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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또 다른 셸터

웹소설 > 일반연재 > 게임, 판타지

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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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16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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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4)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14.

우당탕.

앞서 달리던 아르길이 무언가를 밟고서 미끄러졌다.

짓이겨진 빵이 바닥에 뒹굴었다. 가족을 간병하느라 제때 식사를 못한 간병인이 남긴 것일 수도 있고, 엔틸리움에서 막 사와 따끈따끈한 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의 발에 채여 안의 크림이 튀어나온 쓰레기에 불과했다.

이곳은 천막촌.

음식과 옷가지와 공포와 불안이 쏟아지고 구르는 난장판.

한걸음 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무언가가 발에 걸린다.

서두르는 사람이라면 100% 확률로 방해받는다.

다들 한 번씩은 넘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이런 잡동사니들을 피해가며 움직일 정신머리는 아무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ehakdecliftnodjqutek!"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울렸다. 굵은 남성의 목소리는 제법 매력적이어서, 방송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쓰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은 디멘션 게이트 속 존재다.

중급마족.

그것이 디멘션 게이트 속에서 네 사람을 방해하고 있었다.

넘어졌던 아르길이 벌떡 일어나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달리는 속도가 느려지더니 완전히 멈춰 섰다.

“으헤……댜…어게겨주…….크헷. 에헤헤헤.”

아르길이 흐느적거리며 뒤돌아섰다.

“섀도 런!”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오자마자 위즈는 다짜고짜 박치기를 했다. 순간적으로 위즈의 머리 주변에서 광륜이 솟으며 정전기가 튀었다.

“끄으…….”

아르길이 얼얼한 이마를 부비더니 위즈를 보았다.

“또 빙의 됐던 겁니까?”

“네. 이걸로 세 번째.”

“빌어먹을. 부적도 소용없다니.”

투덜거리던 아르길은 다시 천막촌을 가로지르며 뛰어나갔다. 베베노와 브롬이 경미하게 앞서 있다.

위즈는 그들을 따라 달리며 숨바꼭질-공을 사용했다. 그러자 엄폐상태가 해제된 악령들이 반투명한 몸체를 드러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네 사람 주변을 얼쩡거렸다.

그것들의 목적은 사람에 빙의되는 것.

본능을 마음껏 발산하기 위한 도구로써 육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위즈가 오기 전까지 베베노 일행은, 신전에서 파는 부적으로 악령에게 빙의되는 걸 막았다. 그런데 디멘션 게이트 속에 중급마족의 실루엣이 비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부적을 가지고 있음에도 악령에 빙의되는 것이다.

그리고 빙의된 사람은 동료의 발목을 잡았다.

“기껏 시간을 벌어놓았건만.”

벌써부터 숲에서는 구울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학살자의 망령을 내리쳐 만들어낸 균열을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더 이상 악령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위즈는, 거친 방법을 사용해 악령을 떼어냈다.

바로 ‘마음속의 성전’을 이용하는 것.

마음속의 성전은 정신계열 공격을 막아준다. 이때 발생하는 휘광은 사악한 존재와는 상극이다. 위즈는 그 휘광을 머리에 두른 채로, 악령에 씐 사람의 이마에 박치기를 했다. 그러면 마음속의 성전이 내뿜는 빛에 닿아 악령이 소멸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소멸시켜도 악령은 계속 나타났다. 애초에 구울만큼이나 악령의 수가 많았다. 그걸 하나씩 처치하자니 위즈는 점점 지쳐갔다.

“몰아서 없애버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 바람은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마음속의 성전’은 공격을 위한 스킬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정신계 공격을 막는 자가버프 같은 성격이다. 넓은 면에 피해를 주는 광역스킬이 아닌 것이다.

“헬겔…앓흐브……히히.”

베베노가 침을 흘리며 눈이 돌아갔다. 위즈는 그의 이마에 박치기를 먹이며 이를 갈았다. 별것도 아닌 게 계속 덤벼드니 짜증이 솟았다.

“엔틸리움에서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정신을 차린 베베노를 뛰게 하며 위즈는 또 빙의된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woaldlaternisok dulasrekisoduldu rapetihor qukafeqijendocufuk"

“시끄러워! 조금 전부터 알지도 못할 말로 쫑알쫑알!”

