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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츠 님의 서재입니다.

Reunion : 과거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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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츠
작품등록일 :
2021.04.21 19:20
최근연재일 :
2022.06.17 01:4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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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7,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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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09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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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두번째 이야기 - 히아신스의 과거

DUMMY

태초에 4개의 존재가 있었다.


『 공허 』,『 소멸 』,『 혼돈 』그리고『 창조 』였던 나까지


언제부터 그리고 왜 그곳에 있었는지, 우리들 자신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우리들은 그저 그곳에 존재했고 또한 그 이름에 걸맞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우리들의 강대한 힘 아래에서 태초의 모든 것들은 『 창조 』되었고, 『 공허 』와『 혼돈 』을 통과해 조화를 이루었으며, 끝에 이르러서는 다시『 소멸 』하는 순환을 반복했다.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고 우리들이 자아를 얻은 뒤에도, 그런 태초의 순환은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유지되었다.


하지만 태초의 순환이 어떻게 되는 말든, 자아를 가진 뒤의 우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태초의 순환보다 서로를 더 소중히 여기기 시작했다.


“드디어 완성되었군”


당시의 나는 창조의 힘을 이용해 친구들에게 선물할만한 것들을 자주 만들고는 했다. 그렇게 물건을 만드는 내 곁에는 항상 소멸이 함께 해주었고, 나는 소멸과 단둘이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시간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이제 이 동산이 우리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줄 것이다”


“이름은 뭐라고 할 건데?”


“에덴······그래, 에덴이라고 부를 것이다”


“에덴이라, 좋은 이름이네”


태초의 순환이 시작된 지 겨우 수십억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그때, 이미 나와 소멸은 연인의 관계가 되어있었다. 아니,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혼돈과 공허 또한 다르지 않았다.


“소멸! 창조! 둘이 또 뭐해?”


“너희인가? 언제 에덴에 온 거지?”


“너희 기척을 따라왔지. 우리도 방금 왔어!”


자아를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때의 우리가, 반대되는 힘을 가진 서로에게 이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일지도 몰랐다.


“이 동산이 저번에 말했었던 그것인가? 이름도 이미 에덴이라고 지은 것 같군”


“언제까지나 그 삭막한 곳에 있을 수는 없잖아”


“그래도 난 그곳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만···”


“공허는 그 허무(虛無)의 공간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딱히 그런 건 아니다만······어차피 혼돈, 난 너와 함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다”


“또 그냥 넘어가려 하네!”


정말 별거 없는 대화였지만, 그 사소한 말 하나하나에는 우리들의 행복이 녹아들어 있었다. 어떤 때는 친구로서, 어떤 때는 연인으로서, 우리는 살았고 이 순간이 계속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뒤로도 우리는 셀 수 없을 만큼 긴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 했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에덴에 모여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고, 갑작스럽게 혼돈은 우리에게 제안했다.


“우리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 이런 틀에 박힌 세계가 아니라, 스스로 변화하고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만드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 거야! 우리와 닮은 새로운 존재를 만들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분명 우리가 더욱 행복해지는 방법이지 않겠어?”


항상 우리 4명만이 존재하는 태초의 세상이 각박하다는 생각을 해왔던 나는 곧장 그런 그녀의 생각에 동의했다.


“영원히 이 순환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모두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은 지금의 세상이 아닐 것이다. 나는 혼돈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자는 말에 동의하겠다”


그러나 소멸과 공허는 우리 둘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잖아. 우리와 같은 격을 지닌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것과 다름이 없는 짓인데······우리 중 한 명이 소멸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을 할 수는 없어”


“나 또한 반대하겠다. 작은 가능성이라도 혼돈을 위험에 빠지게 할 수는 없고, 나는 지금 우리 4명만이 존재하는 세상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으니”


둘은 상당히 완고하게 반대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들의 끈질긴 설득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와 혼돈이 진심으로 바란다면, 소멸과 공허는 우리의 생각을 존중해주었다.


