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오일제님의 서재입니다.

천하제일인 말고 장사할게요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공모전참가작 새글

오일제
작품등록일 :
2024.05.08 17:48
최근연재일 :
2024.06.30 22:00
연재수 :
56 회
조회수 :
71,854
추천수 :
1,423
글자수 :
308,562

작성
24.06.12 00:15
조회
955
추천
23
글자
12쪽

날카로운 검 끝에

DUMMY

눈부시게 하얀 복장, 단 한 올의 삐짐없이 잘 정돈된 머리카락.

매끄러운 얼굴과 부드러운 미소 사이로 언뜻 언뜻 요사스러운 기운이 묻어나오는 중년사내.

반강이 철선을 느릿느릿 부치며 천천히 나에게 걸어왔다.


내가 그를 이겨낼 수 있을까?

그것은 장담할 수 없었다.


백리가주와 백리담 쪽을 흘깃 돌아보았다. 그들이 운기조식을 마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다리려면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을 끌려면 끌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숨을 깊게 들이 마시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하나, 둘, 셋···


이제 나와 그의 대결이라는 것이 명백해진 상황.

수백··· 아니 수천명의 무림인들의 시선이 나와 반강에게로 집중되었다.


“한가지만 더 물어보자”


내 질문에 반강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엇을?”


“그 부채, 시원하긴 하냐?”


파팍–


녀석의 답변을 들을 것도 없이 땅을 박차며 거리를 좁혔다. 어차피 내가 생각하는 정답은 ‘아니오’로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분명 수없이 많은 이들의 피가 묻어있을 터인데, 그것으로 바람을 만들면서 어떻게 시원할 수가 있겠는가?


그의 하체 쪽으로 깊숙히 파고든 내가 급제동과 동시에 훌쩍 뛰어올랐다. 무릎으로 박차는 듯하다 몸을 빙글 돌려 뒤꿈치로 내리찍었다. 녀석에게 도달하기까지 두번의 변화와 세번의 속임수가 있었고, 모두 다 통하지 않았다.


어렵지 않게 내 공격을 피해낸 그가 검은 부채를 확 펼쳐냈다. 그러자 부채가 마치 온 세상을 가린 듯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부채가 다시 접혀지고,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나타난 그가 매서운 기세로 나를 내리쳤다.


風捉摸不定. 풍착막불정. 바람은 붙잡을 수도, 헤아릴 수도 없다.


상대방의 기세가 거셀수록 나는 더욱 더 가볍게 날아오른다. 몸을 비틀어 피하는 척 하다가, 그대로 바람을 타고 그의 뒤쪽 방향으로 돌아갔다. 내 손가락이 그의 옆구리를 파고드려는 순간, 그가 부채를 강하게 펄럭이며 비상식적인 궤도로 몸을 빙글 돌렸다. 그와 함께 왼손에서 하얀 섬광이 번쩍—!


그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과 공격에 나는 황급히 땅바닥을 굴러야만 했다. 마음 속으로 한가닥 여유와 경계심을 남겨놓지 않았다면 그것에 정말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부채가 땅을 구르는 나를 연신 내리찍었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한 끝 차이로 공격을 피해내던 내가 어깨를 튕겨 강시처럼 벌떡 일어나고, 앞으로 두 보, 좌로는 한 보, 뒤쪽으로는 열 보를 물러났다.


빈 허공에 부채와 소매를 휘두르던 반강이 천천히 움직임을 멈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유있게 다시 부채를 부치고 있지만, 그의 눈 깊숙한 곳이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양 진영에 정적이 감돌았다. 각각 이유는 다르겠지만 모두의 표정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반강 측의 서생들은 그가 나를 단숨에 끝내지 못했기 때문에, 백리세가 무인들은 반강이 상상 그 이상으로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둘의 움직임을 아무것도 보지 못한 이들도 있을테고.


내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탓에 내 꼬라지는 흙덩이가 뭉쳐져 엉망인데 반해, 상대방은 여전히 깨끗하고 단정하여 여유가 있어보였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지금껏 내가 만나 본 어떤 이보다도 빠를 뿐만 아니라,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철선, 정체를 알 수 없는 병기까지 갖추고 있어 상대하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무언가 대책이 필요한 상황.


반강을 노려보던 나는 조승지를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검을”


“......”


잠시 내면의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던 조승지가 결국 얌전히 그의 검을 가져와 내밀었다. 걸어다니는 검집 신세가 된 녀석의 불타오르는 눈길을 즐겁게 받아내었다.


그래야지. 애초에 나에게 싸워달라고 부탁한 것이 네 녀석 아니던가.


