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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츠 님의 서재입니다.

Reunion : 과거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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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츠
작품등록일 :
2021.04.21 19:20
최근연재일 :
2022.06.17 01:46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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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8
추천수 :
3
글자수 :
447,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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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3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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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44화. 변화(1)

DUMMY

콰직!


콰드득!


살이 뭉개지고 찢어지는 소리, 뼈가 부서지고 갈리는 소리, 피를 찰박거리며 밟는 소리 등. 종류는 다양하지만 하나같이 너무나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나의 내면세계인 건가”


나는 모든 것이 새까만 세계 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발을 내딛으며 어딘가를 향해 걸었다.


“아무래도, 그중에서도 가장 외각인 곳 같은데···”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몇 걸음 걸어가자, 갑자기 환한 빛이 나타나더니 내 주변에 있는 어떠한 장소를 비추었다.


“저건······”


그곳에 있는 것은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었다. 또한, 한 아이가 곡괭이로 나와 닮은 사람의 머리를 내려치고 있었다.


“으아!!! 죽어!! 죽으라고!!!”


아이는 나와 닮은 얼굴을 한 사내를 향해 곡괭이를 몇 번이고 소리치며 외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나는, 아이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태백아”


내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자, 아이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아니, 입을 움직이는 것을 보아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냥 들리지 않게 된 것 같았다.


“다음은 저곳인가”


내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자, 또다시 새로운 불빛이 나타나 이번에는 다른 장소를 비추었다.


“요···용사님······용사님!! 제 잘못이에요! 모두 제 잘못이라고요!!”


이번에는 등에 수많은 창과 검 그리고 화살이 박혀있는 상태로 서 있는 내가 있고, 그 앞에서 양다리가 없는 새하얀 옷의 여자가 미친 듯이 울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마리아”


내가 그 광경을 보고 있다 보면, 불빛은 곧바로 다른 곳을 비추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곳에 불이 들어오면, 나의 과거의 모습과 그에 연관되었던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르하”


나는 또다시 처참한 모습의 나를 보며 슬퍼하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름을 부르고 앞으로 발걸음을 옮겨나가기 시작했다.


“크리스”


나는 앞으로 걸어가면서 생겨나는 내 모습과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렀다. 그리고 그럴수록 점점 더 많은 불빛이 새로운 곳의 빛을 밝혔다.


“레릴”


불은 계속해서 켜졌다.


“하스턴”


슬퍼하는 사람들 또한 계속해서 늘어났다.


“그래, 모두 내 과거의 모습이야. 그리고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이지. 하지만 이젠 나에게 이런 걸 보여주어도······”


십자가에 묶여 불에 타고 있는 모습.


살점을 도려내지며 고문을 당하는 모습.


사지가 기형적으로 비틀린 모습.


벌레들에게 천천히 먹히고 있는 모습.


날이 상한 도끼로 몇 번이나 목을 내려 찍혀지는 모습.


산채로 땅속에 묻히는 모습.


몸이 여러 조각으로 조각내어져 바다에 흩뿌려지는 모습.


강력한 산성 용액에 담가져 녹아가는 모습.


그 외에도 지금 내게 보여주고 있는 그 모든 모습은 모두 내가 과거에 겪었었던 일들이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어”


지금 보여주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내가 겪었던 것들은 맞았지만, 이렇게 누군가에게 핍박받고 상처받으며 한계까지 몰리는 것은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이제 와서 이런 것들을 보여준다고 해도 나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걷고 있었다. 계속해서 고통받고 있는 과거의 나를 보여주었지만, 이제는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조차 않는 일들이었다.


“네가 뭘 말하려는 지는 나도 알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멈춰 섰다. 이제는 어두웠던 곳이 새하얗게 밝아졌다고 느낄 정도로 주변에 처참한 모습인 과거의 내가 가득했다.


