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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또 다른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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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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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13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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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1)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11.

새끼염소가 메에메에 울어댔다. 분수처럼 치솟는 피를 피해 새끼염소가 폴짝폴짝 뛰었다. 하지만 나무에 묶여 있었기에 고스란히 피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아…아…….”

피 묻은 크리스를 쥔 에드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나왔다. 가느다란 염소수염 끝에 맺힌 선홍색 액체가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그의 입과 코에서 왈칵 피가 쏟아져 나왔다.

이번이 두 번째 토혈.

에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구불거리는 칼날이 박혀 있다. 새끼염소에게 박혀 있어야 할 크리스가 자신을 찌르고 있으니 순간적으로 에드는 혼란에 빠졌다.

짐승을 잡는 게 서툴러서 실수를 했나? 아니면 크리스가 어딘가에 튕겨져 날아와 박힌 것일까? 현실을 회피하고자 하는 본능이 이런 의문을 피워냈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손잡이를 꼭 틀어쥐고 있는 건 자신의 손이다.

“내가……내…가 찔렀…다?”

그러한 혼란 속에서 그는 다른 의문을 떠올렸다.

“그보다…어째서……내가…이런 곳에……?”

이 시간에는 강에 그물을 치러 배를 몰고 나가야 했다. 그런데 처음 와보는 숲속에서 자해를 하고 있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 의문을 떠올리자 다른 것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여긴 신성왕국…무엇 때문에 여길 왔지? 맞아. 내 눈을 고치려고…하지만 내 눈은 멀쩡한데…….’

그의 기억 속에 사이비 교단에서 생활하던 1년간의 기억이 떠올랐다.

헌데 아무리 노력해도 교단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곳에서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사이비 교단에 들어간 적이 있다’라는 단편적인 정보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사람의 기억이란 이렇게 불친절한 게 아니다.

‘거짓……된 기억…. 나는 어부…에드먼드.’

그의 눈동자가 탁하게 변해갔다. 그의 몸은 이미 바닥에 쓰러진 상태이지만, 에드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난데없이 사람이 죽어 자빠지자 복면을 쓰고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사람이 눈을 까뒤집고 죽는 걸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으아아아……저, 저것 봐!”

레미라 마법사들이 사라진 방향에서 시커먼 어둠이 피어올랐다. 벌건 대낮에 피어오르는 시커먼 것은 절대 연기가 아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불을 한 번도 안 때본 사람은 없다. 그러니 연기가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다.

“산불은 아냐. 그럼 대체 뭐지?”

“이거 혹시……인신공양…….”

복면인들의 눈이 일제히 바닥에 눕혀진 에드의 시신을 향했다.

염소를 제물로 바쳐 도망간 자들을 잡겠다며 호언장담하던 자가, 갑자기 자신의 가슴에 단검을 쑤셔 박았다. 마치 광신도를 보는 듯 했다. 이미 에드가 사이비 교단 출신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복면인들은 인신공양과 대낮의 시커먼 어둠, 둘을 쉽게 연결 지을 수 있었다.

인신공양의 결과가 바로 저 어둠.

그걸 깨닫자마자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염려되었다.

“한때라도 이자와 한패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뒷말은 듣지 않아도 상상이 되었다. 빛나는 쇠사슬에 묶여 평생을 갇혀 지내든지, 고향에 보내져서 참수당하든지. 어느 쪽이든 암울한 상상뿐이다.

“안 돼. 내가 죽으면 아버지는…….”

“아직 마누라 먹일 약초도 준비 못했다고!”

다들 처벌을 걱정하고 가족의 안위를 염려할 때, 복면인 하나는 당장 맞닥뜨릴 위험을 입에 올렸다.

“그건 나중 문제야. 저 에드라는 작자가 자기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한 짓을 보라고. 저게 저주나 마물 소환 같은 거라면 어떻게든 막아야 해!”

“우리들이 무슨 수로 그걸 막아?”

