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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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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1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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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3.12.17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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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글자
24쪽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11)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11.

마물의 소굴에서조차 한스의 모습을 찾지 못하자, 유저들은 섬을 배회하는 대신 배에 올랐다.

바하르칼 측의 배는 진즉 빠져나간 뒤였다. 그 약삭빠른 자들마저 포기하자, 유저들의 대다수는 자기 갈 길을 떠났다.

스킬북에 미련이 남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섬을 배회하는 자들 대부분은 빌헬름텔처럼 빠른 2차 전직을 위해, 아처로만 키운 사람들이었다. 위즈는 그들을 지나쳐가며 모자손을 까딱거렸다. 그럴 때마다 똑 닮은 뚱뚱이가 생겨났다. 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흩뿌린 위즈는, 뚱뚱이들에 섞여 무언가를 찾는 척하며 돌아다녔다.

누군가 위즈의 모습을 주의 깊게 살폈다면, 위즈가 한 지점을 중심으로 뱅뱅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늘어난 뚱뚱이들 때문에, 유저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에는 보기 드문 풍채라고 생각하고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위즈와 눈을 마주친 이들은 너무 쳐다보는 게 실례라고 생각해 눈길을 거두었다. 그나마 계속 힐끔거리던 자들도, 여기저기서 나타난 뚱보들을 보고는 관심을 접었다.

일루전으로 유저들의 눈을 속인 위즈는, 목표로 삼은 지점으로 다가갔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언덕위에 핀 금잔화가 참 노랗다. 정강이 높이까지 자란 금잔화는 위즈의 발길이 닿자 스스로 고개를 틀어 비켜주었다.

핏 스톤은 위즈의 마력 패턴에 열리도록 만든 관문이 섬 어딘가에 있다고 했다. 스스로 움직이는 금잔화를 본 위즈는 확신했다.

‘여기가 입구야.’

꽃밭 한가운데로 들어갈수록 위즈의 모습은 소금이 물에 녹아드는 것처럼 잘게 부서져갔다.

일루전이 하나둘씩 없어졌다. 마력공급이 끊긴 가짜들은 더 이상 현신하지 못했다.

이 모든 과정이 천천히 일어났음에도, 알아차린 유저는 하나도 없었다.

유저들에게 중요한 것은 옆에서 누가 사라지느냐가 아니라, 한스의 자취를 찾는 것이었다.


◇◇◇◇◇◈◇◇◇◇◇◇◈◇◇◇◇◇◇◈◇◇◇◇◇


금잔화 꽃밭을 통해 들어온 곳은 위즈의 기억에 있는 장소였다. witch가 수련을 시키겠다며, 다리가 두 개만 남은 책상을 내어주며 필사를 하게 만든 널찍한 공터였다.

“제로니스 섬에 이런 곳이 있었나?”

『섬 근처의 암초들을 다지고 이어서 만든 장소다. 이목을 끌지 않도록 마법이 걸려 있기에 배를 타고는 절대 접근이 불가능하다.』

“여기가 암초라고? 흙도 있고, 나무도 자라는데?”

『눈속임이다.』

“하지만 이건 진짜 같은데.”

『그저 일루전만으로 많은 눈을 속이며 이곳에 들어온 그대가 아닌가. 이런 일로 감탄하는 것인가.』

“그건 사람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만든 것뿐이야. 별것 아니라고.”

『꼭 그렇지만도 않다. 존재감이 옅은 존재라는 건, 습격이나 요인암살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300년 전의 항마전쟁에서는, 인간은 수적으로도 많이 부족해 마족들에게 연일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위즈는 당연히 뒤 공작이 필요했을 것이라 짐작했다.

“설마 핏스톤이 그런 일을 담당했어?”

『아니다. 마스터께서 당당하게 하신 일이다.』

마법사란 화력지원에 특화된 존재가 아닌가. 거기에 더 오션에서는 숨은 존재를 탐색하는 방법이 너무도 많다. 원거리 저격의 피해를 줄이는 기술은 더 많다. 그렇기에 위즈는 핏 스톤의 대답이 의외였다.

“네 주인은 마법사잖아. 그런데 암살이라고?”

