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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제님의 서재입니다.

천하제일인 말고 장사할게요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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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제
작품등록일 :
2024.05.0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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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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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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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숲에 부는 바람.

DUMMY



비틀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바로잡으며 눈 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일생일대의 강적.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끄떡이 없는 철옹성과도 같았다.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자세로 술을 들이킨 임풍 단주가 크하- 탄성을 뱉어냈다.


“좋은 술이다. 좋은 밤이야!”


밤새 이어진 격전의 마지막 생존자- 나는 저 멀리 밝아져오는 지평선을 가리키며 답했다.


“좋은 술도 아니고, 이제는 더이상 밤도 아닙니다”


임풍이 껄껄 웃었다.

우리가 밤새 비워낸 것은 지독하게 독하기만 할 뿐 딱히 품질이 좋은 술이 아니다. 안주 하나 없이 그 독한 술을 밤새 퍼부어 마셔대고도 매 순간 첫 잔을 대하듯 술을 들이키는 그가 경이로울 정도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있긴 했지만, 길었던 밤의 몇몇 장면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밤 사이 술에 취한 조승지가 꽤 그럴싸하게 시를 읊으며 노래를 불렀던 것 같기도 하고, 그 장단에 맞춰 대식이 덩실덩실 탈춤 비슷한 것을 췄던 것 같기도 하다.


시(詩), 서(書), 화(畵)를 비롯해 온갖 잡기에 능통하다는 조승지답게 그의 노래 실력 또한 훌륭했다. 하지만 대식의 춤은 역시나 영 아니올시다였다. 하지만 술에 취한 그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 했다. 왠지 모르게 죽이 척척 맞던 그들은 결국 사이좋게 부둥켜안고 춤을 추다가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나를 제외하고 가장 마지막으로 전사한 것은 임강이다. 단 몇 잔만에 염주홍단공을 사용한 듯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긴 했지만, 내공이 워낙 심후해서인지 몰라도 꿋꿋이 버티며 임풍과 나의 대결을 제법 오랫동안 따라왔다.


하지만 그조차 어느 순간부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흐느껴 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술자리에서 우는 진상 중의 진상이 바로 임강이었던 것이다. 내가 어찌해야 할 지 몰라 당황하는 사이, 갑작스레 자신의 아버지를 부둥켜안은 임강이 눈물까지 뚝뚝 흘리며 외쳤다.


아프지 말라고.

늙지 말라고.

제발 좀 자신의 곁에 있어달라고.


그의 말만 들어서는 마치 그의 아버지가 다 늙고 병들어 곧 임종을 앞두고 있는 사람인 것 같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임풍이다. 누구보다 커다란 덩치에 온 몸은 근육질로 가득하고, 반강의 부채에 치명상을 입었으면서도 곧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말술을 들이키는 사람이었다.


임풍은 자신의 허리를 꼭 붙잡고 잠이 든 임강을 떼어내며 흐흐 실소를 흘렸다.


“내가 몇 해 전에 한번 크게 다쳐 사경을 헤멘 적이 있었지. 그때부터 이 모양이야”


“아버지를 많이 걱정하더이다”


“그러게 말이다. 내가 무적인 줄 알았는데 큰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지. 하여간 그때부터는 말도 잘 안듣고 이래저래 잔소리를 해대니 나로서는 아주 귀찮게 되었어”


하지만 아들을 바라보는 임풍의 표정은 귀찮음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다 큰 아들을 땅에 눕히면서도 그의 손길은 부드럽고 조심스럽기 그지 없었다. 정작 임강이 깨어있을 때에는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고 혈도를 짚었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강이가 내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느냐?”


나는 조호연 장주와 조승지에게 들었던 그의 가족사를 떠올렸다.


“대충 들었소”


“좋은 자질을 가진 아이야. 그 이전에 좋은 아이이지”


임풍은 홀로 술을 쭉 들이켰다. 싸구려 술임에도 마치 천하의 명주라도 마신 것 마냥 감탄사를 뱉어낸 그가 몸을 가볍게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일찍이 아내와 사별한 이후 다시 혼인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 적절한 이를 찾아 양자로 삼고 가전무공을 전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었지. 하지만 핏줄이 이어지지 않는 이상 체질에 맞는 아이를 찾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어. 그때 기적같이 나타난 것이 바로 이 아이이다. 벌써 십 오년 전의 이야기로군”


임풍은 그의 양아들을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흰 피부에 고운 턱선, 아직 앳된 소년같기만 한 임강의 얼굴은 거칠고 뻣뻣한 수염이 난데다 산적마냥 험상궂은 임풍의 얼굴과 무척이나 대조되었다.


