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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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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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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20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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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7)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17.

더 오션에는 유저들을 위해 마련된 안전지대가 있다. 거주구역에 있을 경우엔 유저의 눈에 그런 지점들이 자연스럽게 표시된다. 그러면 유저들은 그곳으로 이동하여 로그아웃을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장소가 여관이다.

지금 여관의 한 구석에서도 빛 무리가 뭉치며 사람의 형상이 생겨나고 있었다.

마치 SF영화 속의 양자전송기가 재현된 것만 같은 모습이다.


<더 오션에 접속하였습니다.>


빛 무리 속에서 여성아처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처는 눈 꼬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마사지를 했다. 물론 게임 속 아바타의 몸을 마사지 한다고 하여 피로가 풀릴 리는 없다.

그러나 사람은 항상 생각을 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습관대로 내키는 대로 행동할 때가 더 많은 게 인간이다.

“윽. 운동은 거른 건 그렇다 쳐도, 달랑 3시간만 자고 게임을 하는 건 역시 힘들어.”

물론 식사도 하고 피로회복제까지 챙겨 먹었지만, 근본적인 문제해결은 되지 못한다.

“역시 주말엔 잠을 잘 시간을 벌어야겠어.”

아처는 손가락을 들어 허공의 한 점을 찍었다. 시야 한구석에 깜빡거리던 봉투모양의 아이콘이 펼쳐지며, 메시지창이 열렸다. 캐릭터가 로그아웃 상태였을 때 보낸 것이다.

“빌헬름텔님이? 무슨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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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님께.

지금 이방인들을 상대로 이블 고트와 담판을 지은 무능력자에 대해 캐묻고 다니는 NPC들이 있습니다. 조사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인상이 좋아서 유저들은 흔쾌히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들일 수록 조심해야 하는 법입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모습은 겉모습일 뿐, 속으로는 어떤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모릅니다.

설사 이들에게 선량한 의도가 있다 해도 일단은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습을 바꾸고 다른 직업으로 활동하시길 바랍니다.

지금의 여성아처의 모습은 이곳 사람들에게 너무 알려져 있습니다.

여성아처의 모습은 엔틸리움을 빠져나갈 때만 취해주면 될 겁니다.

저는 잠시 엔틸리움 근처의 마을에 다녀오겠습니다.

위즈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 퀘스트를 받았는데, 약초를 받으러 나가는 사람을 호위하는 간단한 일입니다. 내일 정도면 돌아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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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을 가진 사람은 NPC에게 말만 걸어도 퀘스트가 펑펑 쏟아지는구나.”

다시 한 번 무능력자의 서러움을 체감하며 위즈는 욕실로 들어갔다. 게임 속 캐릭터에게 목욕은 의미가 없었으니, 이곳은 그저 개인공간의 하나일 뿐이었다. 물론 게임 속에서 목욕을 하면, 특유의 상쾌함을 맛볼 수는 있었다. 그래서 게임 속이라 해도 목욕을 하는 유저가 많았다. 하지만 위즈는 목욕을 하기 위해 욕실에 들어간 게 아니었다.

위즈가 빌린 여관방은, 거울이 욕실에 달려 있었다.

그 거울을 보며 할 일이 있어서다. 바로 카무플라주로 모습을 바꾸기 전에, 지금의 모습을 기억해두기 위해서다.

빌헬름텔의 조언대로 모습을 바꾸는 일은, 굳이 거울을 보지 않고도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취하고 있는 여성아처의 모습은, 엔틸리움을 오가면서 성기사들에게 내비친 이력이 있다.

그러니 크레센토에서 발급한 위즈의 통행증을 내밀면서, 지금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한다면 성기사들이 내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위즈는 거울에 비친 여성아처의 모습을 캡처했다.

“그럼 이번엔 성별부터 원래로 돌릴까.”