“adehikork uskas repfhirons. adeuritlou rakawjediwohuck aweipodju ahategikosmus dothadedilo."

갑자기 악령들이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뒤쪽에서 ‘우어어어어’ 소리를 내며 다가오던 구울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위즈는 뒤를 돌아보았다. 디멘션 게이트 속에서 뾰족한 돌기 두 개가 빠져나오고 있었다. 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재질이었다. 그것을 가득 뒤덮은 흠집을 본 위즈는 공격에 자주 노출되는 부위라고 판단했다. 공격을 하든, 공격을 받든.

‘이렇게 멀리서도 확인될 정도라면 실제로는 저 흠집……엄청나게 크겠지.’

위즈가 지켜보는 가운데 돌기는 계속하여 디멘션 게이트에서 솟아났다.

돌기는 지나치게 길고 뾰족했다. 위즈는 더 이상 이것을 돌기라고 부를 수 없었다.

“뿔.”

그 생각이 맞았다. 그것은 털이 숭숭 돋은 짐승의 머리통과 연결되어 있었다.

검은 털로 뒤덮인 짐승은 한차례 접힌 귀가 달려 있었으며 주둥이가 튀어나와있다. 그리고 턱 부분에는 기다란 수염까지 달려 있었다. 전체적으로 기다란 두상은 초식동물의 특징 중 하나였다.

“염소?”

눈꺼풀이 열리며 거대한 일자동공이 드러났다.

“사악한 존재니까 염소모습이라 이건가? 고전적이라 알기 쉽군.”

이제 막 텐트촌을 빠져나간 네 사람의 눈앞에 엔틸리움의 거대한 문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는 불과 100여 미터도 남지 않았다.

염소머리통이 입을 크게 벌렸다. 초식동물의 외형과 어울리지 않는 뾰족한 이빨이 드러났다. 그 입속에서 붉은 살덩어리가 튀어나왔다.

푸욱!

흡사 침을 뱉는 것 같은 소리가 나며 살덩어리가 쭉 내려왔다. 마치 두루마리 화장지가 풀리는 것 같다.

“뭐지?”

살덩어리가 풀려나가며 길게 늘어졌다. 땅에 닿은 살덩어리는 한차례 높이 튀어 올랐다가, 구르면서 활짝 펼쳐졌다. 특유의 탄력으로 부들거리는 살덩어리가 위즈 일행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위즈는 중급마족의 입과 연결된 살덩어리가 혀라는 것을 깨달았다.

“헉! 하마터면 다 와서 죽을 뻔했잖아!”

베베노의 말대로다. 혀에 덮쳐진 천막과 집기는 부서졌다. 혀가 조금만 더 길었다면 그것에 깔려 죽었을 것이다. 아무리 부드러운 살코기에 불과한 혀라 해도, 천막 두어 개 넓이의 덩어리에 맞으면 온전할 수가 없다.

“무슨 놈의 혀가 이렇게 길지? 그보다 우릴 깔아뭉개지 못한 거라면, 녀석의 공격이 실패한 건가?”

살덩이 끝에 얹혀 있는 붉은 덩어리가 입을 열었다.

“djdal qenriwhordul djelsi?”

“으악! 혀에 또 입이 달려 있다!”

겁을 집어먹은 베베노 일행이 도망쳤다. 위즈는 염소 머리통과 혀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숨바꼭질-공을 사용했다.

‘조금 전 혀를 펼친 건 공격이 아니다. 하지만 이유도 없이 혀를 내밀고 있을 리 없지.’

그래서 주변에 은신 중인 적이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없다. 악령들이 서둘러 디멘션 게이트 쪽으로 날아가는 것만을 보았을 뿐.

“응? 악령들이 물러난다? 그러고 보니 염소머리통이 나타나면서부터 그랬지.”

