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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츠 님의 서재입니다.

Reunion : 과거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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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츠
작품등록일 :
2021.04.21 19:20
최근연재일 :
2022.06.17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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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6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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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과거의 인연(4)

DUMMY

“······정신이 드는 건가?”


플루이나의 품에 강제로 안긴 채 전이한 뒤로 기억이 끊겨 있었다. 나는 거대한 침대의 푹신함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고, 나를 무릎에 눕힌 채로 바라보고 있는 히아신스를 볼 수 있었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


그리고 그와 동시에 플루이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걸 듣자마자 몸을 일으키려 하였지만, 곧바로 힘을 잃은 듯 풀썩 쓰러졌다. 그렇게 힘없이 넘어가는 내 몸을, 히아신스는 곧장 붙잡으며 말했다.


“억지로 일어나려 할 건 없다. 강제로 전이를 진행한 탓에, 일시적으로 육체의 불안정함이 커졌을 테니”


“그래······그래 보이네···”


“몸이 매우 뜨겁다. 조금만 더 누워있는 것이 어떤가?”


정신이 조금씩 맑아져 갈수록, 전신의 격한 통증과 열기가 점점 더 생생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정신을 잃은 사이에, 육체가 또다시 더욱더 망가진 듯했다.


“누워있는다고 나을 만한 건 아니잖아······그냥, 앉아 있게만 해줘······”


내가 말하는 것을 들은 히아신스는 불만이 있어 보였지만, 그럼에도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몸을 일으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나는 히아신스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기대앉으며 말했다.


“플루이나”


“참으로 웃긴 꼴이로군, 그대여”


침대의 앞에 있는 거대한 의자에, 누운 것처럼 몸을 기대고 있는 플루이나의 입엔 기다란 곰방대가 물려있었다. 커튼이 쳐져 방안이 어두웠음에도 불구하고, 자욱하게 가득 채운 약초의 선명한 연기를 본 나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틈이 날 때마다 약초를 넣은 연초를 피우는 버릇은 아직 고치지 못했나 보군”


“뭐 어떤가? 지금의 너도 이 약초 연기의 강한 진통 효과 덕분에 나와 대화할 수 있는 것이잖나”


플루이나는 그렇게 말하더니 곰방대를 탁자에 내려놓았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너의 《 영원 》을 찾은 기분은 어떻지?”


그렇게 말하며 침대 끝 부분에 가볍게 걸터앉은 플루이나는, 나와 손을 잡고 있는 히아신스를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삶은 행복한가? 이제는 스스로가 살아 있다는 확신을 할 수 있을 것 같나? 모두 아니라면······그럼에도 아직 공허한가?”


“나는······”


“아니, 대답하지 않아도 알 것 같군. 그 눈만을 보아도 나와 지냈을 때보다 너의 공허함이 더욱더 커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도 히아신스가 있으니 이 정도에 그쳤다는 걸 알아야 할 거야. 히아신스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정말 괴물이 되어있었을 테니까”


“뭐······나와 헤어진 뒤로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을 테니, 그대의 말대로 이 정도에 그친 것을 차라리 다행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지”


플루이나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잡았고, 그대로 침대 위를 기어오듯이 다가와 내 옆에 붙었다. 오른손에는 히아신스가, 왼손에는 플루이나가 붙어있는 그 풍경은, 내게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물을 것이 있다”


나는 곧바로 플루이나가 잡은 왼손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플루이나는 내가 손을 빼지 못하도록 더욱더 꽉 붙잡았고, 그대로 얼굴을 내밀더니 내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녀와는 이미 잤나?”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내 귀에 얼굴을 가져다 댄 플루이나를 손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이상한 걸 묻지 마”


“서로 알몸이 되어 하나가 되는 행위는 가장 마음을 풍족하게 하기 쉬운 방법이다. 하지 않았다면, 당장에라도 하라고 추천할 정도지. 그게 아니면······혹시 나와 하고 싶은 건가?”


