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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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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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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24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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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1)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21.

이렇다 할 계획도 없이 즉흥적으로 밀어붙인 축제는, 엔틸리움의 공기를 서서히 달궈갔다.

축제를 시작한 건 NPC, 그것도 신전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자들뿐이었다. 엔틸리움 토박이 들이나 유저들은 이 엉성한 행사를 냉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축제하는 당일 계획된 축제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런 바보 같은 짓에 장단을 맞추는 게 한심스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축제라며 자기들끼리 신나게 노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생각은 저만치 달아나버렸다.

이쪽은 일하는 데 저쪽에서는 축제라면서 왁자지껄 떠들며 논다.

“재밌겠네…….”

어른들이 체면 때문에 망설일 동안, 어린애들은 이미 축제의 분위기에 흠뻑 빠져 있었다.

“우와! 저 할아버지 도마뱀 구이 같은 걸 팔고 있어!”

“으웩! 벌칙 음식 아냐? 누가 그런 걸 먹냐?”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 걸? 맛집인가봐.”

“그래? 돈 걷어!”

코 묻은 동전이 한데 모였다. 한입씩이라도 맛보려는 집념이 느껴진다.

“원래 여기서는 도마뱀도 먹는 거야?”

“그런 음식점은 없어. 아마 환자나 그 가족들이 노점을 차린 거겠지. 그나저나 무슨 맛일까?”

“도마뱀 구이……츄릅.”

몰려다니는 아이들은 엔틸리움 토박이와, 외부에서 들어온 아이들이 섞여 있었다. 어릴 때는 체면도 안 차리고, 이런저런 거치적대는 입장이란 게 없다. 오늘 처음 만났음에도 아이들이 쉽게 친해진 이유다.

그 모습을 본 어른들은 놀러갈까 말까 망설이는 자신들이 바보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가게는 임시휴무 팻말이 걸렸고, 어른들은 무거운 엉덩이를 흔들며 축제의 열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유저들은 깨알 같은 퀘스트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면서 축제에 참가했다. 다들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휩쓸려 즐거워했다.

하지만 모든 이가 그런 건 아니다.

유저와 NPC 모두가 함께 어울려 축제를 즐길 때, 그 속에 녹아들지 못하고 겉도는 존재가 있었다.

“다들 즐거워 보이네.”

푸념하듯 한마디를 내 뱉은 건, 검은 생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여성유저였다.

그녀는 초보 성직자의 복식을 갖추고 있었다.

수녀복을 닮은 짙은 남색의 원피스. 목을 감싸는 차이나칼라. 정강이까지 오는 치마아래 드러난 롱부츠. 그리고 정육면체의 목재 헌금함.

전형적인 beadsman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성직자임을 증명하는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축제가 벌어지는 신전 앞 공터를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기하학적인 무늬가 사용된 둥근 장식물이 그의 손아귀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부풀려진 어깨부분-군복이라면 계급장이 달려있을 것 같은 부분에 장식을 가져다 댔다. 문장은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다시 한 번 그것을 가져다대자, 급기야 문장은 쩍 소리를 내며 쪼개져버렸다.

“거부 하는구나……. 응. 그래. 역시나 글러먹은 거야…….”

여자의 손에서 부서진 ‘디바인 마크’가 떨어져 내렸다. 이 디바인 마크는 그녀가 신전에 가서 막 받아온 새것이다. 즉 지금처럼 힘없이 부서질 물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디바인 마크는 단지 어깨에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 부서졌다.

그녀가 받아온 디바인 마크가 불량품이라서가 아니다.

“다시 새로 받아와도 똑같이 부서지겠지…….”

전투로 인해 손상을 입은 게 아님에도, 저절로 부서지는 디바인 마크가 의미하는 건 하나다.

타락.

디바인 파워가 더럽혀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성직자처럼 차려 입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성직자가 아니었다.

지금의 그녀는 무능력자.

그러니 서둘러 전직을 해야 했다.