그때 엔틸리움 쪽에서 종이 울렸다. 묵직하고 청아한 소리로 미루어 볼 때, 신전에 매달린 가장 큰 종인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위즈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디바인 웨폰 ‘홀리 웨이브’가 발동되었습니다.>

<반경 800m의 언데드에게 피해를 입힙니다.>

<반경 650m에 성역이 선포됩니다.>

<성역에서는 아군의 상처와 상태이상이 완전회복 됩니다.>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친 거로군.”

어째서 악령들이 물러났는지 이유를 알만했다.

이제 이곳은 성역이다. 아무리 중급마족이라 해도 쉽게 돌아다니지 못하는 것이다. 위즈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텐트촌을 벗어난 뒤라 더 이상 그림자는 없었다. 섀도 런으로 도망칠 수 없으니, 정령강화를 신발에 걸고 뛰어야 했다.

“wakareksi rolekufalfekirho!"

혀에 달린 입이 계속 뭐라고 지껄였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위즈는 주문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그렇다고 저 외계어를 계속 듣고 싶지도 않다.

위즈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베베노 일행은 성문에 거의 다다랐다. 이제 위즈도 발을 뺄 때다.

“정령강화!”

푸른빛 덩어리가 위즈의 몸을 한 바퀴 돌더니 신발에 깃들었다.


<정령강화(바람속성)을 사용하셨습니다.>

<신발에 적용.>

<3분간 이동속도가 증가됩니다. [(W)초당 1.2m / (R)초당 3.8m /(B)초당 2.2m]>

<3분간 이동에 따른 스테미너 소비가 0으로 감소합니다.>


위즈는 한쪽 발을 슬쩍 들어올렸다. 진각을 밟아 빠른 스타트를 하기 위해서이다. 그때 혀에 달린 입이 다시 말을 내뱉었다. 이번엔 위즈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다.

“잠깐 기다리라고! 사람이 말을 하면 최소한 무시는 하지 말아야 할 거 아냐?”

위즈는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중급마족이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중급마족의 혀가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사람? 지금 중급마족……아니, 혀가 자신을 사람이라 주장하고 있어?”

“너 내가 그냥 혓바닥이라고 존나 무시 하냐?”

“허?”

“제길……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평범하게 인간으로 플레이 하는 건데. 쫌 세 보여서 엑시구아를 골랐더니 이게 뭐람…….”

그 말을 들은 위즈는 깜짝 놀랐다.

‘인간으로 플레이.’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이 혓바닥의 정체가 유저.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라는 뜻이다.

“그래. 나 유저 맞다. 캐릭터 생성 단계에서 특이한 종족을 고를 기회가 주어져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지.”

더 오션에도 이종족은 있다. 위즈가 만난 아쿠에리언도 그중 하나. 하지만 유저들은 오직 인간만을 고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다른 종족으로 캐릭터를 만들었다는 소문조차 돌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카더라 식의 소문조차 돌지 않았어. 정보가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었던 거야.’

마족의 혓바닥을 본 위즈는, 이종족으로 게임을 즐기는 유저가 더 있을 거라 생각했다. 위즈는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

“그럼 마족으로 플레이 하고 있는 거야?”

“마족 아냐.”

“저 커다란 염소 머리통이 너 아냐?”

“그럴 리 있겠냐!”

“그럼?”

“네가 보고 있는 이 혀가 나다.”

“촉수 비슷한 모습의 마족도 있구나…….”

“마족 아니라니까!”

“그럼 대체 뭔데?”

계속 추궁하자 혓바닥이 중얼거렸다.

“……말하기 싫어.”

“아~그러셔? 안녕. 난 바빠서 이만.”

위즈가 등을 돌리자 혓바닥이 부르르 떨었다.

“기생충이다!”

“뭐?”

“기생충이란 말이다!”

위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뭐가 기생충이라는 거야?”

“내가…내가 기생충이다. 기생충이라고……. 크흑…….”

위즈는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기껏 마족으로 캐릭터를 만들었는데, 이렇게 염소의 혓바닥 같은 모습이 되었으니 그런 생각을 가질 만도 했다.

“그래. 딱 봐도 강해보이진 않네. 그렇다고 스스로를 벌레라고 생각하진 말라고. 난 무능력자인데도 이렇게 꿋꿋하게 플레이하고 있잖아. 힘내라고.”

