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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또 다른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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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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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24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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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4.

렌틸이 중급마법사가 된 건 최근의 일이다. 따라서 그의 연구실은 인적이 드문 탑의 구석 공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연구실의 문짝이 활짝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렌틸! 어디 있나! 렌틸!”

톨네스가 목청을 높였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맨 나중에 들어온 위즈는 연구실을 둘러보았다. 연구실이라 하니 단순히 넓은 방을 떠올렸는데 그런 곳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법사의 탑에서 가장 작은 방이라 해도 운동장만한 크기. 게다가 책장과 나무상자가 들어차 시야확보도 힘들다.

렌틸의 연구실은 들어오자마자 쉽게 사람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모두 흩어져서 탐지를 써라!”

“하지만 탐지를 쓰면 연구실에 비치된 시약류 물질들이 변형할 텐데…….”

“출력을 낮춰 쓰면 될 거 아니냐!”

“넵! 마스터!”

마법사들이 넓게 흩어졌다. 위즈는 마력을 보는 눈을 사용했다.


<‘마력을 보는 눈’이 시전 되었습니다. 초당 1의 마력이 소모됩니다.>


연구실 곳곳에서 발생한 마력의 파동이 번져나갔다. 마법사가 탐지를 사용할 때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 자주색 등등, 마력의 색은 제각각이었지만 그것들은 한 가지 특징을 공유하고 있었다. 파문이 길게 유지되지 못하고 흩어져버린다는 것.

이미 여러 마법사들의 탐지를 겪어본 위즈에겐 이 파문이 지나치게 약하게 느껴졌다.

‘출력을 낮춘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처한 상황에 따라 같은 스킬이라도 위력을 조절하여 사용한다. 완벽하게 스킬을 이해하고 컨트롤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진짜 달인의 경지란 이들을 두고 하는 얘기였다.

“찾았습니다! 5번 책장 끝입니다!”

그 말에 연구실을 맴도는 모든 파동이 모습을 감추었다. 이미 마법사들은 분주하게 움직여 문제의 장소를 포위하고 있었다. 위즈 역시 톨네스를 따라 책장 끝을 지났다.

“이자가 렌틸?”

드문드문 검버섯이 피어난 노인이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를 책장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이 노마법사의 양다리는 책상다리모양으로 접혀 있었고, 두 손은 양 무릎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인기척을 내며 다가오는데도 두 눈은 열리지 않았다. 잠에 빠진 게 아니라면, 이 자세는 마력을 모으는 명상의 자세.

하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게 아니란 것쯤은 쉽게 알 수 있다.

호흡에 따라 오르내릴 흉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바닥에는 굴러다니는 빈병.

그리고 손에 꼭 쥐고 있는 종이.

톨네스는 빈 유리병을 주워들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나키투스 냄새가 나는군!”

“그건 마력을 태우는 작용을 하는 시약의 재료 아닙니까?”

“마법사가 복용하면 마력을 태우면서 독성물질을 만들어낸다. 마력을 사용할수록 독성물질이 늘어나서 결국엔 사망하고 말지. 나키투스 냄새가 거의 날아 가버린 걸로 봐서 이걸 마신지 1시간은 훨씬 지났을 것 같군.”

톨네스의 말에 따르면 이걸 마시고, 일부러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며 마력을 사용했다는 뜻이 된다. 그리하면 독소발생이 빨라져 명을 재촉하게 될 것임은 렌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생존확률을 낮춰 얻을 것은 확실한 죽음.

애초부터 렌틸은 적당히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대체 무엇이 자네를 이렇게 만들었나?”

렌틸의 손에서 종이를 끄집어내 펼친 톨네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눈이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이럴 수가!”

톨네스는 곧바로 옆의 마법사에게 종이를 넘겨주고는 소리 내어 읽게 했다.

둥둥.


§§§§§§§§§§§§§§§§§§§§§§§§§§§§§§§§§§§§§§§§§§§§§

[렌틸의 유서]

나는 살만큼 살았다.

삶에는 미련이 없다.

그런 내가 지금껏 살아오고 있는 건, 나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다.

바로 운명을 거역하는 것.

알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손녀는 병에 걸려있다.

모두가 고개를 내젓는 불치병. 나는 불치병이라는 단어가 싫다.

마치 병에 걸린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만 같은 냉혹함이 끔찍해서이다.

불치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미래가 죽음으로 고정되어버리는 것 같지 않은가.