“하아···일단, 알았어”


“최대한 위험을 낮추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밖에 없겠군”


그 뒤, 우리는 수억 년에 걸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먼저, 공허의 힘으로 태초의 세상의 일부 지역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 공간을 만들었다. 그 위에 내가 창조의 힘을 사용해 하늘과 땅과 같은 전체적인 형태를 만들었고, 남은 공간은 약화한 소멸의 힘을 채워 넣었다. 마지막으로 혼돈과 내 힘을 합쳐, 이 모든 것들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생명체들을 만들었다.


“이름은 코스모스라고 하자”


“무슨 뜻인데?”


“질서라는 뜻이야, 혼돈에 반대되는 그런 질서”


“혼돈에 반대되는 질서······?”


“응, 혼돈인 나같이 자라지 말라는 의미로 그렇게 지으려고”


“뭐, 네가 그렇게 짓고 싶다면 딱히 큰 상관은 없지만···”


그렇게 우리가 바라던 세상, 코스모스는 만들어졌다. 수많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세계들이 차원의 위에 구슬처럼 흩뿌려져 있는 코스모스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던 가장 이상적인 형태였다.


“저 작은 빛 하나하나가 새로운 세상이라니······”


“너무 아름다워. 저 빛 하나에는 얼마나 많은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걸까?”


“분명 우리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다. 앞으로는 그들 하나하나가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게 되겠지”


그렇게 원하는 결과를 이루었지만, 코스모스를 만들어내며 상당한 힘을 소비해버린 우리에게는 다시 힘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가장 먼저 힘을 소비한 공허는 오래전에 잠이 들었고, 그다음으로 힘을 소비한 내가 잠들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 둘이서 코스모스로 갈 생각인 건가?”


“너희가 다시 깨어날 때까지 잠깐만 돌아보고 올게. 나 혼자서 가는 것도 아니고, 소멸은 아직 여유가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너희보다는 느리겠지만, 우리도 힘을 회복할 거야.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할 거 없어”


코스모스를 만들면서 혼돈 또한 많은 힘을 소비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혼돈은 잠이 드는 것이 아닌, 곧바로 코스모스의 세계들을 돌아보고 싶어 했다.


“이제 쉬어야지”


“당신······”


“날 믿어줘. 네가 자는 동안은 내가 혼돈을 지킬게”


“그럼···혼돈을 부탁하겠다.”


공허가 잠이 든 이상, 그런 혼돈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소멸뿐이었다. 나는 소멸을 믿었고, 소멸이라면 혼돈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줄 수 있겠나?”


“당연하지”


“당신이 붙여준 내 이름도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소멸의 품속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힘을 회복하기 위해 모든 활동이 중지되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히아신스”


“······사랑한다 당신”


“당연하지, 나도 사랑해”


소멸의 손길을 느끼며 그렇게 나는 천천히 깊은 잠에 빠져들어 갔다. 내가 완전히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도 소멸의 다정한 속삭임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잘자, 히아신스”





*                *                  *                 *





“으윽······”


오랜 시간이 흐르고, 잠에서 깨어나며 나는 정신을 차렸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자, 나는 곧장 몸을 일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은 완전히 회복된 건가”


나는 가장 먼저 몸 상태를 살피며 힘이 완전히 회복된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힘을 확인하던 중, 갑자기 이상한 불안감이 나를 엄습해왔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군······일단, 소멸과 혼돈에게로 가는 것이 좋겠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공간을 뛰어넘어 코스모스가 있는 곳을 향했다. 나는 먼저 소멸과 혼돈이 있는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소멸과 혼돈은 어디에 있지?”


나는 코스모스가 있는 곳에 도착해, 혼돈과 소멸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군···”


구슬처럼 흩뿌려져 있는 수많은 세계의 그 어디에서도 소멸이나 혼돈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방금 잠에서 깨어났다고 하더라도, 내가 소멸과 혼돈의 기운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


기운을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본 순간, 또다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나는 곧장 다시 공간을 뛰어넘었고, 에덴으로 향했다.