“미친놈아! 종족이 기생충이란 말이다!”

“기생추웅?”

숙주의 몸에 파고들어 피를 빨고 알을 낳아 번식하는 원시적인 생물.

혐오스러우며 백해무익하고, 그 존재자체가 백번 죽어 마땅한 것.

위즈는 혓바닥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역시 기분 나빠졌다. 안녕. 어서 마계로 돌아가셔.”

“계속 날 무시하면 엔틸리움을 박살내버리겠다!”

혓바닥 끄트머리가 저 혼자 방방 뛰었다. 탱탱한 살덩어리가 움직일 때마다 띠용띠용 소리가 났다.

‘엔틸리움을 박살내기는커녕, 다진 고기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지.’

위즈는 기생충으로 캐릭터를 만든 유저를 무시하고 성문으로 걸어갔다. 그때 섬뜩한 감각이 위즈의 몸을 경직시켰다.

촤악! 촤아악! 달그락 달각.

뭔가 찢어지는 소리가 나고, 그 뒤에 도자기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림자가 위즈를 덮었다. 커다란 무언가가 뒤에 서 있었다.

“난 분명히 경고했어.”

가시가 숭숭 돋은 막대기 같은 게 뻗어 나와 위즈의 진로를 막았다. 그것에는 관절이 달려 있었고, 가시라고 생각한 것은 뻣뻣한 강모였다.

위즈는 고개를 슬쩍 돌려 뒤를 살폈다.

혓바닥 위에 붉은색의 벌레가 앉아 위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벌레답게 키틴질의 광택을 잘잘 흘리는 외골격은 어지간한 금속방어구 만큼이나 단단하게 보였다. 관절과 훤히 드러난 배 부분도 딱딱한 껍질에 둘러싸여있다. 사람이 관절까지 감싼 갑옷을 입으면 움직임이 둔해지겠지만, 자칭 기생충인 이 녀석은 움직임이 부드럽다.

위즈가 뒤돌아서자마자 다리를 거두는 걸 보면, 생긴 모습과 달리 재빠르기까지 하다.

‘전체적인 모습은 갯강구를 닮았어,’

실제로도 잘게 나누어진 외골격은 구부러질 곳이 많았다. 잘하면 공처럼 몸을 돌돌 말기도 가능해 보인다. 그런 몸체가 지금은 완전히 쭉 펴져 수직으로 몸을 세우고 있다. 벌레가 사람처럼 몸을 일으키니 그 크기가 무려 6미터에 달했다.

머리로 생각되는 부분은 납작했으며, 좌우로 빨래집게 같은 입이 달려 있었다. 끝이 무뎌 위험해보일 것 같진 않지만, 그 굵기가 위즈의 팔뚝만 하다. 저 입에 물리면 어디 한군데는 잘려나갈 것이다. 채찍처럼 생긴 기다란 더듬이도 있다.

“어디하나 만만해 보이는 곳이 없군.”

“후후후. 신체 스펙으로 따지면 물리공격은 거의 안 통하지.”

“그래서 어쩔 생각이냐? 난 엔틸리움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제 잘 시간이니까.”

“피곤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지금이 14번째로 불려나온 거니까.”

“14번째?”

“네가 말했다시피, 난 지금 기생충이다. 마족이 아냐. 하지만 마물에게 기생한 시점에서, 마족과 공동운명체다.”

“그렇겠지. 기생충이니까.”

“기생충이라고는 해도 그동안은 별 불편 없이 지냈어. 실제 고생하는 건, 저 염소 대가리-‘이블 고트’니까. 근데 오늘은 아냐. 어떤 미친 새끼가 질리지도 않고, 디멘션 게이트를 연거야. 조건이 아마 최고로 강한 중급 마족이었나 봐.”

“강해보이긴 하네.”

“근데 난 싸우고 싶지 않아.”

위즈는 기생충 유저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잠깐. 소환된 것은 저 이블 고트인가 하는 염소 대가리잖아? 그러니까 싸울지 말지는 이블 고트 마음대로지, 기생충인 그쪽 마음대로 할 일이 아니잖아?”