타락한 성직자 캐릭터를 가진 계정이라면, 무슨 짓을 해도 성직자를 키울 수 없다.

이 같은 룰이 생겨난 이유는, 게임을 플레이 하는 유저들이 일관성 있는 플레이를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이제까지의 게임들은, 본캐와 부캐의 역할이 구분되어 있었다.

본캐를 키우기 위해 부캐가 희생되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본 캐릭터로는 성인군자처럼 굴면서, 부 캐릭터로는 온갖 쓰레기 짓을 벌여 돈을 모은다.

거래사기, 도둑질, PK 등등.

그걸로 본 캐릭터가 성장한다면, 두 캐릭터는 모두 악당이 틀림없다. 하지만 두 캐릭터가 같은 소유주의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누구나 비매너 플레이의 유혹에 빠지게 만드는 요인인 것,

그래서 마도로스社는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우선 1인 1계정의 원칙을 만들었다.

게임 계정을 만들 때는, 암릿을 통한 생체세포 인식이 사용된다. 그래서 한 사람이 2개 이상의 계정을 갖는 건 불가능하다. 대신 계정 내에 캐릭터를 다수 생성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성직자 계열 직업에 한 가지 제한을 달았다.

일정 수준의 악행을 저지른 캐릭터가 계정에 들어있다면, 절대 성직자 계열 직업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

예를 들어 남의 사냥감을 스틸하고 PK를 즐겨 원망을 사면, 그 캐릭터 때문에 다른 캐릭터로는 성직자를 키우지 못하는 것이다.

한번 악당은 영원한 악당. 도장 꿍! 이런 것이다.

게임판 낙인론이니 연좌제이니 하고 말이 많았지만, 대다수 유저들은 마도로스社의 정책을 환영했다. 적어도 성직자를 키우는 유저만큼은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뒷구멍으로 나쁜 짓하고 다니진 않을 테니까.

그만큼 성직자 유저들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그런데…….

“타락이라…….”

고고한 한 마리 백조에서, 진흙탕을 뒹구는 돼지로 전락해버렸다.

여성유저는 힘없이 손을 늘어뜨렸다. 부서진 디바인 마크가 흙바닥을 굴렀다.

“하……하하. 기왕 망가져버린 거……도살자로 전직해버릴까.”

영혼 없는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사라졌다.


◇◇◇◇◇◈◇◇◇◇◇◇◈◇◇◇◇◇◇◈◇◇◇◇◇


베베노의 아버지를 도와 노점 일을 거든 덕분에, 위즈에게도 요리스킬이 생겨났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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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스킬]/[액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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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개발:MX-LV.100] [LV.1-숙련도 37.50/100%]

평범한 요리는 가라! 그때그때 손에 잡히는 재료를 이용해 천상의 맛을 이끌어 낸다!

이건 절대 궁색한자의 요리가 아닙니다.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수많은 요리들도 누군가 처음 만들어낸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맛보지 못한 요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십시오. 그리하면 세상의 식탁은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맛없는 요리를 개선하기⇒숙련도 20%]

[처음 보는 재료의 쓰임을 파악⇒숙련도 10%]

[레시피 없이 요리 흉내 내기⇒숙련도 4%]

[음식을 먹고 레시피 알아맞히기⇒숙련도 2%]

[레시피를 보고 요리해보기(같은 요리 중복 불가)⇒숙련도 0.10%]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 맛보기⇒숙련도 0.01%]

[레시피를 복제해서 타인에게 양도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LV.1이 경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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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요리를 ‘개발’할 수 있는 스킬.

더 오션에 자신이 만든 요리를 널리 퍼뜨릴 수 있다.

레시피가 없어도 요리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은, 위즈의 마음에 쏙 들었다.

“역시 평범한 요리 스킬이 아니었어!”

베베노의 아버지가 사용한 요리재료 중에는 꿀벌과 도마뱀이 있었다. 혐오감 때문에 식재료로는 잘 사용되지 않는 것들이다. 하지만 베베노의 아버지는 그런 것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더 맛있고 영양가 넘치는 요리를 위해서라면, 독 빼고는 다 넣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 당연하다. 아들인 베베노가 질색할 만하다.

