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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1 님의 서재입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과학적으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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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1
작품등록일 :
2022.10.31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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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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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5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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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신종계약(3)

DUMMY

조나선과의 상봉 후 앤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도 눈물 콧물까지 흘리며 새로운 신종계약을 받아들였다.


호손시에는 고무적인 소식이었다.


지략에 있어서는 나와 프란츠 자작이 프라도보다 모자라지는 않을 테고, 부족한 장비들은 건설 중인 고로가 완성되는 대로 무기와 갑옷을 양산해 보충할 수 있겠지만, 호손의 한정된 자원으로 정보전의 우위를 가져가는 것은 쉽지 않을 테니, 앤과 전서구의 존재는 앞으로의 싸움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아무리 몸값을 받으면 풀어주는 것이 관례이자 매너라지만, 전서구를 키울 줄 알뿐 아니라 본인 스스로도 잠입에 능한 전사인 앤은 토런스로 돌려보내기에는 너무 아깝고 위협적인 인재였다.


다행히 과부라서 토런스에 남기고 온 가족도 없고 아르노 백작이 그 성격에 그녀를 살뜰히 챙겼을 리도 없으니, 조나선과의 관계를 역이용해 이쪽으로 전향시킬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최고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나는 프란츠에게 토런스의 전령관이 오더라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만나주지 말라고 얘기했었다.


라딘의 장례식 역시 반은 앤의 호감을 사기 위해, 반은 성의 접견실을 비우기 위해 한 일이었고, 덕분에 방금 프란츠가 앤의 신종선서를 받았으니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간 셈이었다.


‘그치만 진짜로 전령관이 안 올 줄은 몰랐네. ’


늦어도 지금쯤은 올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아르노 백작이 앤을 버리기로 한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비둘기 해킹이 생각보다 잘 먹힌 모양이야. ’


속으로 ‘계획대로.’를 외치며 썩소를 지어본 나는, 릴리를 데리고 다음의 중요한 계획을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 시내로 나왔다.


그리고 오늘만은 값비싼 초와 등불을 가득 켜서 개업을 연장하고 있는 부둣가의 식당을 찾았다.


“그런데 진짜 어떻게 하신 거예요? ”

“뭘 말입니까? ”


탁자에 마주앉은 릴리가 어지간히 궁금했는지 입가에 맥주거품이 묻은 것도 모르고 물어왔다.


“전서구들이요. 하늘을 나는 비둘기들을 무슨 수로 가로채신 거예요? 저번에 촌장님 댁에 갔을 때 무슨 마법이라도 부리신 건가요? ”

“제가 하는 일이 늘 그렇지만 마법은 아닙니다. 그저 녀석들의 ‘생체 네비게이션’을 혼란시켰을 뿐이죠. ”

“네비게이션이요? ”

“참. 여긴 그런 게 없겠구나. 아, 그래도 릴리 씨라면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겠네요. 말하자면 녀석들이 가지고 있는 나침반을 고장 낸 겁니다. ”

“나침반이요? 그게 새들한테 있다고요? ”


가뜩이나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물어 온 그녀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네. 전서구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비둘기의 귀소본능을 이용해서 소식을 전하는 겁니다. 녀석들은 그들이 돌아갈 곳의 방향을 기억해두었다가 주인이 날려 보내면 그쪽을 향해 날아가죠. 그리고 그 방위를 뇌와 머리뼈 사이에 있는 작은 조직 속에 들어있는 자철석을 이용해서 찾습니다. 다시 말해 아주 작은 나침반이 녀석들 머릿속에 내장되어 있는 거지요. ”

“우와. ”

“그래서 촌장 집에 몰래 잠입한 그날, 작은 자철석 조각들을 챙겨가서 비둘기들의 머리뼈 위에 박아놨습니다. 덕분에 머릿속 나침반이 제대로 작동하질 않으니, 날려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들은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공중에서 빙빙 돌다가 추락했지요. 그걸 주워 메시지를 가로챈 다음, 알려도 괜찮은 정보라면 머리의 자철석을 제거한 뒤 날려 보내고, 아닌 경우에는 폐기했습니다. ”

“아하! ”

“갑옷의 약점을 오른쪽 대신 {왼--쪽}으로 고쳐 보내기도 했고요. 아마 이게 결정적인 요인이었을 테죠. 프란츠 자작님의 승리에도, 아르노 백작이 앤 남작을 버리기로 한 것에도. ”

“참 신기하네요. 듣고 봐도 충분히 마법 같아요! ”

“진짜 마법이라면 이렇게 구구절절 원리를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마법이 아닌 과학입니다. ”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말씀을 하셨죠. ‘과학’이라고. 과학이란 건 도대체 뭔가요? ”

“음... ”

“신학도, 법학도, 의학도 아닌 학문... 처음에는 철학이랑 비슷한 거라고 하셨는데 저번엔 또 요리가 과학이라 하시고. ”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습니까? ”


꽤나 놀랐다.

최근 들어 계속 내 옆에 붙어있기는 했지만 지나가듯이 말한 내용까지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었을 줄이야.


하긴 호신술을 배울 때 그녀가 보여줬던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성실한 학생이니까.


“괜찮으시면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음, 글쎄요. ”


과학이란 무엇인가?

오라클로 정의를 찾아보면 이렇게 나온다.


‘보편적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하는 체계적 지식’.


좁은 의미로는 자연 현상을 다루는 자연과학을 말하지만, 인간의 행동과 사회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하면 그것이 사회과학이 되고, 수사학, 논리학, 통계학 같은 형식과학도 존재하며, 문화연구나 철학마저 인문과학의 범주 내에 있다.