“나 때문에 내 주변 사람들이 불행해졌다고 말하기라도 하려는 거겠지”


고통을 받고 있는 과거의 나 사이에서 들려오는 것은 오로지 그런 나를 보고 슬퍼하는 과거의 인연들의 울음소리 뿐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고통과 절망으로 얼룩져 있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


들려오는 온갖 절망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나는 그렇게 누군가를 말하면서도 스스로 어이없어했다. 결국, 이곳은 자신의 마음 속이었으니, 이런 풍경을 보여주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우리를 잊으려는 거야?”


내가 눈을 손으로 가리며 한숨을 쉬자, 갑자기 누군가가 내 발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도와줘!!”


“절대 우리를 잊지 마!!”


“살려줘요!!”


“죽고 싶지 않아!!”


“널 사랑하고 있어”


“난 반드시 네 마음속에 영원히 남고 말 거야!!”


“떠나지 말아줘!!”


방금 전 과거의 나를 보고 슬퍼하던 이들이 내 발아래에서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인간들로 쌓인 거대한 탑 위에 서 있는 나를 향해 올라온 그들은 내 발목을 잡고, 허벅지를 껴안았으며, 손목을 잡으면서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우리를 잊지 않겠다고 네가 약속한 거잖아”


계속해서 올라온 그들은 어느샌가 나를 완전히 뒤덮었고, 내 얼굴을 붙잡은 누군가는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동자를 터질 듯이 누르면서 말했다.


“절대 잊지 마, 우리들과 함께 했던 나날들을. 마음속에 새기고, 그 눈동자에 박아넣어 줘”


눈동자가 터지면서 피가 흘렀지만, 그럼에도 나를 잡고 있는 그들의 손길은 더더욱 과격해지고 있었다. 전신에서 피가 나오고 있음에도 그들은 나를 향해 말을 하고 있었다.


“넌 우리의 구원자야.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진 절대적인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지. 모든 생명은 덧없이 사라지지만 너의 곁에서만큼은 영원할 수 있어. 그러니 넌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해”


그들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하는 말은 그대로 내 귀로 박혀 들어왔다.


『 우리의 삶과 이름을 』


나는 그들의 마지막 절규를 들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서 있었다. 그러자 내 몸에 닿아있던 그들의 감각이 일제히 사라졌고, 나는 바다에 빠진 것처럼 어딘가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마음의 더더욱 깊은 곳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나락의 구멍에 빠진 것만 같이 끝없는 무력감과 허탈함에 뒤덮인 상태로 계속해서 떨어져 가던 나는, 한참을 추락하고 나서야 바닥에 닿을 수 있었다.


“이곳은······”


바닥에 닿고 나서야 눈을 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가득 채워져 있는 거대한 동산의 모습을 본 나는 이 장소가 어디인지를 깨닫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에덴이군”


과거에 히아신스와 함께 만들었던 거대한 낙원의 공간, 에덴.


“그렇다면·········”


나는 이곳이 에덴임을 깨닫자, 곧바로 홀린 듯이 어딘가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수많은 꽃 사이를 지나고 또 지나서 걸어가자, 덩굴로 이루어진 거대한 문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문 너머에 있는 건가?”


나는 떨리는 손으로 덩굴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나타난 것은 거대한 동산과 그 중앙에 솟아있는 거목의 모습이었다.


“·········히아신스”


그 거대한 거목에는 히아신스가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검은 드레스를 입고 수많은 장신구를 차고 있는 히아신스는 잔뜩 금이 가있는 거대한 공 하나를 품에 껴안은 채로 쓰다듬고 있었다.


“히아신스”


나는 다시 한 번 더 히아신스의 이름을 부르며 히아신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정한 손길로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공을 쓰다듬고 있는 히아신스는 내 손이 뺨에 닿았음에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나의 마음 가장 깊숙한 장소인 이곳에, 오직 너만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히아신스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히아신스의 뺨을 쓰다듬을수록 왠지 모르게 거대한 무언가가 내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나에게 남은 건 너밖에 없다는 거겠지. 넌 셀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또 살아갈 나의 곁에 서 있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니까”


히아신스는 내가 어떤 말을 하든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럼에도 히아신스를 꽉 끌어안으면서 속삭였다.