“이 멍청이들아! 할 수 있고 없고가 그렇게 중요한가? 이 숲을 벗어나면 천막이 있다! 거기엔 치료받으려고 몰려온 사람들이 있단 말이다! 내 아버지도 있고! 댁들의 마누라며 딸도 거기 있을 거 아냐!”

비로소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자들이 복면을 벗었다.

발을 빼려고 해도 이미 진창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복면 같은 걸 하고 있다고 무사할리 없다.

“사실 나는 노상강도외다. 그러니 원래 무기를 쓰겠소.”

인상 더러운 사내가 나무꾼들이 쓸법한 투박한 도끼를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그는 풀숲에서 천에 감싼 물건을 찾아들었다. 꼼꼼하게 싸매어진 노끈의 매듭을 잡아당기자, 천이 벗겨지며 시커먼 도끼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투용답게 날이 넓은데다가, 뒤쪽에는 뾰족한 돌기까지 달려 있다.

“뭐 그렇다고 해도 댁들보다 나은 구석은 하나도 없지만……그래도 하는 일이 이거다 보니 도끼는 많이 휘둘러보았소. 선봉은 이 베베노에게 맡겨주시구려.”

그러면서 베베노는 붕붕 소리가 나게 도끼를 휘둘러보았다. 베베노가 가볍게 가지고 노는 도끼는 보통 사람은 들어 올리는 것조차 벅찬 무게다. 그런 것을 가볍게 가지고 노는 모습은 모두에게 믿음을 주었다.

다른 두 사람은 석궁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허리춤에는 단검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무장상태로 보아 이들은 사냥꾼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전투와는 무관했다. 돌팔매나 던지면 모를까 이렇다 할 병기술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 하지만 이들 역시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우리들은 사람들이 대피하도록 알리겠습니다.”

베베노는 에드의 시체에서 크리스를 뽑아냈다. 부정한 의식에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꺼림칙해서 손도 못 댈 물건이지만, 가족의 안전이 걸려 있다고 생각하자 간이 커진 베베노다.

“단검을 가지고 가시오. 아마 성기사들 역시 이변을 눈치 챘을 테지만, 자세한 사정은 모르고 있을 거요. 이걸 보여주고 설명하면 쉽게 알아듣겠지.”

말을 마친 베베노는 두 명의 사냥꾼과 함께 사라졌다. 세 사람이 뛰어 들어간 방향은 시커먼 어둠이 피어올라오는 곳이었다.


◇◇◇◇◇◈◇◇◇◇◇◇◈◇◇◇◇◇◇◈◇◇◇◇◇


디멘션 게이트는 마법진이 모여 만들어졌다.

그리고 마법진이란 순수한 마력이 술식이라는 얼개를 뒤집어쓴 형태.

그 마력의 얼개를 뒤흔드는 최고의 방법은, 그 순수성을 깨뜨리는 것이다.

즉, 전혀 다른 이종의 마력을 강제로 끼워 넣어 술식의 단락을 일으키는 것.

그래서 레미라 마법사들은 힘을 모아 매직캐논을 만들어냈다.

중급마법사 11인이 마력을 공명시켜 완성시킨 주문이라 그런지, 일반적인 매직 캐논과는 궤를 달리하는 거대한 마력의 덩어리가 형성되었다. 강제로 모인 마력이 과포화 상태로 뭉쳐지며 울부짖었다.

비정상적으로 흉포한 마력의 존재는 주변에 영향을 끼쳤다.

그 기세만으로도 나뭇가지가 바삭거리고, 풀잎은 노랗게 시들어갔다.

레미라 마법사 11인의 입에서 동시에 시동어가 터져 나왔다.

“매직 캐논!”

11인의 마력과, 11개의 술식, 그리고 11개의 시동어가 한데 뭉쳐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발사 직후 매직캐논이 순간적으로 응축되면서 빠르게 쏘아져나갔다. 그 궤적을 따라 시뻘건 불길이 쫒았다. 탈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냥 공기이건만, 고농도의 마력덩어리가 지나가자 공기 스스로 타오른 것이다.

