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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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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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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0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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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글자
25쪽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7)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7.

“이번 마을에서는 구할 수 있다면 좋겠네요.”

“안 된다면 더 멀리 나가봐야겠지.”

병의 진행을 늦춰주는 약-병증완화제의 재료 중 하나인 퍼플웜의 씨앗은, 자주색 애벌레처럼 생긴 꽃대의 덜 여문 씨방을 갈라 얻는 약재다. 꽃이 피기도 전부터 씨가 생기는 이 특이한 식물은, 통증완화 및 독소정화에 탁월한 효능을 지니고 있다. ‘산들 숙주’ 만큼이나 빈번하게 사용되는 약재라서 결코 재고량이 달릴 수 없다.

하지만 위즈와 렌틸이 엔틸리움 인근의 마을을 뒤지는 이유는, 이 퍼플웜의 씨앗 때문이다.

두 사람은 지금의 이상 현상이 바하르칼 용병들의 사재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용병마법사들이 강한 이유는 그들의 마법실력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아낌없이 마법시약을 사용해대는 물량공세의 힘도 크다.

전쟁을 위한 마법시약의 제조.

이때 사용한 재료들 중에는 약초들 역시 다량 포함되어 있다.

허나 그뿐이라면 신성왕국에서 약재가 부족해지는 사태가 발생하진 않았을 것이다. 바하르칼 용병들은 부상자의 치료를 위해 일반적인 약재들까지 싹 쓸어갔다.

그 결과가 약재의 부족현상이다.

렌틸은 이렇게 말했다.

당장은 약재의 소모가 큰 신성왕국에서 약재파동이 발생했지만, 이 혼란은 곧 대륙 전체로 퍼져갈 것이라고.

벌써부터 약재를 둘러싼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위즈가 탄 말이 갑자기 무언가에 걸려 넘어져 바닥을 굴렀다. 미처 피하지 못한 위즈 역시 말과 한 덩어리가 되어 굴렀다.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던 데다가, 말에 깔리기까지 한 탓에 대단한 위력의 스킬에 맞은 것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위즈는 지금 만테코른에서 유령사서에게 받은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로브에 걸린 스톤 스킨으로 총 1250의 데미지를 받아냈습니다.>


그렇다고 하늘과 땅이 뒤집히듯 곤두박질 친 충격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위즈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으윽……대체 뭐랍니까 이건.”

말에서 내린 렌틸이 길옆의 풀숲에서 밧줄을 걷어왔다. 밧줄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즈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렸다.

“우리들 말고도 약초를 찾아 마을을 떠도는 자들이 있는 거로군요.”

“이건 방해공작이겠지.”

위즈의 말은 곧장 일어섰지만 발목을 삐어 절룩거렸다. 이 상태로는 사람을 태우진 못한다. 렌틸은 마법으로 말을 빌린 관청에 연락을 넣었다. 말을 회수하러 사람이 오기까지는 발이 묶인 거나 마찬가지다.

“여긴 제가 지키고 있을 테니, 렌틸님 혼자서라도 마을에 가주십시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함정이 널려있다면, 혼자 다니는 게 더 위험하네. 나 혼자는 평정을 유지할 수 없으니까.”

위즈는 렌틸과 함께 하는 내내 손녀 걱정에 서두르는 모습을 보아왔다.

‘확실히……렌틸 혼자 내보내는 건 불안해.’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 다음 마을의 약재는 동이 나고 말았다.


◇◇◇◇◇◈◇◇◇◇◇◇◈◇◇◇◇◇◇◈◇◇◇◇◇


엔틸리움에 돌아와 보니 이상하게도 목발을 짚거나, 팔에 부목을 댄 사람이 늘어나 있었다. 신성왕국에 방문하는 환자는 대부분 질병치료를 목적으로 하지, 외상치료를 위해 방문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럼에도 이렇게나 눈에 띌 정도로 부상자가 늘어났다면,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 없었다.

“이들도 약재를 구하려다가 다친 거로군요.”

“좋지 않군.”

