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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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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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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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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26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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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글자
23쪽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2)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22.

그것은 3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마법사의 탑에 속한 중급마법사였다. 하지만 약재와 시약의 연구에 특화된, 얼치기 연금술사 같은 위치였다. 연금술의 명맥은 겨우겨우 유지되고 있었다. 반면 마법은 아직까지도 많은 자료가 남아있었다.

당연히 마법실력이 중급마법사의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내 마법실력은 중급마법사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조금 더 정진한다면 그 벽을 깨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으나, 내 관심사는 오로지 내 손녀 아이린을 고칠 약을 만드는 것뿐이었다.

아이린은 조금 희귀한 병을 앓고 있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일 년에 한두 번 발작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틀 동안 드러누워 괴로워하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그렇게 되면 건강하게 뛰어놀기도 하고, 빠졌던 살도 다시 붙는다.

겉보기에는 목숨에 지장이 없어 보이지만, 나는 알고 있다.

발작의 강도가 점점 세지고 있다는 것을. 발작을 일으킨 직후 의식을 잃는 시간도 점점 길어지고 있다는 것을.

발작직후 손녀가 일주일간 눈을 뜨지 못했을 때 나는 깨달았다.

이 이상 내버려 둔다면, 일주일은 곧 한 달이 될 것이고……한 달은 두 달이 될 것임을.

그러다 어느 순간엔 영원히 눈을 뜨지 못하게 될 것임을.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손녀가 허겁지겁 묽은 죽을 들이키는 모습을 보며 나는 결심했다. 레미라로 가겠다고.

40년간 배워온 약학과 조제법으로는 손녀를 연명시키는 게 고작이었다. 나는 연금술이라면 손녀를 구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걸로 믿었다.

깨어있는 시간동안에는 항상 연금술의 공식을 중얼거리며 지냈다. 밥을 먹다가도 갑자기 소리 지르면서 아이디어를 옆 사람의 로브자락에 써 갈기기도 했다.

그만큼 나는 광적으로 연금술에 매달렸다.

이 때문인지 내가 레미라 섬에 들어온 사연을 모르는 마법사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딱한 사정을 동정했으면 했지, 마법실력도 부족하면서 어찌 중급마법사가 될 수 있느냐며 딴죽을 걸진 않았다.

하지만 단지 사람들의 동정에 기대어, 내가 레미라의 마법사가 된 건 아니다.

집념만큼이나 나에겐 연금술에 대한 재능이 있었다.

덕분에 기존의 마법시약의 능력을 한 단계 상승시키는 결과까지 내놓았다.

그럴수록 완벽한 치료약의 완성도 가까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연구실에 누군가 무단으로 침입한 일이 발생했다.

마법사들의 연구실이란 아무리 깨끗하게 정리해도, 물건이 워낙이 많다보니 누가 책을 한권 가져가도 눈치 채지 못한다. 그럼에도 단번에 알아차린 것은, 분명히 깨끗하게 치워놓았을 책상위에 한권의 노트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펼쳐본 나는 곧 노트의 주인이 내 손녀임을 알고 경계를 풀었다.

노트에는 고대유적에서 발견되어 공개된, 완전 자립형 골렘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통합왕국 시절의 물건이라는 것 같은데,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세세하게 잘 정리해놓았다.

하지만 나는 치료사이며 마법사. 그런 내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연금술이다.

노트를 한참 들여다봐도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안 간다.

내 손녀 아이린이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노트를 보냈다는 건……내가 없는 동안 착실하게 공부하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안 있으면 내 생일이다.

요 깜찍한 녀석이 선물이라고 이런 걸 보내온 모양이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녀석에게 보낼 답례품을 준비했다.

그로부터 6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내 책상위에는 여자아이가 하고 다닐 법한 예쁜 머리핀이 놓여 있었다. 나는 대번에 머리핀의 주인이 손녀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후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이 일도 이젠 익숙해져서, 나는 손녀의 깜짝 선물을 기다리게 되었다.