그렇게 쏘아진 강화판 매직 캐논이, 디멘션 게이트를 이루는 마법진에 명중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초에 불과했다.

그 과정은 ‘뭔가 번쩍하더니 쾅 소리가 났다’로 요약할 수 있었다.

2초의 시간은 매직캐논을 쏜 마법사나, 지켜보는 위즈와 빌헬름텔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주문이 명중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파괴했나?”

렌틸을 비롯한 레미라 마법사들은 폭발의 여파로 흩날리는 흙먼지 너머를 노려보았다.

디멘션 게이트를 이루는 마법진은 하나 둘이 아니다. 직사각형을 이루는 각각의 가상의 선에 많게는 10개에서 적게는 6개가 들어 있는 것이다.

총합 32개의 마법진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세계에 발조차 내딛지 못할 거물이 온다는 뜻이다.

그러니 마법진이 하나라도 빠지면 그만큼 디멘션 게이트는 불안해진다.

디멘션 게이트가 불안해지면 불안해질수록, 이곳을 통과하는 존재는 큰 타격을 입는다. 어쩌면 들어오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디멘션 게이트는 개구멍 같은 것.

만약 개구멍이 좁아지면 덩치 큰 사람은 비집고 들어올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게다가 디멘션 게이트가 불안해지면 얻게 되는 부수적인 이득도 있다.

두 번째 공격에서는 더 많은 마법진을 파괴할 수 있게 되는 것.

세 번째 공격에서는 더욱 더 많은 마법진이 파괴되고, 네 번째 공격에서는 아예 디멘션 게이트를 닫아버릴 수도 있다.

그렇기에 첫 공격이 중요한 것이다.

잠시 후 흙먼지가 걷히며 디멘션 게이트가 드러났다.

디멘션 게이트를 이루는 마법진의 숫자는 32개.

“하나도 안 줄었어.”

레미라 마법사 하나가 중얼거렸다. 허탈할 만도 하다.

아직 디멘션 게이트가 완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급히 날린 공격인데도 전혀 먹히지 않았다. 이렇게 초반 대응에서 재미를 보지 못하면, 다음부터는 지루한 소모전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선 자리를 옮깁시다. 여긴 디멘션 게이트와 너무 가까워요.”

뭐가 쏟아져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너무 붙어 있는 건 좋지 않았다. 위즈 일행과 레미라 마법사들은 숲을 빠져나왔다.

‘저렇게 크고 수상한 게 나타났으니, 엔틸리움에서도 난리가 났겠지.’

위즈의 예상대로 숲 바깥쪽에서는 천막에 있던 사람들이 대피하고 있었다. 성기사들은 검문절차를 없애고 사람들을 엔틸리움에 들여보냈다. 디멘션 게이트 쪽으로도 성기사가 달려왔다. 모두 합쳐 30명이나 되는 인원이다.

숲속에 전개된 마법진들은 점점 크기가 커져서 숲의 한 귀퉁이를 어둠으로 물들였다.

마법진에는 물리적인 힘도 적지 않은 듯, 마법진에 닿는 족족 나뭇가지들이 부러져나갔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악한 기운이 번져나가면서 새들이 날아오르고, 짐승들은 사람들의 곁을 지나쳐 뿔뿔이 흩어져 사라졌다.

짐승들조차 본능적으로 도망치고 있다.

가까이 다가온 성기사들 역시 일정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디멘션 게이트는 처음의 세배 이상 부풀어있다. 위험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크기다.

레미라 마법사 하나가 성기사 무리에게 다가갔다

디멘션 게이트를 연 원흉이라고 오해하지 않게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레미라 마법사는 해명할 필요 없었다.

이미 성기사들은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있었다.

“당신들이 레미라에서 온 마법사들인가? 초기 대응은 어떻게 됐지?”

“실패했습니다. 중급 마법사 11인의 마력을 공명 시켰는데도 공격이 먹히지 않았습니다.”