“없다,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하지만 에덴의 어디에서도 혼돈과 소멸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 불안감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태초의 순환······그곳을 확인한다면, 적어도 살아있는지는 확인할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며 나는 다시 공간을 넘었고, 이번에는 태초의 순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이동해서 내가 태초의 순환을 확인한 그 순간이 바로······


“아니야···그럴 리가 없다···그럴 리가······”


계속해서 커지던 불안감이 결국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죽었을 리가 없단 말이다!!!!”


과거와는 다르게, 태초의 순환에서『 창조 』된 태초의 것들은『 공허 』만을 지날 뿐이었다.『 혼돈 』을 통과하며 완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했고, 그렇다고『 소멸 』하지도 못하는 듯 보였다.


“그들이···죽었을 리가······없다······!”


태초의 순환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적나라하게 소멸과 혼돈의 죽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들이···죽었을 리가···”


나는 커다란 절망감을 느끼며 곧바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동시에, 내 바로 옆 공간이 일그러졌고, 그 일그러짐에서 공허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


“이제야 잠에서 깨어난 건가”


“공허······”


“아무래도 태초의 순환을 확인한 것 같군”


“도대체 혼돈과 소멸에게······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혼돈은······죽었다”


공허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혼돈의 죽음을 최대한 침착하게 내게 전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들은 그 순간, 마음이 차갑게 내려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소멸은 살아있지”


“소멸이···살아있다고···?”


“그래, 녀석은 아직 살아있어”


“하지만 방금전에 내가 태초의 순환을 봤을 때는 분명······”


“다시 한 번 확인해봐라. 정말 소멸이 죽었는지, 너라면 바로 알 수 있을 테니”


그런 공허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곧장 고개를 돌려 태초의 순환을 바라보았다. 최대한 침착하게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을 찾기 위해 집중했다.


“아···아아아···!”


곧바로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곧장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불안정한 모습으로 꿈틀거리는 태초의 것들 사이로 그토록 바라던 소멸의 기운이 느꼈다.


“그곳에서 비켜라!”


나는 곧장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이동하며 힘을 사용했다. 그러자 꿈틀거리고 있던 태초의 것들 대부분이 그 자리에서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나는 그 속에 숨겨져 있던 소멸의 기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살아있었군···살아있었던 거야···”


아주 작게 빛나는 검은 기운의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그것은 소멸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확실한 증거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보다 훨씬 더 커졌군”


“그렇다는 것은···”


“그래, 소멸은 지금 힘을 회복하고 있다. 어쩌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지도 모르지”


공허의 말을 듣자 내 눈에서는 눈물이 미친 듯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한 손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남은 한 손으로는 소멸의 기운을 다정하게 끌어안은 채로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살아있다면···살아있기만 한다면, 분명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소멸의 기운은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아무런 대답도 없이 웅웅거릴 뿐이었다.


“사랑한다···정말로 사랑하고 있다······”


눈에서 나온 눈물은 또르르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대로 소멸의 기운으로 떨어져 내렸다.


“당신이 돌아올 그 날까지, 언제까지나 이 마음을 간직하면서 기다리겠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                *                  *                 *





나는 지금 에덴동산의 정상에 눈을 감고 누워 있다. 내가 눈을 감고 있는 이유는 소멸이 없는 세상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고, 내가 누워 있는 이유는 소멸과 함께했던 에덴동산의 추억을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게 느끼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가 보고 싶군”


이렇게 누워 있는 것이 지칠 때면, 나는 코스모스를 향하고는 했다. 약해진 세계에는 되살아날 기회를 주었고, 너무 강해진 존재에게는 책임을 부여하는 등 창조주로서의 일을 하면서, 동시에 소멸의 기운을 찾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분명, 이제 얼마 안 가서 소멸은 돌아올 거야”


천문학적인 시간이 흐르며, 작은 덩어리에 불과했던 소멸의 기운은 이제는 우리와 비견될 정도로 자라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소멸이 돌아올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앞으로···1조 년 정도인가······”


나는 그와의 재회를 기대하며, 또다시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생각을 멈추고 그저 가만히 있는 것에 더 가까웠지만, 생각 속에서만큼은 다시 소멸과 재회할 수 있었다.