이게 운명이라면 난 그 운명을 거스르고 싶었다.

내가 마법사의 탑에 들어온 것은 이 때문이었다. 다양한 비전을 접하다보면, 손녀를 구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노력 끝에 손녀를 위한 약을 조합할 수 있었다.

비록 완치는 시킬 수 없지만, 발작을 막고 천수를 누리게 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손녀를 위해 매년 약을 조합해왔다. 약효는 1년밖에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도 그래야 했는데……재료 조달에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바하르칼의 망종 놈들이 마법시약의 재료를 싹쓸이 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바하르칼의 용병마법사에게 약초를 사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이들은 돈 대신 다른 것을 요구했다.

그래. 다들 알고 있다시피, 전쟁에 앞서 링 오브 언밸런스를 사용하게 만들라는 것이었다.

난 그에 응했고 약초를 받을 수 있었다.

다들 레미라를 지키려 안간힘을 쓸 때, 나는 손녀의 약을 만들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전쟁 중인 걸 감안하면 약의 도착이 늦어지는 건 당연했으니까.

나는 완성된 약을 배편으로 부쳤다. 마력과 반응하지 않게 잘 밀봉해서.

그리고 안심했다. 올해도 손녀가 무사할 거라 믿고서.

하지만 레미라를 출발한 배는 도중에 소식이 끊겼다.

레미라에 바하르칼 용병들이 상륙한 날.

나와 거래했던 마법사가 약병을 들고 찾아왔다. 그는 풍랑에 휩쓸린 배의 잔해에서 발견한 거라면서, 돌려받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것이라 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지시대로 부상자들에게 마비독을 살포했다.

그런 짓까지 하고 나니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레미라 마법사 모두에게 쫒기는 몸이 될 테니 살아도 산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래도 손녀에게 약을 전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되었다.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약제사가 있으니, 조합법과 돈을 남기면 내가 죽은 뒤에도 손녀는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어리석은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자, 잇페인이 내게 넘겨준 약은 그가 불어넣은 마력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당장 약초를 구할 길도 막혔다. 그는 보란 듯이 여분의 약초가 든 상자를 내 앞에서 불태웠다.

그는 손녀 한 사람과 레미라 섬의 많은 목숨을 저울질 한 대가라고 웃으며 떠나갔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너무도 무서워서 그에게 덤벼들지도 못했고, 사정을 설명하며 탑의 마스터들에게 매달리지도 못했다.

나는 패배했으며,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내 잘못으로 인해 레미라는 위험해질 뻔했으며, 그 죄의 대가로 손녀는 고통스럽게 죽어갈 것이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손녀의 저승길이 외롭지 않게 하는 것뿐이다.

날 이기적이라 욕하고, 내 시체에 침을 뱉어라. 나는 그래도 싼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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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렌틸님은 바하르칼의 용병마법사에게 협박을 받아서 그런 짓을?”

“게다가 손녀의 목숨까지 위험해졌군요.”

유서의 내용에 따르면 잇페인은 약초를 불태우고, 완성된 약을 일부러 변질시켰다.

한마디로 렌틸을 가지고 논 것이었다.

위즈는 잇페인이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렌틸을 농락한 것에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이런 의문을 가진 건 지금이 처음은 아니다.

더 오션에서 잇페인과 싸운 횟수는 위즈가 단연 1위. 그로 인해 받은 불이익과 피해도 가장 컸다. 정신공격은 그만큼 큰 상처를 남겼다. 이때부터였다. 잇페인이라는 보스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 건.

이에 대해 위즈는 끊임없이 생각해왔다. 그러나 알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렌틸이 겪은 일을 듣고 나니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잇페인의 이름은 그 자체로 ‘고통을 먹는 자’.

말 그대로 고통을 식량이라고 생각하니 의문은 쉽게 풀렸다.

인간의 지능은 의식주와 관련된 것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옷을 걸치는 건, 명예니 도덕이니 하는 것에 구애받기 시작했다는 뜻. 음식을 먹는 건 생존을 위해, 거주지 문제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그중에서도 인간이 문명을 일으키며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농사를 지으면서부터다.

즉, 인간은 먹고 사는 게 최우선 순위인 것이다.

이를 잇페인의 경우에 대입하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

세상에 행복과 기쁨이라는 독초대신, 고통과 불행이라는 꽃을 주식으로 삼는 악인(惡人).