“중급마법사들의 힘으로도 역부족이라니……그렇다면 최소한 중급마족의 힘이 들어 있는 게 틀림없다.”

성기사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알려주었다.

일단 디바인 웨폰을 발동시켜 성역을 선포한다.

이렇게 되면 부정한 존재들은 성역 안에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성직자와 성기사의 스킬은 그 위력이 향상된다.

성기사들은 이때 집단 공격기를 사용할 계획이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엔틸리움의 주변이 전장으로 변한다.

그러니 민간인들은 전부 엔틸리움으로 대피해야 한다고 했다.

“당신들도 마찬가지다. 서둘러라.”

문득 위즈는 복면을 쓴 자들이 숲속에 남아 있음을 떠올렸다.

레미라 마법사들은 자신들을 따라 나왔지만, 그들은 어디 있는 건지 코빼기도 비치질 않고 있다.

“어쩌면 숲속에 사람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보가 아니라면 위험을 감지하고 이미 피했을 거다. 대피시키기에도 이미 늦었지.”

성기사는 롱소드를 뽑더니 허공에 대고 휘둘러댔다.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을 베었을 뿐인데 스파크가 튀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잘려나가고 있다.

“무엇을 공격하는 겁니까?”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벌써부터 디멘션 게이트에서 악령들이 기어 나오고 있다. 이 녀석들에게 붙들리면 몸을 지배당해 다른 사람을 공격하게 된다.”

유령 비슷한 존재라면 이미 수차례 만나보았다. 만테코른의 유령사서부터 시작해서, 학살자의 망령에 깃든 영혼까지. 그 결과 위즈는 유령이 원한다면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위즈의 눈에도 유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망자와의 친화력이 있음에도 그랬다. 위즈는 궁금해졌다. 지금까지 보아온 망자들과 악령이 어떻게 다른 건지.

“악령이란 건 대체 뭡니까?”

“망자가 남긴 사념체다. 극단적인 감정이 포함되어 있기에 위험하지. 항상 화가 나 있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유령이라고 생각하면 되겠군.”

말을 하면서도 성기사는 계속 검을 휘둘렀고, 이따금씩 디바인 파워가 담긴 빛의 화살을 내 쏘기도 했다. 잠시 후 모든 성기사들이 동작을 멈추었다.

“일단 새어나온 건 처리했다.”

“그럼 이틈에 숲을 수색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리들이 해치운 악령은 백여 마리에 달한다. 저만한 크기의 디멘션 게이트가 등장했는데 백 마리는 너무 적은 숫자다. 아마 대부분의 악령은 숲속으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확실히……숲속에 사람이 있군.”

“그렇다면 더더욱 숲속에 들어가야지요. 사람이 있는 걸 알면서도 이대로 포기한단 말입니까?”

“역부족인 걸 알면서도 달려드는 건 만용이다. 몇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그보다 수백 수천 배의 사람을 포기할 수는 없다.”

“한두 명 구하려고 많은 사람들을 포기하라는 게 아니잖아요! 잠깐이라도 수색해볼 수는 있는 것 아닙니까?”

성기사는 한숨을 쉬더니 위즈에게 질문했다.

“엔틸리움의 성기사는 100명이다. 그 의미를 알고 있나?”

“그거야……집단공격기를 쓸 수 있는 최소한의 숫자라고…….”

“그렇다면, 만약 여기서 한사람이라도 죽을 경우 어떻게 될지도 알고 있을 거다.”

성기사들의 집단공격기는 최소 100명이 모여야만 쓸 수 있다.

오직 100명이어야 한다.

99명으로는 쓸 수 없다.

위즈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렇군요.”

“나도 사람이 있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성기사가 된 이상, 내 목숨이라고 함부로 굴려서는 안 된다. 내 목숨을 지킴으로 인해서,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물러서야 한다.”

위즈는 숲 쪽을 돌아보았다. 어둠에 집어 삼켜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는, 악령들에게 쫓기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손 놓고 있어야 하다니.’