“아무튼 이제부터는 캠프 분위기를 낼 수 있다 이거로군. 오늘은 직접 만들어 먹어볼까? 마침 여관 음식도 질리는 참이었으니까.”

장을 보기에 앞서 위즈는, 여관부터 들르기로 했다. 일단 일행들과 상의하여 메뉴를 정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방에 들어선 위즈는 렌틸이 침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손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모습이 자애로운 할아버지를 연상시켰다.

“또 자는 거예요?”

“아, 왔는가. 위즈. 축제는 잘 되어가고 있나?”

“네. 렌틸님도 좀 쉬셨어요?”

“그럴까 했는데, 쉴 수가 없겠더구먼.”

위즈는 구석에 놓인 약초뭉치를 발견했다. 포장이 뜯어진 약초뭉치 옆에는 제조에 쓰이는 사발이과 숟가락 들이 널려 있었다.

“병증완화제는 이미 먹였잖아요?”

“아……이건 다르다네. 라르리르고가 들어왔거든.”

“그럼 이게 아이린을 치료할 약?”

“뭐…구할 수 없는 재료가 있어서, 완벽한 건 아니네. 그 때문에 1년마다 지어 먹여야 하지만……아무튼 완성했다네.”

렌틸은 푸른기가 도는 액체가 찰랑이는 유리병을 위즈에게 내밀었다.

“왜 이걸 저한테?”

“조금 전 치료사 길드에서 사람이 찾아왔다네. 아마 약의 증산 계획 때문에 부른 듯 했지만, 이걸 만드느라 가지 못했다네. 난 지금부터 치료사 길드에 다녀올 테니, 그동안에 손녀가 깨어나면 이 약을 먹이게나.”

“알겠습니다. 책임지고 먹이도록 하죠.”

위즈에게 약을 맡긴 렌틸은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이제 이 퀘스트도 끝이 보이는구나.”

렌틸이 넘겨준 약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위즈는 아차 싶었다.

“이런! 무슨 요리를 할지 상의한다는 걸 깜빡했다!”

위즈는 렌틸을 쫒아 방을 나섰다. 마침 레미라 마법사 하나가 옆방으로 들어가면서 한마디 했다.

“실내에선 뛰지 마라.”

“렌틸이랑 상의할 게 있단 말이에요. 여관을 나가기 전에 따라잡아야지.”

“뭐? 렌틸이 밖으로 나갔단 말이냐?”

레미라 마법사가 되물었다. 치료사 실드로 간다면서 렌틸이 방을 빠져나간 지 불과 1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렌텔과 마주치기는커녕 털끝하나 본적도 없는 듯 말하고 있다.

위즈는 우뚝 멈춰 섰다. 뭔가 이상하다는 예감이 든다.

“렌틸은 지금 막 방을 나섰다고요. 그런데 나가는 모습을 못 본 거예요?”

레미라 마법사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그의 몸에서 강력한 마력의 파문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으음! 이 여관 근처에는 없다.”

레미라 마법사는 허둥지둥 방을 열어 동료를 불렀다. 상황 설명을 들은 그들은 분개했다.

“손녀를 내팽개치고 도망칠 줄이야!”

“한때 동정심을 가진 게 후회스럽군!”

그들은 렌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럴 리 없어. 손녀를 걱정하는 렌틸이 도망쳤다고? 뭔가 사정이 있을 거야.’

위즈는 마력을 보는 눈을 사용했다. 렌틸은 마법사다. 혹시라도 단서가 될 만한 걸 남겼을지도 모른다.


<‘마력을 보는 눈’이 시전 되었습니다. 초당 1의 마력이 소모됩니다.>


위즈의 눈동자가 검푸른 색으로 물들었다. 보통사람은 볼 수 없는 색채가 세상에 덧씌워졌다.

“역시 뭔가 다른 게 있어.”