“함께한 십 오년동안··· 이 아이는 그 거칠고 고된 수련을 하면서도 단 한번도 불평 불만을 이야기 한 적이 없다. 염주홍단공을 완성하고 가문을 빛내는 것이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그에게 주어졌던 소명인 것 처럼 말이지. 처음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그러했으니까. 하지만 이 아이와 함께한 시간이 늘어날수록 점점 이상한 감정이 생겨나더군”


그가 술잔을 들이킬 때 이번에는 나 또한 그의 보조를 맞춰 술잔을 비웠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내가 걸어온 길이 맞나? 이 아이에게도 이 길을 강요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조상 대대로 내려온 무공을 완성하고 강호에 이름을 떨치는 것도 중요하지. 하지만 그 이름 하나 때문에 혹여라도 이 아이를 잃게된다면 내가 버텨낼 수 있을까?”


“......”


“그것들은 이 아이를 키우기 전에는 가지지 않았던 의문이었다. 뒤늦게 알게 되었지. 그것은 부모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어디선가 날아온 나뭇잎이 임강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임풍은 두꺼운 손을 조심스레 뻗어 나뭇잎을 섬세하게 치워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생긴 것만 곱상할 뿐, 이상하게 내 성격을 닮았어. 앞 뒤 가리지 않고 정의감에 불타는 데다, 가문을 어떻게든 지켜내고 빛내보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하지. 이제는 내가 생각이 바뀌었는데도 이 녀석이 좀처럼 바뀌질 않아”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아니, 벌써 어제로군. 네가 강호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려는 듯한 이야기를 했을 때 너를 비판하듯이 이야기 했었지. 하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솔직히 이 아이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면 했다. 너처럼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위해 그냥 훌훌 털고 떠날 수 있는 녀석이었으면 좋겠어”


술이 올라서일까, 임풍의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얼마 전 세상을 등진 중원 세계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쪼글쪼글한 주름들, 검버섯들, 생기를 잃고 혼탁해진 눈동자···


함께한 시간 동안 나름 최선을 다해 모셨지만, 그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또다른 여행을 떠나가기 전 나의 손을 붙잡으며 당부했던 마지막 말들은, 부디 가문을 빛내달라는 내용이 전부 아니었던가. 그것은 이곳 중원세계 모든 무림인들의 꿈이지만, 정작 자식 본인의 삶을 걱정하고 응원하는 말은 아니다.


내내 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내가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도 예전의 그대와 마찬가지였소. 일대종사가 되어 가문을 빛내달라는 말을 수도 없이 되풀이했었지. 그 또한 옛날 몰락한 무가의 자손이었기에··· 결국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에도 그 이야기 뿐이더군요”


임풍이 눈을 빛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는 미안하지만··· 전력을 다해 내 멋대로 살아가고 있지. 내 인생, 결국 내가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소?


잠시 입을 헤 벌리고 있던 임풍이 곧 푸하하하-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통쾌하게 웃던 그가 다시 한번 잔을 내밀었다.

우리는 거칠게 잔을 마주친 뒤 또 한번 끝까지 들이켰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으니, 너는 이미 일대종사나 다름없다”


그의 말을 듣자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애써 외면해왔던,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렇지만 가슴 한편에 자그맣게 담겨있던 죄책감, 혹은 사명감 같은 것이 사르르 녹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가 큼지막한 엄지손가락을 나를 향해 곧추세웠다.


“백리세가와 다른 무인들이 모두 모인 곳에서 일시불이니 뭐니 했을때는 은인이고 뭐고 네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은 심정이었지. 하지만 인정하마. 내가 아는 돈벌레 중에는 네가 으뜸이다”


나 또한 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워보였다.