하지만 성기사들의 말이 옳다. 때로는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이미 레미라 마법사들은 엔틸리움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 기분은 잘 알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위즈님.”

빌헬름텔이 손을 끌었다. 위즈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내디뎠다.

엔틸리움 근처의 천막촌에 다다른 위즈는 버려진 그릇이며 보따리들을 보았다. 다들 몸만 피하느라고 미처 챙기지 못한 것들이다. 당나귀와 수레도 주인을 잃고 방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피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위즈는 천막 한 곳에서 몇 사람이 성기사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노인 하나가 수레에 탄 채 국자를 휘두르고 있었는데, 성기사들은 상대가 노인인지라 힘을 쓰지도 못하고 쩔쩔맸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몇 명의 사내들이 성기사와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하는 행동을 보니 저들은 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 같았다. 성기사들은 그들을 엔틸리움으로 대피시려고 하는 중이고.

위즈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약초를 따던 숲을 바라보았다. 이 거리에서도 시커먼 어둠에 먹힌 숲의 모습과, 여러 개의 마법진으로 이루어진 디멘션 게이트가 보인다. 저건 이방인이 아닌 NPC들에게도 생소한 풍경일 것이다.

‘낯선 걸 보면 누구라도 꺼리게 되지. 그런데 저들은 가지 않으려고 한다?’

위즈는 실랑이가 벌어지는 쪽으로 가까이 가보았다.

“이놈들아! 내 아들놈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지 않느냐!”

“어르신! 아드님은 엔틸리움에 들어가 있을 겁니다.”

“아들놈이 날 내버리고 저만 쏙 들어갔을 리 없다! 이놈들! 수레에서 손 치우지 못하겠느냐!”

국자로 성기사들을 때리는 노인은 아들 때문에 비킬 수 없다는 모양이다. 그리고 성기사들과 몸싸움을 벌이던 사내들은 자신들의 동료가 아직 숲에 있다며 버티고 있었다.

정황상 숲속에 사람이 남아있는 건 분명한 사실.

그게 저들이 말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위즈는 먼저 성기사와 뒤엉킨 사내들에게 충고해주었다.

“이미 숲에는 악령들이 떠돌고 있다 합니다. 당신들만이라도 대피하는 게 어때요?”

“그럴 수가!”

위즈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숲을 침식해 들어가는 어둠을 본 사내들이 성기사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어떻게든 막아보겠다고 남았는데 그 사람들…….”

사내들은 레미라 마법사들이 엔틸리움을 향해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마법사도 도망치는데……아직도 남아 있는 거야?”

이들의 말을 듣고 위즈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레미라 마법사들은 겉보기에는 그냥 여행자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은 렌틸을 비롯한 마법사들의 존재를 정확히 알아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 목소리가 익숙한 걸?’

혹시 몰라서 위즈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당신들 숲속에서 만난 적 있죠?”

이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약초를 노리고 습격했던 복면인이었다.

“맞아. 몹쓸 짓을 하려고 했지.”

“그렇다면 어째서 저 숲속에 사람이 남아 있는 거지요? 저와 렌틸님은 이미 숲을 벗어났습니다. 뒤쳐져 있던 당신들이 그걸 모르진 않았을 텐데요?”

“무지렁이들이지만 우리도 알건 다 알아. 저건 마족을 불러들이는 차원 관문이다. 그러면 여기 천막촌에 있던 사람들이 위험할 거 아니냐! 그래서 사람들을 대피시킬 동안 시간을 벌겠다면서 저들이 남은 거다.”

“자기희생이라니……그렇게 선량한 사람들이 왜 그런 짓을 했던 겁니까?”

“우리라고 이렇게 사람이 죽어나가는 걸 바란 건 아냐!”

이들에게는 악의가 없었다. 위즈는 이들이 처한 상황을 떠올려보고 딱하게 생각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위즈는 조금 전 이들이 했던 말을 다시 곱씹어보았다.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다.