조금 전 탐지를 사용한 레미라 마법사의 것으로 보이는 마력의 흔적이 서서히 흐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시커먼 마력이, 아이린이 잠든 방문 앞. 그러니까 위즈가 밟고 서 있는 바닥에 남아 있다. 이 역시 위즈가 지켜보는 사이에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렌틸의 마력은 갈색이다. 검은 색은 아냐. 옆방의 레미라 마법사 중에서도 검은 색은 없어.”

위즈는 자신의 모자손 건틀릿에, 마력을 불어 넣어보았다. 검푸른 빛의 마력이 어린다. 검은 색과 비슷하지만, 역시 바닥에 남은 흔적과는 전혀 다르다.

“내 것도 아냐. 그럼 대체 누가 남긴 마력이지”

잠시 후 렌틸을 쫓아 나갔던 마법사들이 돌아왔다. 렌틸을 찾진 못했지만, 손녀를 두고 도망치진 못했을 거라 생각해 다시 돌아온 것이다.

“혹시 렌틸이 돌아왔나?”

위즈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어딜 간다고 하던가?”

“약의 증산 문제로 치료사 길드에 간다고 하더군요.”

“거긴 이미 다녀왔어. 렌틸은 없더군.”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그때 마법사 하나가 비틀거리며 2층으로 올라왔다. 창백한 안색에 땀을 질질 흘려대는 모습이, 어딘가 아픈 사람 같다.

“왜 그러는 거지?”

“렌틸과……만났습니다.”

“만났다고? 그는 어디 있나?”

“놓치고 말았습니다. 추격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제 뒤에 나타나서는 마비독을……크윽!”

마법사는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고 말았다.

“이로서 분명해졌군. 렌틸은 아직도 숨기고 있는 게 있다.”

위즈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사라진 렌틸. 주인을 알 수 없는 검은 마력. 그리고 레미라 마법사를 마비시킨 마비독.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렌틸은 여전히 잇페인을 위해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


방으로 돌아온 위즈는 레미라 마법사들에게 물었다.

“라르리르고를 가진 마법사가 도착했나요?”

“그는 오늘 밤 늦게 도착할 예정이네. 그건 왜 묻지?”

“렌틸이 나가기 전에 저한테 약을 한 병 맡겼어요. 라르리르고로 만든 약이라더군요. 혹시 라르리르고를 가진 다른 마법사가 엔틸리움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나요?”

“라르리르고는 희귀한 약초네. 현재 탑의 연락을 받고 라르리르고를 운반중인 마법사는 한 사람 뿐이네.”

그렇다면 더더욱 이상하다. 있지도 않은 라르리르고를 가지고 약을 만들 수는 없다. 위즈는 푸른 액체가 담긴 약병을 바라보았다.

“그 약이 가짜일 가능성은?”

“그럴 리 없어요. 일주일 간 함께 여행하면서, 렌틸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어요. 아이린이 잘못되면 자신도 죽는 거라고요. 그런 사람이 약 가지고 장난칠 리 없어요. 음?”

위즈는 약병에 둘러진 종이에 깨알 같은 글자가 적혀 있음을 발견했다. 무늬가 들어간 띠지라고 생각했기에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건 약을 만드는 방법?”

“뭐라고?”

레미라 마법사들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손녀를 살릴 약과 조제법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본인은 사라졌다? 심상치 않군.”

“혹시 자살을?”

“으음…….”

다들 같은 생각을 떠올리는 지 안색들이 어둡다. 어두운 골목에 쓰러져 식어가는 렌틸의 주검이 보이는 듯하다.

‘이 약이 진짜라면, 라르리르고는 대체 어디서 난 거지?’

그때 위즈의 머리에 하나의 가설이 번뜩였다.

모든 일은 바하르칼에서 전쟁에 사용할 물자를 잔뜩 사들이면서 시작되었다.