“사랑해”


내가 히아신스를 꽉 끌어안자, 그것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땅에서 수천수만이 넘는 검은 손이 일제히 튀어나왔다. 검은 손들은 히아신스를 끌어안고 있는 내 어깨를 강하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정말로”


나를 짓누르는 것은 지금까지 나에게 맡겨지고 이어진 수많은 이들의 유지.


과거의 인연들이 내게 주었던 작은 조각들.


난 그들을 기억해야만 한다.


난 그들을 대신해서 이루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나 또한 그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받았고, 많은 것들을 배웠으니까.


그들로부터 받은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들의 유지를 이어가는 나는 부러질 수 없었다.


휠 수도 없고


꺽일 수도 없다.


하지만 아무리 과거의 인연들이 지금의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들의 유지를 이어가야 한다는 의무감이 내 전신을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네가 있기에 나는 살아갈 수 있어”


내 심장을 뛰게 해주며, 숨을 쉬게 해주는 히아신스가 있어야만 나는 살아갈 수 있다.





*                *                  *                 *





“살인자 설우현을 내놓아라!!!”


“살인마를 체포하고 처벌해라!!!”


“정부와 경찰은 각성하라!!!”


“아카데미는 살인마를 길러 낸 책임을 져라!!!”


수십명의 사람들이 팻말을 들고 한 병원의 앞에서 격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다. 한진성은 병실의 창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한진성과 마리아, 그리고 히아신스만이 남아있는 병실의 침대에는 내가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누워 있었다.


“·········으······으으······”


깊은 침묵만이 흐르는 그곳에서 나는 천천히 의식을 되찾으며 눈을 떴다. 마리아와 히아신스는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내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당신!”


“우현님, 몸은 괜찮으신 건가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한 나는, 곧바로 오른팔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히아신스는 손수건을 꺼내 내 머리에서 흐르는 땀을 가볍게 닦아주면서 말했다.


“혹시 악몽이라도 꾼 건가? 계속 식은땀을 흘리던데······”


“아니야, 평소대로의 꿈이었어”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렇게 말하고는 히아신스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곧장 창문을 바라보고는 그곳에 서 있는 한진성을 향해 물었다.


“진성아”


“말하쇼, 형님”


“밖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아까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보니까, 시위라도 하는 것 같은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 순간까지도, 사람들의 함성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한진성은 그런 내 질문을 듣더니 표정을 팍 찡그리며 말했다.


“뭐긴 뭐야, 구해준 은혜도 모르고 날뛰는 쓰레기들이지”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데”


“제가 설명해 드리도록 할게요, 우현님”


한진성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인지, 마리아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끼어들면서 말했다.


“우현님께서 주작을 상대로 무의 극의를 사용한 것은 기억하실 거예요”


“그래, 그랬지. 그게 이 세계에 가장 덜 부담을 주는 방법이었으니까”


“네, 맞습니다. 우현님의 말씀대로, 무의 극의를 사용하며 이 세상의 진화는 시작되지 않았죠. 하지만 문제는 우현님께서 검을 휘두르시며, 그 경로에 있던 사람들이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이에요”


“사람이 죽었나?”


“네, 우현님께서 휘두르신 발뭉에 의해 서울을 반으로 가르다 못해 근처 지역에까지 이르는 거대한 검흔이 생겨났고, 불행하게도 마침 대피소까지 덮쳐지며 더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현재까지 대략 240명 정도의 사망자가 확인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지금은 경찰과 계승자분들께서 입구를 통제하고 계시고요”


마리아는 말하면서도 굉장히 안타까움이 담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죽은 것을 내가 신경 쓸 거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한진성은 오히려 엄청나게 기분이 나쁜 듯 마리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서 마리아, 너는 형님이 지금 잘못이라도 했다는 거냐?”


