 한쪽 앞발까지 달라붙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다른 라이칸스로프들은 잠시 망설이더니, 서슴없이 바위로 올라가 배를 깔로 앉았다. 그러자 뒤쪽에 서 있던 다른 라이칸스로프가 바위에 앉은 동족을 밟으며 다음 바위에 내려섰다. 이 라이칸스로프 역시 마찬가지로 바위에 주저앉았다. 그게 반복되자, 스티키 젤의 영향을 받지 않는 길이 생겨났다.

“지독한 놈들! 같은 편을 발판으로 삼다니!”

스티키 젤 때문에 조금 시간을 지체했지만, 라이칸스로프는 곧 세 사람을 따라잡았다.

세 사람의 달리는 속도가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정령강화는 자가 버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장비에 걸어주는 스킬에 불과했다. 맨발에는 정령강화를 걸지 못하는 것이다. 그 결과 기껏 벌린 간격은 다시 좁혀지고 말았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라이칸스로프들은 다시 속도를 낮추었다. 그 모습을 본 베베노가 분통을 터뜨렸다.

“저놈들 우릴 가지고 놀고 있어!”

“이러다간 우리가 먼저 지쳐나가겠지.”

“최소한 저놈들을 떼 내어 버릴 수만 있다면……….”

베베노는 생각했다. 라이칸스로프는 어차피 척후병 같은 거라고.

계속 짖어대는 것은 본능에 따라 짖는 개소리가 아니라, 어딘가로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라고.

베베노는 달리기를 멈췄다. 브롬과 아르길이 돌아보았다.

“두 사람 말이 맞아. 이렇게 달리기만 하다간 지쳐서 나가떨어질 거야. 차라리 여기서 저놈들을 치자. 조금 전 스티키 젤 때문에 3마리밖에 안 남았잖아. 이건 기회야.”

그 말을 들은 브롬이 라이칸스로프들을 살폈다.

“우리가 멈추니까 따라 멈추는군. 확실히……이대로 달고 다니다간 결국 당하고 말겠지. 네 말대로 싸우는 게 낫겠어.”

“나도 찬성. 그런데 방법은 있는 건가?”

베베노는 들고 있던 도끼로 땅을 힘차게 내리찍었다.

“방법? 그런 거 없어. 그냥 싸우는 거지.”

“큭. 그게 뭐야?”

“하여간 생긴 대로 근육바보였군.”

브롬과 아르길은 어이없어 했다. 하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으니, 활에 시위를 먹이며 전투를 준비했다. 돌팔매용으로 준비한 돌을 던졌다 받으며 브롬이 말했다.

“녀석들은 하급마물이지만, 보통 인간은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해. 이렇게 말이지!”

허공에 던져 올린 돌을 활대로 쳐낸 브롬이 중얼거렸다.

“거봐. 저거 보이나?”

목표로 삼은 라이칸스로프가 날아든 돌을 입으로 덥석 물었다. 턱에 힘을 주자 돌은 오도독 소리가 나면서 쪼개져버렸다. 라이칸스로프는 맛있는 것이라도 먹는 것처럼 돌을 씹더니 꿀꺽 삼켜버렸다.

“돌까지 씹어 먹다니 한창 때 나이로군.”

“재미없는 농담은 사절이다. 베베노.”

“개가 돌을 씹다니 재미있잖아. 스스로 우리들의 살길을 열어주는데.”

“그게 무슨 뜻이지?”

베베노는 바닥의 돌을 주워들었다.

“돌을 씹어 먹는 걸 보고 생각난 건데, 저 녀석 입장에선 날아드는 돌을 피하는 건 쉽겠지?”

“라이칸스로프의 반사 신경으로 못 피하는 게 더 이상하지.”

구울 다음으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마물이 라이칸스로프다.

그래서인지 영웅담에서는 자주 썰리는 불쌍한 멍멍이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건 이야기 속에서나 그럴 뿐, 실제 맞닥뜨리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비록 하급마물로 분류되고는 있지만, 라이칸스로프는 중급마물에 필적하는 엄청난 민첩성과 예민한 반사 신경을 자랑한다.

단순히 상체의 몸놀림만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모조리 피해내는 게 라이칸스로프다.

화살도 아닌 돌을 못 피할 리 없다.

설명하지 않아도 세 사람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피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보란 듯이 돌을 씹어 먹은 이유는?”

베베노는 의문을 가졌다. 브롬과 아르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뻔한 상황 아닌가.

“우릴 가지고 노는 것이겠지. 겁을 주려는 것도 있겠고.”

“그건 인간들 입장에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고. 저놈들의 입장이라면?”

그 말을 들은 브롬과 아르길의 뚱한 얼굴이 점차 환해졌다.

“우리는 사냥감이고 저 녀석은 사냥개야.”