“내가 기생한 시점에서, 이블 고트는 내가 조종할 수 있어.”

위즈는 디멘션 게이트에서 삐죽 튀어나온 거대한 염소의 머리를 올려다보았다. 산만한 머리통을 보고 있자니,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몸뚱이에 생각이 미쳤다. 몸뚱이는 얼마나 클 것인가.

“저렇게 큰 덩치를 조종한다고?”

“그래.”

“완벽하게 장악해서?”

“완벽하지. 저 녀석은 내 명령을 거부하지 못해.”

“그럼 뭐가 문젠데? 싸우기 싫다면 안 싸우면 그만 아냐?”

“하아……너 초짜냐?”

기생충 유저의 설명에 따르면, 소환대상은 반드시 계약을 맺어야만 한다.

그리고 계약에는 다양한 옵션이 있어서, 소환된 이후의 행동까지도 지정할 수 있다.

저 ‘이블 고트’의 경우, 소환된 직후 가까운 곳에 있는 도시를 파괴하도록 되어 있다.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엔 마계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 마계로 돌아갈 방법은 두 가지다.

도시를 파괴한다. 아니면 소환한 사람이 죽는다.

“그럼 깔끔하게 엔틸리움을 파괴하지 그래?”

“바보냐? 여긴 신성왕국이라고! 그리고 엔틸리움은 지금 디바인 웨폰까지 쓰고 있어! 무슨 수로 파괴해? 지금 보니까 성기사도 우글거리네.”

“성지 속에서도 잘만 버티고 있네.”

“버티는 게 고작이다. 근데 어째 성기사들이 100명 정도는 되어 보이는데. 내 착각인가?”

“눈 좋네. 맞아 100명.”

“아오…씨……돌아버리겠네. 집단공격기 쓰는 숫자잖아? 성역선포하고 집단공격기 때리면, 마왕이라 해도 코피 터진다고!”

“그럼 소환한 사람을 찾으면 되겠네.”

“그래!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야!”

기생충 유저가 엔틸리움으로 몸을 틀었다.

“소환자는 저기에 있다.”

“엔틸리움에?”

“그래.”

“그걸 어떻게 알지?”

“이블 고트의 다른 이름은 영혼포식자다. 디멘션 게이트가 열리면서 악령이 튀어나온 걸 봤겠지? 그거 이블 고트의 힘이다. 다른 마족들도 대부분 만들 줄 알지만, 이블 고트의 것은 특별하지. 악령에 씐 개체를 하나하나 조종할 수 있거든.”

기생충 유저의 생각은 이러했다. 악령을 넓게 퍼뜨려서 소환자를 찾는 것. 잘만하면 소환자를 찾아 쉽게 없애버릴 수도 있으니 악령을 끝없이 뽑아냈던 것이다.

“하지만 소환자는 없었다. 분명 이 근처에 있어야 하는데도.”

“후딱 소환만 시키고 자리를 피한 거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이블 고트가 머리만 내밀고 있는 거 보이지? 저거 디멘션 게이트를 안쪽에서부터 부수고 있어서 그런 거야. 그런데 디멘션 게이트가 멀쩡하잖아? 누가 계속해서 디멘션 게이트를 고치고 있는 거야.”

위즈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마계에서 중급마족씩이나 되는 거물이 나타났는데, 그 존재는 기생충을 선택한 유저에게 조종당하고 있다. 그리고 기생충 유저는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곳은 신성왕국. 마족이 싸우기엔 페널티가 많다.

‘나 같아도 도망가고 싶겠다.’

상대가 싸우지 않겠다고 하니 위즈는 도와주고 싶었다.

싸우지 않고 넘어갈 수만 있다면, 엔틸리움은 다시 평화롭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기생충 유저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다. 일단 이블 고트라는 것을 거느리고 있는 시점에서 위험인물…아니 위험충이다. 자신을 이용해 엔틸리움에 위해를 끼칠 가능성도 있었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뭐지? 빨리 말해.”

“어째서 그런 계약을 맺은 거지? 처음부터 계약 같은 거 맺지 않았다면 이 고생은 안했을 거 아냐?”

“계약은 내가 기생하기 전, 이블 고트가 맺은 거다.”