“진짜 비싼 검이다. 상처나지 않게 조심히 쓰고 반납할 수 있도록”


“...아까 전까지만 해도 나보고 그냥 가지라고 하지 않았었나?”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 뿐이다. 내가 잠깐 미쳤었던거지”


애초에 준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던가. 이 녀석이랑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자꾸 화가 치밀어 오른다. 싸우라고 있는 검을 상처나지 않게 쓰라는 것은 또 무슨 이야기인지.


“됬고, 나 싸우는 동안 색목인이 죽지 않게 신경 좀 써줘라. 타지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느냐”


조승지가 궁시렁대며 뒤로 물러났다.



그에게 받아든 검을 하늘 높이 치켜 들었다가 서서히 내렸다.


날카로운 검 끝에 나의 적이 있었다.



***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지,

결국 다들 좋은 검을 고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귀창 사평을 상대할 때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조승지의 검은 단지 외관이 화려할 뿐만 아니라 정말 좋은 검에 속하는 물건이었다. 칼날은 날카롭고 충분한 탄성과 강인함을 갖추었으며, 손잡이와 칼날 무게의 배분이 적절하여 손잡이를 잡았을 때 묘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촌동네의 시전에서 동전 몇푼이면 구할 수 있는 싸구려 검을 쓰던 나로서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맛본 기분이라고나 할까···


때문에 조승지가 그의 검을 나에게 주겠다는 제안을 했을 때 거절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앞으로 싸울 일이 또 있겠냐 싶어 결국 그 제안을 거절했는데, 이렇게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다시 그의 검을 잡게 될 줄은 몰랐다. 어찌되었건 제대로 된 검 없이는 눈앞의 이 교활한 녀석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반강이 말했다.


“검을 든다고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응. 너의 패배”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조승지 홀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강은 표정 변화없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유심히 살폈다.


“움직임은 체계가 없고 말에는 위아래가 없군. 아무리 보아도 백도무리와 어울릴만한 녀석이 아닌데,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녀석일꼬?”


이미 수차례에 걸쳐 내 모습을 충분히 지켜보았을 반강이다. 내가 어떻게 체중이동을 하는지, 어느 발과 어느 손에 더 신경을 쓰는지 모든 것이 그의 머리 속에 정리되어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그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라도 더 알아내려는 듯한 집요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모두를 압도할 만한 무공 실력을 갖추었으면서도 극도로 신중하고, 상대방에 대하여 관찰하고 분석하여 확신한 다음에야 비로소 움직이는 유형인 듯 했다. 그런 그를 돕는 것은 마치 쌍둥이들처럼 차려입은 저 서생 무리들.


반강이 서생 무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들이 임풍에 대하여 오판한 탓에 꽤 쓸만했던 호위무사를 하나 잃지 않았느냐.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다. 이 녀석의 사문을 알아낼 수 있도록”


만약 그가 말하는 호위무사가 색목인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색목인이 임풍에 맞서 싸운 것은 결국 반강 본인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던가. 게다가 단지 패배했다는 이유로 목을 베어내려 한 것도 반강 본인이었으니, 마치 아끼는 수하를 그들 때문에 잃었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화법 자체가 논리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서생들은 그에게 묻거나 따질만한 입장은 아닐 터. 색목인이 패배한 뒤로 내내 좌불안석이던 서생들이 눈을 빛냈다. 머리를 맞댄 그들이 나를 노골적으로 힐끔이며 열띈 토론을 벌였다.


“속도에 중심을 두고 형(形)에 구애받지 않는 것은 산동의 비검자(飛劍子)와 맞아 떨어지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 무공을 아무리 익혀봤자 삼류에 불과할 뿐입니다. 저런 수준의 움직임을 보일 수는 없소”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듯한 모습이 운남의 무영객(無影客)과 일치한다”


“아니다. 그의 무공은 이미 수백년 전에 소실되었다. 게다가 지역적으로 너무 멀어서 이치상 맞지 않아. 오히려 백면신투(百面神偸)는 어떠한가?”


서생들이 줄줄히 읊어대는 이름들이 누구인지는 당췌 알 수 없었다.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녀석들이 언뜻 귀엽기도 하다. 만약 그들이 나에게 무공을 가리친 것이 촌구석에서 기체조나 가르치는 노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되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문득 고향 마을에 남아있을 변노인의 못생긴 얼굴이 떠올랐다.

무림고수의 위엄이라고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볼품없는 행색과 치졸한 성격. 아직도 온 정신이 주색잡기와 노름에 팔려 있을 것이 뻔하니, 내가 떠나올 때 쥐어준 돈은 진작에 다 써버렸을지도 모른다.


‘녀석들이 뭔가 그럴싸한 별호들을 떠들어대는 것을 보니, 변노인이 나에게 가르친 것들이 그래도 영 헛것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내 자세와 움직임을 분석하며 떠들어대는 녀석들을 보다보니 이 와중에 또 장난기가 발동했다.