‘내 경우에는 마음속의 성전을 통해 뿌리쳤다. 하지만 내가 잇페인의 뜻에 호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최후의 순간에는 날 배신해 절망하게 만들었을 거야.’

잇페인의 즐거움은 타인의 불행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걸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는 걸 렌틸의 유서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이것이 고통을 먹는 자-잇페인의 정체.

‘용서할 수 없는 자야. 하지만……잇페인의 데이터는 잠겨버렸으니 나올 일은 없어. 설사 다시 등장한다 해도 데이터를 왕창 뜯어 고친 뒤겠지.’

위즈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잇페인을 처단할 기회는 없다. 게다가 렌틸은 이미 죽어서…….

“응?”

위즈는 렌틸의 시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렌틸의 몸에 짙은 갈색의 마력이 은은하게 어려 있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며 투명하게 변해갔다.

“톨네스님?”

“뭔가 위즈.”

“죽은 사람에게 마력이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까?”

“몇 분도 안 되어 사라져야 정상이지.”

“그렇다면 렌틸이란 사람은 아직 살아 있군요!”

“뭣이?”

톨네스가 손을 뻗어 맥을 짚었다.

“맥은 뛰지 않는다. 숨도 쉬지 않아. 자네가 잘못 본……음?”

돌연 톨네스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 모습을 다른 마법사들이 궁금해 했다.

“무슨 일입니까?”

“쉬잇!”

톨네스는 눈을 감고 자신의 마력을 렌틸에게 밀어 넣었다. 미미하게 반탄력이 발생했다. 명색이 중급마법사인 렌틸이다. 그 몸에 직접 타인의 마력을 밀어 넣었으니 당연히 반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건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다. 죽은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즉, 지금 이렇게 반탄력이 발생했다는 건 렌틸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 된다.

“나키투스의 독성을 해독해야겠다! 해독제를 만들어라! 어서!”

“살아 있습니까?”

“그렇다! 맥이 느려져서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 했구나! 한시가 급하다! 서둘러라!”

“10분만 기다려 주십시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렌틸은 지금 당장이라도 죽게 생겼는데!”

“나키투스라는 약재에서 약성을 우려내려면 최소 8분은 걸립니다. 거기에 배합 시간까지 계산하면 아무리 빨라도 10분 이내로 해독제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일단 만들어라. 어떻게든 버텨보겠다.”

톨네스는 정화주문을 준비했다. 렌틸의 몸에 들어있는 독소의 양을 줄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정화주문을 사용하자마자 렌틸은 코피를 쏟아냈다.

“오히려 역효과인가.”

주문을 통해 마력이 쏟아져 들어오자, 정화되는 양보다 새로 생겨나는 독소의 양이 늘어난 탓이었다. 조금 전 톨네스가 탐색삼아 밀어 넣었던 마력도 여기에 한몫했다.

뒤늦게 사태를 깨달은 톨네스는 뒤로 물러났다. 손을 대면 댈수록 상황은 악화되기만 할뿐이었다.

“이를 어쩐다.”

마법사들은 다들 약초를 주물럭거리는 사람들이라, 다들 어느 정도의 의학지식은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독에 관한 학문은 전문분야에 해당한다. 그러니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아니지. 독이라면 나도 할 수 있는 게 있으니까.’

위즈는 자신의 발치에 와 뒹구는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아직 밑바닥에 악취가 나는 액체가 몇 방울 남아 있는 게 보였다.

‘독은 확보했고. 이번 전쟁에서 유저들에게 받은 해독제도 조금 남아 있을 거야.’

위즈는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와 조제도구를 찾았다. 비록 수준이 낮긴 하나 위즈 역시 조제스킬을 가지고 있다. 한 손보다 두 손이 거드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어디보자. 해독제는 모두 8개. 이건 하급이니까 나키투스인가 하는 독에는 안 들을 거야. 그렇다면 약성을 높이는 쪽으로 만들어야겠군.”

위즈는 중급해독약의 조제법에 따라 해독제를 두 개 넣고, 필요한 약제를 함께 갈았다. 그 과정은 느릿느릿하게 이루어졌다. 1그램이라도 오차가 없도록 조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위즈가 원하는 시스템메시지가 떴다.


<숙련조합의 효과로, 중급해독제의 지속시간이 10분 증가합니다.>

<숙련조합이 성공했습니다. 기존의 중급해독제보다 효력이 20% 상승합니다.>


“바로 이거야.”

위즈는 유리병에 조금 남아 있던 독을 핥았다.


