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오일제님의 서재입니다.

천하제일인 말고 장사할게요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공모전참가작 새글

오일제
작품등록일 :
2024.05.08 17:48
최근연재일 :
2024.06.30 22:00
연재수 :
56 회
조회수 :
71,891
추천수 :
1,423
글자수 :
308,562

작성
24.05.08 17:49
조회
3,592
추천
39
글자
12쪽

DUMMY


“아들아. 나에겐 꿈이 있었다”



노인의 말은 쇳소리가 섞여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사내라면 모름지기 온 천하에 이름을 크게 떨치고 가문을 빛내야 하지 않겠느냐. 비록 나의 재주가 보잘것 없어 그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


“그래도 늘그막에 너를 얻은 것이 축복이다. 다행히 너는 무공에 천부적인 자질이 있다고 하니···”


누워있던 노인이 힘겹게 손을 들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다.


“강호에 우뚝 서는 사내가 되어라. 부디 이 가문을 빛내주려무나”


그는 곧 임종을 맞이할 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힘으로 내 손을 꽉 붙잡았다.


“걱정마십시오, 아버지”


노인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눈이 무언가를 꿈꾸기라도 하듯 몽롱하게 변했다. 단단히 붙들었던 손에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마지막 내쉰 숨과 함께, 그의 영혼이 육신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의 혼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저승이라는 곳. 또는 저 우주 어딘가일 수도 있고.

나처럼 생뚱맞은 어딘가로 환생하게 될 지도 모르고.



어딘가로 긴 여행을 떠나가는 그의 영혼에게, 이제는 솔직하게 진심을 털어놓았다.


“이 가문을 꼭 빛내보이겠습니다. 번쩍번쩍거리는 황금으로요”


어찌되었든 빛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



햇수로 5년.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던 청년이었던 내가 이곳 중원에 난데없이 떨어진 뒤 지나간 세월이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악착같이 모아온 돈으로 마침내 나만의 작은 가게를 열게된 바로 그 날의 일이었다. 한평생 나를 짓누르던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비로소 벗어나 이제 꽃길을 걷는 일만 남았다 싶었는데, 자축의 치킨 사들고 2평 고시원으로 돌아가던 나를 덮친 거대한 트럭 한 대.


그리고 이어진 암전(暗轉)...


정신이 다시 들었을 때, 나는 이곳 중원 세계 속 열 다섯살 사내 녀석의 몸에 들어와 있었다. 어디에 박혀 있는지도 모르겠는 시골 촌구석 마을 속, 기울어져가는 가문의 유일한 계승자 신분으로.


이것이 환생인지, 빙의인지, 환혼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비교적 빠르게 이곳 생활에 적응한 편이었다. 몰락한 가문이라 하더라도 그럴싸한 집과 하인들이 있었고, 병들고 노쇠한 아버지 뿐이지만 그래도 가족이라는 것도 있었다. 천애고아로 태어나 그야말로 맨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했던 대한민국에서의 형편보다는 훨씬 나은 처지가 아니던가.


아무튼 나를 아들이라고 부르는 노인의 병수발을 하며 지내다보니, 이곳에서의 시간도 어영부영 이렇게 5년씩이나 지나버렸다.


난데없이 이곳 중원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존재조차 알 길 없었던 생면부지의 남이었지만, 그가 나를 부르는 ‘아들’이라는 단어에는 알게 모르게 나를 옭아매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 육신이 이 세상을 떠났으니, 비로소 나는 완전히 자유로워진 셈이다.



집과 땅을 팔고 하인들도 모두 떠나보냈다. 가재도구까지 모두 처분하고 나니, 손에 남겨진 것은 은전과 동전이 여럿 담긴 전낭 하나 뿐이다.


결코 많다고는 할 수 없는 돈이지만 아쉬움은 없었다. 처음 느껴보는 묵직함이다. 촌구석의 몰락한 가문을 정리한 것 치고 꽤나 남은 셈 아닌가. 이 정도면 내 꿈을 펼치는 밑천으로는 부족함이 없을 터.


