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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제님의 서재입니다.

천하제일인 말고 장사할게요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공모전참가작 새글

오일제
작품등록일 :
2024.05.08 17:48
최근연재일 :
2024.06.3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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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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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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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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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6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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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피의 냄새

DUMMY


비릿한 피냄새에 정신이 아득하다.

아무리 소매로 문지르고 닦아내도 얼굴에 잔뜩 묻은 피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울렁거리는 속을 게워내며 목줄기를 더듬었다.

분명 섬뜩한 부채날이 파고든 것 같았는데, 다행히도 내 소중한 피부에는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반강 녀석을 바라보았다. 눈부시게 하얗던 장포는 피와 흙으로 뒤엉켰고, 잘려나간 손목에는 뼈가 허옇게 드러나 있었다. 임강의 주먹을 정면으로 얻어맞고 함몰된 얼굴에서는 본래 얼굴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대로 죽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반강의 가슴은 희미하게 오르락 내리락 거리고 있었다. 널부러진 그를 보호하거나 다가가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토록 기세등등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우리를 괴롭히던 녀석 치고는 허무한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속을 게워내느라 다시 고개를 숙인 나의 시야에 누군가의 뒤꿈치가 보였다. 혹시나 누군가에게 기습을 당할까 싶어 나를 보호하고 선 백리담과 임강이었다. 백리담이 말했다.


“고생했네. 대단한 격전이었어”


조금 전 상황을 돌이켜보면 아직도 모골이 송연했다. 녀석을 꿰뚫을 줄 알았던 검이 그렇게 허무하게 똑 부러져버릴 줄이야.나를 끌어안던 녀석의 섬뜩한 미소가 아직도 생생했다. 강호에 떨어진 이후 이토록 죽음에 가까이 갔던 순간이 있었던가.

마지막 순간 백리담이 그를 베어내지 않았다면, 나는 정말 반강 녀석의 동귀어진(同歸於盡)에 당했을지도 모른다.


“감사합니다. 제가 큰 신세를 졌군요”


“신세는 무슨. 이것은 순전히 자네의 공적일세. 자네가 아니었으면 저 녀석을 어떻게 잡을 수 있었겠는가”


“공적이라니, 무슨 큰일날 소리를···!”


나는 화들짝 놀라 두 손을 내저었다. 내가 반강을 상대했던 것은 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추앙받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공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고결하고 선량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무림인으로서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은 나로서는 정말 피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단혈맹의 인물들이 줄줄히 나를 찾아와 복수하겠다고 하면, 그때가서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뼛속부터 무림인인 백리담과 임강으로서는 나의 이런 걱정을 이해할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내가 겸손을 떤다고 오해한 백리담이 감탄이 깃든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한때 자네를 돈만 밝히는 속물 양아치.. 아니 장사치라고만 생각했던 적이 있었네. 사과하도록 하지”


백리담은 생각하는 것이 투명하게 다 비춰보이는 부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었다는 것은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생각했던 것만으로 사과를 해야한다면 나야말로 사과해야 할 대상이 한 두명이 아닐 것이다.


“돈 밝히는 건 사실이니 딱히 사과를 안하셔도 됩니다. 오늘을 무사히 넘기고 나면 대금을 단단히 청구할 것이니 긴장하고 계시오”


푸핫- 백리담이 웃음을 터뜨렸다.


“돈 이야기라면 부디 동생 말고 허 총관과 얘기해주게. 연이가 본디 돈에 관해서는 까다롭기 그지없는데, 자네한테는 아낌없이 퍼주더군!”


“그러고 보니 백리연 소저는 어디 있습니까?”



“응? 그 아이가 자넬 이곳에 보낸 것 아니었나?”


임강과 나는 당황하여 서로 눈을 마주보았다. 분명 우리에 한참 앞서 그의 아버지를 지원하러 간다고 했었는데, 보아하니 백리율 가주가 이끌고 있던 세력과 전혀 합류를 하지 못한 상황이 아닌가.


그러나 백리담은 딱히 그녀를 걱정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연이는 우리가 걱정해야 할 만한 녀석이 아니야. 어딘가로 새서 팔자 좋게 놀고 있을지도 모르지. 우리는 일단 이 빌어먹을 하루를 끝내보자고”


백리담은 아직까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파 무리들, 그리고 단혈맹의 잔당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주춤거리며 좀처럼 달려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반강 녀석을 따르던 서생무리들까지 뿔뿔히 도망가 버렸으니 그들의 구심점이 남아있을리 만무했다.