“제가 감히 어떻게 우현님에게 잘못이 있다 할 수 있겠어요. 오히려 우현님이 아니었다면, 이 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는 재앙이었는 데도 말이죠”


“그렇지, 진짜 다 죽여버릴까 싶···”


한진성이 말하고 있던 그 순간, 시위를 하던 한 남자가 내가 있는 병실의 창문을 향해 벽돌을 집어 던졌다. 창문이 깨지며 유리 조각이 튀었지만, 마리아의 신성력에 막히며 사라졌고, 날아오는 벽돌은 한진성이 한 손으로 잡아냈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라고 이 살인마 새끼야!!! 내 아들 살려내!!! 이 시발새끼야!!!”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내가 오늘 저 살인마 새끼 죽여버리고 말 거야!!!!!”


나를 살인마라고 욕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그대로 날아와 내 귀에 박혔다. 경찰들에게 끌려나가면서도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치는 남자의 외침을 나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듣고 있었다.


“······우현님은 살인마 같은 게 아니에요”


“그래, 형님이 무슨 살인마야! 그냥 내가 다 처리하고 올까?”


“······아냐, 괜찮아. 내가 저 사람들의 가족이나 친구를 죽인 건 정말로 사실이니”


나는 나를 욕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며 순식간에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내 손 아래에서 이백 명이 넘는 생명이 또다시 사라졌다는 것이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히아신스는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내 손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응, 고마워”


나는 나를 욕하는 사람들의 외침을 그렇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이런 일은 익숙해진 지 오래였으니, 몇 번이고 겪은 일에 무언가를 느끼기에는 나는 이미 너무 닳고 닳아있었다.


똑똑!


그 순간, 누군가 병실의 문을 두드리더니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수행원을 뒤에 두고 있는 그는 계승자가 아닌 듯 보였지만, 상당한 위압감을 가지고 있는 노인이었다.


“자네가 설우현이군”


홍연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문 앞에 섰고, 노인은 그대로 나를 향해 걸어왔다.


“너무 늦게 인사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난 엘릭이라고 하네. 미약하지만 계승자 협회의 협회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지”


“협회장이라······그래, 엘릭 네가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자네도 보다시피 사람들의 반발이 너무 심해서 말이야. 자네가 사람들의 눈에 띄고 싶어하지 않은 것은 알지만, 이미 일의 규모가 너무 커졌어”


엘릭은 그렇게 말하고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수행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오더니 내 손에 서류 뭉치를 건넸다.


“이건?”


“자네와 히아신스의 호적과 결혼 증명서와 같은 것들이지. 그동안은 제대로 생존 신고도 되어있지 않았더군”


“결혼 증명서···?”


히아신스는 관심이 있는 건지 서류 뭉치를 가져가더니 보기 시작했다. 엘릭은 그걸 보며 미소를 짓더니 다시금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난 자네와 자네의 동료들이 계승자들의 선구자가 되어주었으면 해”


“선구자가 뭐지?”


“SS급 1위인 노아 빌드레드가 실종된 상황이야. 게다가 세계의 진화라는 크나큰 재앙마저 기다리고 있지. 지금 이 세상은 새로운 영웅들이 필요해”


“우리들이 그 영웅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건가?”


“그래, 난 자네와 그 동료들이 새로운 SS급이 되어주길 바라네. 자네는 등급 외 판정, 남은 이들도 SS급 1위에서부터 차례대로 배치하도록 하지. 자네가 원한다면, 이름을 포함해서 모든 정보를 비공개로 해도 좋아. 게다가 자네와 히아신스는 전투에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되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영웅의 존재라는 평화의 상징뿐이거든”


“·········나쁘지 않은 조건이군”


“그래, 그 외에도 모든 편의와 보상을 약속하겠네. 지금 사람들이 자네의 아카데미 퇴학을 요청하고 있지만, 그것도 모두 없던 일로······”


“아니, 그건 상관없어. 저들이 아카데미에서 내가 사라지길 바란다면 원하는 대로 해줘”


“정말 괜찮은 건가?”


