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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제님의 서재입니다.

천하제일인 말고 장사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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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제
작품등록일 :
2024.05.0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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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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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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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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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하얗고 붉은 것들

DUMMY



백리율 가주가 크게 검을 휘두르며 임강과 백리담이 싸우던 공간을 메웠다.


전투의 흥분에 사로잡혀있는 백리담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작전이 뭐냐?”


“단순합니다. 녀석이 또다시 접근하기 전에 먼저 찾아내서 부숴버리는 것이오”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재빠르게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이 긴박한 전투의 와중에 철푸덕 앉아버리는 나를 본 백리담과 임강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운기조식을 하면서 어떻게 녀석을 찾아?”


“운기조식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무어라 설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위기 때마다 내 머리를 쿡쿡 찌르듯이 자극하는 그 느낌에 집중하면, 무언가 반강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거대한 물결 틈에 숨어서 이 거대한 사파무리를 지휘하며, 때때로 직접 기습까지 해대는 이 녀석을.


관자놀이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나머지 손가락을 마치 안테나처럼 벌렸다. 지금 내가 시도하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나에게 위험을 알려주던 감각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기대만큼 충분한 느낌이 오지 않는 것 같아 검지까지 동그랗게 말았다. 백리담과 임강이 수군대는 소리가 얼핏 들려왔다.


“잘 보게 임강. 저러고 있으니 꼭 돈을 구걸하는 자세 같지 않은가”


임강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보면 볼수록 참으로 희한한 분입니다”


매섭게 눈을 흘기자 그들이 입을 헙 다물었다.


다시 눈을 감고 머리 속의 기운에 집중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던 함성, 창칼이 맞부딪히는 소리, 기합소리와 비명소리가 점점 잦아들더니···


고요하다.

세상에 나 혼자만 남은 것처럼.


천천히 나의 감각을 확장시켰다. 내 관자놀이로부터 뻗쳐나온 기운이 땅과 바람을 타고 평야로 뻗쳐 나아간다. 처음에는 희미하고 애매모호했다. 하지만 마치 짖눌렸던 시야가 회복되는 것처럼, 수없이 많은 동그란 기운들이 서서히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된다!’


그것은 평야를 가득 메운 무인들의 기운들이었다.

백사장에 가득한 모래와도 같이 수없이 많은 기운들이 내 손바닥 위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떤 것은 희었고, 어떤 것은 잿빛이었다. 그 중 어떤 기운은 유달리 희었고, 어떤 기운은 유달리 시커맸다.

이 중 분명히 반강의 기운이 어딘가에 섞여있을 것이다. 나는 그 기운을 구분해 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며 사방을 찬찬히 훑었다. 그런데···


‘...저 기운은 뭐지?’


문득 저 평야 끄트머리에서 무언가 꺼림칙한 기운이 느껴졌다.

서로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한데 엉켜있는 기운들과는 관계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평야를 관조하고 있는 그 기운.

그저 존재만을 느낄 수 있을 뿐, 너무 멀어 색깔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그 기운이 유독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더 신경쓸 여유는 없었다.

살금살금 쥐새끼 마냥 우리 진형을 향해 접근하는 어두운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모든 빛을 흡수해 버릴 것 마냥 짙은 검은색의 기운이.


번쩍 눈을 뜬 내가 고개를 돌려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우리가 위치하고 있는 전열의 정반대 방향이었다.


‘저쪽이다’


나와 눈을 마주친 백리담과 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나와 백리담, 임강이 함께 몸을 날렸다.

우리들이 향하는 길을 따라 백리세가의 무인들이 줄지어 갈라졌다.

무인들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생생히 느껴진다.

우리들이 반드시 녀석을 잡아낼 것이라는 그들의 바램이, 그들의 믿음이.


가는 길의 중간에는 다시 검을 주워들고 부상자들을 보호하고 있는 조승지도 있었다. 우리 셋의 질주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복잡했다. 녀석이 불끈 쥔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며 외쳤다.


“가라. 녀석을 조져버려!”


주먹을 불끈 쥐어 그에게 화답했다.


휘몰아치듯 달려온 우리가 격전의 경계선에 이르렀을 때···


사파 무리들 틈 사이에서 때마침 반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죽음의 부채를 휘두르려던 반강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잡았다, 요놈!”


백리담이 앞뒤 가릴 것 없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아버지의 말은 역시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높이 치켜든 그의 검에서는 잔뜩 응축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당황한 기색을 보였던 것도 잠시, 반강은 흥 코웃음을 치며 부채를 펼쳐내고 왼소매를 휘둘렀다.