길게 호흡을 끌어모은 백리담이 내공을 가득 담아 외쳤다.


“단혈맹 놈들아, 이 더러운 사파 무리들아! 네놈들의 우두머리 반강을 잡았다! 모두 투항해라!!!!”


백리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퍼져나갔다. 하지만 저 멀리 백리세가의 진형 쪽에서는 아직 전투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임강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반강을 쫓느라 본 진영에서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아직 저쪽까지 소식이 들어가긴 어려울 것 같군요”


비록 우두머리는 잃었지만 아직 평야에는 사파머리가 한 가득이다. 우리가 반강을 쫓아 떠나올 때에도 본대는 꽤나 궁지에 몰려있었으니, 서두르지 않으면 기껏 반강을 잡아내고도 더 큰 피해를 막지 못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것을 눈치챈 것이 우리 뿐이 아니라는 것.


“물러서지 마라!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된다!”


주춤거리던 사파무리들 사이에서 한 녀석이 외쳤다.


“이미 돌이키기엔 늦었어. 저 재수없는 녀석이 있건 없건 오늘 끝장을 보아야 해! 본대가 무너지고 나면 이 녀석들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무리들 사이에 교묘하게 숨은 채 다른 무리들을 선동하는 목소리.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매우 곤경에 처하게 생겼다. 그의 말을 들은 사파무리들의 눈빛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입가를 닦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임강과 백리담, 그리고 나는 서로 등을 맞댄 채 점차 살기가 고조되고 있는 녀석들을 돌아보았다.


“꼭 제 목이 날아가야만 정신을 차리는 놈들이 있지”


백리담이 차갑게 말했다.


“본 진영으로 다시 합류하는게 먼저일 것 같습니다”


임강이 호흡을 가라앉히며 그에게 답했다. 지친 것은 임강 뿐이 아니다. 하루 종일 계속된 싸움, 모든 것을 쏟아넣은 돌파로 인해 모두가 꽤나 지쳐 있었지만 티를 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 저 곤죽이 된 녀석은 꼭 챙겨서 가자고”


백리담이 주변을 경계하는 동안 임강이 축 늘어진 반강을 마치 전리품처럼 들쳐멨다. 적들은 아직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좀처럼 우리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나는 반토막 나버린 검을 소중하게 허리춤에 끼워넣었다. 조승지 녀석이 그토록 비싸다고 강조하던 검이 아니던가. 아무리 부러졌다 하더라도 그냥 버리고 가면 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아쉬운 마음에 반강 녀석의 철선까지 챙기려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그가 손쉽게 휘두르던 것이 경이로울 정도로 정말 무지막지하게 무거운 물건인데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앞서가는 임강이나 백리담의 엉덩이에 독침을 쏘아버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몸에 꽂아넣을지도 모르고.


사방에서 적들이 점차 간격을 좁혀오는 가운데, 선두에 선 백리담이 다시 한번 기운을 끌어올렸다.


“가자!”


우리 셋이 다시 한번 돌파를 시작하려던 순간이었다.


온통 적들로 가득했던 평야의 한쪽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두두두두···.


거대한 함성과 함께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가는 석양을 등지고, 지금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세력이 이 전장에 개입하려 하고 있었다.


“뭐, 뭐지?!”


사파 무리들이 당황하여 웅성웅성 거렸다. 영문을 모른 채 당황한 것은 우리들 또한 마찬가지.


잘 벼려진 칼처럼 하나되어 평야를 질주하는 세력.

백여필의 말이 달리면서도 전혀 대오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혼란에 빠져있던 전장이 일시적으로 싸우던 것을 멈추고 그들이 나타난 방향을 멍하니 바라볼 정도였다.


적인가. 아군인가.


하루종일 이어진 싸움으로 모두가 신체와 정신의 극한에 가까워져 있는 시점이다. 그들이 누구냐에 따라 이곳에 있는 모두의 운명이 결정될 터였다.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이가 검을 뽑아 들었다.