『모습을 바꾼 뒤, 그대로 걸어가 무기로 푹 쑤신 뒤 그 사람 행세를 하셨다. 주로 직급이 높은 자를 타깃으로 삼았지. 참모행세를 했을 때는, 해당 세력을 함정에 몰아넣어 몰살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치사하잖아?”

『마스터는 악명에 연연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마스터에게는 그 어떤 것에도 현혹되지 않는 견고한 방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네가 얻으려던 ‘마음속의 성전’이다. 영광으로 알아라. 자고로 영웅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좋은 동료도, 뛰어난 무기도 아니다. 마음속의 성전이 완성되는 순간부터 진정한 영웅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위즈는 말없이 눈만 굴렸다. 이게 그렇게나 대단한 스킬인줄 몰랐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가 쏙 들어갔다. 보상 퀘스트라서 편한 마음으로 왔는데, 의외로 골치 아픈 내용이 엮여있을 것만 같았다.

‘그냥 카피캣 스킬을 향상 시키려면 필요한 부속품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 스킬 자체로 큰 위력이 있다는 건가?’

문득 퀘스트 난이도를 떠올려본 위즈는 플러스(+)가 두 개나 붙어 있던 것을 기억해냈다.

‘야단났다. 그냥 하나짜리도 힘든데 두 개짜리라니?’

위즈는 솔직히 톡 까놓고 물었다.

“그……마음속의 성전이라는 거, 그렇게 얻기 힘든 거야?”

『얻는 과정도 그렇지만, 유지하는 것은 더 힘들다.』

“그게 무슨 뜻이지?”

『다른 기술들은 충분히 몸에 익혀 숙련되면 결코 잃을 수 없다. 팔다리가 떨어져나가지 않는 한은 말이지. 하지만 마음속의 성전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개념을, 억지로 엮어 붙들어 매어 둔 것이다. 그렇기에 조금만 실수해도 엉클어져서 되돌릴 수 없게 된다.』

“무슨 말인지 도통…….”

『일단 해보면 알게 된다. 책상 서랍을 열어봐라.』

위즈는 바닥에 널브러진 책상에 다가가 서랍을 통째로 뽑아내었다. 그 안에는 눈처럼 하얀 종이다발이 있었다. 핏스톤이 지시했다.

『맨 첫 장부터 읽고 답하라. 마력을 종이에 집중하면 글자가 나타날 것이다.』

이미 모자손에 넣은 스크롤을 발동시키며 전투를 치러온 위즈다. 마력의 운용법 정도는 알고 있었다. 마력을 불어 넣자 아무것도 없는 종이에 글자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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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 네가 돌아가고 나서 곰곰 생각해보니, 역시나 일을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다. 나 역시 당장 이곳을 떠나, 함께 목숨을 걸만한 동료들을 모으러 갈 생각이다. 그전에, 너와의 약속을 지켜야겠지. ‘마음속의 성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겠다.

마음속의 성전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언령(power word)의 사용법 중 한 갈래이다.

스스로 계명을 지어 자신을 속박하는 대신, 약해지는 자신을 다잡고, 그 어떤 것에도 현혹되지 않는 청정함을 얻는 것이 주목적이다.

먼저 계명을 짓기 전에 네 가지 질문을 던지겠다. 어려운 문제가 아니니, 생각하지 말고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답하라.


1. 그대는 스킬북을 찾을 생각이 없다면서, 결국 그것을 찾는데 동참했다. 여기에 티끌만큼도 욕심이 개입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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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동안이라도 스킬북이 욕심났다면, 벼락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지.’

그만큼 위즈는 꺼릴 게 없었다.

<스킬북에 욕심을 부린 게 아니다. 스킬북 찾기는, 마음속 성전을 얻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유저들이 알아서 찾아내고, 빠져나갔다면 굳이 찾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적어 넣자, 답지가 펄럭거리며 한쪽 구석으로 날아갔다. 핏스톤이 입을 열었다.