용병마법사들이 사용할 마법시약의 재료를 대량 구매하는 과정에서, 라르리르고라는 약재 역시 바하르칼의 수중에 떨어졌다. 라르리르고는 손녀의 약을 만들 때 반드시 필요한 재료였기에, 렌틸은 이들과 거래를 했다.

라르리르고를 넘겨받는 대신, 레미라 수호전쟁에서 바하르칼이 승리하도록 돕는다.

하지만 렌틸은 만들어진 약도, 라르리르고도 잃고 말았다.

악랄한 잇페인은 렌틸의 눈앞에서 약병을 깨고, 라르리르고가 담긴 상자도 불살라버렸다.

그렇다면 잇페인이 그런 짓을 했다는 증거는 어디 있는가? 그건 렌틸의 말 뿐이다.

위즈는 자신의 생각을 레미라 마법사들에게 말해주었다.

“혹시 그때 잇페인이 라르리르고를 태우지 않고, 그걸로 새로이 약점을 잡아 렌틸을 옭아맸다면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니, 그동안 겪었던 일들에도 적잖은 의혹이 있음이 드러났다.

레미라 지하에 위치한 어밴던드 폴리스에서, 렌틸은 나키투스라는 독초로 자살을 시도했다. 마력을 가진 자에게 특히나 치명적인 독이었다. 몇 방울을 맛본 위즈조차 단번에 5000이나 되는 데미지를 입고 사망했다. 세 갈래 운명의 길이 아니었다면, 그때 적잖이 스탯이 깎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독을 마시고도, 레틸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 그걸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렌틸은 평생 동안 약초를 주물럭댄 사람. 그러니 죽지 않을 정도로 독의 농도를 조절하는 건 일도 아니었을 거야.’

탑의 마법사들 중에 치료사 출신이 있었다면, 단숨에 들통 날 트릭이다. 하지만 치료사 공부를 한 사람은 렌틸이 유일했다. 그래서 렌틸의 자살소동이 연극이란 걸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렌틸은 아직도 잇페인의 명령을 받고 있는 거예요.”

그의 행방불명에 대한 유력한 가설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렌틸이 어떤 명령을 받았는가는 아무도 몰랐다.

이곳은 레미라가 아니다. 신성왕국 한가운데, 그것도 대도시인 엔틸리움이다.

바하르칼의 용병마법사가 함부로 건드릴 대상이 아닌 것이다.

“명령을 내린 자가 잇페인이라면, 레미라에서 시킨 일과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네.”

“혹시 마물을 소환한 게 잇페인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소환자가 바하르칼 용병의 반지를 끼고 있었으니까.”

차마 그 반지를 끼운 게 자신이라고 말은 못하고, 위즈는 그냥 고개만 도리도리 흔들었다.

“마물을 소환해서 엔틸리움을 부수는 걸로, 바하르칼이 얻을 건 없어요. 전쟁은 기세에요. 만약 레미라 정벌에 성공했다면, 신성왕국의 대도시 하나가 마물의 공격으로 날아 가버리는 일로 대륙에 혼란을 줄 수 있었을 거예요. 그 틈을 타 대륙에 바하르칼의 병력이 상륙할 수도 있었을 테고요. 하지만 바하르칼은 졌어요.”

“이블 고트 자체를 이용해 다른 일을 꾸밀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네만.”

“이블 고트가 제법 강력한 마족이라 해도, 결국엔 퇴치되었을 거예요. 그렇게 거대한 덩치의 마족은 때릴 곳 투성이니……아!”

위즈는 하고많은 마족들 중에 왜 이블 고트가 소환되었는가를 생각한 적이 있다. 그 의문에 렌틸은 이렇게 답해주었다.

덩치가 크면 때릴 곳도 많다. 게다가 맷집까지 좋다면, 여러 사람이 달라붙을 수밖에 없다.

즉 이블 고트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딱 좋다는 것.

‘이블 고트는 마족. 놈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성기사를 비롯한 성직자들 뿐.’