이렇게 말하니 위즈는 할 말이 없었다.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데 어쩔 것인가.

“마족이 분탕질치지 않고 돌아가면 내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야. 그러자면 역시 소환자를 찾아 없애야겠지.”

“그러니까 제발 나 좀 도와줘.”

“소환자를 찾을 방법은 있나?”

“그래. 여기 이 계약서를 봐라.”

기생충 유저가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계약서를 한 장 꺼냈다.

그 내용은 기생충 유저가 말한 것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위즈는 계약서가 조금 특이하다고 느꼈다. 계약서에 사용된 잉크는 짙은 회색이었다. 일반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색. 그보다 위즈는 이런 잉크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쪽을 봐. 마지막 부분.”

날카로운 기생충의 다리가 계약서의 하단을 톡톡 두들겼다.

사인을 해야 할 곳에는 손바닥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런데 손가락이 세 개 밖에 없는 게 아닌가.

“확실히 알기 쉬운 특징이로군.”


◇◇◇◇◇◈◇◇◇◇◇◇◈◇◇◇◇◇◇◈◇◇◇◇◇


엔틸리움에 들어온 위즈는 성기사들에게 조사를 받았다.

베베노 일행이 도망칠 시간을 벌고자 마물과 이야기를 나눴다고 둘러댔지만, 혹시나 마물에게 무슨 짓을 당해 조종당할지도 모른다 하여 취해진 조치다.

위즈야 아무 것도 당한 게 없으니, 조사한다고 붙잡아봐야 성기사들만 지쳤다.

“이만 돌아가 봐도 좋소.”

만약 마물과 얽힌 게 다른 사람이라면, 더 많은 시간을 붙잡아 놨을 것이다. 하지만 위즈이기에 조사는 불과 10분 만에 끝났다. 위즈는 1시간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었다.

어쨌거나 위즈가 사람을 구하기 위해 마물이 우글거리는 숲으로 들어가는 모험을 감행 것만은 사실.

성기사들은 그 의기를 높이 샀다. 그 고압적인 성기사들의 어투가 반 존대로 변한 것이 그 증거였다.

“세상에……성기사들이 경의를 표하다니. 저 이방인은 대체 누군가요?”

사람들이 쑥덕거렸다. 위즈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차피 원래 얼굴도 아니니 상관은 없지만, 괜히 부끄러웠던 것이다.

성기사들이 존댓말을 하는 대상은 오직, 신과 신을 모시는 성직자들 뿐.

각 나라의 국왕이 앞에 있어도 결코 존대를 하지 않을 만큼 그들은 원리원칙을 고수한다.

그 때문에 숲 속에 사람이 남아 있음을 알면서도, 성기사들은 누구하나 구하러 가지 않았다.

엔틸리움에 와 있는 성기사들은 정확히 100명.

그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집단공격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선택한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다.

헌데 무능력자인 이방인이 자신들이 할 일을 대신 해주었으니,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 해도 적응이 안 되네.”

위즈는 일단 여관에 들려 렌틸을 찾았다. 렌틸은 약을 증산하겠다며 치료사 길드로 갔다고 한다. 여관에 남은 건 레미라 마법사들이었다. 혹시라도 렌틸이 도주할까봐, 렌틸의 손녀를 감시하기 위해서이다. 위즈는 속으로 너무한다고 생각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렌틸이 없으니 물어볼 사람이라곤 이들 밖에 없겠구나.’

위즈는 의자를 끌어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마법사가 위즈를 힐긋 보더니 눈을 감았다.

너하고는 딱히 할 말이 없다는 태도. 하지만 위즈는 이들이게 볼 일이 있었다.

“중급마법사라면, 모든 종류의 시약에 대해 알고 있나요?”

“…….”

“소환계열 시약에 사용되는 약재 중에 알시오네라는 게 있다던데 사실인가요?”

“…….”

위즈는 다른 마법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위즈의 지목을 받은 마법사는 눈을 감아버렸다. 이들이 그리 협조적이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겪어보니 위즈는 괜히 시간낭비만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별수 없군. 시장에 가서 물어봐야 하나…….”