『첫 번째 계명이 열렸다. 계속하라.』

위즈는 다음 장을 펼쳤다. 같은 내용이 더욱 노골적인 표현으로 적혀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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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킬북을 찾기 위해 그대가 사용한 방법은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이를 잃은 사냥꾼에게는 잔인한 방법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대는 타인의 아픈 기억을 들쑤셨다.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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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망을 위해 타인의 마음을 짓밟는 일을 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다. 만약 스킬북에 대한 일이 마무리되지 않았다면, 제로니스 섬은 이방인들의 분쟁으로 시끄러워졌을 것이다.>

단숨에 답을 적어내린 위즈는 어쩐지 자기합리화 같아 입맛이 썼다. 분명 선의로 한 일이었지만,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따지면 할 말이 없긴 했다. 이번에도 역시 답지가 날려 사라졌고, 핏스톤은 같은 말을 되뇌었다.

『두 번째 계명이 열렸다. 계속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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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대는 불에 타 울부짖는 아이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이 실존하지 않음을 안 뒤에도 그대는 분노를 품었다. 그대의 감정은 허깨비에까지 쏟을 만큼 하찮은 싸구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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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질문은 본 위즈는 즉시 답을 적으려 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깃털 펜이 자꾸만 꺾여나갔다. 싸구려 감정이란 말이 가슴을 후볐다. 분명 사이테리아가 보여준 것은 진짜가 아니다. 마물이 사냥감을 현혹시키려 꾸민 허상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서도 위즈는 사이테리아에 대한 분노를 키워갔다.

‘그녀와 헤어질 때의 모습이 연상되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게임속의 몬스터에 감정을 품는다는 것은 정신착란이나 마찬가지야. 내 멘탈이 이렇게나 망가져 있었나?’

위즈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깃털펜을 세웠다.

<목적 앞에서는 그런 감정에 흔들리는 것조차 사치다. 실수를 인정한다.>

마침표를 찍었지만, 답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건 왜 안날아?”

『세 번째는 보류다. 네 번째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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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같은 이방인을 속이면서까지 그대가 얻으려 한 스킬북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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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이건 쉽군.”

위즈는 거침없이 답을 써내려갔다.

<원본이 하나라서 문제가 생겼다. 그러니 필사본을 각 나라로 보내어 모든 이방인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네 번째까지 끝마쳤군.』

훨훨 날아 허공을 유영하는 답지를 보며 핏스톤이 중얼거렸다.

“이제 다 끝난 건가?”

『안타깝게도 실패로군.』

“뭐가 문제지?”

『원래 계획은 4장 모두 계명으로 완성되어 그대의 주변을 맴돌아야 했다. 헌데 지금 허공에 떠오른 답지는 3장이다. 게다가 제멋대로 주인을 벗어나 떠돌아다니고 있다. 이는 조화가 깨졌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망했군.”

『실망하긴 이르다. 아직 한 가지 시도해볼만한 방법이 남아있다.』

“그게 뭐지?”

『계명을 하나로 묶을 언령을 지정하는 것이다.』

핏스톤은 혀를 휙휙 내둘러 날아다니는 답지들을 낚아챘다. 그가 내민 답지에는 위즈가 적은 내용은 사라지고 엉뚱한 말들이 적혀 있었다.


=======================================

1. 눈앞의 이익을 쫓느라 목적을 망각하지 않는다.

2. 내 스스로 옳다고 여기면, 손가락질 받는 것도 감수하겠다.

3. ### #### # # ## ##.

4. 최후엔 모두가 다 같이 웃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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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계명?”

『그대의 행동이 의도한 바를 간추린 게 이것이다.』

“마치 기사도 같은데?”

『잘 알고 있군. 기사도 역시 원래는 언령의 일종이었다. 언령의 힘은 기사들을 무적의 존재로 만들어주었지.』

“난 몰랐어. 기사도에 그런 위력이 있는 줄은. 그저 허울 좋은 말장난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은 허울 좋은 말장난이 맞다. 아니, 그보다도 못한 쓰레기가 되었지. 만약 기사들 스스로 계명을 어기지 않았다면, 기사도는 여전히 그들에게 힘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소하다며 업신여기자, 언령은 힘을 잃었다. 지금 그대가 세운 계명 역시 붕괴 직전의 상태다. 명심해라. 단순히 하나를 추가하는 게 아니라, 나머지를 아울러야만 하는 것이다. 그게 안 되면 실패다.』

핏스톤의 주의를 들으며 위즈는 계명을 곱씹었다. 기사도를 연상시키는 구절들을 묶으려면, 어지간히 좋은 말이 아니면 힘들 것 같았다.