렌틸의 말마따나 이건 좋지 않았다. 약재의 품귀현상으로 말미암아, 이들이 무력을 행사한다면 그에 대한 반작용이 곧 나타날 것이다. 위즈는 그 반작용의 전조를 발견했다.

“저기 서있는 성기사……아까부터 뭔가를 적고 있는데요?”

“바하 왕국에서도 이번 일을 알고 있을 거네. 아마 저 성기사는 그걸 조사하고 있겠지.”

“성기사들이 대거 투입되겠지요?”

“일단 그럴 거라고 보네. 사람들이 폭도로 변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어쩌면 도시의 출입을 통제할지도 모르겠군. 서두르세.”

말을 갈아탄 두 사람은 엔틸리움을 빠져나왔다. 이번에 찾아갈 곳은 다른 도시들과 상당히 떨어진 마을-세알이었다.

신성왕국의 마을들은 대부분이 도시 사이에 배치되어,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계획적인 주거지이다. 그렇다고 모든 마을이 다 그렇게 생겨난 건 아니다.

자연적으로 생겨난 부락도 존재했는데, 세알 마을도 그중 하나다.

세알은 험한 산중에 위치한 마을.

이곳은 숯을 굽고 암염을 채취해 먹고사는 전형적인 산간마을이었다.

두 사람은 해 질 무렵이 다되어서야 산자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속은 벌써 어두컴컴해진 게 한밤중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위험을 무릅쓰고 숲속에 발을 내디뎠다.

말은 놓고 가기로 했다. 이미 마을로 오르는 길에는 말을 맡기라고 마구간이 지어져 있었다. 마구간 지기는 원래 이 마을에는 방문하는 사람이 드물다고 했다. 마구간에 맡겨진 말들도 대부분 마을사람들의 것이었다.

“한밤의 산행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만 어쩔 수 없군요.”

“고집을 부려 미안하네.”

“여기까지 온 이상 꼭 구해가야죠. 퍼플웜의 씨앗.”

이번엔 마법사인 렌틸이 앞장섰다. 라이팅 주문으로 만든 빛의 구슬을 사방에 뿌린 렌틸은 탐지주문을 사용했다. 위즈 역시 섀도 런 스킬로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숲속엔 산짐승밖에 없었고 사람은 없었다. 날이 저물었는데 산속을 헤매는 쪽이 이상한 것이다.

급경사인데다가 바위가 많은 길은 험한 정도를 넘어 위험했지만, 적어도 길을 헤맬 염려는 없었다. 평소 마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이라 그런지, 주변의 잡초며 덤불이 깔끔하게 제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시간을 오른 끝에 두 사람은 세알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알마을의 건물들은 반 움집의 구조로 되어 있었다.

숯을 굽는 가마로 인한 화재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게다가 편평한 땅을 구하기 힘들었기에 많은 건물들이 경사면에 파묻혀 있었다. 그 모습은 장난감 집을 찰흙 속에 반쯤 박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네요.”

늦은 시간임에도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장작을 나르는 사람들과, 아지랑이가 일렁거리는 건물을 본 위즈는 이들이 숯을 굽는 중이라는 걸 알았다.

“누구요?”

밤늦게 찾아온 손님의 존재가 신기한 모양인지 누군가 다가왔다. 위즈는 한걸음 물러섰다. 아무래도 무능력자인 자신보다는 렌틸에게 맡기는 편이 좋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레미라에서 온 렌틸이라고 합니다. 손녀의 병구완을 위해 바하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러시군. 하지만 지난 한달 동안 여길 찾아온 사람은 댁들이 처음이오. 아무래도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치안 걱정 없이 지내는 게 신성왕국 사람이었지만, 밤에 찾아온 불청객을 경계하는 건 어디나 같았다. 그 증거로 렌틸과 마주한 사내는 허리춤에 꽂아둔 나이프에 손가락을 걸었고, 뒤편에 서 있는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연장을 꼭 쥐고 있었다.

렌틸 주변에 라이팅 주문이 날아다니고 있었으니 그가 마법사인 걸 모를 리도 없지만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이와 같았다.