변화의 시작은 머리카락이었다. 지금 위즈는 허리까지 오는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올려 묶은 상태였다. 그랬던 머리카락이 살짝 귀를 덮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눈썹의 숱은 짙게 변했고, 남자다운 느낌이 들도록 수염이 거뭇하게 돋아났다. 하지만 위즈는 수염을 지워버렸다.

“그동안 남자 모습을 하면 무조건 근육질. 수염은 물론 구레나룻까지 돋아난 마초였지. 그건 이제 식상해.”

카무플라주라는 스킬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평소 다양한 바리에이션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위즈는 꽃미남을 만들어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다이어트가 끝났다지만 고작 1차 목표를 달성한 것에 불과했다. 살집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런 육체정보를 반영한 상태에서 카무플라주를 쓰면 대중이 말하는 꽃미남을 만들 수 없다.

“그냥 마초와는 반대의 느낌으로 가야겠군.”

위즈는 얼굴의 색을 바꾸고, 팔다리의 길이를 가급적이면 짧고 가늘게 조절했다.

창백한 피부와 커다란 눈이 어울리며 겁이 많아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되었다. 수염조차 나지 않아 애송이라고 부르기 딱 좋아보였다. 위즈는 영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소심한 남자의 연기를 떠올렸다.

“죄, 죄송합니다.……흐음. 이건 너무 작위적이네. 목소리 톤이 별로야.”

낮은 중저음부터 고음역까지 소리를 낼 수는 있지만, 지금의 얼굴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았다.

“대화는 가급적이면 줄이고, 우물쭈물하면서 상대방이 말을 가로채게 만들어야겠다.”

상대방이 복장 터지게 만들어, 이쪽에서 할 말을 알아서 하도록 만든다.

“나에 대해 조사하는 자들이 있다니, 말을 아끼는 편이 노출도 피할 수 있겠지. 그래. 이 캐릭터로 밀고 나가자.”

위즈는 즉시 빌헬름텔에게 바뀐 모습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 행동하게 될 것인 가에 대해서도. 잠시 후 빌헬름텔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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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큭큭. 답답이 캐릭터라니……그거 재미있는 발상이군요. 빨리 퀘스트를 마치고 가서 어떤 모습인지 보고 싶습니다. 아, 연기에 몰두한 나머지 사람들을 너무 화나게 하진 말아주시길. NPC들 입장에서는 무능력자인 사람이, 답답하기까지 하면 주먹에 힘이 들어갈 수도 있어요. 전투계열 NPC들과는 절대 엮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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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텔의 메시지를 본 위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NPC들의 성격도 제각각이니까.”


◇◇◇◇◇◈◇◇◇◇◇◇◈◇◇◇◇◇◇◈◇◇◇◇◇


여관을 나선 위즈는 엔틸리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중급마족을 물리친 직후의 안도감과,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다. 사람들 중에서는 아직도 염소를 닮은 마족에 대해 떠드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소환한 놈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글쎄. 뭐라고 했지?”

“충격이 심했는지 사기라면서 소리소리 질렀다고 하더라고요. 중급마족이 그런 식으로 엿 먹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역시 세상엔 재미있는 일투성이로구나.”

떠들어대는 쪽은 10대 초반의 남자아이. 그리고 듣고 있는 쪽은 할아버지로 보이는 노인이었다.

하지만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것 치고는 남자아이는 그다지 즐거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사내아이는 시종일관 노인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다 노인의 얼굴이 조금 붉게 상기되자, 노인을 부축해 일으켰다.

“볕이 너무 뜨겁네요. 우리 들어가서 시원한 음료수 마셔요.”

자기 몸보다 큰 체구의 노인이 무거울 텐데도 용케 몸을 가누며 천천히 걸음을 내딛는 사내아이를 보며 위즈는 중얼거렸다.

“저게 말로만 들었던 ‘어른이’라는 건가?”

렌틸의 손녀를 구하는 것에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이제까지는 보지 못했던 모습들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환자를 돌보는 이들은 거의 어린애나 여자들이었다.