탑의 마법사들도 참 짓궂지. 손녀의 부탁을 받았다고는 해도, 누구하나 알리지 않다니.

1년에 한 번씩 만나는 손녀도 그렇다. 넌지시 깜짝 이벤트를 화제로 올리면 무슨 소리를 하느냐며 고개를 젓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손녀가, 할아버지를 놀리고 싶어 하는 거라고만 여겼다.

그리고 이 비밀스러운 장난은, 3년 째 되는 올해부터 큰 변화가 생겼다.

일단 물건이 보내지는 간격이 6개월에서 1개월로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예전과 달리 물건들이 더렵혀지거나 손상된 채 보내지는 것이다.

머리핀은 산을 부어 부식시켰다. 손가락을 가져다대니 힘없이 부서질 정도다.

작은 신발에는 독사의 허물이 들어 있다. 더운 지방에서 흔히 발견되는 녀석이다. 그만큼 이것에 물려죽는 사람도 많다.

여자아이의 옷은 찢겨지고 피가 묻어 있다. 피는 이미 굳어서 시커먼 얼룩이 되었다. 너무 오래되어 피 냄새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핏자국이 주는 섬뜩함만은 그대로이다.

나는 그동안 착각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물건을 보내온 건 손녀가 아니다.

손이 벌벌 떨렸다. 누군가가 손녀를 해치려 한다. 어째서? 대체 누가?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는 대로 손녀를 데려와야겠다. 섬에서 가장 빠른 쾌속선을 빌려 타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 연구실을 나서던 나는, 한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는 단검으로 찍어 문짝에 고정되어 있었다. 레미라섬의 남쪽 모래사장에서 단 둘이 보자는 내용이었다.

누구라는 말도, 용건도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동봉된 긴 머리카락을 발견한 순간 피가 거꾸로 솟았다.

감히 레미라에서 레미라 마법사인 나를 조롱하고 있다. 손녀의 목숨줄을 가지고 말이다.

단둘이 보자고? 아마 동료를 데려가면 도망치겠지. 그렇다면 좋다. 나 혼자 가겠다. 그리고 녀석을 붙잡아 손녀를 지키겠다.

나는 듯이 달려간 약속장소에는 한사람이 서 있었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모래사장을 향해, 나는 매직 캐논을 퍼부었다. 하지만 주문은 발동되지 않았다. 도망치지도 못하고 나는 그에게 사로잡혔다. 상대는 나로서는 짐작 못할, 까마득한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그는 자신을 바하르칼의 용병마법사라고 소개했다.

이름은 잇페인.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찌하여 손녀를 노리느냐고.

잇페인은 이렇게 답했다.


내게 치료받은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노라고. 세상의 전부였던 어머니를 죽게 하였으니, 당신 역시 같은 고통을 느껴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나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

아니지. 치료사는 그걸 장담하지 못한다.

치료사는 신이 아니다. 적절한 방법으로 치료를 해도, 그 시기가 늦어지면 환자가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 밖의 여러 가지 이유로도 말이다. 그러니 잇페인의 말대로 내가 그의 어미를 죽인 게 맞을지도 모른다.

잇페인이 말했다.


암살자는 네 손녀의 곁에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네가 달려가 본들, 묘비 말고는 구경할 게 없을 거다.

마법사가 득실대는 레미라에서, 3년이나 들키지 않고 널 괴롭히던 자의 솜씨를 우습게보지 마라.


내가 본 잇페인은 미치광이가 아니었다. 3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날 괴롭힐 준비를 해왔으며, 오늘에야 그 계획을 시현시킨 것이다. 그래서 나는 두려웠다.

이러다가 정말 손녀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의 말마따나 아이린은 내 전부였다. 아들 내외가 실종된 이후로도 내가 끈덕지게 살아가는 건, 그 어린 것이 혼자 남겨지는 게 딱해서였다.