“어디 주제를 모르고 덤벼드는 것이냐”


온 힘을 담아 휘둘렀던 백리담의 검이 대번에 반대 방향으로 튕겨나가고, 하얀 섬광이 그의 목줄기를 향해 파고 들었다.


내가 백리담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그를 죽음에서 구원하는 사이, 이번에는 임풍이 붉게 달아오른 주먹을 기세좋게 꽂아넣었다. 반강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부채의 방향을 틀었다. 철컹- 소리와 함께 까만 세침이 비오듯 쏟아졌다. 다급히 한발자국 나선 내가 검을 둥글게 휘두르며 녀석의 암기들을 받아냈다.


“뒤쪽으로!”


단번에 몸이 굳어버린 그들을 제치고 나와 반강이 맞붙었다.

다시 한번 세상의 시간이 느릿느릿하게 흘러가는 가운데, 반강과 나는 우리 둘만의 시간 축에서 또 다시 수십 합을 교환했다.


둘만의 시간 축이라니··· 이 얼마나 낭만적인 표현인가!

하지만 이 싸움은 이 전장의 그 누구보다 치사하고, 그 어떤 싸움보다 속임수가 난무하며, 그 와중에 그 누구도 손해보는 것은 없는 치열한 수싸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수세에 가까워지는 것은 반강이었다.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내 몸은 점점 더 가벼워져 간다. 실력이 비슷한 상대를 맞아 검을 쓰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무아지경에 빠져 휘두르는 검에 반강이 몇번씩이나 뒷걸음을 쳤다. 그의 표정에는 더이상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대단하군. 참으로 대단해!”


감탄사를 뱉어낸 반강이 또다시 나를 향해 주변의 무인들을 던져냈다. 황급히 검을 회수하는 사이 녀석이 전장 속으로 사라져갔다.


“네놈을 직접 상대하는 것은 이제 재미가 없다. 마침 네놈과 어울릴법한 상대가 생각났어. 다음에 소개해주도록 하지”


반강의 목소리가 희미해진다. 이대로라면 녀석을 먼저 찾아낸 보람도 없이 또 한번 추격전을 반복해야 한다. 어쩌면 다음에 또다른 무시무시한 녀석을 데려올 수도.


나는 황급히 백리담과 임강을 돌아보았다.

애초에 그들에게 바랬던 것은 함께 싸워주는 것이 아니다.

짧게나마 반강을 직접 상대해 보고 얼이 나간 그들은 그제야 내가 도움을 요청한 의도를 이해한 듯 보였다.


“···길을 열어주마”


한계를 깨닫고 자존심을 접은 백리담이 검을 다시 들어올렸다. 염주홍단공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임강의 몸에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각기 푸르고 붉은 불꽃을 피워낸 그들이 반강이 사라져가는 방향을 향해 돌진했다. 적들의 진형 한복판 속으로.


더이상 그들의 뒤에는 지켜야 것들이 없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치워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백리담과 임강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일이었다.


촥—-!!! 붉은 액체가 튀었고,


펑!!! 무언가가 연신 터져나갔다.


나는 온통 터져나가고 튀어나가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떠서 시야를 좁힌 채 오직 반강의 기운을 쫓는 데에만 집중했다. 녀석을 빠르게 잡는 것만이 이 피의 행진을 끝낼 수 있는 길일 것이다.


곧 녀석의 하얀 옷자락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이 혼란스러운 전장, 피와 죽음이 가득한 곳에서도 깔끔하기 그지없는 반강의 모습. 하지만 이 하얀 여우의 내면은 이 전장의 그 어떤 이보다도 어두운 검은색이었다.


뒤를 돌아본 그가 다급히 속도를 높였다. 손에 잡히는 대로 주변의 무인들을 던져내면서.


하지만 백리담과 임강이 어김없이 붉은 안개를 피워내니, 그의 뒤를 쫓는 우리의 속도는 전혀 늦춰짐이 없었다. 이미 상대편 진영 한복판에 너무 깊숙히 들어와버린 우리이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오직 반강을 향한 돌진 뿐이었다.


“앗-!”


요리조리 방향을 비틀며 마구잡이로 무인들을 던져내던 반강의 손에 미처 그를 피해내지 못한 서생 무리가 잡혔다. 반강을 졸졸 따라다니던 바로 그 서생 중의 한 명이 하얀 옷자락을 펄럭이며 애처로운 비명을 질렀다.


백리담의 검이 어김없이 번뜩이고,


촥—-!


하얀 것이 갈라지며 붉은 것을 쏟아낸다.


공포에 질린 서생들이 뿔뿔히 갈라지며 아우성을 쳤다. 그 광경을 바라본 반강이 우뚝 멈춰섰다. 또다른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은 무인들이 재빠르게 거리를 벌리며 우리의 주위에서 벗어났다.