“내가 아는 대머리 중엔 그대가 으뜸이오”


또 한번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린 그가 독을 기울여 내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나는 더이상 한 잔도 더 들어가기 어려운 몸상태였지만, 도저히 그가 내미는 술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꿀꺽- 술잔을 비우고 나니 이제는 눈을 뜨는 것조차 어려웠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느릿하게 눈을 꿈벅이는 나를 바라보며 임풍 단주가 싱긋 웃었다.


“아까 네가 한 말. 결국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말을 다음에 꼭 이 녀석에게도 해줄 수 있도록 해라. 이 녀석은 요즘 도통 내 말을 잘 안들어서 말이야”


“내 말이라고 들을리가 있···”


나는 더이상 버텨내지 못하고 앉은 자세 그대로 꽝- 머리를 바위에 박았다.

상대를 잃은 임풍이 마지막 술잔을 들이키더니 벌떡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강이보다는 나의 친구로 더 적합한 사내로구나. 하지만 내 술상대가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 다음엔 조금 더 실력을 늘려서 올 수 있도록”


그에게 답했다.


잠시만 기다려보시오.

나는 고급술에 더 강하단 말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친구를 탐내는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있단 말이오.


내 말은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힘겹게 버텨내던 눈꺼풀이 감기자마자 내 의식은 저 먼 곳으로 훨훨 경신법을 펼치며 날아갔다.



***



간만에 꿈이라는 것을 꾸었다.

중원에 떨어진 뒤로는 오랫동안 꾼 적이 없었던 터라,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 꿈에서 나는 늙은 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고 임종을 지켜보았으며,

변 노인의 손에 한웅큼 은자들을 밀어넣었고, 약재들을 모조리 팔아치운 뒤 대식과 만세삼창을 했다.

백리담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으며, 괴창 사평의 정수리에 남아있던 몇 안되는 머리카락을 뽑아냈다.

반강이 살기어린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백리연이 내 손목을 잡을 때 쯤에야

내가 꾸고 있는 꿈들이 결국 모두 내가 직접 겪은 일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소협, 이 소협!”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커다란 바위 뿐이기에 당황했는데, 알고보니 내가 앉은 자세로 땅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자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소협.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건가요?”


다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와 황급히 마른 세수를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백리연이었다.

그녀는 진동하는 술 냄새 때문인지 차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진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저, 잘 주무셨습니까?”


“...그대야말로 자긴 잔 건가요?”


나는 퀭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잠든 것 같은데, 어느새 완연한 아침이 되어있었다. 푹 잤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으로 따지면 얼마 잠들지 못한 셈이다.


조승지와 대식은 여전히 다정하게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추하기 그지 없었다. 임강은 홀로 단정하게 누워 곱게 잠들어 있었다. 임풍 단주는 어디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휴. 그 빡빡머리 단주에게 제대로 당했습니다. 꽤 멀리까지 왔는데 어떻게 이곳을 찾아내셨습니까?”


“밤새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크게 웃어댔는데 모를 수가 있겠어요?”


나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뒤쪽에 널부러져 있는 주정뱅이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참고로 노래를 부른 것은 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치죠”


“그렇다고 치는게 아니라—”


변명을 하던 내가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백리연이 슬쩍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잠깐 둘이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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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에 부는 바람. +1 24.06.22 710 1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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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금칠 +1 24.06.20 818 2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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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남궁세가 (1) +1 24.06.17 930 20 12쪽
42 피의 냄새 +1 24.06.16 941 21 11쪽
41 하얗고 붉은 것들 +4 24.06.15 969 19 12쪽
40 알량한 자비심을 버리고 +2 24.06.14 975 20 12쪽
39 격전 +2 24.06.13 983 2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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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주인이 되어주마 +1 24.06.11 985 21 12쪽
36 반강 (4) +2 24.06.10 1,039 24 12쪽
35 반강 (3) +1 24.06.09 1,064 22 13쪽
34 반강 (2) +2 24.06.08 1,088 24 13쪽
33 반강 (1) +2 24.06.07 1,151 27 13쪽
32 바람 잘 날 없다. +1 24.06.06 1,175 25 12쪽
31 금화역조 +1 24.06.05 1,191 22 12쪽
30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 일 (2) +1 24.06.04 1,237 2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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