하얗게 빛나는 검이 어둑어둑해진 사위를 환하게 밝혔다.

하늘 높이 검을 치켜올렸던 그가 검을 앞으로 찍어내리자–


그것이 진짜일지, 모두의 착각일지···

마치 번개가 치는 듯한 섬광과 함께 사파무리들이 반쪽으로 갈라졌다. 단번에 갈라져버린 사파무리들을 말발굽이 짓밟고 지나갔다. 백리세가의 진형에서 떠들썩한 함성이 치솟았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사파무리들의 마음을 꺾어놓는 일이었다. 위기에 대응할 사령탑이 존재하지 않으니 전장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을리 만무했다.


“후퇴하라, 후퇴하라–!!!!”


군데 군데 섞여있던 사파무리의 수장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우성이 일어났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백리세가의 무인들이 기세를 끌어올렸다. 전장의 양쪽에서 무서운 기세로 치고 들어오니, 방향을 잃은 무인들이 갈팡질팡하며 서로의 발목을 잡았다.


혼란을 틈타 백리세가의 진영에 다시 합류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백리율 가주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었지만 다시 기운을 내어 진영을 진두지휘 하고 있었고, 한동안 뻗어있던 빡빡머리 임풍도 어느덧 다시 합류해 주먹을 흉흉하게 휘둘러대고 있었다.


“강 아우, 가세!”


백리담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외쳤다. 임강은 들쳐메고 있던 반강을 대뜸 집어 던지고 백리담을 따라, 그리고 그의 아버지를 따라 적진 한복판으로 몸을 날렸다.


“.....”


나는 이 승패가 결정난 전투에서 더이상 할 일이 없었다.

이미 지금까지 보아온 붉은 것들, 그리고 비릿한 냄새만으로도 나에게는 한도초과였다.

땅에 널부러진 반강의 색색거리는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흉측하게 망가져버린 녀석은 아직까지도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도련님—!!!”


대식이 반갑게 외치며 나에게 달려왔다.


“대식아!!!”


나 또한 반갑게 대식을 맞았다. 한동안 팔자에도 없는 싸움에만 집중해 있다보니, 그저 대식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탁 풀어지고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만 같았다.


대식이 내 피로 얼룩진 얼굴을 보고 기겁했다.


“도련님, 다치신 곳은 없는거지요? 얼굴은 왜이리 벌겋습니까?!”


“내 피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너는 별일 없었느냐?”


“저야 괜찮습죠..!”


대식은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안전하게 잘 쉬고 있었던 모양인지 얼굴이 상쾌하기 그지 없었다. 이곳 혼란스러운 전장 한복판에서 가장 보송보송한 것이 무공을 전혀 모르는 대식인 셈이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녀석. 결국 해냈구나”


대식을 따라온 조승지가 옅은 미소를 띄며 말했다. 그의 표정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몸 이곳 저곳에도 꽤나 상처가 생겨나 있었다. 아마 대식이 안전하게 있을 수 있었던 데에는 이 녀석의 역할이 꽤나 컸을 것이다.


그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해주려는 순간···


녀석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떠졌다.

그의 시선이 내 허리춤에 고정되어 있었다.

반으로 똑 부러져버린 녀석의 장검에게로.


“야 이 새끼야, 이게 얼마짜리 검인데···!!!”


녀석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대뜸 내 멱살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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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의 냄새 +1 24.06.16 941 21 11쪽
41 하얗고 붉은 것들 +4 24.06.15 969 19 12쪽
40 알량한 자비심을 버리고 +2 24.06.14 975 20 12쪽
39 격전 +2 24.06.13 983 21 12쪽
38 날카로운 검 끝에 +2 24.06.12 955 23 12쪽
37 주인이 되어주마 +1 24.06.11 985 21 12쪽
36 반강 (4) +2 24.06.10 1,039 24 12쪽
35 반강 (3) +1 24.06.09 1,064 22 13쪽
34 반강 (2) +2 24.06.08 1,088 24 13쪽
33 반강 (1) +2 24.06.07 1,151 27 13쪽
32 바람 잘 날 없다. +1 24.06.06 1,175 25 12쪽
31 금화역조 +1 24.06.05 1,191 22 12쪽
30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 일 (2) +1 24.06.04 1,237 2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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