플루이나는 갑자기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어깨가 드러날 정도로 옷이 벗겨진 것을 본 나는 표정을 찌푸렸고, 플루이나는 그런 내 표정을 보더니 오히려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여전히 성불구자나 다름없는 성욕이로군. 정말로 달려 있긴 한지 궁금할 따름이야. 아! 그래, 그럼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어떤가 히아신스? 직접 본 너의 평가를 이야기하면 어떻지?”


“그는 모든 것이 완벽한 존재다. 그런 부분에서는 내가 평가할 것이 아닌 것 같군”


“그건 남자 구실을 못한다는 걸 돌려서 말하는 건가? 그렇다면 인정하는 거라고 받아들이도록 하지”


“그게 아니다···! 어·········그는···”


살짝 얼굴이 빨개진 히아신스는 그대로 얼굴을 내밀었고, 소리가 새지 않게 능력까지 사용하면서까지 플루이나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하······! 그래, 재밌군, 재밌어! 한때 내가 사랑했던 남자의 성 취향을 아는 건 이런 느낌인 건가?”


“도대체 뭘 이야기 한 거야······”


“여자들만의 이야기다, 그대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말도록”


“그러니까 무슨···”


“쉿”


플루이나는 그렇게 말하며 내 말을 멈추더니, 그대로 내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차가운 냉기의 기운이 내 피부를 타고 전신으로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일단, 열을 낮추도록 하지. 이렇게 한다면 잠시 동안은 편해질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한결 낫네”


전신의 열이 플루이나의 냉기에 의해 조금씩 조금씩 내려가자, 나는 숨통이 트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대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조금 더 자신을 챙길 줄 알아야 한다. 나이만 따지면 엘프족의 시초도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만큼 많은 주제에, 어찌 이리도 감각이 둔한지”


“이 정도면 이미 충분히 챙기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이렇게 이런 모습이 되었나? 자기가 가진 것들을 다 나누어 주었고, 결국엔 사용하던 육체마저도 조각내어 나누어 버릴 만큼 자신을 챙긴 결과가 이런 것이란 말인가?”


“그건 내 선택이었어.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이용해 그들을 구했고, 그 대가로 그들의 삶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 말이야”


“그래, 그대는 그런 방식으로 달려왔고, 결국 그 끝에 도착했지. 하지만 이제는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하며 쉬어야 할 때다. 모두가 그대의 행복을 바라고 있어. 그대가 이런 고통을 받기를 바라는 이는 이제 없단 것을 알아라”


그런 플루이나의 말을, 히아신스는 아무런 대답 없이 가만히 듣고 있었다. 히아신스는 끼어드는 것 없이 플루이나와 나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볼 생각인 것 같았다.


“지금의 모습을 보아라. 불안정해진 육체로 인해 매일매일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지금의 모습이, 진정 그대가 바라던 행복인가?”


“하지만 내 곁에는 히아신스가 있어. 나는 그거면 충분히 행복···”


“아니, 충분하지 않다. 그 눈에 깃든 공허함은 히아신스만으로 채울 수 있을 만큼 작은 것이 아니야. 그대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을 텐데?”


말을 할수록 플루이나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 슬프고 괴로운 듯한 그 표정에 깃든 감정은, 명백한 동정심이라는 감정이었다.


“그대는 지금도 자신의 허무함을 채울 수 있는 새로운《 자극 》을 찾고 있다. 몇 번이고 그대는 히아신스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겠지만, 나는 확실하게 알 수 있어.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역시, 그의 마음을 채우기에 나로는 부족했던 것이었나”


플루이나의 말을 들었음에도, 히아신스는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조용히 납득했다. 하지만 나는 곧장 그런 히아신스를 강하게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아니야. 나는 너만 있으면 충분해. 히아신스, 너만 있으면···!”