제대로 싸웠다면 총력전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전에 성직자들이 남아 있을 리 없다. 신전의 경비가 허술해진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축제 때문에 신전에 있어야 할 성직자들이, 광장에서 축제를 거들고 있어.’

비번인 성기사마저 빵을 굽고 있었다. 신전에 숨어들어갈 사람이 있다면,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대담한 계획이야. 성직자들은 신전 앞 공터에 있을 뿐이야. 바로 코앞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달려올 거라고.’

위즈는 벌떡 일어섰다.

“혹시 모르니 아이린을 지킬 사람을 남겨두고, 신전으로 가야겠습니다.”

“렌틸이 신전에 갔단 말인가? 거길 왜?”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틀림없습니다. 축제로 어수선한 지금이야말로, 신전에 잠입할 좋은 기회니까요.”


◇◇◇◇◇◈◇◇◇◇◇◇◈◇◇◇◇◇◇◈◇◇◇◇◇


축제가 벌어지는 신전 앞 광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누군가는 열정적으로 춤을 추었다. 누군가는 배터지도록 음식을 집어삼켰다. 누군가는 대단한 묘기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축제에서 크게 두드러지는 부류는 이런 사람들이었다.

반면 구경하는 사람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에 구분 짓기 어려웠다. 그래서 아무도 가벼운 여행복 차림의 노인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축제를 즐기는 사람의 대부분은, 치료차 방문한 환자와 그 가족들이다. 이 노인도 그중 하나로 보인다.

노인의 모습에서 특이한 점이 있다면, 소매와 바짓단을 끈으로 동여매어 흘러내리지 않도록 했다는 것뿐이다.

노인은 인파속에 섞였다가 천천히 신전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평소라면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면,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지금 축제를 지원하러 나갔다. 축제가 벌어지는 장소가 정문 바로 앞이다 보니 생긴 일이었다.

신전에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달려올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한 성직자들은 신전에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놓았다.

그 덕분에 노인은 수월하게 담을 넘을 수 있었다.

노인은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 펼쳤다. 신전의 내부, 그중에서도 지하까지 이어지는 최단거리의 경로가 표시되어 있다.

노인의 어깨 쪽에서 시커먼 덩어리가 나타났다.

“알겠소. 조금만 기다리시오.”

노인이 대답하자 시커먼 덩어리는 모습을 감췄다.

“경비인력이 얼마 없어야 할 텐데.”

노인은 신전의 어둠속으로 스며들었다. 지하로 통하는 입구에는 성직자 한사람이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노인은 품속에서 약병을 꺼냈다. 검지만한 시험관이었다. 마개를 비틀어 뽑아낸 노인은, 안의 액체를 솜에 적셔서 바닥에 굴렸다. 가벼운 솜뭉치는 소리 없이 통로를 지키는 성직자의 발치까지 굴러갔다.

“으하암……이상하네……왜……이렇……ㄱ……졸ㄹ…….”

노인은 득달같이 달려나가 쓰러지는 성직자의 몸을 받아냈다. 낮아진 숨소리를 확인한 노인은 성직자를 바닥에 눕히고, 목에 걸린 열쇠를 빼냈다. 열쇠는 달랑 하나. 이것이 지하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열쇠임은 당연한 것이었다.

문을 연 노인은 벽에 걸린 횃대에 불을 붙였다. 지하라고는 하지만 아주 깊진 않았다. 고장 한 층계정도의 깊이다.

돌아다니면서 나머지 횃불에 불을 붙이자 어두컴컴한 공간이 환하게 밝아졌다.

천장에 맺힌 습기가 한곳에 모여 똑똑 물방울이 되어 떨어졌다. 지하라고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습기가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곳에는 물이 가득 채워진 목욕탕이 있었다. 유약을 발라 구워낸 벽돌을 쌓아 만든 탕에는 이미 손님이 있었다.

하지만 목욕 중인 것은 사람이 아니다.

탕 속에는 사람을 해하는 병기들이 가라앉아 있었다.

노인은 탕에 손을 밀어 넣어 물을 떠냈다.