‘작문 수업하는 것 같네.’

그만큼 위즈는 골치가 아팠다. 이래서 플러스가 두 개나 붙었나보다며 내심 투덜거리길 5분 째.

끙끙거리던 위즈는 witch가 사용했던 방법을 차용해보기로 했다.

‘그녀는 내가 했던 행동을 반추하도록 유도해서 계명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보다 앞서 했던 행위 속에서 계명을 뽑아내면 어떨까? 분명 포괄적인 무언가가 생기지 않겠어?’

위즈는 제로니스 섬에 오기 전의 일들을 곰곰이 되씹어보았다.

먼저 왕궁에서 겪은 일들. 이때 위즈는 신분 때문에 서로 적이 되고만 남매의 해묵은 오해를 풀어주었다.

‘좋은 일을 한 건 사실이지만, 내가 평소 선행을 쌓는 종류의 인간은 아니지.’

시간을 더욱 거슬러 올라가, 에켈요새에서 노상강도를 상대하던 때를 떠올리니 더욱 막막하다. 계명의 내용은 기사도처럼 행동을 제약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자신이 해온 행동들은 어디까지나 이익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에켈산에서 벌인 전투는 사실 생존이 주 목적이기까지하다.

‘넓은 의미에서는 계명을 따르는 것이긴 하지만……딱히 거창한 명분 같은 건 없단 말이지.’

카피캣을 배우고, 유령사서를 만나고, 인육만두를 처치하고……게임을 시작할 때의 시시콜콜한 사건까지 떠올렸다. 허나 나오는 건 한숨뿐.

‘아무것도 없어. 쓸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오기가 생긴 위즈는 현실에서의 기억까지 되짚어보았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수년전 용병시절의 추억까지 헤집고 있었다.

고민하는 위즈가 안되어 보였는지 핏 스톤이 질문을 던졌다.

『위즈, 그대는 어떤 인간이지?』


◇◇◇◇◇◈◇◇◇◇◇◇◈◇◇◇◇◇◇◈◇◇◇◇◇


‘나는 어떤 인간이었지?’


하루는 브렌이 이렇게 말했다.

“너와 움직이면 내가 절대적으로 안전해진다는 사실이 기뻐. 왜냐고? 해커 주제에 혼자 다 해먹잖아.”

편재가 맡은 포지션은 해킹으로 시큐러티를 침묵시키는 것이었다.

평범한 해커라면 단말기부터 연결하고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편재는 먼저 적진에 들어가서 단말기를 꽂았다. 침입자에 대한 대응으로 소란스러워진 것은 당연한 일. 편재는 그런 상황에서도 맡은 일을 수행해내고는, 총잡이가 되어 미쳐 날뛰었다. 마치 처음부터 전위대로 들어온 것처럼.

리암은 이런 행동에 대해 한마디로 일축했다.

“영웅은 재미없어. 가늘고 길게 사는 게 최고야.”

화려한 삶을 사는 영웅이란 동화책 속에나 존재하는 것.

현실의 영웅이란 여기저기 추켜세워지는 손짓에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힘이 다하면 쓰러져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그래도 누구하나 손을 내미는 사람은 없다.

영웅놀이에 빠진 애송이는 차고도 넘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때 영웅이었던 쓰레기들은 바닥에 차곡차곡 쌓인다.