“이상하군. 병구완은 힘든 일일 텐데. 남자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위즈는 노모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년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저는 엔틸리움에 막 도착한 이방인입니다.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는데,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말해놓고 위즈는 아차 했다. 원래 우물쭈물 말꼬리를 흐리며 상대를 답답하게 만드는 연기를 할 생각이었는데, 궁금한 마음이 지나쳐 평소처럼 질문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엎질러진 일. 이제 와서 갑자기 소심한 척 하면 상대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 아닌가.

‘어쩔 수 없지. 이 아줌마하고는 정상적으로 대화하고, 다음에 만날 사람과는 계획대로 하는 거야.’

중년 여성이 물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어째서 남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죠?”

“아! 남자들은 힘쓸 일이 생겨서 엔틸리움 밖으로 나갔어요. 이번에 약초가 부족해지는 일이 벌어졌잖아요? 약초강도까지 나타났고요. 그 때문에 이웃나라에서 비축해둔 약초를 지원해주겠다고 했어요.”

“그것 참 다행이네요. 그런데 어째서 남자들이 필요한 거죠?”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이라서, 운반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군요. 말이나 수레를 구하는 시간이 꽤 걸릴 테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그걸 기다릴 시간이 없잖아요.”

“여길 찾으신 분들은 다들 급하니까…….”

“그래서 남자들이 직접 약초를 가지고 오겠다고 나선 거예요.”

“약초를 어디서 받아 오기에 그런 겁니까? 설마 국경에서부터 여기까지는 아니겠지요?”

“당신 말 대로예요. 국경에서 약초를 넘겨받는다더라고요.”

“어느 쪽 국경이죠?”

“엔테롤이요. 거긴 산악지대가 많아서 질 좋은 약초가 많기로 유명하죠. 우리 그이도 크게 기대하고 있답니다.”

위즈는 신성왕국과 엔테롤의 접경 지역까지의 거리를 떠올려보았다.

말을 갈아타고 이동하면 나흘의 거리다. 하지만 도보로 걸어서 이동하면 그 두 배는 걸린다. 무엇보다 짐을 지고 있다면 속도는 더욱 느려진다.

“그 먼 길을……사람이 무거운 짐까지 지고서 이동하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닐 텐데요.”

“그건 알지만 가족들 마음은 그렇지 않죠. 그래도 걱정할 건 없어요. 성기사들이 호위하고 있으니까요. 거기에다가 이건 소문인데요.”

중년여성이 목소리를 낮췄다.

“어느 욕심 없는 치료사가, 적은양의 약재를 가지고도 약을 만들 수 있는 비법을 공개했다고 해요. 다른 나라에서 보내준 약초가 도착할 때까지는 버틸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제 안심이에요.”

“하……하하. 다행이로군요.”

위즈는 중년여성과의 대화를 끝내고 돌아섰다. 그녀가 말하는 욕심 없는 치료사는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런 일로 칭찬 듣는 게 왠지 부끄러워서 위즈는 빠르게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래도 다행이다.’

약재의 부족은 사람들에게서 마음의 여유를 빼앗아갔다. 그런데 자신이 알려준 약성강화법 덕분에 약의 증산이 가능해졌다. 사람들은 다시 여유를 되찾았고, 얼굴엔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내가 로그아웃하기 전 여관에 잠시 들렀던 렌틸이 그랬지.’

약성강화법에 필요한 모안티아는 이미 넘겼다. 그걸로 이미 약재들을 재처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작업을 대량으로 할 수 있는 시설이 없었다. 그 때문에 약의 증산은 늦어지고 있었다.

치료사들이 자신의 집으로 가서 약을 조제했고, 신전에서도 이를 도왔다.

그래서 실제 약이 나오기 시작하는 건 내일 아침부터다.

‘병증을 완화시키는 약은 어제부터 공급이 끊겼다.’