난 무엇이든 할 테니 손녀만은 살려달라고 빌었다. 내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니 내 목숨을 가져가고, 손녀는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했다.

잇페인은 늙은이의 목숨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손녀의 목숨대신 레미라 마법사의 명예라도 가져가야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마법사의 탑에서 고스트 소드를 훔쳤다.


◇◇◇◇◇◈◇◇◇◇◇◇◈◇◇◇◇◇◇◈◇◇◇◇◇


“이건 렌틸의 기억이로군.”

렌틸이 자신의 목에 독침을 꽂아 넣으려는 순간, 위즈는 진각과 촌경의 조합으로 그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진각과 촌경을 함께 사용하여 위력이 배가 됩니다.>

<시너지 스킬-무신장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진각:MX-LV.100] [LV.1-숙련도 00.00/100%]

모든 무술의 기본. 체중을 하체에 실어 안정감을 주며, 공격력과 명중률을 향상시켜줍니다.

- 진각을 사용하고 2초 이내 일반 공격 : 물리공격력 +5 / 명중률 +5%

- 적을 타깃으로 진각을 사용하면 50의 고정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 진각을 밟으며 ‘촌경’을 사용하면 시너지 효과가 발생합니다.

≪시너지 효과 : 무신장/ 스태미나 50을 소모해 타격한 상대를 최대 5미터까지 날려버립니다. 날려간 상대가 5미터 안에서 장애물을 들이받아 멈추면, 3초간 스턴을 일으킵니다.≫

≪상대가 지나치게 무겁거나, 시전자의 힘 스탯이 부족하면 밀어내기는 발동하지 않습니다. 이때는 물리공격력에 100의 고정 데미지만 가산됩니다.≫

≪무신장을 얻어맞은 상대에게 2초 내로 무신장을 적중시키면, 무기의 공격력을 포함한 물리공격력의 2배의 데미지를 추가로 입힐 수 있습니다.≫

≪3회째 무신장의 연속 성공 시 주는 추가 데미지는, 앞서 가한 2회째 추가 데미지의 2배입니다. 이것은 4회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


생각지 않은 시너지효과가 발생했지만, 위즈는 그 덕을 보지 못했다.

렌틸은 NPC이며 중급마법사이다. 보기와는 달리 위즈보다 스탯이 높았는데, 그건 힘스탯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렌틸의 몸을 날려버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촌경은 타격이 깊숙이 파고드는 공격이다. 그 묵직함은 마법사가 맞고 버틸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우욱!”

렌틸은 가슴을 움켜쥔 채 몸을 새우처럼 구부렸다. 이미 독침은 바닥에 떨어뜨린 뒤였다. 위즈는 렌틸의 멱살을 잡아들어 올린 후, 이마로 그의 이마를 들이 받아버렸다. 최후의 일격 같은 이유가 아니다.

‘아직까지 잇페인의 명령을 받고 있다면, 렌틸의 심상세계에 잇페인이 남긴 그 시커먼 것들이 남아 있을지도 몰라.’

심상세계에서의 싸움은 이미 수차례 승리한 바 있다. 위즈는 ‘마음속의 성전’을 이용했다. 선명한 휘광이 위즈의 머리에 맺혔다. 위즈와 이마를 맞댄 렌틸의 머리에도 은은하게 휘광이 어렸다.

그리고 육체적인 고통에 정신 못 차리는 틈을 이용해, 렌틸의 심상세계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다른 이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크게 어렵진 않았다.

그렇게 위즈는 렌틸이 겪은 일들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제 장면이 바뀌어 렌틸이 자살을 시도하는 모습이 나왔다.

렌틸은 독초인 나키투스로 독약을 제조했다. 두 개의 시험관을 준비한 렌틸은 독약을 두어 방울 비어있는 시험관에 떨어뜨려 바닥에 조심스레 놓아두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른 시험관에 넣어, 다른 무언가를 섞어 넣고는 그것을 조심스레 들이켰다.