“우리들은 누군가의 희생을 대가로 치르고 살아가. 무언가를 이루었다면, 선구자들의 노력이 뒷받침 된 덕이지. 내가 아무리 천재라도 완전히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내진 못하잖아? 결국 앞서의 이론을 발전시키거나, 반박해서 새로운 이론이 생겨나는 거다. 우리가 세우는 공도 마찬가지. 애초에 총을 발명한 누군가가 없었다면, 오늘처럼 적을 섬멸할 수 있었을까? 우리들은 과거의 그 누구보다 높은 곳에서 시작하고 있어. 이미 선구자들이 이룬 것들이 발밑에 깔려 있는 셈이지. 하지만 초보 영웅님들은 자신의 발밑을 살필 줄을 몰라. 오로지 머리 위에 펼쳐진 화려한 스크린 루프 속의 태양만을 동경하지. 그리고는 버림받았다며 징징징징. 민간인들 인질로 잡고 추접한 짓거리를 하는 거야. 큭큭큭. 죄를 짓는 순간 영웅이고 나발이고 똑같이 오렌지색 멜빵바지 입고 노는 건 매한가지야. 수백 년 전 라엘리언을 때려잡은 편재가 살아 돌아와도 마찬가지지. 그런데 뭐? 스스로의 몸뚱이를 타락의 늪 속에 밀어 넣으면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동안 자신이 해온 일들을 인정해달라고? 그 누구보다 자신을 깔아뭉개는 게, 자기 자신이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큭큭큭큭. 한마디로 머저리들이야 머저리들.”

인형병기에 들러붙은 살점을 떼어내던 리암은 그날따라 말이 많았다.

누구보다 가장 높이 떠오른 인간은 추락한 뒤, 소각장에 들어갈 고깃덩이와 더럽혀진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사람들에게서 잊혀갔다.

리더였던 제퍼슨은 기지에 돌아와서 멱살을 잡았다.

“얌마! 죽고 싶어 안달이 난 거라면, 그냥 머리통에 총이나 갈기고 죽어! 이 자살지망생아!”


‘확실히…그때의 난 무모했지. 앞뒤 안 가리고 날뛰었으니까. 그렇지만 제퍼슨은 끝까지 날 버리지 않았어. 용병생활 중의 난, 나 자신의 무모함을 사람들이 받아들여주는 것을 즐기고 있었어. 내가 특별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누구보다도 앞장서 들어가 위험을 자초했고…….’


◇◇◇◇◇◈◇◇◇◇◇◇◈◇◇◇◇◇◇◈◇◇◇◇◇


『그것이 그대의 답인가?』

핏스톤의 물음에 위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내가 살던 세계에서의 내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해.”

『알겠다.』

핏스톤은 혓바닥으로 붙잡아놓은 종이를 풀어놓았다. 그러자 조금 전의 무질서함은 어디가고, 위즈를 중심으로 빙빙 돌기 시작했다.

『마력을 허공에 내뿜는다고 생각해라.』

시키는 대로 하자 종이의 회전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급기야 종이에 불이 붙어 불덩이가 되어버렸다. 그런 상태가 되어서도 회전은 멈추지 않았다. 다행이도 불은 금세 꺼졌다. 대신 글자만이 남아 이글거리며 잔상을 채워나갔다. 붉은 잔상들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며, 여러 개의 고리를 이루었다. 위즈는 점차 따뜻한 기운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둥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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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크 스킬]/[패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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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 성소(聖所) : MX-LV.1] [LV.1-숙련도 Mastered]

흔들리는 마음, 미혹에 빠지기 쉬운 눈을 가진 인간.

계명으로 스스로를 묶으매, 어둠 속에서도 길을 헤매지 않을 것이다.

이를 마음에 깊이 새기고 지키는 한, 최후에 믿고 의지할 것은 성전뿐이리라.


1. 눈앞의 이익을 쫓느라 목적을 망각하지 않는다.

2. 내 스스로 옳다고 여기면, 손가락질 받는 것도 감수하겠다.

3. ### #### # # ## ##.

4. 최후엔 모두가 다 같이 웃을 것이다.


[카피캣 - 보조스킬 카피 가능.]

[계명은 타인에게 알려줄 수 없습니다.]

[계명 하나를 충족하지 못하여 나머지 기능은 봉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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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성전이 아니라 성소로 되어있는데 이거 정상인가?”

『여전히 이곳이 나무가 자라고 풀이 돋은 평지로 보이는가?』

“당연하지.”

『역시 그렇군. 그대가 얻은 건 거죽에 불과한 것. 진짜 성전이라면, 마스터가 이곳에 걸어둔 허상을 꿰뚫어보았을 것이다. 아쉽군.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르니, 계명을 얻지 못한 종이는 갈무리 해두도록.』


<‘불완전한 계명’을 얻었습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뭐지?』

“두 번째 계명에, 스스로 옳다고 여기면 손가락질 받는 것도 감수하겠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렇다면 남을 속이거나, 목숨을 빼앗는 것도 용인된다는 뜻인가?”