이 역시 내일 아침이 되어야 해결된다. 위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정오가 되려면 한참 멀었다. 내일 아침까지 남은 시간이 까마득하다.

‘그전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겠어.’

시장으로 향하던 위즈는 신전에서 성직자들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응? 무슨 일이지?”

성직자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방에 흩어졌다. 주택가에도 성벽 근처에도.

게다가 시장까지.

마침 방향이 같았으므로 위즈는 그들의 뒤를 쫒았다. 시장에 도착한 성직자들은 일정 간격으로 자리를 잡고 섰다. 상인들은 그런 성직자들을 보고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 하던 대로 물건을 진열하고 창고를 정리했다.

‘포만감이 떨어졌으니 뭐라도 사먹으면서 물어봐야겠다.’

위즈는 사과를 두어 개 샀다. 두 개는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하나는 바지에 대충 문질러 닦아서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육즙이 입안에 가득 찼다. 수면부족으로 흐늘거리던 몸에 잠시 동안이나마 활기가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사과를 하나 다 먹어치운 위즈는, 새로이 사과를 꺼내 절반정도를 먹었다. 그리고 이제야 발견했다는 듯, 성직자들을 가리켰다.

“저 사람들은……아까부터 왜……?”

“성직자들? 치료사들이 약을 증산하느라 바쁜 모양이요. 어제까지만 해도 간간히 왕진 다니더니 오늘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은 걸 보면.”

“저들이……환자를……?”

“성직자들이 환자를 돌볼 수밖에 없질 않소.”

고작 두 개의 문장을 사용했을 뿐이지만 위즈는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단어수를 줄이고 말을 흐리다보니, 하고 싶은 말도 못하게 되지 않는가.

‘아우…짜증나. 역시 소심한 척하는 건 그만두는 게 낫겠어.’

위즈는 평소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성직자들은 외상치료에 특화된 게 아닌가요? 여기 온 환자들은 대부분 병에 걸린 사람들인데.”

“안수치료라면 병을 치료하진 못해도, 병증을 완화시키는 것은 가능한 모양이요.”

과일가게 주인의 말대로라면, 신전 측에서는 시간을 벌기 위해 성직자들을 내보냈다는 소리다. 하지만 신전에서 안수치료가 가능한 모든 인원을 내보내도 모든 환자들을 커버할 수는 없다.

애초에 안수치료가 가능한 성직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엔틸리움같은 대도시에 위치한 신전이라면, 그 수가 많아봐야 200명을 넘지 못한다. 반면 이들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수천 명이다.

‘이래서는 내일 아침까지는커녕, 밤까지도 못 버텨.’

간신히 진정시켜놓은 사람들이 다시 무법자로 돌변할지 모른다.

위즈는 입맛이 뚝 떨어져 먹던 사과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어버렸다.

“방법이 없을까?”

시장을 빠져나오던 위즈는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 가운데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오더니, 환자와 보호자들이 만족한 얼굴로 돌아갔다.

“뭘까?”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성직자로 보이는 여성이 있었다.

NPC가 아닌 유저. 따라서 엔틸리움 곳곳에 배치된 성직자처럼 안수치료 능력은 없다. 안수치료는 레벨100을 달성해야 손에 넣을 수 있는 스킬. 위즈가 보기엔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진 못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손에 들고 있는 작은 나무상자다.

직육면체인 상자의 맨 윗부분에는 길고 좁은 구멍이 파여 있었다. 어떻게 보면 투표를 할때 사용되는 선거함을 닮았다.

‘하지만 성직자가 뜬금없이 선거함을 들고 다닐 리 없지. 그렇다면 저건?’

위즈가 지켜보는 가운데 성직자 유저의 앞에 환자가 섰다. 환자는 호주머니를 뒤져서 동전을 끄집어냈다.

“은화 5개면 10시간동안 병의 진행이 늦춰진다고 했지요?”