<중독되셨습니다.>

<1시간동안 독성을 억누릅니다. 서둘러 해독제를 드십시오.>


“이제 내가 만든 중급해독제가 듣는지 안 듣는지를 알아볼 차례다.”

서둘러 막자사발에 들어 있는 중급해독제를 들이킨 위즈는 머리만 벅벅 긁었다. 엉뚱한 문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든 건 중급해독제가 아닙니다.>

<‘해독제를 해독시키는 약’을 제조하셨습니다.>

<이 약을 섭취할 경우 30분간 어떤 해독제도 듣지 않습니다.>

<제조 레시피가 저장되었습니다.>


“어이구…지금 필요한 건 이게 아닌데…….”

이미 3분이나 되는 시간을 날려버렸다. 위즈는 초조해지지 않고 다시 중급 해독제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하급 해독제를 3병이나 넣었다. 그리고 다른 약초도 더욱 곱게 갈아 넣었다. 그렇게 완성된 중급해독제를 들이마시자 기다리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중급해독제를 사용하였습니다.>

<나키투스의 독성을 감소시켰습니다.>

<‘해독제를 해독시키는 약’의 효과로 인해 중급해독제의 효과가 사라집니다.>

<나키투스의 독성은 전용 해독제로만 완벽하게 중화시킬 수 있습니다.>


“좋아! 이거라면 시간은 벌어줄 수 있겠어!”

위즈는 같은 방식으로 중급해독제를 만들어 톨네스에게 달려갔다. 역시나 해독제는 완성되지 않은 상태다. 위즈는 자신이 만든 중급해독제를 톨네스에게 건넸다.

“이걸 써보세요.”

약병을 바라보던 톨네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중급해독약? 설마 자네가 만든 건가?”

“네. 일단 제게 실험했으니까, 약효는 틀림없을 겁니다. 적어도 저분이 해독제를 만들 때까지는 버틸 수 있게 해줄 거예요.”

“잘 쓰겠네.”

톨네스는 위즈에게 받은 중급해독약을 렌틸에게 먹였다. 그러자 렌틸의 머리 위에 붉은 색의 막대그래프가 생겨났다.

치료사를 직업으로 택한 유저들에게만 보이는 것이었다.

굳이 친구신청을 하지 않거나 파티를 맺지 않아도, 치료사가 치료를 시작하면 막대그래프가 생겨난다. 치료를 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편의를 봐주기 위해 도입된 시스템이었다.

이미 팬 사이트에서 관련정보를 수집했기에 위즈는 놀라지 않았다.

위즈가 지켜보는 가운데 붉은 색의 막대그래프가 오른쪽에서부터 점차 초록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위즈가 알기로 초록색이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으면, 캐릭터든 NPC든 죽는 걸로 알고 있었다.

붉은 색은 독과 같은 상태이상, 검은색은 그냥 HP부족. 그리고 초록색은 정상을 나타내는 지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초록색은 손톱만큼 밖에 없었어. 그런데 지금은 1/10수준까지는 회복될 것 같아.’

렌틸을 해독시키고 나면 그 다음은 자신 차례다. 독의 섭취량이 적다지만 여전히 위즈는 중독 상태. 제대로 된 전용 해독제는 위즈에게도 필요했다.

‘바다에서 잇페인을 상대할 때도 그렇고……어째 해독제 레시피만 늘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

위즈는 책상에 몸을 기댔다. 달칵 소리가 나며 액자가 넘어갔다. 몸을 기대면서 손길에 채인 모양이었다. 위즈는 손을 뻗어 뒤집어진 액자를 집어 들었다. 더 오션의 세계엔 사진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액자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초상화였다.

활짝 웃고 있는 소녀의 초상화.

목탄을 사용해 그려진 흑백의 소녀는 비록 그림일 뿐이지만, 종이 바깥에까지 생기가 뻗어 나올 것만 같았다.

이곳이 렌틸의 연구실임을 감안해본다면, 이 소녀가 누구인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아이가 손녀로군.”

“으음…….”

위즈는 초상화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나키투스의 진짜 해독제를 마신 렌틸이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문득 위즈는 렌틸이란 노인에게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누나를 잃게 되면 나 역시 자살을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나약한 마음을 품기 전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하지 않겠어?’

더 오션을 하는 것도 그래서다. 현실세계에서 S랭크 용병이 되어 아우터라인을 헤매도 성과는 없었고, 셸터를 이용한 해킹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니 하다하다 못해 게임으로 사람을 구할 생각까지 한 것이다.