위즈가 생각했던 대로다.

‘역시 독성을 약화시킨 걸로 음독자살을 연기한 거야.’

독약을 마신 렌틸은 서둘러 유언장을 작성하고는, 그것을 손에 쥐고 바닥에 앉았다. 처음 발견됐을 때처럼 명상 중인 자세다.


-……아이린. 미안하구나. 나만 죽으면 되는데……너까지 끌어들이고 말았구나…….


그 다음부터는 위즈도 알고 있는 일들이었다.

렌틸이 연극을 한 건지도 모르고, 탑의 마스터인 톨네스는 그를 불쌍히 여겨, 레미라를 빠져나가도록 도와주었다. 여기엔 위즈까지 가세했다.

‘가만있자. 톨네스가 마스터라고? 마스터는 최소한 상급마법사여야 하는 게 아니었나? 왜 중급마법사인 톨네스가 마스터이지? 원래 레미라엔 상급마법사가 없는 게 아니었나?’

하지만 주어진 정보도 없는데 혼자 생각해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 위즈는 일단 의문을 묻어두었다. 나중에 알아보면 될 일이다. 지금은 렌틸의 심상세계에 집중할 때다.

이 심상세계라가 참 좋은 게, 그 사람의 감정까지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점이었다.

감정이란 말로 표현되는 사건과 정보보다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 마법사의 탑은, 세상의 모든 학자군의 직업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탑을 배신한 자는 평생 쫓길 테지. 그걸 알면서도 위즈는 나를 따라 나서주었다. 다행이 위즈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구나. 마법사가 아닌데도 마법을 배우고 싶다라……. 못할 것도 없지. 내가 아는 건 모두 알려주겠다. 죽기직전에 이런 식으로나마 후인을 남길 수 있어 다행이야.


안도감 뒤엔 죄책감도 뒤따랐다. 렌틸은 그간 신세를 진 모든 사람들에게 미안해했다.

특히 톨네스와 위즈, 그리고 홀로 남겨질 손녀-아이린에게 그러했다.

그래서 렌틸은 살고 싶었다. 배신자로 손가락질 당하면서도 살아서 속죄하고 싶어 했으며, 자신의 자살소식을 듣고 슬퍼할 손녀 때문에 살고 싶었다.

하지만 잇페인이 요구한 것은 렌틸의 목숨이었다.

그것의 그의 삶의 의지를 꺾어놓았다.

위즈는 분노가 치밀었다.

이렇게나 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죽음을 강요한다. 이렇게나 죄책감에 시달리는데, 배신을 명령한다.

이 모든 건 잇페인의 계획. 그 핵심은 렌틸의 손녀-아이린에게 붙어 있다는 암살자 때문이다.

‘대체 아이린을 노리는 녀석이 누구야?’

암살자의 정체에 대한 단서가 나올까 싶었지만 실속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시커먼 형체가 낄낄거리며 위즈 앞에 나타났다.

『이젠 놀랍지도 않군. 늙은이가 걱정되어 왔나?』

“한 가지만 묻겠다. 어머니가 죽은 게 정말 렌틸 때문인가?”

『응? 내 어미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무슨 소리야?』

“하지만 분명히 렌틸에게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나? 그래서 렌틸을 괴롭힌 게 아닌가?”

『아~그건 이야기를 지어내다보니 그렇게 된 거였지. 그럴듯했나?』

“그럼 어째서 렌틸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거냐!”

『레미라에 틀어박힌 마법사를 밖으로 꾀어내려면, 가장 쉬운 방법이 바깥의 가족을 인질로 잡는 것이지. 렌틸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마침 눈에 띤 게 렌틸이었을 뿐이고. 실제 가지고 놀아보니 특별한 재미가 있더군. 역시 사연을 가진 불쌍한 것들이야말로 날 감동시킨다. 앞으로도 이런 놈들을 애용해줄 생각이다. 내가 생각해도 난 고상한 취미를 가졌어.』

고상한 취미. 녀석이 덧붙인 마지막 한마디에 위즈는 폭발했다.