“······”


그렇게 완전히 잠에 빠지며 소멸과의 추억을 되새기려던 그 순간···


“나···이 여자를 알고 있어···”


갑자기 누군가가 갑자기 내 뺨을 만지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였다면 바로 뿌리쳤겠지만, 나는 그 손길과 목소리를 듣자마자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기억이 안 나······내가 소중히 여기던 사람을 만났다는 확신이 드는데, 아무것도···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고,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지는 다정한 손길이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뜨고 내 앞에 있는 자를 바라보았다.


“당신···정말 당신인 건가···?”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마음이···마음이 미친 듯이 끌어 올랐다. 비록, 생긴 것은 달랐지만, 그토록 기다리고 바라왔던 소멸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자임을 곧바로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내 뺨을 쓰다듬고 있는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나···나는······으윽···!!!”


“당신···!!”


하지만 소멸은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더니 크게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그걸 본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고, 그와 동시에 의식을 잃은 소멸이 내 품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정신 차려라! 당신!”


몇 번이고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소멸은 제대로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곧장 힘을 사용했고, 그의 몸 상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랬군. 그렇게 된 거였어”


소멸의 육체 안에 거대한 기운이 잠들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이 육체는 정확히 말하면 소멸의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의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육체가 평범한 인간의 것이니, 당신의 힘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이 육체에 봉인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군”


주인을 공격할 수 없는 힘의 특성상,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주인의 몸을 파괴하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힘을 완전히 회복했다면, 이야기는 달랐겠지만···


“일단 몸을 바꾸는 것이 우선인데······”


소멸의 힘을 감당할 수 있는 육체로 옮길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소멸은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나와 상극인 소멸의 힘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젠장···! 이럴 때···이럴 때 혼돈이 있었다면······”


혼돈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의 육체를 옮겨줄 수 있었겠지만, 혼돈은 이미 죽어버린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군.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조처를 해야 겠어”


나는 우선 조금이라도 기억이 돌아올 수 있도록 소멸의 육체를 강화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본질에도 거대한 제약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만약 다시 나를 두고 떠날 거라면, 단 한 번도 내게 여지를 주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만약 내게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인다면, 아무리 완강하게 거부하더라도 난 당신이 에덴을 벗어날 수 없게 할 것이니”


그의 동의가 없는 이상, 이 속박은 완전하게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그가 이곳에 남겠다고 말한다면, 이 속박은 그의 육신과 영혼을 이곳에 완전하게 묶어버릴 것이었다.


“차라리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내 눈에 띄지 말았어야 했다. 차라리 그때까지 나를 피해 숨어있어야만 했다”


그가 이곳에 남는다면, 완전히 힘을 회복할 때까지 1조 년 정도는 이곳에 꼼짝없이 갇혀있어야만 했다. 나는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린 지금 그의 정신은 절대로 버티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그 모습을 보여준다면, 설령 지금의 당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당신을 놓아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품속에 있는 소멸을 또다시 강하게 끌어안았다.


“으······”


“정신이 드는 건가···?”


소멸은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정신을 차렸다. 잠에서 깬 소멸은 곧바로 내게 몇 가지를 물었고, 나는 그런 소멸의 질문에 한치에 거짓도 없이 진실되게 대답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 또한 인간인 지금의 소멸이 설우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남아서 기억을 찾을 건지, 아니면 이곳을 떠나 평범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것인지 선택하라”


몇 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마친 나는 소멸···아니, 설우현을 향해 물었다. 내 질문을 들은 설우현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윽고 마음을 먹은 것처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는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


설우현이 그렇게 말하기 시작하자마자, 제약은 망설임 없이 그의 영혼을 속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말을 완전히 마무리하는 그 순간······


“이곳에 남아서 기억을 찾을게”


철컥!