“그래. 만약, 돈을 원한다면 내가 가진 돈을 전부 나누어 주어도 좋아”


“······좋아, 그렇게 하겠네”


엘릭은 당황스러워 보였지만, 그럼에도 곧장 침착함을 유지하며 표정을 관리했다.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는지 엘릭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를 향해 말했다.


“그럼 이 제안은 수락하는 거라고 알고 있겠어”


“그래”


엘릭은 나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병실의 문을 열고 수행원과 함께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지. 자네의 빠른 회복을 빌겠네”


그렇게 말은 한 엘릭이 병실 바깥으로 사라지자, 나는 곧바로 마리아와 한진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버들이랑 스노우는 어디에 있어?”


“아, 버들과 스노우라면 지금쯤 해외에 있을 거예요”


“해외?”


“네, 우현님이 쓰러지시고 나서 전 세계에 숨어있는 모든 악마와 천사를 닥치는 대로 찾고 있거든요. 저도 고문······아니, 정보를 듣기 위해 심문을 하던 도중에 온 것이랍니다”


마리아가 말하던 와중 뻘쭘해하며 미소를 짓는 사이, 히아신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정말 방금 그 제안을 받아들여도 괜찮은 것인가? 분명, 눈에 띄고 싶어하지 않았으면서······”


“어차피 언젠가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었어”


“사실, 나도 좀 걱정이 되긴 해. 나나 다른 애들은 상관없지만, 형님과 누님은 유명해지고 싶어하지 않아 했었잖아?”


“형식적인 등급······그것도 가장 높은 등급이라면 받아두어도 나쁘지 않겠지. 어차피 나와 히아신스는 그 어떠한 정보도 공개하지 않을 생각이니까”


“뭐, 형님이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다면야 괜찮겠지만······”


한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고, 나는 속으로 다른 것들을 떠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오히려 신경 쓰이는 건······”


나는 머릿속으로 지금 신경 쓰이는 것들에 대해 떠올렸다.


무량의 공격 속 숨겨져 있던 검은 기운.


아무런 전조 증상 없이 갑자기 나타난 주작.


그리고 방금 전에 나를 만나러 왔던·········





*                *                  *                 *





“완료했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병원의 통로에서 무량과 그런 무량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엘릭이 있었다. 엘릭은 세뇌를 당한 것인지, 눈에 초점이 흐릿했다.


“이제, 준비는 어느 정도 됐어. 설우현을 살인마라 욕하겠지만, 등급 외 판정을 받은 계승자는 정체도 모르면서 영웅이라고 추앙하겠지”


무량은 창문 너머로 아직도 시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둘이 같은 존재인지 알게 되면 인간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살인마를 처벌하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무량은 마치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도움을 구하려고 할지······아니면 그런 상황에서도 서로를 탓하는 위선을 보여줄지······어쩌면 둘 다 일 수도 있지만 말이야”


무량은 그렇게 말하고는 아무런 전조도 없이 왼손으로 엘릭의 심장을 관통했다. 동시에 허공이 일그러지더니 4쌍의 날개를 가진 악마가 나타나 무릎을 꿇었다.


“이제부터 네가 계승자 협회장을 연기해라. 지난번 일로 고위급 악마가 많이 죽었으니, 너도 설우현의 눈에 띄지 않게 노력하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인 악마는 바닥에 쓰러진 엘릭의 시체를 들더니 곧바로 어딘가로 사라졌다. 무량은 고개를 돌리더니 저 멀리 내가 있는 병실의 문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앞으로 조금이야. 아주 조금만 기다려주면 돼”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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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31화. 습격(2) 21.12.16 34 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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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26화. 과거의 인연(3) 21.11.16 32 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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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23화. 새로운 동료 21.10.18 37 0 23쪽
26 두번째 이야기 - 히아신스의 과거 21.10.09 31 0 25쪽
25 22화. 토너먼트(5) 21.10.03 30 0 16쪽
24 21화. 토너먼트(4) 21.09.21 36 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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