“네놈은 어디까지 썩어 있는 것이냐!”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군. 자아성찰 같은 건 소싯적에도 해본 적이 없으니 말이야…….』

“언제가 되었건……심상세계 밖에서 나와 만나게 되면, 그날 네 묘비를 새겨주마!”

『그 패기! 역시 그녀의 후계자답구나! 크핫핫핫!』

마음속의 성전이 내뿜는 빛에 휘말려, 잇페인이 남긴 어둠이 사라졌다.


◇◇◇◇◇◈◇◇◇◇◇◇◈◇◇◇◇◇◇◈◇◇◇◇◇


위즈는 서둘러 의식을 이동시켜, 렌틸의 심상세계에서 빠져나왔다.

시야 한구석에 자리 잡은 시계를 보니, 렌틸에게 촌경을 먹인지 고작 3초밖에 지나지 않았다.

위즈는 쓰러지는 렌틸의 몸을 부축했다.

“정신 차려요. 여긴 아직 신전이라고요.”

“위즈……말리지 말게. 난 죽어야 하네. 그래야 아이린이 살 수 있어.”

“잇페인이 자기 어머니를 죽게 만들었다고, 죽어달라고 해서?”

“……난 최악의 인간이네.”

“그건 놈이 거짓말한 거예요. 잇페인 그놈은 사람을 가지고 놀면서 즐거워하는 거라고요.”

“치료사는 실수를 하면 안 되네. 구할 수 있는 사람도 살리지 못하게 되니까. 나는 지금까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네만……잇페인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 나 때문에 죽은 사람이 분명 있을 것 같더군.”

“잇페인의 말이 진짜라고 해도, 렌틸님은 잘못 없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런 걸 신경 써야 한다면, 차라리 치료를 안 하고 안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위즈가 계속 설득하자 렌틸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자네 말이 사실이라 해도……난 죽어야 한다네. 그의 입장에선 이번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을 테니까. 그러니까 내가 살아 있으면 잇페인은 아이린을 죽이고 말 거야.”

위즈의 팔에 렌틸의 체중이 강하게 실렸다. 렌틸의 옷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지하의 축축한 공기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피비린내가 확 올라왔다. 위즈는 렌틸의 몸을 더듬었다. 짧은 손칼이 달랑거리며 걸려 있었다. 신장 쪽이다. 신장은 동맥이 지나는 위치, 창상을 입었으니 당연히 출혈도 심하다.

위즈는 렌틸의 상처를 꾹 누르며, 그를 안고 지하를 빠져나왔다.

다행이도 지하실을 지키던 성직자는 아직까지도 곯아떨어져 있었고, 순찰을 도는 다른 성직자와도 맞닥뜨리지 않았다. 위즈는 그대로 진각을 밟아, 뒤편의 담을 넘었다.

담을 넘은 뒤로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았다. 다들 축제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위즈는 렌틸의 상처를 힘주어 틀어막았다. 그래도 피가 꾸역꾸역 새어나온다.

“이정도 상처라면 성직자의 안수치료를 받는 게 나을 텐데…….”

하지만 신전에서 도둑질 한 사람을, 성직자에게 데려가는 건 현명한 생각이 아니다.

심리적으로 켕기는 것뿐만 아니라, 치료받은 이후의 문제도 생각해야 했다. 뭘 하다가 뒤에서 칼을 맞았느냐고 물으면 어쩔 것인가.

렌틸의 성격이라면 자신이 저지른 죄를 전부 불고, 칼을 문채 엎어져버릴지도 모른다.

“그건 안 돼. 일단 치료사 길드로 가자. 지혈만 시키면 어떻게든 목숨은 부지하겠지.”