하지만 내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오히려 히아신스는 진정하라는 듯이 나를 다정하게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나를 생각해서, 여러 고통들을 참아왔던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이겠지. 그만큼 이건,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부족하단 말이 아니다. 단순히 내가 그런 당신의 마음을 전부 채울만한 존재가 아니었을 뿐이라는 이야기지”


“아니야, 이 마음 모든 곳에는 너에 대한 사랑이 있어. 너 말고 다른 것들로 내 마음을 채울 일은 영원히 없을 거야”


“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그런 만큼 당신의 행복을 바란다. 나로부터 얻을 수 있는 행복만이 아닌, 다른 이들로부터의 행복도 함께 당신의 마음을 채우기를 바라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상처받고 망가진 당신의 마음은 나만으로는 전부 고칠 수 없다는 걸,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니”


히아신스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히아신스의 품에서 떨어진 나를 본 플루이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녀의 말이 맞다. 단순히 오랜 시간을 살아오며 그대의 정신이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그 결과 히아신스에 대한 애정만으로 채울 수 없는 크기가 된 것이지. 절대, 그대의 히아신스에 대한 마음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건 나도 알아, 그저 납득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그걸 인정하면 히아신스에 대한 내 사랑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으니까”


플루이나가 말한 모든 것들을 나도 알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 있는 공허함이 히아신스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도, 이 공허함이 해결되지 않는 한 내가 다시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일은 없으리란 것도 전부 알고 있었다.


“그대도 점점 마음속 공허함이 다시 커져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히아신스가 아닌 다른 것들에게 흥미나 재미를 느낄수록 새로운 자극에 대한 열망은 커져만 갔겠지”


“······”


“그러니 아무리 몸이 불안정해지더라도, 마수들이 있는 게이트에 들어오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을 죽이려 하는 존재들의 살의에서, 그대는 오히려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더욱더 그 자극을 느끼고 싶었겠지”


“······”


“게다가 그 육체의 불안정함도 고칠 수 있으면서 고치지 않는 것이잖나. 고통만큼이나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강렬한 자극은 얼마 존재하지 않으니, 그 고통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공허함을 채우고자 했겠지”


나는 그런 플루이나의 말을 듣고는 전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래, 전부 맞아. 그래서 너는 내게 뭘 말하고 싶은 건데? 내가 히아신스가 아닌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는 거로, 너는 내게 무엇을 바라는 거지?”


“나는 내가 무언가를 얻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지”


“행복을 바란다는 말은 누구든지 할 수 있어”


“히아신스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자극을 받아들인다면, 그제서야 진정으로 그대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언젠가 허무한 마음을 전부 다른 감정으로 채우게 된다면, 비로소 그대는 행복을 찾을 수 있겠지”


플루이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고, 탁자로 걸어가 곰방대를 집어 들었다.


“그만큼이나 나는 그대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을 나누어주면 살아온 그대가, 이제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어”


“진짜 플루이나도 아닌 네가?”


“그래, 그대의 눈에는 내가 진짜 플루이나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설령 내가 진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는 플루이나 드 엘리시온 쿠힐라다. 나는 플루이나로서 그대의 행복을 바라는 것뿐이지”


플루이나가 입에 곰방대를 물자 금방 연기가 피어올랐다. 약초의 쓴 향기가 순식간에 방 전체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뭐, 납득이 가지 않을 수 있겠지만, 일단 들어보아라. 처음부터 하나씩 전부 설명해 주도록 할 테니”


플루이나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의자에 앉았고, 곰방대를 입에 문 상태로 계속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대가 그대의 일행과 함께 게이트에 들어왔던 그 순간에, 나는 평범한 마수에 불과했다. 그저 《 타인의 기억을 읽는 능력 》과《 환상을 만드는 능력 》이라는 별거 아닌 재주가 있는 조금 특별한 마수였지”


“·········설마, 그 마수가 내 기억을 읽으려 했었나?”


“그렇다. 그 마수는 능력을 사용해 그대의 플루이나에 대한 기억을 읽었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내게 몸을 빼앗기게 되었지”


“단순히 기억을 읽은 것만으로, 몸의 지배권을 빼앗기다니······그것참 놀라운 일이군”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다. 마수에게 지배권을 빼앗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지”


“당연한 일?”