덜거덕. 덜거덕.


가족도 없고 갈 곳도 없어 끝까지 남아있던 하인, 대식이가 커다란 마차와 짐수레를 끌고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시라도 빨리 마을을 떠날 생각에 몸이 달아있던 나는 벌떡 일어나며 그를 반갑게 맞았다.


“마차 하나 구하는데 왜 이리 오래 걸렸어?”


녀석이 대답없이 눈만 데굴데굴 굴린다. 그의 표정을 보고 뭔가를 눈치챈 나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네 이놈!”


불호령과 함께 수레 뒤쪽에서 홀연히 한 노인네가 휘리릭 몸을 뒤집으며 나타났다. 애초에 만나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 노인에게서 도망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재빨리 표정을 풀고 공손히 허리를 접으며 인사를 올렸다.


“스승님! 이 누추한 곳까지 번거로운 걸음을 하시다니요”


“흥, 요 며칠새 찾아오지 않길래 변고가 있음을 알았다”


염소 수염에 쭉 째진 눈, 말라 비틀어진 몸에 꾀죄죄한 행색. 당최 무림 고수의 위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양반이 몇년째 나에게 무공을 가르치고 있는 변노인이라는 작자이다.

나에게 천부적인 자질이 있다며 무공을 가르쳐보겠다고 하는 노인네의 말에 홀딱 넘어가, 우리 영감이 이것 저것 많이도 가져다 바쳤지.


“상을 당했으면서도 나에게 알리지도 않은 것을 보면 뻔하지. 무공 수련을 그만두고 도망칠 수작을 하고 있음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제가 왜 도망을 칩니까?”


“도망칠 수작이 아니라면, 이 마차와 수레들은 무엇이냐! 집도 팔고, 가재도구도 다 처분해버렸다며?”


이 사실들을 미주알 고주알 일러바친 놈이 누구냐. 매서운 눈길로 대식을 노려보자니, 녀석이 뜨끔하는 표정을 지으며 스승의 뒤로 몸을 숨긴다. 나는 더이상 숨기려는 것을 그만두고 어깨를 늘어뜨리며 푸념했다.


“스승님. 제 나이가 벌써 약관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제 삶은 스스로 정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어딜 가려는 수작이냐? 네 무공이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개봉입니다”


노인네가 그 작은 눈을 땡그랗게 떴다.


“헛··· 설마 무림맹?!”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슬픈 눈으로 먼 산을 바라보았다. 내 표정을 보고 지레짐작한 스승은 인상을 찌푸리며 재차 물었다.


“네놈 아비의 유언인 것이냐? 그토록 가문을 일으켜야 하느니 뭐니 하더니···”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를 팔아먹은 것은 미안한 일이지만, 이렇게라도 내 앞길에 좀 도움이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내 혼신을 다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변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효심은 갸륵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어림없는 일이다. 쓸데없는 생각말고 짐 풀어라. 내 밑에서 몇년만 더 구르자”


“아, 좀!”


또 다시 수 년을 이곳 촌구석에서 허비하라는 말인가. 나도 모르게 울컥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디서 감히···말대꾸를?!”


변노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성큼 한 발을 내딛었다. 단 한걸음이었을 뿐이지만 순식간에 그와 나의 간격이 숨결이 마주할 정도로 좁혀졌다. 하늘 높이 치켜든 그의 지팡이가 나의 머리를 노리고 번쩍! 내리쳐진다.


그러나 이 정도에 당할 정도라면 어찌 변노인의 품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내리쳐지는 지팡이의 결을 따라 살짝 고개를 비트니, 사부의 지팡이가 헛되이 허공을 갈랐다. 변노인의 눈에 감출 수 없는 당혹감이 스치더니, 다시 입술을 일자로 다물며 합! 짧은 기합을 내질렀다.