세알마을은 이들이 살아가는 터전. 만에 하나 찾아든 손님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해도 물러설 곳이 없기 때문이다.

렌틸은 손을 내저어 라이팅 주문을 사라지게 했다. 굳이 라이팅을 켜지 않아도 이곳은 충분히 밝았다. 계속 켜놓았다면 마법사라고 유세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손녀는 엔틸리움에 있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이런 산골마을까지 찾아온 거요?”

손녀의 이야기를 떠올리자 사내의 경계가 풀린 듯 보였지만, 그럼에도 태도는 여전히 딱딱했다.

“약재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렌틸의 말을 들은 사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거라면 더 큰 도시로 가셔야지.”

“전쟁의 여파로 약재가 부족한데, 사람들이 너무 몰리는 바람에 그게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사내는 전쟁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뒤편에서 누가 외쳤다.

“어디서 전쟁이 벌어진 거요?”

“레미라입니다.”

“사흘 전 도시에 다녀왔는데 온통 그 얘기뿐이더군. 레미라에서 왔다고 했는데, 설마 벌써 전쟁이 끝난 거요?”

“네 전쟁은 끝났습니다. 바하르칼이 패했지요.”

“역시 마법사들의 성지답군. 어이~저분들 수상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다들 손에 든 거 내려놓고 우린 일이나 하자고.”

사람들은 다시 숯가마를 살피러 건물로 들어갔다. 렌틸 앞에 서 있던 남자는 머리를 긁었다.

“하……저 녀석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약재를 구하러 왔다 하였소? 대충 사정은 알겠소만, 우리들이라고 그리 많은 약재를 가진 건 아니요. 오히려 도시보다 종류도 양도 적을 거요.”

“제가 구하는 것은, 퍼플웜의 씨앗입니다.”

“그건 흔해 빠진 것 아니오? 진짜 그걸 구하러 여기까지 온 거란 말이요?”

“그렇습니다.”

“쳇. 퍼플웜의 씨앗 따위가 그리 귀해졌다니, 바깥은 말도 안 되게 어렵겠군. 그래, 얼마나 필요하시오?”

“1킬로그램 정도가 필요합니다.”

“그 정도라면 그냥도 내어줄 수 있소.”

“아닙니다. 충분한 값을 치르겠습니다.”

“뭐 굳이 돈을 내겠다면야 고맙게 받겠수다.”

사내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자신의 집에서 상자를 하나 들고 나왔다.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습니다.”

사내는 말없이 상자를 열었다. 안을 살펴본 렌틸은 혀를 찼다. 퍼플웜의 씨앗은 저장성이 높은 약재다. 그럼에도 상자 속의 내용물 절반이 못쓰게 되어 있었다.

“이건 너무 오래되었구려.”

“사놓고도 잘 쓰지 않으니 어쩔 수 없소. 그래서 내가 돈을 안 받겠다고 한 거요.”

위즈는 말라비틀어진 퍼플웜의 씨앗을 입에 넣고 오도독 씹었다.


<퍼플웜의 씨앗을 맛보았습니다.>

<생산된 지 1년이 지나 약성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1/3의 약성이 남아 있습니다.>


위즈는 상자의 살짝 들어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약 60킬로그램이군. 약성이 1/3로 저하되었다고 하니까, 3킬로그램을 써야 원래 효과를 노릴 수 있다는 뜻이 되는군.’

위즈는 상자 뚜껑을 닫으며 렌틸을 돌아보았다.

“이거 통째로 가져가죠.”

“하지만 오래되었으니 거의 쓸모가 없을 거네.”

“그렇지 않아요. 약성이 조금 남아 있으니, 사용하는 양을 늘리면 돼요.”

“내 생각에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소. 마을 사람들 모두 같은 날에 구입한 거라서, 다른 집을 가도 마찬가지일 거요. 대신 돈은 받지 않겠소.”

“어쩔 수 없군.”

다른 곳에서는 이것도 못 구해 난리일 것이다. 렌틸은 상자의 내용물을 덜어 허리춤의 가죽주머니에 나눠담았다. 작은 크기의 주머니임에도 상자 속의 내용물은 모두 들어갔다.