반강의 얼굴에 분노가 가득했다. 자신의 심복인 서생을 잃은 것에 대한 분노일까. 아니면 자신을 피해 달아나는 서생 무리에 대한 분노일까. 막상 그들을 우리에게 던져낸 것은 자신이면서 말이다.


검은 부채가 사방에 펄럭이고 하얀 섬광이 번뜩였다. 백리담과 임강은 그의 뾰족한 분노를 피해 주저없이 몸을 날렸다. 그들이 재빠르게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달려오는 속도를 늦추지 않은 내가 뛰쳐들었다.


그는 내가 겪어본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

하지만 그가 몸을 숨기면서 싸우기로 결정한 시점에서 이미 승부는 결정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난한 싸움.

이제는 끝낼 때도 되었다.


風捉摸不定. 풍착막불정. 바람은 붙잡을 수도, 헤아릴 수도 없다.


부채를 흘려내고 하얀 섬광을 피해냈다.

다급해지는 그의 손짓들을 무용지물로 만들며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을 내딛는다.

녀석의 동공이 확대되고···

지금까지의 그 어떤 간격보다 더 그에게 가까워졌다.


마지막 일격.

선택지는 많지만 내 검이 향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녀석이 아무리 음흉하고 사악할지라도 내 손으로 목숨을 빼앗고 싶지는 않다.

결국 급소를 피해 옆구리 쪽으로 검을 찔러넣었다.


그러나···


쩡—-!!!



마치 벽에라도 부딪힌 듯한 충격.

그와 동시에 녀석의 몸에 닿았던 검이 똑 부러지고 말았다.


“....!!!!”


사람의 몸에 날붙이가 닿았는데 어떻게 검이 부러진단 말인가.

말로만 듣던 도검불침(刀劍不侵)의 경지인 것일까?


하지만 녀석에게도 타격이 갔음은 분명하다.

검이 부러지는 순간, 우드득 갈비뼈가 으깨지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기 때문이다.

반강은 고통으로 몸을 일그러뜨리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이 물러터진 녀석. 네 녀석이 목을 노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놀라움에 움직임이 굳은 나를 녀석이 단단하게 얼싸안았다.

날카롭게 세워진 철선의 날.

그것의 서늘한 기운이 나의 목줄기를 파고 들고···

내 곤두선 신경이 한발자국 늦게 요란한 경고음을 울려댔다.


서걱—-!



붉고 비릿한 피가 나의 얼굴을 적셨다.


그러나 피를 뿜어낸 것은 나의 목이 아니다.


백리담의 검에 잘려나간 반강의 손과 부채가 하늘로 높이 치솟았다.


그 뒤를 이어···


쾅—!


임강의 붉은 주먹에 안면을 적중당한 반강이 수 장을 날아가 데굴데굴 굴렀다. 함몰된 얼굴을 하늘로 향한 채 벌러덩 누워버린 그에게서는 더이상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하얗고 붉은 강냉이가 땅바닥으로 투툭 떨어져 내렸다.


백리담은 반강을 베어낸 자세 그대로 멈춰선 채 크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반강을 베어낸 그의 표정에는 지금껏 보지 못한 상쾌함과 뿌듯함이 가득했다. 임강 또한 주먹을 내지른 자세 그대로 멈춰있었는데, 그의 표정에도 후련함이 한 가득이었다.


백리담이 말했다.


“음··· 짜릿하군!”


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시원한 일격이었습니다”



나는 황급히 허리를 굽히고 울렁거리는 속을 게워냈다.


“...우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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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남궁세가 (2) +1 24.06.18 882 20 12쪽
43 남궁세가 (1) +1 24.06.17 931 20 12쪽
42 피의 냄새 +1 24.06.16 941 21 11쪽
» 하얗고 붉은 것들 +4 24.06.15 970 19 12쪽
40 알량한 자비심을 버리고 +2 24.06.14 977 20 12쪽
39 격전 +2 24.06.13 985 21 12쪽
38 날카로운 검 끝에 +2 24.06.12 957 23 12쪽
37 주인이 되어주마 +1 24.06.11 986 21 12쪽
36 반강 (4) +2 24.06.10 1,041 24 12쪽
35 반강 (3) +1 24.06.09 1,065 22 13쪽
34 반강 (2) +2 24.06.08 1,089 24 13쪽
33 반강 (1) +2 24.06.07 1,153 27 13쪽
32 바람 잘 날 없다. +1 24.06.06 1,176 25 12쪽
31 금화역조 +1 24.06.05 1,193 22 12쪽
30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 일 (2) +1 24.06.04 1,239 25 12쪽
29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 일 (1) +1 24.06.03 1,251 2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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