지팡이가 부르르 떨리며 변화를 일으킨다. 두 개, 네 개, 여덟 개··· 찰나의 순간 수십 개로 불어난 지팡이가 사방을 덮쳐왔다.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발을 놀렸다.


風吹草不動. 풍취초불동. 바람이 불어도 수풀이 흔들리지 않는다.


희뿌연 잔상을 일으키며 스승의 매서운 공격을 모두 피해냈다.


그뿐이랴? 그의 뒤에 몸을 감추고 숨어있던 얄미운 대식의 머리까지 모질게 쥐어박고 빠져나왔다.


“아이코!!”


대식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나뒹굴고, 변노인은 혀를 차며 나를 바라보았다.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모습이 기쁜 것인지 놀란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스승이란 작자가 구결 몇 개만 던져주고 매일 놀러다니기만 했으니, 내 성취가 어느새 이정도까지 올라왔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여간 피하는 것만큼은 중원 제일이구나. 어디서 맞아 죽지는 않겠다”


“다 스승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얌전히 포권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지팡이가 다시 날아왔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콩! 지팡이가 내 정수리를 가볍게 찍으며 스승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불과 몇 년 만에 여기까지 이른 네 재능이 놀랍긴 하구나. 하지만 아직 풍취팔보(風取八步)의 극의에 도달하려면 한참 멀었다. 게다가 중원 무림의 음험함이란 이루 설명하기 어려운 법이야. 너는 아직 사람 한 명, 짐승 한 마리 베어본 적이 없으니, 그 어떤 실전경험도 없는 너를 어찌 내가 안심하고 출도시킬 수 있겠느냐?”


내가 연쇄살인마도 아니고 왜 사람들과 짐승들을 베어 넘겨야 한단 말이냐. 스승이 걱정하는 말들에 전혀 동의할 수 없지만, 그의 말을 반박하는 대신 넌지시 승부수를 던졌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저와 함께 개봉에 가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뭐, 나보고 무림맹에 가라고? 어림도 없는 이야기!”


스승이 펄쩍 뛰는 것을 보며 속으로 씨익 미소지었다. 넙죽 따라올 것 같았으면 물어보지도 않았다. 이때다 싶어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손을 감싸쥐며 흐흐 멎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스승님. 이 정도면 당분간 술과 음식을 드시고 놀음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화양루의 노식이에게도 잘 말해놓았습니다”


흠칫 놀라는 듯 하던 노인네는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자신의 손 안에 들어온 것들의 무게를 재었다. 눈썹이 찡그려진 채 펴지지 않자, 나는 재빨리 동전 한 냥을 더 그의 손에 쑤셔넣었다. 주름살 가득한 손에 동전 몇 개가 더 들어가고 나서야 그의 눈썹이 일자로 펴졌다. 속이 쓰라렸다.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진 그가 목소리를 흠흠 가다듬으며 물었다.


“아비의 유언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네놈 성격에 이곳에 남아있을 녀석은 아니지. 산골에 처박혀서 이 늙은이만 상대하다 보니, 이제 한창 피어나는 나이인 네놈이 지루해하는 것도 이해한다”


손바닥에 돈이 쥐어지자 갑자기 생겨난 공감능력. 못말리는 주정뱅이이자 도박 중독자인 그의 일관된 모습에 감탄하는 사이, 변노인은 추억에 젖은 듯한 눈빛으로 저 먼 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무림(武林)이라··· 그곳에서 젊고 혈기넘치는 고수들을 만나며 부대끼다 보면 얻는 것도 적지 않겠지. 지금은 무엇 하나 두려울 것이 없겠지만, 세상 일이라는 것은 네 마음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몇번 고생을 하다보면 너도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예, 예”


건성으로 대답하는 나를 스승이 못미더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너같이 재능이 뛰어난 아이는 게으름이 가장 큰 적이다. 내 곁을 떠났다고 수련을 게을리한다면, 네 아비의 숙원대로 큰 빛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야. 알겠느냐?”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깊게 숙였던 허리를 피고 나니, 어느새 스승 변노인은 눈 앞에 없었다.