‘렌틸, 당신은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

위즈는 주저앉아있는 렌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마다 위즈의 키가 줄어들며 우둑우둑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어느덧 위즈는 렌틸의 손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같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연령대였다. 초상화속의 소녀는 10대였지만, 위즈의 얼굴은 30대의 성숙한 모습을 풍기고 있었다. 갑자기 모습을 바꾼 위즈를 보고 톨네스는 놀란 눈치였으나,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선선히 물러났다. 그러면서 주변의 마법사들에게 뒤로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음…….”

렌틸은 초점이 안 맞는 눈을 들어 위즈를 올려다보았다. 막 깨어난 직후라 그런지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위즈를 올려다보던 흐리멍덩한 눈은 곧 총기를 되찾았다.

“너, 너는!”

위즈는 그 상태에서 50대의 얼굴을 만들었다. 볼에 살이 차오르고, 헤어스타일도 억척스러운 아줌마의 모습이 되었다.

“아…아아…….”

렌틸이 입을 벌리고 달싹거렸다. 위즈의 얼굴은 계속 세월을 품고 노쇠해져갔다. 허리에서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우드득 울렸다. 등이 굽으며 어깨 폭이 좁아졌다. 얼굴의 살이 빠져나가며 주름이 지고, 탄력을 잃은 피부는 늘어졌다. 눈꺼풀이 늘어지며 두 눈은 뜬 듯 감은 듯한 상태가 되었다. 머리카락은 삽시간에 하얗게 새어 렌틸의 것처럼 푸석푸석하게 변했다.

“아이린!”

렌틸은 손녀의 이름을 부르며 벌떡 일어섰다.

“아이린!”

렌틸은 손녀의 모습을 향해 다가가며 손을 뻗었다. 위즈는 카무플라주를 풀어버렸다. 왜소한 늙은이의 모습이 크게 부풀며 험상궂은 사내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쭉 찢어진 위즈의 눈매가 더욱 좁혀졌다. 입매는 꾹 다물려졌고, 코에서는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지금 보니까 당신이 손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알겠어. 그런데…….”

안 그래도 허스키한 중성음이 갈라지며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위즈는 한발자국을 내딛었다. 힘 있게 진각을 찍자 연구실에 쿵 소리가 울렸다.

“당신이 손녀를 사랑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뭐…뭐?”

손녀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모습을 바꾸어 덩치 큰 장정이 된 것도 혼란스러운데, 그 당사자가 다짜고짜 손녀를 들먹이며 들이치자 렌틸은 정신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위즈는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번에도 역시 진각을 실었다. 렌틸은 뒷걸음질 쳤다.

덩치 큰 사내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도 대단한 압박감을 주는데, 내딛는 걸음마다 쿵쿵 거리니 렌틸 같은 노인은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는 본인이 마법사라는 사실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당신은 손녀를 사랑하지 않아. 그렇지?”

“무, 무슨……으헉!”

렌틸의 등이 책장에 닿았다. 사실 렌틸은 앉아 있던 곳에서 그리 멀리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당연히 원래 자리로 되돌아온 것이다. 등짝으로 차가운 한기가 들어오고, 눈앞에는 괴인이 험상궂은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게다가 음독자살을 시도한 사실까지 떠올리자 렌틸은 정신적으로 그로기 상태가 되고 말았다.

“대, 대체 내게 원하는 게 뭔가!”

“당신이 포기한 손녀. 어차피 죽을 거라면 내게 줘. 제물로 쓰거나 실험재료로 소모하면 딱 좋겠네.”

그러자 흔들리던 렌틸의 눈동자에 떨림이 멈췄다.

“지금 뭐라고 했나?”

“듣고 싶은 단어만 알려주지. 제물, 실험재료.”

“이놈!”

렌틸이 품에서 매직스틱을 꺼내 겨누었다. 위즈는 렌틸의 팔꿈치를 건드려 매직스틱이 빗나가게 하고는 곧장 달려들어 짓눌렀다. 위즈와 책장 사이에 낀 렌틸은 옴짝달싹도 못하고 몸부림쳤다.

“이거 놓지 못하겠느냐!”

“놓지 않으면? 응? 죽일 거야? 왜? 왜 화가 나는데? 어차피 손녀를 구하지 못한다고 포기했던 게 아닌가? 그래서 당신도 죽고 손녀도 죽는 길을 택한 게 아니었나?”