“렌틸님. 그 주머니는?”

“마법사들에게 지급되는 매직포켓이네. 난 원래 약재를 다루기 때문에, 4개나 사용하고 있지.”

목적을 달성한 두 사람은 세알마을을 떠났다.

“부디 손녀의 병을 고칠 수 있길 빌겠소.”

“고맙습니다.”

자신이 가진 약재를 거리낌 없이 내놓은 고마운 사내가 손을 흔들어주었다. 산속은 아직 순박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산 아래쪽 사람들은 문제가 많군.’

위즈는 마을로 내려가는 길에 복면을 쓴 자들을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이들은 경사진 바위에 이끼를 깔고는 수통의 물을 뿌리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는 길가의 나무에 밧줄을 매다는 중이다.

경사진 길을 오를 때는 오르막이지만, 돌아올 때는 내리막이 된다.

내리막에서 젖은 이끼를 밟거나, 밧줄에 발목이 걸리면 크게 다칠 수밖에 없다.

이들이 한밤에 산속에서 이런 짓을 하는 이유야 뻔하다.

‘약초를 빼앗을 생각이로군.’

함정까지 파놓고 기다리는 자들의 정체를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 신성왕국에는 약재가 부족하다. 그로 인해 약재를 찾아 발품을 파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약재인데 찾는 사람은 늘어났으니 이는 자연스레 경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 결과 엔틸리움에는 부상자들이 대량 발생하였다.

위즈는 길목에 쳐진 밧줄에 걸려 낙마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건 약재를 찾는 누군가가 경쟁자를 제거하려 만든 함정이었다.

‘섀도 런으로 미리 주변을 살피길 잘했어.’

레미라에서 잇페인을 추적할 때 섀도 런을 사용한 뒤로, 위즈는 숲속이야말로 섀도 런을 쓰기 좋은 장소라는 걸 배웠다.

섀도 런이란 스킬은 자신의 그림자 속에 숨어 공격을 회피하는 스킬. 또한 자신의 그림자와 접한 그림자 속으로 들락거리고, 이를 통해 공격까지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섀도 런은 빠르게 이동하는 목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한밤중이라면 온 세상에 암흑에 뒤덮여 그림자의 의미가 없어진다. 즉, 자신의 힘닿는 데까지 멀리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스킬 설명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멀리 이동할수록 스태미나가 소비된다. 100미터 넘게 이동하면 그때부터는 스태미나가 200이나 사용되었지.’

그걸 깨닫고부터 위즈는 간간히 먼 거리도 직접 달려가 살펴보았다. 마법사인 렌틸의 감지능력이라면 굳이 이런 수고를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세알마을과 연결된 길은 심한 오르막길이었다. 즉, 돌아갈 때는 내리막이 되어 더 위험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렌틸이 일일이 탐지를 사용하는 건 힘들다.

그래서 섀도 런을 사용한 것인데, 함정을 파고 기다리는 자들을 발견하게 될 줄은 위즈도 몰랐다.

“저들 중에 마법사가 있는 지 한번 살펴주시겠어요?”

렌틸은 탐지스킬을 최대 출력으로 사용했다. 마력의 파동이 넓게 흩뿌려지고 렌틸은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는 없는 것 같네. 하지만 숫자는 많군. 스무 명이나 되다니. 저들의 무장상태는 어떤가?”

“도끼를 든 사람이 다섯. 나머지는 단검을 나무막대기에 묶어서 들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갑옷은커녕 손목 보호대도 착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단 노상강도는 아닌 것 같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나무를 베거나 장작을 마련할 때 사용하는 도구가 도끼다.

단검은 생선을 손질하고 고기를 자르는 등 요리에도 사용된다.

이 둘의 공통점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도구라는 것. 이걸 무기랍시고 들고 나서는 건, 별도의 훈련 없이도 다룰 수 있어서이다. 이는 민란이 일어났을 때 농민들이 손에 들고 다니는 걸로 증명된다. 지금 아래쪽에서 기다리는 자들도 그러했다.