『계명에 부정적인 것이 언급되었다면, 언제나 최소한의 수준으로 행해야 한다. 만약 그대의 두 번째 계명을 확대 해석하여, 틈나는 대로 속이고 죽이기를 반복한다면 그건 마족이나 다름없다. 그리되면 그대가 얻은 마음속의 성소는 타락하고 말지.』

“그럼 기사도 꼴이 나겠군.”

『그렇다. 하지만 더욱 최악의 경우는 그 타락의 정도가 심해져, ‘타락한 마음속의 성소’가 되는 경우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게 되지. 사실상 마족으로 분류해도 될 것이다.』

위즈는 바하르칼 용병들을 떠올렸다. 그들이야말로 틈만 나면 음모를 꾸미고, 장차 대규모 전쟁을 일으켜 이권을 손에 넣으려는 악의 축 아닌가.

“이방인 중에는 틈만 나면 못된 짓을 하는 부류가 있는데, 그들이 ‘타락한 마음속의 성소’를 얻을 수 있을까?”

『그럴 확률은 낮다. 왜냐하면, 먼저 마음속의 성소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괜히 앞에 ‘타락한’이 붙는 게 아니로구나…….”

둥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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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 퀘스트/ ‘마음속 성전(聖殿)’][완료]

보상: ‘마음속 성전(聖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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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가 완료되어 미노클 왕성으로 돌아가는 포탈이 열립니다.>


『날 다시 아공간에 넣어다오.』

위즈는 펫 인벤토리를 열어 핏 스톤을 집어넣었다.

“일단 돌아가면 이글아이 스킬북의 필사본부터 돌려야겠군. 크레센토는 나라가 크니까, 대충 40~50권을 내주면 되겠지?”


◇◇◇◇◇◈◇◇◇◇◇◇◈◇◇◇◇◇◇◈◇◇◇◇◇


이날 대부분의 유저들은 하던 사냥을 접고, 자신이 떠나온 도시를 향해 움직였다.

“뭐? 훈련장에서 이글아이를 가르친다고?”

“정말이라니까? Lv.1 이글아이라고.”

“스킬북이 몽땅 불에 타 없어진 게 아니었어?”

“글쎄, 마지막 스킬북을 가져간 NPC가 필사본을 여기저기 뿌렸다던데? 그것도 한두 나라가 아니래. 바하르칼을 제외한 모든 국가에 필사본이 전해졌다는 모양이야.”

“허……여러 나라에 인맥을 가진 걸 보면 그 NPC도 제법 굉장한 인맥이었던 것 같네. 그나저나 바하르칼만 쏙 빼놓은 이유가 뭐래?”

“글쎄…그건 나도 잘…….”

“뭐, 아무려면 어때. 어서 가자고. 이번엔 내가 샤프슈터 1인자가 되고 말겠어.”

“빌헬름텔님이 우리 레벨의 두 배는 될 걸?”

“크윽……그, 그럼 내가 2인자.”

“누구 맘대로?”

유저들은 삼삼오오 모여 떠들며, 저마다의 꿈에 부풀어 왔던 길을 되밟아 나갔다.

회색망토 무리들은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 머슬가이님. 어떡해요. 바하르칼에만 필사본이 안 왔대요.

-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필사본 사용안하고 그대로 가져오는 건데.

머슬가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황상 한스라는 NPC가 원본을 가지고 무사히 도주에 성공한 듯 했다.

- 후회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윗선에서 한스라는 자와 물밑접촉을 할 거다. 우리들은 이야기를 잘 풀어나가기만을 바라자.


◇◇◇◇◇◈◇◇◇◇◇◇◈◇◇◇◇◇◇◈◇◇◇◇◇


이글아이 스킬의 완전 전파 소식에 크게 기뻐한 것은, 역시 순수 아처들이었다.

빌헬름텔 역시 소식을 듣자마자 훈련장으로 이동 중이었다. 하지만 위즈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다. 그가 향한 곳은 우편물 보관소였다.

“저…사서함을 개설하려고 합니다만.”

“계약서에 이름을 적으시고, 예치금으로 은화 열 닢을 주세요.”