위즈는 렌틸의 손목을 후려쳐 매직스틱을 버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렌틸의 멱살을 쥐고는 책상까지 끌고 왔다. 위즈는 손을 뻗어 초상화가 담긴 액자를 움켜쥐었다.

“자! 손녀에게 직접 말해봐! 할아버지와 손녀가 함께 죽는 해피엔딩을 바랐다고!”

“으끅끅끄으…….”

렌틸이 무너져 내렸다. 위즈는 슬그머니 그의 앞에 초상화를 떨어뜨려놓고 한 걸음 물러났다. 렌틸은 초상화를 가슴에 끌어안고 오열했다.

“미안하다 아이린! 할애비가 잘못했다!”

렌틸의 애끓는 목소리가 연구실을 울렸다. 위즈는 그때서야 톨네스를 돌아보았다. 톨네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중독 상태에서 막 깨어난 사람을 다그치더니 기어코 울려버렸다. 뭐라고 말을 붙일 상황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렌틸이 진정하면 그때는 톨네스가 나설 것이다. 위즈는 그전에 할 말만 마치고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렌틸. 당신이 죽어버리면 혼자 남겨질 손녀는 어떨지 생각해보셨어요?”

“…….”

“나이 먹고 죽을 때가 되어 죽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독을 마시고 죽었다는 걸 알면 손녀는 무척 슬퍼할 거예요.”

“…….”

“난 이방인이에요. 이 세계가 아닌 바깥세계에 내 누나가 있어요. 그런데 그 누나가 제멋대로 날 구하고는 자신은 깜깜한 어둠속에 갇혀버렸어요. 누나를 떠올리면 난 우울해져요. 왜난 이렇게 무력할까 하고요. 그러니 렌틸의 기분도 이해는 가요. 그렇지만……렌틸의 선택은 분명 잘못되었어요. 난 가족을 끔찍이 여기는 패밀리 맨이 아니지만, 그래도 가족이란 이런 거다 하고 생각하는 게 있어요.”

렌틸의 눈이 위즈를 향했다.

“그게 뭐지?”

“가족은 버리는 게 아니에요. 지켜주는 거죠.”

렌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액자를 뒤집어 뚜껑을 걷어내고 초상화를 끄집어냈다. 그것을 품속에 잘 갈무리한 렌틸이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 당연한 것을……난 잊고 있었구나.”

“이제 진정이 되었는가?”

톨네스가 다가왔다. 렌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나도 자네 입장이었다면 마음이 흔들렸을 거네. 마법사도 결국은 인간이니까. 마음 같아서는 그냥 없었던 일로 해두고 싶을 정도네. 그렇지만 자네가 저지른 죄는 크다네. 레미라 섬의 주민들과, 우릴 돕는 이방인까지 말려들게 할 뻔했으니까.”

“각오하고 있습니다.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그래. 처벌을 내려야겠지. 하지만 그전에 할 일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마스터.”

“마법사의 탑을 총괄하는 마스터로서, 세상의 마법사들에게 일제 징발령을 내리려하네. ‘라르리르고’라는 이름의 약초를 빠른 시일 내에 가져오게끔 말이야. 섬에서 가장 빠른 쾌속선을 준비시켜 놓았으니 자네가 가서 그걸 수령하게. 전쟁이 끝나고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건 잘 알겠지? 다들 바빠서 짬을 내지 못하니 자네가 수고해주게.”

“라르리르고라면…손녀의…….”

“빨리 다녀오게. 아, 그리고……위즈. 자네가 함께 따라가게.”

“네?”

“어쨌거나 그가 죄를 지은 건 사실. 누군가는 감시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다면 탑의 마법사를 붙여야지 왜 저를?”

“말했지 않나? 다들 바쁘다고.”

톨네스는 역정을 내더니 손바닥을 뒤집었다. 그러자 위즈의 몸이 빛에 휩싸이며 사라져버렸다. 뒤이어 렌틸도 모습을 감췄다.

“톨네스님. 괜찮겠습니까? 이걸 다른 사람들이 알면…….”

“말했지 않나. 마법사도 인간이라고. 난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까지 쭉 인간이고 싶네.”


작가의말

2014.11.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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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4) +2 14.05.16 1,785 33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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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4) +1 14.04.24 1,214 22 25쪽
95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3) +2 14.04.21 1,135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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