내 귀에는 그의 영혼이 완전히 속박되어버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





《 13년째 》


“날 속였어···! 날 속였다고!!”


이곳에 온 지 겨우 1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설우현이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위해서 코스모스의 시간을 멈추어 주었다.



《 53년째 》


갑자기 설우현이 칼을 들고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몇 번이고 내 목과 가슴을 찌르고 베었지만, 단 한 번도 나를 다치게 하지 못했다.


“죽여···죽여버릴 거야···!”



《 121년째 》


설우현이 갑자기 전원이 꺼진 것처럼 쓰러지더니 잠을 자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강해진 육체에 맞는 대량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일시적으로 수면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자는 모습은 처음 보는군”


나는 자고 있는 설우현을 무릎에 눕혀놓고, 그의 옆얼굴만을 바라보며 수백 년 정도를 가만히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그가 옆에 있기만 하다는 것만으로 너무나도 행복했다.



《 538년째 》


설우현이 잠에서 깨어났다. 잠을 자는 동안 적어도 수천 년에서 수만 년의 기억을 떠올린 것인지, 그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어딘가 사뭇 달라 보였다.


“이야기하자”


설우현은 내 옆에 앉았고, 떠올린 기억에 대해 하나하나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이야기를 느긋하게 경청하였다.



《 1392년째 》


또다시 그가 잠이 들었다. 나는 또다시 그를 무릎에 눕혔고,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


그의 얼굴을 보다 보니, 그 뒤로도 한 400년 동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관찰만 했던 것 같았다.



《 1만 2843년째 》


그동안은 잠이 들고 일어나면 나와 기억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가 일어나면 또다시 나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반복해왔다.


“어딘가 아픈 건가···당신···?”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눈에서는 초점이 없어졌고, 몸 어디에서도 힘을 주지 않았으며, 가만히 바닥에 주저앉아만 있었다.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내 특기이니, 언제든지 망가져도 괜찮다”


그의 정신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를 믿고 다시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나는 가만히 주저앉아 있는 그를 끌어안은 채로 또다시 길고 긴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 18만 7592년째 》


그의 정신이 갑자기 돌아왔다. 그는 홀린 것처럼 검을 잡더니, 갑자기 검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가 검을 연습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널 죽이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거겠지?”


날 죽이고 이곳에서 나가는 것.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검 연습을 도왔다. 내게는 그가 아무리 강해진다고 해도 날 죽일 수 있을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으니.



《 2백만 년 째 》


그가 이곳에 온 지 정확히 2백만 년이 지났다. 그동안 방대한 기억을 되찾으며 강해진 그는 검을 들고 다시 내게 덤벼왔지만, 결국 아무런 상처도 내게 입히지 못했다.


“도대체···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 1억 년 째 》


지난 시간의 대부분을 그는 망가졌다가 정신을 차리고, 채 5분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망가지는 것을 반복했다.


“차라리 죽여줘!! 죽여달라고!!!!!!”


그는 내 드레스 끝을 잡고 몇 번이고 소리쳤다.



《 10억 년 째 》


1억 년을 기점으로, 그는 정신이 망가지는 횟수가 급격하게 줄었다. 그는 다시 검을 잡고 훈련하기 시작했고, 10억 년이 되는 그때, 내게 처음으로 아주 얇지만, 상처를 내는 데 성공했다.


“······내가 강해지기는 했던 거구나”


“당신은 이미 충분히 강하다”


“널 죽이기에는 아직 부족하잖아”


그는 아직도 나를 죽이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듯 보였다.



《 300억 년 째 》


역시 소멸이라 그런 것인지, 그는 인간이 되어서도 겨우 300억 년 만에 검을 완전히 통달하는 데 성공했다.


“검에 끝에 닿았으니, 이제 날 죽일 건가?”


“아니, 너한테 도전하는 건 무극(武極)에 완전히 도달한 뒤야”


“이미 충분히 무의 극에 달했다고 부를 수 있을 텐데도?”


“······난 겨우 이 정도로 만족할 생각 따윈 없어”


하지만 그는 더욱더 높은 경지를 바라보고 있는 듯 보였다.