환자의 물음에 성직자 유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환자는 동전을 꼼꼼하게 세어 정확히 5개의 은화를, 나무상자에 집어넣었다.

“beadsman, 루시엔. 은화 5개 확인했습니다.”

그녀가 나무상자를 높이 쳐들자, 머리위로 고리 형태의 빛이 떠올랐다.

“오오! 신이시여! 여기 당신께 바치는 공물이 있나이다! 병마에 시달리고 지친 이들에게, 평안을 주십시오!”

그녀가 말을 마치자 빛의 고리는 돈을 낸 환자의 몸에 스며들었다.

“어떤가요?”

“몸이 가벼워진 게 한결 좋소.”

“도울 수 있어 다행입니다.”

그 모습을 본 위즈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렇군! beadsman이라면 굳이 안수치료가 아니어도 사람들을 진정시킬 수 있어. 하지만…….’

beadsman에게 치료를 받으려면 돈을 내야 한다. 치료사라면 몰라도 성직자인데 치료에 앞서 돈을 내야 한다. 그것도 완치가 아닌 대증요법 수준의 치료를 받으면서 말이다.

가격도 굉장히 비싸다.

치료사들이 총동원되어 증산중인 ‘병증을 완화키는 약’은, 그 가격이 은화 한 닢이다. 헌데 그 다섯 배나 되는 돈을 받아먹으면서, 고작 10시간 동안 병의 진행이 되지 않게 해준다면 누구라도 바가지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봐! 성직자가 되어서 부끄럽지도 않나! 신께 귀의한 자가 어찌 돈을 밝힌단 말이냐!”

“저는 beadsman입니다. 헌금이 없으면 신께서는 힘을 빌려주시지 않습니다.”

“돈이 없으면 안 된다고? 그런 건 신도 아니야!”

“내가 알기로는 성직자가 되기엔 재능이 모자란 사람이 beadsman이 된다더군. 되도 않는 성직자 흉내는 그만 내고 때려치워라!”

“맞다! 때려치워라!”

사람들이 비난해도 beadsman은 꿋꿋하게 서 있었다.

“이봐! 내말이 말 같지 않…….”

beadsman 유저의 어깨를 짚던 남자는, 자신의 손을 붙잡은 건틀릿을 보고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너무나 잘 닦여서, 손가락 관절 하나하나가 번쩍거리는 건틀릿. 이런 걸 착용하는 사람은 성기사 뿐이다.

“무슨 일인가?”

성기사의 고압적인 말투에 남자는 꼬리를 말았다.

“아니……그게…저…너무 비싼 것 같아서, 에누리는 안 될까 해서요. 헤헤헤.”

성기사가 고개를 돌렸다.

“젊은 beadsman이여. 헌금을 깎을 수도 있소?”

“그건 안 됩니다.”

“그렇다는군. 원래대로라면 디바인 파워는 감히 인간이 다루지도 못할 지고의 힘. 하지만 신께서는 그런 힘을 우리에게 내려주셨다. 그 대가가 번쩍이는 쇳조각이라면 아주 싸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습죠! 그렇습죠!”

남자가 굽신거리자 성기사는 남자를 놓아주고 자리를 떠났다. 성기사가 사라진 뒤, 그 누구도 beadsman을 비난하지 않았다. beadsman은 당당한 성직자의 한 종류.

당연히 돈을 밝힐 수밖에 없는 특성은 여기 모인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금 전의 남자는 beadsman을 비난했다.

‘beadsman이 뭔지 몰라서 그런 건 아닐 거야. 아마도 그 남자는 돈이 부족했겠지. 그래서 생떼를 쓴 것뿐.’

병에 걸리면 치료사를 찾는다.

하지만 그 치료사는 지금 약의 증산문제로 바쁘다.

그렇다면 꿩 대신 닭. 성직자를 찾는다.

하지만 성직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렇다면 인기 없는 beadsman을 찾는다.