치료사 길드는 신전과 가까이에 있다. 아무리 지금 축제가 벌어진다 해도, 최소인원 정도는 남아있을 것이다. 자꾸만 쳐지는 렌틸을 끌며 위즈는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막 모퉁이를 도는 순간, 위즈는 갑자기 앞에 들이닥친 사람과 부딪쳐 뒤로 자빠졌다.

“어엇!”

위즈는 재빨리 자신의 몸을 바닥에 깔아, 렌틸이 다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앞 좀 똑바로 보고 다녀ㅇ……당신은?”

상대가 누군지 확인한 위즈의 얼굴이 환해졌다. 자신과 부딪힌 사람은 성직자 복장의 유저다.

성직자를 키우는 유저들 중에 아직 레벨 100에 도달한 사람이 없었으니 안수치료는 당연히 불가능. 따라서 성직자라 해도 부상당한 렌틸에게 도움이 안 된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유저는 예외다. 돈을 낸 만큼 디바인 파워를 쓰는 성직자. beadsman이기 때문이다.

엔틸리움에 있는 beadsman은 단 한사람.

루시엔이라는 이름의 여성 유저뿐이다.

“마침 잘 되었네요!”

위즈는 엉거주춤 서 있는 그녀가 든 나무상자에 은화를 마구 집어넣었다.

예전에 대련모드 속에서 만난 beadsman은 부상자의 치료에 은화 1닢씩을 요구했다. 지금은 급한 만큼 은화를 한 번에 열 개나 넣었다. 같은 요구라도 돈을 많이 넣으면 옵션이 붙는다. 어쩌면 지혈뿐만 아니라, 너무 흘려서 모자란 피까지 보충해줄지 모른다.

“이 NPC가 입은 상처 좀 치료해주세요.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까.”

“저는 더 이상 디바인 파워를…….”

우물거리던 루시엔은 난데없이 자신의 머리위에 둥근 빛의 고리가 떠오르자 화들짝 놀랐다.

“오오! 역시 beadsman이야!”

위즈는 렌틸의 상처에서 피가 멎고, 창백한 얼굴에 혈색까지 돌아오는 것을 확인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루시엔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위즈는, 서둘러 렌틸을 들쳐 업었다. 다시 깨어나면 또 죽겠다고 난리를 칠지 모른다. 그 전에 여관에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위즈는 부리나케 뛰어 사라졌다.

위즈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 루시엔은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 그건……분명 디바인 파워였어. 쓸 수 없게 된 것이 아니었나?”

루시엔은 혹시 몰라서 양손을 맞잡고 디바인 파워를 모아보았다. 손안 가득히 디바인 파워가 흘러넘친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난 타락한 게 아니었나?”

루시엔은 혼란스러웠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확인할 방법은 하나. 그녀는 신전으로 가서 디바인 마크를 다시 받아왔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어깨에 달아보았다.

파삭.

루시엔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디바인 마크는 루시엔을 거부했다. 그녀는 억지로 디바인 파워를 모아보았다. 방금 전까지는 가득 흘러넘치던 힘이 지금은 눈곱만큼도 모이지 않는다.

성직자로서 끝장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 그녀는 타락한 몸으로, 다친 사람을 치료했다. 디바인 파워로 말이다.

루시엔은 위즈가 사라진 방향을 떠올렸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나야 해.”


◇◇◇◇◇◈◇◇◇◇◇◇◈◇◇◇◇◇◇◈◇◇◇◇◇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 위즈는 레미라 마법사들과는 만나지 못했다.

신성왕국에서는 함부로 마법을 쓸 수 없기에 마법사들은 뛰어서 이동했고, 위즈는 섀도 런으로 재빨리 이동했기에 그렇다. 섀도 런은 마법이 아니라, 마력의 컨트롤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길이 엇갈렸나보군. 이미 빠져 나온 줄도 모르고 신전을 감시하겠지.”