저 멀리 돈을 절그럭거리며 잰걸음으로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떠나는 것을 걱정하고 아쉬워하는 듯 했던 말투와는 달리, 발걸음이 그리 경쾌할 수가 없었다.


“하··· 많이도 뜯겼다”


소중한 밑천이 잠깐 사이에 꽤나 거덜나 있었다. 그 돈이 대낮부터 술이나 퍼먹고 도박이나 하는데 쓰인다고 생각하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용돈을 두둑히 쥐어주지 않았으면 정말 나를 계속 붙잡아 두거나 쫓아온다고 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내 원대한 꿈도 다 물거품이 되겠지.


눈을 찢으며 대식을 바라보니, 아직까지도 머리를 감싸쥔 그가 눈물을 그렁그렁한 채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앞으로의 긴 여정을 계속 함께 할텐데 마냥 구박할 수만은 없다. 이미 뜯긴 것은 뜯긴 것. 더이상 잔소리 하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번쩍 손을 들어 저 드넓은 미지의 땅을 가리켰다.


“가자! 떠나자! 가문을 번쩍번쩍 빛내보자!”


“예!”


재빨리 마부석에 올라탄 대식이 기운차게 고삐를 털었다. 늙은 당나귀들이 투레질을 하며 한걸음 한걸음 내딛고, 그를 따라 마차와 수레가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한다.


다리를 쭉 뻗고 등을 기대며 목 뒤로 팔을 베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나의 중원 생활,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천하제일인 말고 장사할게요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제목 변경 공지 (기존 : 장사치의 무공이 너무 강함) 24.06.27 37 0 -
공지 제목변경 및 연재시간 공지 (PM 10:00) 24.06.18 475 0 -
56 개봉으로 (3) NEW +1 19시간 전 179 7 13쪽
55 개봉으로 (2) +1 24.06.29 280 7 12쪽
54 개봉으로 (1) +1 24.06.28 351 8 13쪽
53 삼, 오 (三, 五) (2) +1 24.06.27 423 14 13쪽
52 삼, 오 (三, 五) +1 24.06.26 493 12 12쪽
51 의혹 (3) +1 24.06.25 551 16 12쪽
50 의혹 (2) +1 24.06.24 567 15 12쪽
49 의혹 (1) +1 24.06.23 651 15 12쪽
48 숲에 부는 바람. +1 24.06.22 712 18 12쪽
47 딱히 바라는 것은 없고. +1 24.06.21 787 17 12쪽
46 금칠 +1 24.06.20 819 22 12쪽
45 이젠 신물이 난다. +1 24.06.19 911 19 12쪽
44 남궁세가 (2) +1 24.06.18 882 20 12쪽
43 남궁세가 (1) +1 24.06.17 930 20 12쪽
42 피의 냄새 +1 24.06.16 941 21 11쪽
41 하얗고 붉은 것들 +4 24.06.15 969 19 12쪽
40 알량한 자비심을 버리고 +2 24.06.14 975 20 12쪽
39 격전 +2 24.06.13 983 21 12쪽
38 날카로운 검 끝에 +2 24.06.12 957 23 12쪽
37 주인이 되어주마 +1 24.06.11 985 21 12쪽
36 반강 (4) +2 24.06.10 1,040 24 12쪽
35 반강 (3) +1 24.06.09 1,064 22 13쪽
34 반강 (2) +2 24.06.08 1,088 24 13쪽
33 반강 (1) +2 24.06.07 1,152 27 13쪽
32 바람 잘 날 없다. +1 24.06.06 1,175 25 12쪽
31 금화역조 +1 24.06.05 1,193 22 12쪽
30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 일 (2) +1 24.06.04 1,238 25 12쪽
29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 일 (1) +1 24.06.03 1,251 27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