“가족을 위하는 마음은 갸륵하지만……저렇게 나오니 좀 무서워지는군요.”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네. 그나저나 길은 하나뿐이니 저들과 부딪힐 수밖에 없는데…이를 어쩌나…….”

정말 제대로 싸우게 되면 이쪽이 이기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렌틸은 싸우길 주저했다.

저들은 그저 한순간 선택을 잘못한 민간인. 이 상황을 벗어나겠다고 민간인에게 마법을 사용하는 건 레미라 마법사로서 해선 안 될 일이다. 그리고 신성왕국을 찾은 목적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렌틸은 손녀에게 약을 만들어주려고 찾아온 것이지, 모르는 이들과 싸우려고 온 게 아니다.

“비행주문으로 날아서 피하는 건 어떤가요?”

“신성왕국 내에서는 마법을 쓰는 게 힘들다네. 마력의 흐름이 비틀려져서 정교한 컨트롤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지.”

“탐지나 라이팅은 잘 쓰셨잖아요?”

“그거야 초보도 쓸 수 있는 주문이니까 문제는 없지만, 더 고위 주문이라면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네.”

렌틸이 레비테이션을 쓰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잘 날아오르다가 갑자기 마력을 컨트롤 못하게 되면 추락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럼 저들을 어떻게 상대합니까?”

“함정을 파놓은 걸 보면 저들은 굳이 우리들을 찾으려 움직이진 않을 거네. 아마도 저들 역시 마구간을 들렀을 테지. 마법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거야. 그렇다면 그걸 역으로 이용하는 게 좋을 것 같네. 적당히 보기에만 화려한 주문을 사용해서 이목을 끌고, 몸을 마비시키는 독을 살포할 생각이네.”

“그럼 저도 모습을 바꿔야겠군요.”

지금 위즈는 여성아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비를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혹시라도 바하르칼 용병들이 자신을 알아볼까봐서다. 하지만 렌틸은 저들을 뚫고 가선 안 된다며 말렸다.

“하지만 우리들이야 약재도 얻었겠다, 여기 두 번 다시 찾아올 일이 없으니, 그냥 빠져나가면 그만이네. 그렇게 되면 저들은 세알마을로 올라갈 거네.”

“당연히 그렇겠지요. 저들도 약재를 구하러 왔으니까요. 세알마을 사람들은 기꺼이 약재를 내줄 겁니다. 뭣하면 돈 주고 팔아도 될 테고요.”

“우리들 때처럼 이야기를 나눠 좋게 해결될 것 같진 않군.”

세알마을 사람들은 성격이 담백했다. 렌틸의 딱한 사정을 알자마자 약재를 상자 째로 내어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건 누가 찾아가도 마찬가지일 텐데 어째서 렌틸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거지?’

렌틸은 자신이 무엇을 걱정하는 지를 알려주었다.

“다른 사람을 습격해서 약재를 얻을 생각을 할 정도로 감정이 격앙된 자들이, 오래되어 효과가 떨어지는 약재를 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겠나?”

“그 말씀은 저들이 세알마을에 해코지를 할 거란 얘기입니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네.”

“여긴 신성왕국 안입니다. 성기사가 두려워서라도 그럴 리 없다고 하질 않았습니까?”

“이젠 생각이 바뀌었네. 막상 내 손녀의 목숨이 걸리고 보니, 한밤중에 산을 오르는 위험까지 무릅쓰지 않았나. 저들 역시 한밤에 산을 올랐네.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아나?”

“저 사람들도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이겠지요.”

“맞네. 저들 역시 아직 약재를 구하지 못한 게야.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지. 눈이 뒤집힌 저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그렇다면 역시 싸울 수밖에 없겠군요.”

“싸우지 않고 해결할 방법이 있네. 자네는 일단 세알마을로 올라가게. 자네는 경사면에서도 빨리 이동할 수 있지?”

“올라간 다음엔요?”

“약재가 든 상자들을 깨부숴 마을 곳곳을 어지럽히라고 하게.”

위즈는 렌틸의 의도를 이해했다.