“그리고 사냥개는 주인이 오기 전에 사냥감을 건드려선 안 되지.”

그 말을 들은 베베노가 질문했다.

“하지만 직접 사냥감을 물어뜯는 사냥개도 있어. 그런 개들은 덩치가 좋지. 저놈들도 한 덩치 하는데……어떨까?”

브롬과 아르길이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럴 리 없어.”

직접 사냥하는 게 목적이라면, 거리가 0이 될 때까지 좁혀 왔을 것이다. 게다가 사냥감인 자신들이 멈춰있는데도,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다.

결국 뒤를 쫒으며 신호를 보내는 게 고작인 놈들이라는 뜻이다.

베베노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우릴 노리는 놈이 정말 중급 마족이라면, 놈이 원하는 것은 아마도 제물일 거다.”

“대충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관문까지 열어둔 마당에 왜?”

“마족 놈들의 속셈을 어떻게 알겠어. 하지만 이걸로 안심이다. 저놈들은 우릴 상처 입힐 순 있어도 죽이진 못해.”

베베노는 가장 가까이에서 어슬렁거리는 라이칸스로프를 노리고 전투도끼를 휘둘렀다. 그의 예상대로 라이칸스로프는 반격하지 않았다. 그저 공격을 피하며 뒤로 물러서기만 할뿐.

“라이칸스로프를 상대로 화살을 낭비할 이유는 없겠지.”

아르길이 단검을 뽑으며 달려들었고, 그 뒤를 브롬이 받쳤다.

그렇게 세 사람과 세 마리의 라이칸스로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자 세 사람의 스태미나가 급격히 깎여나갔다. 차라리 도망쳤다면 더 오래 버텼겠지만, 이제 와서 싸움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최소한 녀석들에게 중상을 입혀 쫒아오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래서 중점적으로 공격하는 부분은 라이칸스로프의 발이었다. 가끔씩 빈틈이 나타나는 곳도 있었는데 주로 얼굴이었다. 물론 눈 코 귀가 달려 있는 곳이니, 얼굴을 공격하는 것도 등한시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드러난 빈틈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얼굴을 공격할라치면 얄밉게 쏙 피해버리는 라이칸스로프를 보며, 베베노는 열 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를 다시 깨달았다. 그건 브롬과 아르길도 마찬가지.

라이칸스로프들은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뒤로 물러서며 숨을 골랐다.

“헉헉. 미안하다……여기 남자고 내가 말하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베베노의 후회를 들은 브롬과 아르길이 웃었다.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어. 비록 제대로 활약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이봐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겠어? 그거 영웅소설 속에 나오는 조연들이 죽기 전에 내뱉는 말 같잖아?”

“듣고 보니 그렇군. 죽고 싶지 않은데. 누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

“크윽! 지금 한 말은 훨씬 더 위험해. 내뱉자마자 죽는 데스 워드라고!”

그때 라이칸스로프의 뒤편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울렸다.

“눈 감아!”

그리고 주먹만 한 빛 덩어리가 날아들더니, 확 터지며 주변을 환하게 물들였다. 강렬한 광원을 직시한 라이칸스로프는 눈을 가리며 몸을 웅크렸다. 순간적으로 시각이 마비된 녀석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런 라이칸스로프에게 시뻘건 화염이 활짝 날개를 펼치며 날아들었다.

“코로나아아아!”

시각이 마비되었다지만, 본능적인 위험을 느낀 라이칸스로프들이 자리에서 이탈했다. 하지만 워낙이 범위가 넓어서, 피한다고 피했음에도 털에 불이 옮겨 붙고 말았다.

낑! 끼잉!

불이 붙은 라이칸스로프들이 바닥에 몸을 비벼댔다. 불을 끄느라 틈을 타 누군가가 베베노 일행에게 접근했다. 그 존재는 베베노의 불길에 비춰진 라이칸스로프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왔다.

“이방인 위즈라고 합니다.”

하지만 베베노 일행은 위즈의 인사에 반응할 정신이 없었다.

“으악! 눈이 타들어간다!”

“내 눈! 내 누우운!”

위즈는 이들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눈감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작가의말

연참 3일차 입니다.

벌써부터 덥네요.

그래서 문을 열었더니 날벌레들이....

ㄱ-....




2014.11.08 수정

[11,420 => 11,640]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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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99 시러스
    작성일
    14.05.14 15:28
    No. 1

    잘보고 갑니다 날벌레라니ㄷㄷ 파리는몰라도 모기시즌은 아직아닌것같은데
    최고온도 30도 찍었다는 뉴스보니 그것도 아닌것같아요 조심해야 할듯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gksvlfwl
    작성일
    14.05.14 19:34
    No. 2

    모기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벌레에게 물린것이 생겨서 찝찝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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