그렇지만 돈이 없는 사람은 그마저도 불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약’이라는 자원의 부족은, 다시금 사람들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내일 아침까지만 버틸 수 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아침까지만 버틸 수 있다면……·.’

몰려있는 인파를 빠져나온 위즈의 눈에 약방이 보였다. 약재상과는 달리 파리만 날리고 있다. 이미 만들어진 완제품을 파는 곳이다 보니 가장 먼저 약이 고갈되었던 것이다.

위즈는 홀린 듯이 약방으로 걸어갔다. 손님이 찾아왔음에도 약방주인은 한가롭게 차를 끓여 마시고 있었다.

진열대에 놓인 약병을 둘러보던 위즈는, 상당수의 약이 남아 있다는 것에 놀랐다.

‘어째서 팔리지 않았을까.’

종이로 써 붙인 약의 효능을 살피자, 의문은 곧 해결되었다.

단순한 감기약과 소화제. 그리고 단순한 진통제나 수면제처럼 일상적으로 쓰이는 약들이었다. 위중한 병의 치료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위즈는 이 약들을 만들 재료를 가져다가, 당장 필요한 약을 만들었다면 참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완제품으로 만들어버린 것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다.

‘가만있자……약을 만드는데 들어간 재료 중 몇 가지는, 중증환자의 치료에 사용하고 있는 것들이야. 감기약이라 해도 그런 성분은 여전히 남아 있어.’

위즈는 스킬창을 열었다. 오리지널 스킬 카테고리에 ‘만능조제’가 있었다.

만능조제는 어린 아쿠에리언을 구해낸 보답으로 받은 스킬북으로 배운 것이다.

사샤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 아쿠에리언이 만든 오리지널 스킬.

이 스킬을 이용하면 기존의 조합된 결과물을 다시 섞어서 특별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잘하면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몰라.’


◇◇◇◇◇◈◇◇◇◇◇◇◈◇◇◇◇◇◇◈◇◇◇◇◇


위즈는 약방을 돌면서 많은 약들을 구입했다.

감기약, 변비약, 설사약, 소화제, 진통제 등등. 전부 팔리지 않아 먼지만 쌓여가던 것들이다. 하지만 무조건 안 팔리는 것만 골라 구입한 건 아니다. 위즈가 구입한 약들은, 반드시 중병의 치료에 사용되는 성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구한 위즈는 서둘러 여관으로 향했다.

1분이라도 빨리 조합해서 결과물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관 앞에 선 위즈는 걸음을 멈췄다. 입구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노인과 젋은 여성이 뒤에, 그 앞에는 장정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남자를 본 위즈는 그들이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차렸다.

‘베베노, 브롬, 아르길. 모두 내가 숲에서 구해낸 자들이야. 왜 찾아온 거지? 그보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야?’

그들과 만났을 때는 여성아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카무플라주로 다시 모습을 바꾼 상태.

‘성별부터 겉모습까지, 모든 게 바뀌었으니 그냥 모른 체 지나가자.’

위즈는 그들을 지나쳐 여관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뒷줄에 서 있던 노인이 위즈를 불러 세웠다.

“총각. 혹시 이 여관에 묵고 있는감?”

“네……마, 맞는…데에…요오…….”

위즈는 혼신의 힘을 다해 말을 더듬고 말끝을 흐렸다. 이들에게 붙잡혀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떨쳐낼 생각을 했다.

‘나는 만능조제를 시험하러 가야한단 말이다.’

노인이 그런 위즈의 마음을 알 리 없었다.

“혹시 이 여관에 아처복장을 한 아가씨가 묵고 있나?”

“저, 저는…이제……마, 막 도착해서 잘…….”

“여관 주인에게 물었더니, 요즘 수상한자들이 손님들의 정보를 캐묻는다면서 내쫒았네. 그래서 오가는 손님들을 붙잡고 물어보는 거라네.”

“무, 무슨 볼일이…….”