검 끝을 땅을 향해 내리고 두 손으로 칼자루를 잡은 채 마치 삽으로 땅을 파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두 다리를 구부정히 구부린 채로 뒷다리에 중심을 두고 고개를 번쩍 들어보이니,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볼품없는 자세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내 표정은 진지함과 비장함 그 자체.


나를 바라보며 이런 저런 분석을 쏟아내던 서생들이 일제히 침묵에 잠겼다. 혼란에 빠져있던 서생 중 한 명이 미간을 좁히며 나에게 삿대질을 했다.


“그런 기수식을 취하는 무공은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가 너의 정체를 알아낼까봐 수작을 부리는군!”


“수작을 부리긴, 우리 문파의 기수식은 원래 이렇다. 너희들의 견문이 짧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 뿐.”


견문이 짧다는 말이 서생 녀석들에게는 큰 모욕인가보다. 그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딴 자세가 무슨 기수식이 될 수 있단 말이냐! 지금 네 검의 방향과 무게 중심에는 그 어떤 의미도 있을 수가 없어!”


“역시 책벌레라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검을 겨누는 방식은 그 날의 온도와 습도, 해가 떠 있는 위치, 바람의 방향에 따라 매번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 터무니없는···!”


반강이 손을 번쩍 들었다. 나와 설전을 주고받던 서생들이 헙- 입을 다물었다. 서생들의 표정에는 억울함이, 반강의 표정에는 피로함이 가득했다.


“이 녀석들이 이렇게 쓸모없게 느껴지는 것도 오랜만이야. 네놈같이 제멋대로 날뛰는 녀석을 만나니 아무 소용이 없구나”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그가 내 사문을 알아내는 것을 포기했음에도 나는 이 기괴한 자세를 풀지 않았다.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오랜만에 삽질하는 자세를 하고 있으려니 여러가지 영감이 마구 마구 솟구쳤기 때문이었다. 반강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변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 또한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내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바라보던 녀석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감히 나를 상대하면서도 여유를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거냐”


“여유라니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너도 우리 사문의 기수식을 무시하는 것이냐?!”


눈을 부릅뜨며 버럭 녀석에게 호통을 치자, 조승지와 대식,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백리세가의 무인들과 심지어 쓰러져 치료를 받고 있던 임풍까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반강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몸께서 간만에 손을 쓰는 상대가 이런 어릿광대 녀석이라니···”


“너는 뭐 이리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냐. 하여간 체면만 차려대고 입만 오래 터는 녀석들 치고 제대로 된--”


이미.

나의 눈 앞에 들이닥쳤다.

반강의 신형이.

내 말이 끝나기 전에.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천하제일인 말고 장사할게요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제목 변경 공지 (기존 : 장사치의 무공이 너무 강함) 24.06.27 37 0 -
공지 제목변경 및 연재시간 공지 (PM 10:00) 24.06.18 475 0 -
56 개봉으로 (3) NEW +1 19시간 전 178 7 13쪽
55 개봉으로 (2) +1 24.06.29 279 7 12쪽
54 개봉으로 (1) +1 24.06.28 350 8 13쪽
53 삼, 오 (三, 五) (2) +1 24.06.27 421 14 13쪽
52 삼, 오 (三, 五) +1 24.06.26 492 12 12쪽
51 의혹 (3) +1 24.06.25 550 16 12쪽
50 의혹 (2) +1 24.06.24 565 15 12쪽
49 의혹 (1) +1 24.06.23 648 15 12쪽
48 숲에 부는 바람. +1 24.06.22 709 18 12쪽
47 딱히 바라는 것은 없고. +1 24.06.21 785 17 12쪽
46 금칠 +1 24.06.20 817 22 12쪽
45 이젠 신물이 난다. +1 24.06.19 908 19 12쪽
44 남궁세가 (2) +1 24.06.18 882 20 12쪽
43 남궁세가 (1) +1 24.06.17 930 20 12쪽
42 피의 냄새 +1 24.06.16 941 21 11쪽
41 하얗고 붉은 것들 +4 24.06.15 969 19 12쪽
40 알량한 자비심을 버리고 +2 24.06.14 975 20 12쪽
39 격전 +2 24.06.13 983 21 12쪽
» 날카로운 검 끝에 +2 24.06.12 956 23 12쪽
37 주인이 되어주마 +1 24.06.11 985 21 12쪽
36 반강 (4) +2 24.06.10 1,039 24 12쪽
35 반강 (3) +1 24.06.09 1,064 22 13쪽
34 반강 (2) +2 24.06.08 1,088 24 13쪽
33 반강 (1) +2 24.06.07 1,151 27 13쪽
32 바람 잘 날 없다. +1 24.06.06 1,175 25 12쪽
31 금화역조 +1 24.06.05 1,191 22 12쪽
30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 일 (2) +1 24.06.04 1,237 25 12쪽
29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 일 (1) +1 24.06.03 1,250 27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