“악당이 되란 말씀이로군요.”

“이런 부탁을 해서 미안하네.”

위즈는 히죽 웃었다.

“괜찮습니다. 악당놀이는 처음이 아니니까.”


◇◇◇◇◇◈◇◇◇◇◇◇◈◇◇◇◇◇◇◈◇◇◇◇◇


길가의 나무그늘 속에는 복면을 쓴 사내들이 숨을 죽인 채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이들은 젖은 이끼를 바위에 깔아두고 숨어 있는 중이었다.

세알마을과 이어진 길은 오직 하나.

이 길은 경사가 심한데다가 곳곳에 바위가 튀어나와 있어서, 올라갈 때나 내려올 때나 매우 위험하다. 실족하거나 뒤에서 누가 떠밀기만 해도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런 곳에 젖은 이끼를 깔아둔 것은, 앞서 지나간 마법사 일행을 노린 것이었다.

고작 이끼를 깔아둔 것이기에 마법사의 탐지스킬에도 걸리지 않는다. 그저 자연물을 이용한 것이니까. 게다가 어두운 산길이라는 의외성 때문에 충분히 먹힐 거라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설사 밟기 전에 이끼의 존재를 눈치 채더라도, 크게 신경 쓸 리 없다고 여겼다.

이것이 마법사를 상대로 장난에 가까운 함정을 설치한 이유다.

“이 근처에서 퍼플웜의 씨앗이 있을 만한 곳은 이제 이곳 말고는 없어.”

이들은 함정이 파놓은 곳과는 거리를 두고 숨어 있었다. 물에 젖은 이끼를 깔아둔 곳으로부터 100여 미터나 떨어진 곳이었다. 마법사의 감지능력을 얕볼 수 없기 때문에 충분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놈들이 미끄러져 굴러 떨어지면 곧바로 밧줄을 당기는 거다.”

리더로 보이는 자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이 손에 쥔 밧줄 끝에는 그물이 연결되어 있었다. 마법사 일행들을 받아내기 위해서다. 주변의 나무넝쿨을 엮어 만든 것이라 보기엔 엉성했지만, 공모자들 중에 사냥꾼이 있어서 그물의 짜임새나 강도는 신뢰할 수 있다.

마법사 일행이 실족해서 미끄러지면, 그물로 받아낸 다음 무기를 들이밀고 협박해서 퍼플웜의 씨앗을 빼앗는다. 이것이 이들이 세운 계획의 전부다.

“그런데 어째서 안 내려오는 거지?”

누군가 입을 열었다. 그때 마을이 있을 방향에서 비명소리와 함께 폭음이 울렸다. 번쩍이며 벼락이 내리꽂히기도 했다.

“설마 마을을 습격한 건가?”

“저쪽도 애가 타는 모양이군.”

“다들 정신 바짝 차려. 물불 안 가리는 작자가 마법사라면 우리도 위험해.”

그 말에 다들 입을 꾹 다물고 바짝 긴장했다. 마법사를 상대한다는 리스크가 이제야 직접적으로 느껴진 까닭이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환한 빛이 어둠을 몰아냈다. 마법으로 만들어낸 빛의 구슬이었다.

드디어 마법사가 길을 내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미끄러지듯 비탈길을 내려오는 소리가 밤공기를 울렸다. 혹시라도 숨어 있는 게 들킬 새라, 복면을 쓴 사람들은 몸을 웅크렸다.

갑자기 내려오는 움직임이 멎었다.

그리고 산길 한가운데에 시퍼런 빛이 작렬했다.

쩌쩍!

마법사는 스태프를 휘둘러 얼어붙은 이끼를 멀리 쳐냈다. 얼어붙은 이끼는 나무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마법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변조마법을 사용한 탓에 탁한 목소리다.

“장난친 놈들은 그 자리에 꼼짝 말고 있어라. 난 지금 기분이 매우 안 좋다.”

이미 들통 나버렸으니 목숨이라도 보전하려면 마법사의 말에 따르는 게 옳았다.