그렇게 만들어진 사서함에는 위즈가 보낸 물건이 들어있었다.

한권의 책과 쿠키가 담긴 작은 종이봉투.

“헉!”

비명이 튀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서, 빌헬름텔은 사물함의 물건을 서둘러 인벤토리에 넣었다.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빌헬름텔은 아무렇지도 않게 건물을 나섰다.

“하……이런 일도 다 있군 그래.”

조금 전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책은, 이글아이 스킬북의 원본.

사용하는 순간 즉시 스킬을 마스터 하게 되는 보물이었다.

그때 위즈에게서 문자가 왔다.

띠링.


<쿠키 잘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시간을 내 주실 수 있다면, 빌헬름텔님에게 작은 부탁을 하려 합니다. 중립도시 시에니투스까지의 길안내를 해주십시오. 벌꿀술은 그때 얻어먹도록 하겠습니다.>


작가의말

1.

끌끌끌......

요즘, 문피아에 자주 보이는 글중 하나가 하차합니다. 에 관한 글입니다.


원래 net상에서 쌓인 관계란 게 얄팍하기 그지 없어서,

뭔가를 기대하고 갈구한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확실하게 말씀드릴게요.


저는 제 글을 읽는 독자분들에게 댓글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추천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서재 왼편 팬더 아래에 적힌 글을 보시길.

그저 잘 놀다 가시면 됩니다.

글을 써서 돈을 벌 정도로 대단한 작가도 아니고,

그저 재미로 쓰는 글에 60명 씩이나 선작한 게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2.

제글에 달린 댓글에 답댓글은 절대 안 다는 이유 역시 명확합니다.

먼 훗날...폭탄 설정이라도 하나 터뜨리면,
'하차합니다'
하고 줄줄 뜰 거라고 생각해서이지요.

이거 짝사랑만은 않겠어요(?) 같은 느낌이네요.

[거기다 글 끄트머리의 '작가의 말'에다가 충분히 표현할 수 있기도 하고]



3.

또 다른 셸터는 제가 즐겨 쓰는 어떤 설정을 그대로 가져왔답니다.

힌트를 몇 가지 드리자면......


에일리언

바이러스

Dr.자로의 비밀


이 정도가 되겠네요

알아채신분은 비밀글로 표현해주시길 바랍니다.

스포일러는 자제해야 하는 법입니다. 아무렴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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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4) +2 13.11.30 1,026 23 27쪽
33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3) +2 13.11.29 1,153 30 21쪽
32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2) +3 13.11.28 1,052 25 20쪽
31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1) +4 13.11.23 1,525 20 19쪽
30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ED) +1 13.11.22 1,151 22 15쪽
29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8) +1 13.11.19 1,220 24 34쪽
28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7) +1 13.11.16 1,517 29 24쪽
27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6) 13.11.15 1,558 28 23쪽
26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5) +1 13.11.13 1,753 28 21쪽
25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4) +1 13.11.12 1,147 25 14쪽
24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3) 13.11.11 1,138 31 21쪽
23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2) +2 13.11.08 1,565 39 18쪽
22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1) +1 13.11.07 2,194 36 23쪽
21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0) 13.11.06 1,142 36 18쪽
20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9) +1 13.11.05 1,535 31 22쪽
19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8) +3 13.11.02 1,116 23 20쪽
18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7) 13.11.01 1,205 32 23쪽
17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6) 13.10.29 1,153 31 23쪽
16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5) 13.10.28 1,145 27 14쪽
15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4) 13.10.26 1,477 36 17쪽
14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3) +1 13.10.25 1,587 36 16쪽
13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2) +1 13.10.24 2,422 40 21쪽
12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 13.10.22 2,118 32 15쪽
11 1. 계절이 바뀌는 때 (ED) +1 13.10.19 2,876 138 19쪽
10 1. (9) +1 13.10.16 1,915 42 23쪽
9 1. (8) 13.10.14 1,705 29 23쪽
8 1. (7) +1 13.10.05 3,290 60 25쪽
7 1. (6) 13.10.04 2,229 42 22쪽
6 1. (5) 13.10.02 2,269 39 17쪽
5 1. (4) 13.09.29 2,362 4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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