“그 아가씨에게 아들놈을 데려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왔네. 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군. 여관주인 말마따나 생글생글 웃는 놈들이, 그 아가씨에 대해 캐묻고 다니거든.”

노인의 말을 들은 위즈는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그럼 노인장도 내게 관심 끊으쇼. 그게 날 위하는 거야!’

위즈는 슬쩍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관 근처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 캐묻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직후라, 누군가 숨어서 엿보는 듯한 기분도 든다.

‘탐지를 배웠다면 좋았을 텐데.’

문득 위즈는 자신을 바라보는 노인의 시선을 느꼈다. 노인은 위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위즈는 고개를 돌렸다.

“그, 그럼……전…이, 이만…….”

여관으로 들어가려는데 노인이 다시 위즈를 불렀다.

“아, 아직……볼일이……?”

노인은 자신의 아들에게 손짓했다.

“내가 만든 호박파이 가져오너라.”

“여기 있습니다. 아버지.”

산적두목 같은 인상의 떡대가 공손하게 바구니를 바쳤다. 노인은 바구니를 위즈에게 내밀었다.

“이, 이건……?”

“원래는 내 아들놈 구한 아가씨 줄려고 준비한 건데, 만나지 못하니 어쩔 수 없지. 꿩 대신 닭이라고 총각이 가져가서 먹게.”

“어째서……저, 저한테?”

“그 아가씨랑 눈 색깔이 닮았어. 그래서 마음에 들어서 주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게.”

강제로 떠넘기듯이 바구니를 내어준 노인은 손을 털었다.

“가자. 못난 아들놈아. 은인은 나타나지 않을 모양이다.”

노인과 산적두목 같은 부자(父子)가 떠나자, 다른 사람들도 여관을 벗어났다. 위즈는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눈치 챘어. 모습을 바꿨는데도 동일인물이라는 걸 알아차렸어.’

노인은 일부러 눈 색깔을 언급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은 부분에서 들통 난 것이다.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겠군.’


작가의말

연참 8일째.




2014.11.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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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121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2) +3 14.06.26 696 24 30쪽
123 120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1) +2 14.06.17 1,106 20 31쪽
122 119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0) +2 14.06.14 682 18 26쪽
121 118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9) +2 14.06.09 1,603 91 28쪽
120 117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8) +2 14.06.05 974 31 23쪽
119 116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7) +2 14.05.31 1,615 96 23쪽
118 115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6) +1 14.05.30 970 22 25쪽
117 114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5) +3 14.05.29 2,017 39 31쪽
116 113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4) +2 14.05.28 1,236 32 29쪽
115 112화...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3) +8 14.05.27 1,909 59 30쪽
114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2) +3 14.05.26 810 23 23쪽
113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1) +2 14.05.24 1,954 40 25쪽
112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0) +4 14.05.23 1,838 33 23쪽
111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9) +3 14.05.22 1,721 44 24쪽
110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8) +5 14.05.21 1,660 60 22쪽
»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7) +4 14.05.20 2,274 40 24쪽
108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6) +5 14.05.19 1,634 50 25쪽
107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5) +6 14.05.17 1,089 32 30쪽
106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4) +2 14.05.16 1,785 33 25쪽
105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3) +2 14.05.15 2,361 130 26쪽
104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2) +2 14.05.14 1,060 23 25쪽
103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1) +2 14.05.13 928 28 25쪽
102 99화...5.혼돈을 비추는 거울 (10) +2 14.05.12 1,548 34 29쪽
101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9) +3 14.05.07 1,749 106 19쪽
100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8) * +2 14.05.03 1,527 34 34쪽
99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7) +4 14.05.01 1,135 22 25쪽
98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6) +2 14.04.29 1,003 30 23쪽
97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5) +2 14.04.25 1,529 29 27쪽
96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 +1 14.04.24 1,214 22 25쪽
95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 +2 14.04.21 1,135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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