그 말로 유추할 수 있는 건, 적어도 전투 능력을 갖춘, 전투 계열 NPC라는 것!

“숲에 남은 사람들 싸울 줄은 알던가요?”

“사냥꾼 둘에 도끼를 든 사내였지. 세 명 모두 산사나이들이라 쉽게 죽을 리 없어.”

그때 바로 옆에서 성기사들을 국자로 밀어내던 노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자네! 지금 도끼를 든 사내라고 했나?”

“네. 어르신.”

“그 도끼, 뒤쪽에 뾰족한 돌기가 달린 전투 도끼였지?”

“그렇습니다요. 어르신.”

“도끼 든 놈은 산도적처럼 생겨먹었고?”

“그, 그렇습니다요.”

“그놈 이름이 뭐라더냐?”

“베베노라고…….”

노인이 국자를 내 팽개치고 수레에 드러누워 버렸다.

“아이고~이 미친놈이 저기가 어디라고 남아!”

숲속에 남은 사람 중 하나가 노인의 아들임이 확인되었다. 성기사들은 눈치를 보며 수레를 끌었다. 아들이 죽은 거나 마찬가지란 소식을 들은 노인은, 성기사를 제지할 힘도 나지 않는 듯 가슴만 두들겼다.

“저어…… 어르신…….”

위즈가 말을 걸었지만 노인은 말을 하지 않았다. 위즈는 수레를 따라가며 계속 노인을 불렀다. 그러자 제풀에 지친 노인이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처자는 뭣 땜에 자꾸 불러대는가?”

카무플라주 스킬로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지만, 이렇게 처자라는 말을 들으니 위즈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저는 이방인입니다. 이 세계의 주민들보다는 죽음에서 자유로운 편입니다.”

죽어도 다시 부활하는 존재이니 그렇다. 이건 게임 속의 모든 NPC들이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제가 숲속에 들어가 볼 테니, 어르신은 엔틸리움에 들어가시지요. 살았다면 활로를 개척해보고, 죽었다면 시체라도 찾아내겠습니다.”

노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생판 처음 보는 얼굴의 이방인이 선뜻 아들을 찾아봐주겠다고 하자 금세 얼굴에 생기가 돈다.

“정말 그리해주겠나?”

“네. 제 힘이 닿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성기사가 위즈를 말렸다.

“가봤자 죽기십상이요.”

“하지만 이대로는 찜찜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앞서 말했다시피 저는 이방인이라 죽음에서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성기사님은 성기사님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저는 이방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성기사는 더 이상 위즈를 말리지 못했다. 빌헬름텔이 활을 고쳐 매며 말없이 옆에 와서 섰다. 위즈를 따라가겠다는 뜻이다.

“빌헬름텔님은 여기 남아 주세요.”

“하지만 위즈님 혼자서는 얼마 버티지도 못할 겁니다.”

“저에겐 섀도 런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은 적을 탐지할 방법도 있고요. 적을 피해서 도망치는 거라면 혼자가 더 편합니다. 그리고 빌헬름텔 님 역시, 이곳에 남아 할 일이 있습니다.”

“제가 할 일이란 게 뭡니까?”

“저 디멘션 게이트에서 뭐가 튀어나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만, 사람들이 상대하기 벅찬 녀석이 나올 경우엔 네이처스 아크로 저격해 주십시오.”

“회귀본능으로 말입니까?”

“네. 데미지 딜링 면에서는 그보다 탁월한 스킬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이걸 렌틸님께 전할 사람도 필요하니까요.”

위즈는 인벤토리를 열어 숲에서 채취한 모안티아 묶음을 꺼냈다. 숲에 마물이 나타났으니, 한가로이 모안티아를 구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이게 없으면 다시 폭동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이렇게까지 말하자 빌헬름텔은 더 이상 고집부리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위즈님, 꼭 살아서 돌아오십시오.”