하지만 복면을 하고 숨어 있던 자들은, 너도나도 모습을 드러냈다. 상대가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마법사를 상대로 이런 짓을 벌인 것은, 고통 받는 가족을 위해서이다. 아무 것도 해보지 않고 포기할 자들이 아닌 것이다.

“마을 쪽이 소란스러운 걸 보았소. 퍼플웜의 씨앗을 구했소?”

“약효가 날아간 쓰레기를 가져다 어디에 쓴단 말이냐!”

“거짓말 마시오. 이미 구한 것 같은데, 딱한 사람들끼리 나눠씁시다.”

“흐흐흐……감히 날 공격하려 하다니.”

마법사는 푹 눌러쓴 후드를 걷었다. 숨어 있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복면을 쓰고 있었다. 마법사가 스태프를 확 쳐들자, 두 눈에서 시퍼런 빛이 번뜩였다. 그 순간 마법사 앞에 선 사람들은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으윽!”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복면을 사람들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동안 마법사는 조심스럽게 내리막을 걸어 내려왔다.

“내 마안(魔眼)을 본 자들은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게 되지. 안심해라 잠깐뿐이니까.”

그 말만 남기고 마법사는 이들을 스쳐지나갔다. 마법사가 사라지고 10분 정도 지났을 때, 이들은 마비되었던 몸에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이라도 쫓아가자!”

“쫓아가봐야 같은 수에 당하겠지. 역시 마법사를 터는 건 미친 짓이야.”

“그럼 세알마을이라도 가보자. 혹시 남은 약초가 있을지도 몰라!”

복면을 쓴 자들은 앞 다투어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랐다. 하지만 세알마을에 도착한 이들이 본 것은, 한곳에 모여 박살난 상자의 파편이었다. 주변에 흩뿌려진 약재들로 보아 상자 속에는 약재가 담겨 있었던 게 분명했다. 상자 주변에는 마법의 흔적으로 보이는 구덩이가 있었다. 탄내가 흘러나오는 구덩이에는 그을린 옷을 걸친 사람들이 자빠져 있었고, 그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부목을 댄 자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세알마을에 찾아온 마법사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분명했다.

“아이고~나 죽는다! 살살! 살살! 아프다고!”

그 모습을 본 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마법사가 죄다 털어간 모양이다.”

발밑에 뒹구는 약재를 살피던 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작자의 말이 맞아. 이거 오래되어서 약성이 많이 빠져나갔어. 이걸로 약을 만들려면 많은 양이 필요해. 만들어도 제 효과를 낼지도 모르겠고.”

환자를 보살피다보니 약초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건 당연한 일. 적어도 자주 쓰이는 약초의 품질정도는 파악할 줄 안다. 그렇기에 이들은 직접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앞 다투어 약재를 확인한 복면인들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세알마을은 틀렸군.”

“어서 빠져나가자. 잘못하면 우리가 했다고 덤터기 씌울지도 몰라.”

복면을 쓴 자들은 다시 왔던 길로 내려갔다.

불청객들이 충분히 멀어지자 마을 사람들은 연기를 그만두었다. 부목을 하고 있던 사람이 몸을 일으키고, 구덩이에 엎드려 신음을 흘리던 사람은 기지개를 켰다.

“당분간은 방문자들을 조심해야겠어.”

“이곳의 약재가 이미 털렸다고 소문을 내는 게 좋겠지?”

“마구간 지키는 내 아들놈에게도 알려야겠어.”

세알마을 사람들은 망보는 사람을 뽑아 산 아래로 내려 보냈다.


◇◇◇◇◇◈◇◇◇◇◇◇◈◇◇◇◇◇◇◈◇◇◇◇◇


“마안이라니……꽤 그럴 듯 했어요.”

“으흠. 내가 이목을 끄는 사이 독을 뿌린 자네의 은밀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마구간에서 말을 찾은 두 사람은 달빛을 받으며 멀어져갔다.


작가의말

오늘은 근로자의 날입니다.

하지만 출근할 수밖에 없지요.

왜 난 햄보칼 수 없어? ㅠㅠ



2014.11.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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