위즈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때 맞은편에 있던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상인에게 물어봐야 알 수 없을 거요.”

“어째서?”

“비약은 학자계열 직업군의 영역. 약재 상인이니 일반인보다야 많이 알 테지만, 그렇다고 시약에 대해 알리는 없지.”

“그래서, 알시오네는 소환계열 시약에 사용되나요?”

“맞소. 그것도 시약 조성표의 80%나 차지하지.”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한 가지만 물읍시다. 왜 그걸 알고 싶어 하는 거요?”

“디멘션 게이트를 연 작자를 찾으려고요.”

그 말에 레미라 마법사들 전원이 벌떡 일어났다.

“그게 사실이오?”

“사실이에요. 도와줄 거예요?”

“마족출현은 긴급 상황에 속하니 당연히 도와야지. 그래, 우리들은 지금부터 뭘 하면 되겠소?”

“일단 알시오네를 대량으로 꾸준히 구매하는 사람을 찾아요. 그리고 그 사람의 오른손에 손가락이 3개밖에 없다면, 그자를 미행해서 소환에 사용된 마법진을 찾아 파괴해버려야 해요.”

“손가락 3개라니……제법 상세한 정보를 얻으셨군. 알겠소. 지금 당장 엔틸리움에 그런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리다.”

“아, 그리고. 이 일은 우리들끼리만 처리해야 해요.”

“어째서요? 성기사들의 도움을 구하면 더 쉬워질 텐데?”

“소환자가 저와 똑같은 이방인일 경우엔, 도주할 우려가 있으니까요.”

NPC가 아닌 유저가 소환자일 경우, 소환 마법진을 포기하고 로그아웃 해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잠수 타다가 다시 디멘션 게이트를 열면 그것이야말로 골치 아팠다.

지금 신성왕국은 약초가 부족해서 한때 치안이 어지럽혀진 걸, 성기사를 투입해서 억지로 진정시켜놓은 상태다. 만약 이때 마물이 신성왕국 한가운데에 나타난다면, 혼란이 가중될 것이다. 그리되면…….

위즈는 계약서에 찍혀있던 손도장을 다시 떠올렸다.

그 손도장은 손가락이 3개라는 것 말고도 또 다른 특징이 있었다.

검지의 마디 하나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던 것.

그 때문에 잉크를 발라 손도장을 찍을 때, 반지 때문에 검지가 잘 찍히지 않았다.

그래서 소환자는 더욱 힘을 주어 손도장을 찍었다. 그 결과 반지가 종이를 눌러 흔적이 남았다. 해골반지의 흔적이.

해골을 문장으로 쓰는 단체는 해적이나 산적이 아니면, 바하르칼 용병뿐이다.

일단 조사는 해봐야겠지만 위즈는 소환자가 바하르칼 용병일 거라고 심증을 굳힌 뒤였다.

애초에 전쟁준비를 이유로 바하르칼이 많은 숫자의 약초를 구입했고, 그 결과 약초파동이 발생해 신성왕국의 치안이 약화되었다. 만약 이때를 노려 정확히 이블 고트의 소환에 성공했다면, 엄청난 혼란을 초래할 수 있었다.

이걸 이용하면 레미라 침략 전쟁으로 인한 부정적인 시선을, 다른 사건으로 덮을 수 있게 된다.

이게 바하르칼이 얻을 이득이다.

그런데 이블 고트에 기생한 유저 때문에 13번이나 소환에 실패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기생충 유저는 이블 고트를 조종해 디멘션 게이트를 안쪽에서부터 망가뜨리고 있었다.

계획에 차질이 생긴 셈.

‘잡히기만 해봐라. 증거를 낱낱이 찍어다가 뿌려주마. 전쟁배상금에 이어, 신성왕국에도 엄청나게 돈을 퍼 먹여야 할 거다.’


작가의말

연참  5일 째.


병원에서 지어온 감기약이 엄청 잘 듣네요.

우왕ㅋ굳ㅋ.


아직 완전 부활을 외칠 때는 아니지만......

족쇄가 풀린 것처럼 몸이 가벼운 게 기분이 좋네요.



2014.11.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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