빌헬름텔을 떼어놓은 위즈는 즉시 섀도 런을 사용해 숲을 향해 뛰쳐나갈 자세를 취했다. 그때 성기사 하나가 위즈를 불러 세웠다. 위즈 일행을 인도하던 성기사였다.

“이걸 가지고 가시오.”

성기사가 자신의 목에 매달린 작은 메달을 내주었다. 디바인 마크가 새겨진-일종의 성물이다.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능력이 탁월하기로 유명해서, 메달은 성물 중에서도 상위 랭크에 해당했다. 그 대신 성기사가 아닌 사람은 제 힘을 끌어내진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즉, 전문가용이란 것. 이건 성기사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걸 내준 이유는, 이렇게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서다.

성기사는 마물, 마족과 제1선에서 싸우는 전사다.

그럼에도 지금은 대의를 이유로 마물을 피해 몸을 사려야만 하는 입장이다. 100명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집단 공격기를 쓸 수 없기 때문.

그걸 이유로 마물에게 위협받는 사람을 모른 체 해야 하니, 성기사들 생각에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명령이 떨어진 이상 단독행동은 불가하다.

이럴 때 이방인 하나가 나섰으니, 성기사들은 아주 조금은 감탄했다.

딱 봐도 무능력자인데 어디서 그럴 용기가 나오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들이다. 자연스레 성기사들의 고압적이고 딱딱한 어조가 부드러워졌다.

위험을 자초하는 일임에도 선뜻 나선 이방인에 대한 호감의 표시다.

지금 내미는 메달도 그런 뜻이 담겨 있었다.

“가지고만 있어도 악령들이 싫어할 겁니다.”

“고맙게 잘 쓰겠습니다.”

위즈는 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럼 가볼까…….’

위즈의 모습이 그림자 속으로 잠겨들었다. 그리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숲을 뒤덮은 어둠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뭐지?’

조건만 맞으면 정령 강화를 신발에 걸었을 때보다, 섀도 런으로 이동할 때가 더 빠르다. 그렇다고 하지만 텐트촌과 숲까지의 거리는 백여 미터가 떨어져 있다.

조금 전 성기사에게 메달을 건네받은 곳은 텐트촌의 한가운데였으니, 사실상 더 멀리 떨어져 있다고 봐야 한다. 수백 미터는 족히 되는 거리.

‘그런데 그 먼 거리를 섀도 런을 한번 사용한 것만으로 뛰어넘어버렸다고?’

섀도 런으로 이동한 거리가 100미터를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200의 스태미나가 소모된다.

지금 위즈의 스태미나는 총량이 2200.

그렇지만 렌틸을 데리고 도주했었기에 지금은 그 양이 줄어들어 500정도가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섀도 런으로 이동할 수 있는 최대 거리는 200미터다.

미니맵을 살펴본 위즈는 실제 이동한 거리가 800미터에 가깝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현 스태미나를 생각하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섀도 런……이것 참, 말도 안 되는 스킬을 얻어버린 것 같군.’

위즈는 일단 생각을 접어두었다. 이곳은 마물의 소굴과 같은 곳.

악령에게 걸리기 전에, 빨리 사람들을 찾아내야 했다.

‘숨바꼭질-공!’

위즈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반경 100미터의 공간이 보이지 않는 파동으로 가득 찼다. 아무것도 존재치 않으리라 생각했던 공간 곳곳에서 희끄무레한 존재가 나타났다.

“저게 악령인가?”

엿가락을 녹여 늘어뜨린 것처럼 흐느적거리며 배회하는 것들이 있었다. 이미 인간의 모습을 버린 그것들은 이형의 새로운 존재이지, 유령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작가의말

연참 2일째 입니다.

연참기간이 많이 남았는데 극심한 탈력감에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코에서 그냥 짭짤한 물이 줄줄 흐릅니다.

머리도 띵합니다.

이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 있나!


꽃가루 알러지인 줄 알았는데, 코감기인 것 같습니다.

제발 좀 기침 할 때는 손으로 가리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2014.11.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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