렌틸을 구속하려면 되도록이면 많은 마법사가 필요했기에 위즈는 아쉬워했다. 그렇다고 다시 신전에 돌아가는 건 좋지 않았다. 아이린 주변에 있다는 암살자도 걱정되었고, 렌틸이 곧 깨어날지도 모른다.

“여관에도 마법사가 두 명 남아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여관에 도착한 위즈는 입구에 얼쩡거리는 사내를 발견했다. 마물이 득실거리는 숲에서 구해낸 3인 중 한 사람, 사냥꾼 브롬이었다. 위즈를 발견한 브롬은, 손에 들린 바구니를 내밀었다. 달콤한 냄새가 솔솔 피어오른다. 바구니 속에 든 것은 위즈의 예상대로 호박파이였다.

“베베노의 아버님이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벌은 넣지 않았으니까, 다른 사람들하고 나눠 먹으라더군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만드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계속 접하다보면 질린다.

그래서 위즈는 당분간 단것이 당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코는 멋대로 벌렁거리고 입안에는 침이 가득 고인다.

‘오늘 노점에서 질리도록 만든 호박파이이건만.’

게다가 지금 건 특히나 더 달콤해 보인다. 자신에게 보내는 거라고 베베노의 아버지가 특별히 더 신경 쓴 모양이다.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네. 그런데 그분은 축제라고 술을 너무 마신 모양이로군요. 밤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업혀오다니.”

“아하하……그렇게 되었네요.”

호박파이가 든 바구니를 받기 위해, 등에 업힌 렌틸의 위치를 살짝 비튼 순간. 렌틸이 신음을 흘렸다.

“어이구…이것 참. 이제 좀 편해지나 했더니.”

브롬의 손에서 바구니가 떨어졌다.

“살아있었군요? 그 사람.”

그러면서 바짝 마른 입술을 한차례 혀로 핥는 브롬.

위즈는 소름이 돋았다.


작가의말

연참 13일째......



2014.11.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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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121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2) +3 14.06.26 695 24 30쪽
123 120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1) +2 14.06.17 1,105 20 31쪽
122 119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0) +2 14.06.14 682 18 26쪽
121 118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9) +2 14.06.09 1,602 91 28쪽
120 117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8) +2 14.06.05 974 31 23쪽
119 116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7) +2 14.05.31 1,614 96 23쪽
118 115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6) +1 14.05.30 970 22 25쪽
117 114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5) +3 14.05.29 2,017 39 31쪽
116 113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4) +2 14.05.28 1,235 32 29쪽
115 112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3) +8 14.05.27 1,909 59 30쪽
»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2) +3 14.05.26 810 23 23쪽
113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1) +2 14.05.24 1,954 40 25쪽
112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0) +4 14.05.23 1,837 33 23쪽
111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9) +3 14.05.22 1,720 44 24쪽
110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8) +5 14.05.21 1,659 60 22쪽
109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7) +4 14.05.20 2,273 40 24쪽
108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6) +5 14.05.19 1,633 50 25쪽
107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5) +6 14.05.17 1,088 32 30쪽
106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4) +2 14.05.16 1,785 33 25쪽
105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3) +2 14.05.15 2,361 130 26쪽
104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2) +2 14.05.14 1,059 23 25쪽
103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1) +2 14.05.13 927 28 25쪽
102 99화...5.혼돈을 비추는 거울 (10) +2 14.05.12 1,548 34 29쪽
101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9) +3 14.05.07 1,749 106 19쪽
100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8) * +2 14.05.03 1,527 34 34쪽
99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7) +4 14.05.01 1,135 22 25쪽
98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6) +2 14.04.29 1,002 30 23쪽
97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 +2 14.04.25 1,528 29 27쪽
96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 +1 14.04.24 1,213 22 25쪽
95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 +2 14.04.21 1,135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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