《 1200억 년 째 》


세상에 있는 모든 병기란 병기는 모두 극에 도달한 설우현은 어느 날, 그가 그토록 바라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무극(武極)에 도달한 것 같군, 축하한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


나는 그의 검날을 잡았고, 그대로 목으로 가져다 대면서 말했다.


“그럼 이제 날 죽일 건가?”


“······아니, 널 죽이는 건 이제 그만둘래”


아무래도, 이제는 더이상 그가 날 미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널 원망해봤자···아무런 의미도 없겠지”



《 5000억 년 째 》


병기를 깨우친 그는 내게서 지식을 배웠고, 마법 같은 다양한 것들을 깊숙이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는 극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심심하잖아, 그냥 하는 거지”


“그런 건가?”


“물론, 그것도 이제는 끝이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때부터 그는 다시 나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과거에 겪어온 일에 대해 그는 하나씩 풀어놓고 있었지만, 아직 나와 관련된 기억은 하나도 떠올리지 못한 듯 보였다.



《 9000억 년 째 》


그가 처음으로 나와 관련된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이 소멸이라는 사실도, 공허와 혼돈에 관한 기억도 떠올렸다. 아주 자그마한 것들이지만, 단순히 그가 기억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나도 행복했다.



《 9999억 9999만 9900년째 》


결국, 힘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보다 그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100년 더 빨랐다. 그는 기억을 다 되찾는 그 순간, 나를 꽉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미안해···너무 늦어서···”


그 말을 듣자, 나는 쌓여왔던 감정이 터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친 듯이 울고 있는 나를 본 그는 아무 말 없이 다시 한 번 더 꽉 끌어안아 주었다.



《 1조 년 째 》


나의 기다림은 그렇게 끝이 났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참 많은 것이 변했다 싶어서”


“많은 것이라면?”


“별건 아니야. 그냥, 이곳을 나갈······”


그리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여행이 시작될 것이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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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union : 과거의 인연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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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45화. 변화(2) 22.05.18 20 0 18쪽
48 44화. 변화(1) 22.05.03 35 0 20쪽
47 43화. 기습(2) 22.04.25 29 0 20쪽
46 42화. 기습(1) 22.04.14 26 0 19쪽
45 41화. 사후처리(事後處理) 22.03.28 25 0 16쪽
44 40화. 서리의 의미(3) 22.03.07 26 0 23쪽
43 39화. 서리의 의미(2) 22.03.01 24 0 18쪽
42 38화. 서리의 의미(1) 22.02.17 26 0 18쪽
41 37화. 세번째 이야기 - 스노우의 과거(2) 22.02.07 27 0 19쪽
40 36화. 세번째 이야기 - 스노우의 과거(1) 22.01.31 29 0 22쪽
39 35화. 스노우(3) 22.01.17 58 0 16쪽
38 34화. 스노우(2) 22.01.09 27 0 21쪽
37 33화. 스노우(1) 21.12.30 46 0 18쪽
36 32화. 습격(3) 21.12.21 35 0 18쪽
35 31화. 습격(2) 21.12.16 33 0 21쪽
34 30화. 습격(1) 21.12.11 39 0 19쪽
33 29화. 과거의 인연(6) 21.12.11 31 0 25쪽
32 28화. 과거의 인연(5) 21.11.26 37 0 20쪽
31 27화. 과거의 인연(4) 21.11.16 36 0 20쪽
30 26화. 과거의 인연(3) 21.11.16 31 0 21쪽
29 25화. 과거의 인연(2) 21.11.04 43 0 19쪽
28 24화. 과거의 인연(1) 21.10.31 27 0 17쪽
27 23화. 새로운 동료 21.10.18 36 0 23쪽
» 두번째 이야기 - 히아신스의 과거 21.10.09 31 0 25쪽
25 22화. 토너먼트(5) 21.10.03 29 0 16쪽
24 21화. 토너먼트(4) 21.09.21 35 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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