“그야 당연한 일이지······”


히아신스가 감탄하는 것을 본 플루이나는 오히려 광포하면서도 압박감 있는 미소를 짓더니, 의자에 몸을 기대고 팔을 괴면서 말했다.


“왕은 그 무엇에도 지배받지 않으니까 말이다”





*                *                  *                 *





“그러니까, 형님이 너희한테 전생에 관한 걸 알려주었단 말이야?”


“최근 며칠 동안 무언가를 계속 고민하던 게 그것 때문이었군요”


수도 엘리시온을 향한 지 또다시 하루가 흘렀다. 마차는 박살이 났으니, 일행은 걸어서 엘리시온에 도달해야 했고,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었다.


“그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너희 둘의 전생에 대한 것이나, 우현과 히아신스의 정체, 이곳이 내 전생의 세계라는 것까지도 모든 것이 전부 믿기 힘들 만한 내용들 뿐이었으니”


“······나는 딱히 생각의 정리가 필요한 건 아니었어. 그냥 우현이를 믿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생겨서 그런 거지. 왜 믿어주지 못할 걸까 후회가 되더라”


그런 스노우와 한버들의 말을 들은 마리아는 곧바로 작은 감탄을 내뱉었다. 마리아는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한버들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다정하게 감싸면서 말했다.


“버들, 자신을 탓할 필요 없어요. 스노우의 말대로, 갑작스럽게 믿기 힘든 이야기인 건 맞으니까요”


“근데, 형님이 너희들을 꽤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긴 한가 보네. 그걸 이야기했다는 건, 형님이 너희에게 마음의 공간을 내준 것과 다름없으니까 말이야”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스노우는 한진성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하지만 한진성은 얕은 한숨을 내쉬더니, 어이없어하며 스노우를 향해 말했다.


“어이가 없네. 넌 형님이 너희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긴 시간을 살아왔다는 걸 알면서 그런 걸 묻는 거야?”


“인간의 마음이라는 건, 알면 알수록 더럽고 추한 법이에요. 우현님은 그런 자들에 의한 상처를 수없이 받아왔고요. 물론 좋은 일이 있을 때도 있었겠지만, 존재의 영혼에 더욱 깊게 새겨지는 것은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종류의 감정이니까요”


“한낱 인간들도 100년도 채 못사는 짧은 세월을 살아가며 그렇게 많은 상처를 받는데,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을 살아온 형님이라고 다르겠냐”


한진성과 마리아의 슬픈 표정을 보며, 한버들과 스노우는 그제야 설우현이 자신들에게 과거를 이야기해준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살아있다는 건 기쁜 일이지만, 살아간다는 건 슬픈 일이지. 그만큼 형님은 너무 많은 괴로움을 느껴왔어. 수많은 이별과 배신을 겪었고, 몇 번이나 망가졌겠지.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닐 거야”


“하지만 우현이 망가지는 모습이라니······나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굳건하게 강해 보였는데······”


“스노우의 말대로, 우현님은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을 만큼 강하죠. 그런 우현님의 약한 모습을 생각하기가 힘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스노우는 단순히 우현님이 저희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뿐이라는 걸 알아야 해요”


마리아는 머릿속으로 며칠 전 숙소에서의 밤을 떠올렸다. 한밤중에 숙소에서 빠져나와 히아신스의 품에 기대서야 겨우 잠이 들고, 그 상태에서도 고통스러워하는 설우현의 모습을 훔쳐보았던 기억이 순식간에 마리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우현님은 저희가 아닌 히아신스님의 앞에서만, 아주 가끔 약한 모습을 보여주시죠. 그리고 그건 우현님이 자신의 상처받은 모든 부분까지 보여줄 수 있을 만큼, 진심으로 히아신스님을 사랑하기 때문일 거예요”