기묘하게도 물에서는 반짝반짝 신비한 빛이 났다.

“성수(聖水). 온갖 사악한 것을 정화하는 디바인 파워가 깃든 액체.”

탕마다 채워진 것은 모두 성수였다.

이곳은 마속성의 병기들에 디바인 파워를 듬뿍 먹이는 장소.

의뢰를 받은 경우엔, 정화작업을 마친 무기를 주인에게 돌려준다.

하지만 너무도 위험하다고 판단된 경우엔, 용광로에 집어넣는다.

그것을 결정짓는 곳이 바로 여기다.

노인은 품속에서 다시 지도를 꺼냈다. 지하의 한 곳에 붉은 색으로 체크되어 있는 게 보인다.

“9번이라…….”

한 가운데에 위치된 작은 탕 앞에 선 노인이,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시뻘겋게 녹이 슨 롱소드 한 자루가 잠겨 있었다.

“이걸로 된 거야…….”

노인은 입을 꾹 다물고 녹슨 롱소드를 건져냈다. 그때 입구가 활짝 열리며, 누군가 들이닥쳤다. 흡사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듯 민첩하다.

“렌틸! 멈춰요!”

지하에 들어온 건 위즈였다. 렌틸을 천천히 몸을 돌렸다.

“위즈인가…….”

렌틸은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위즈는 천천히 렌틸 쪽으로 다가갔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그걸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저랑 함께 돌아가요. 아이린은 레미라 마법사들이 지켜줄 거예요. 아니, 이번 기회에 아이린도 레미라로 함께 돌아가면 어때요? 잇페인도 건드리지 못할 거예요.”

“이미 다 알고 있군. 하지만 이미 늦었다네.”

렌틸의 어깨에 시커먼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작은 날개를 퍼덕이며 바닥에 내려섰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위즈는 예전에도 같은 장면을 본적이 있었다.

“저 덩어리는……디멘션 게이트를 열었던?”

“맞네. 이번 일의 핵심은, 이 ‘하급 마족-어둠의 전령’이지.”

렌틸은 들고 있던 롱소드를 마법진에 던져 넣었다.

“안 돼!”

위즈가 달려들었지만, 마법진은 롱소드를 삼킨 채 사라져버렸다. 어둠의 전령이라는 하급마족도 없어져버렸다.

“나는 탑의 마스터를 비롯해 모든 마법사들이 착각하도록 만들었어. ‘링 오브 언밴런스’를 잇페인에게 넘겨 레미라를 위기에 빠뜨렸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진짜 내가 맡은 역할은, 탑에서 고스트 소드 계열의 마검을 훔쳐내는 것이었네.”

위즈는 기억을 뒤져 마검이 도난당한 적이 있는지를 떠올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렌틸의 소식을 알려온 젊은 마법사가 그런 말을 했었다. 하지만 보고를 들은 톨네스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해버렸다.

“그렇다면 조금 전의 롱소드도 고스트 소드입니까?”

“그렇다네.”

“잇페인이 꾸미는 게 대체 뭡니까?”

“그건 나도 모른다네. 난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이제 지쳤어. 더 이상 주변 사람들을 배신하고 싶지 않아. 이제……쉬고 싶군.”

렌틸의 손가락이 자신의 목 언저리를 향했다.

“또 비겁하게 도망치려는 겁니까!”

위즈는 진각을 밟으며 몸을 날림과 동시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축제에서 늙은 석수와 조각을 하며 배운 ‘촌경’의 매서운 기세가, 렌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작가의말

연참 12일차.

주말입니다. 쉴래요.





2014.11.0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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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1) +2 14.05.24 1,955 40 25쪽
112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0) +4 14.05.23 1,838 33 23쪽
111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9) +3 14.05.22 1,721 44 24쪽
110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8) +5 14.05.21 1,660 60 22쪽
109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7) +4 14.05.20 2,274 40 24쪽
108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6) +5 14.05.19 1,634 50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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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4) +2 14.05.16 1,785 33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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