“뭐, 형님은 남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쉽사리 보여줄 수 있을 만한 인생을 살아오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힘들어하면서, 남을 도우려고 노력하는 이상한 면도 있지. 육체와 정신이 그렇게 망가지고도 남을 도우려 하는 건, 형님밖에 없을 거다”


“맞아요, 우현님은 본인 스스로를 챙기려고 하지 않는 점이 있죠. 항상 자기 자신도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면서, 언제나 자신을 희생해 남을 돕는다니까요. 그런 자애로운 모습을 본 제가 어떻게 우현님을 마땅히 경애하지 않을 수 있겠나요?”


마리아가 그렇게 말하며 뺨을 붉히자, 그걸 본 한진성은 살짝 표정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나는 널 볼 때마다 마교의 부교주가 생각나”


“어머, 저와 같은 신실한 신도였나 보네요?”


“······그렇지, 너무 신실해서 문제였지만 말이야”


그렇게 대화를 하며 걸은 지도 어느새 수 시간이 흘렀고, 거대한 평원을 지나자 길 끝에 점점 거대한 성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한, 수도 엘리시온의 거대하고 웅장한 모습을 본 한진성은 곧장 감탄을 내뱉으면서 말했다.


“엄청나게 크구만. 웬만한 도시를 몇 개나 합쳐도, 이 성채 하나보다 작을 수도 있겠어”


“이 정도면 수도가 아니라, 이것 자체로도 하나의 나라라고 부를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러네요, 한 나라의 수도인 것을 감안하고도 정말 굉장한 크기이네요. 제가 전생에 살았던 나라의 수도도 이곳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커져가는 엘리시온의 막대한 위용을 본 일행은, 순간적으로 말문을 잃은 듯 보였다.


“엘리시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신분증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일행이 엘리시온의 성문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자, 경비병들이 곧장 길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였고, 곧장 하얀 갑옷을 입은 여자가 성문 쪽에서 다가오며 경비병을 향해 말했다.


“폐하의 손님이시다. 당장 길을 비켜라!”


“메르세데스님!!”


경비병은 하얀 머리와 갑옷을 보더니, 경악하며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었다. 메르세데스는 그런 병사들을 지나 일행을 향해 다가왔고, 가슴에 손을 얹더니 가벼운 인사를 하며 말했다.


“수도 엘리시온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태사의 일행분들 그리고 폐하의 환생이시여”


일행은 아무 말 없이 그런 메르세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스노우는 갑자기 자신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았다.


“심장이 날뛰는군······”


두근 두근


“이곳···엘리시온에 도착해서 그런 건가······?”


소설 속에서나 보았던 거대한 성채, 한눈에 담을 수도 없는 그 거대한 위용을 보며 스노우는 왠지 모를 고양감을 느끼고 있었다.


“폐하와 태사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일단, 성으로 가도록 하시죠”


메르세데스의 안내를 받으며 일행이 이동을 시작하던 그때까지도, 스노우는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스노우? 거기서 뭐 해?”


“·········”


“스노우···? 스노우···!”


“······미안하다 버들. 내가 잠시 다른 생각을 했나 보군”


한버들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스노우는 곧바로 엘리시온의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스노우는 방금 전 느꼈던 고양감과 기이한 느낌을 조심스럽게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지배욕······인가”


마치, 무언가를 지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만 같았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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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화. 과거의 인연(4) 21.11.16 37 0 20쪽
30 26화. 과거의 인연(3) 21.11.16 32 0 21쪽
29 25화. 과거의 인연(2) 21.11.04 43 0 19쪽
28 24화. 과거의 인연(1) 21.10.31 28 0 17쪽
27 23화. 새로운 동료 21.10.18 36 0 23쪽
26 두번째 이야기 - 히아신스의 과거 21.10.09 31 0 25쪽
25 22화. 토너먼트(5) 21.10.03 30 0 16쪽
24 21화. 토너먼트(4) 21.09.21 35 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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