즉, 하나의 특정한 학문이라기보다는 과학적 방법론을 따르는 수많은 학문들의 총체.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셋 다 아니지만 어쩌면 전부 다일 수도 있겠네요. ”

“네? ”

“물론 신학 쪽은 조금 무리수긴 하지만요. 하지만 이곳은 신의 기적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이니 언젠가는 신성과학 같은 것도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경험성’은 확실히 충족하거든요. ”


릴리가 꿈뻑꿈뻑 눈을 깜빡였다.


“음. 가장 좁은 의미인 자연과학을 기준으로 설명하면, 과학의 본질은 경험성, 객관성,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겠죠. 경험성이란 어떤 현상이 실제로 세상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거고, 객관성은 같은 조건과 방법을 쓰면 그것이 똑같이 일어나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재현가능성이 있어야 한다는 소리죠. 마지막으로 합리성은, 그것이 신의 뜻이 아닌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돼야 한다는 이야기고요. ”

“웅... 어렵네요. ”

“힘들면 이쯤에서 그만둘까요? ”

“아, 아니에요. 말씀해주세요. 듣고 싶어요! ”

“알겠습니다. 마침 적당한 예도 하나 있으니 들어보죠. 저와 릴리 씨가 만드는 생명수 말입니다. ”


릴리가 상체를 앞으로 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 씨와 저의 생명수는 아마 기본적으로 같은 물질일겁니다. 제 나라에서 미네랄이라고 불리는 물질이 적당량 들어가 있는 깨끗한 물이죠. 하지만 릴리 씨의 생명수는 현재로서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

“어째서요? ”

“왜냐하면 릴리 씨의 생명수는 ‘하나님’이라는 릴리 씨의 신의 힘을 빌려서 릴리 씨만이 만드는 거니까요. 실제로 존재하긴 하므로 경험성은 충족시키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걸 재현할 수도 없고 인간의 영역에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것은 과학이라고 할 수 없지요. ”

“우움. ”

“하지만 태양의 우물로 만들어내는 제 생명수는 같은 재료를 가지고 같은 방법을 쓰면 누구나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마법이나 신의 기적을 빌릴 필요가 없죠. 따라서 제 생명수는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

“요컨대, 릴리 씨가 믿는 하나님이 사실은 신이 아닌 모종의 현상이고, 그것을 이용해서 생명수를 창조하는 능력을 누구나 얻을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기적이 아니라 과학이라고 불러야 할 거예요. ”

“그건... 죄송한데 좀 불경하게 들리네요. ”

“그렇죠? 그래서 제 세계에서도 과학과 종교는 사이가 늘 좋지만은 않았답니다. 종교재판에서 유죄를 받고 가택연금을 당하거나 심지어 화형당하는 일도 있었으니까요. ”


어라? 근데 생각해 보니 여기서는 괜찮은가?

일단 별의 여신이랑 태양신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내 세계의 중세유럽과 달리 다신교 사회인 것 같긴 한데.


“죄송한데 방금 한 얘기 화형감은 아니지요? ”

“... ”


어라?

어라라?

목 뒤로 삐질 식은땀이 흘렀다.


“혹시 저 지금 큰일 난겁니까? ”


내 표정이 점점 굳어지자 조용히 쏘아보던 릴리가 표정을 풀더니 키득키득 웃었다.


“하하! 그 정도는 아니에요. 신성제국의 주신이신 별의 여신님께서는 수많은 별들만큼이나 많은 신들이 계신다고 가르치신 걸요? 물론 그중에 특히 위대한 열두 분이 계시지만. 게다가 미르 씨는 외국인이시니까 보통은 ‘외국의 종교는 참 이상하네’ 정도로 넘길 거예요. ”

“휴우. ”

“그래도 다른 신님들의 사제나 신관님들 앞에서는 그런 말씀 하시지 않는 게 좋아요. ”

“알겠습니다. 새겨듣죠. ”


그때 대구로 요리를 하기보다는 꼬리를 잡고 몽둥이로 쓸 것 같이 생긴 주방장 피에르가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오오, 드디어! 드디어 갓 튀긴 대구튀김을 맛보는 건가! ’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데,


“아, 이거 어떡하지? ”


산만한 덩치에 걸맞지 않게 쭈뼛거리던 그가, 침통한 얼굴로 수염을 긁으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오. 오늘 신명재판 때문인지 손님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몰려서... 손질해 둔 대구가 다 떨어진 모양이오. 조금만 더 일찍 오시지. ”

“...예? ”

“대신 방금 드신 맥주 값은 받지 않겠소이다. 끙, 안 그래도 저번에 사업 얘길 하시다 다 식어버린 걸 드셔서 보는 마음이 불편했는데. 바쁘시더라도 다시 한 번 꼭 찾아주시오. 그때는 정말 제대로 실력발휘를 해 드릴 테니. ”

“하하... 예, 뭐. 어쩔 수 없죠. 네... ”


허탈함에 축 늘어진 나를 보며 릴리가 한 마디 보탰다.


“흥! 신벌이에요, 신벌! ”


자기도 못 먹게 된 주제에 고소한 듯 말하는 그녀였다.



* * *



결국에는 성의 만찬장에서 대충 저녁을 해결하고, 오늘도 목욕 시중은 정말 필요 없는지 거듭 묻는 시녀에게 연일행사처럼 손사래를 쳐 보인 다음, 데운 물에 몸을 씻고, 이제 내 몸에 맞게 살짝 굴곡이 진 침대 위로 벌렁 드러누웠다.


그래도 인간은 적응의 생물인지, 몇 주 전만 해도 입에 넣자마자 구역질이 나왔던 햄과 소시지가 나름 먹을 만했다.

물론 날이 날이니만큼 가장 신선한 고기를 골라 신경 써 만든 놈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호신술 훈련이 없는 날인데도 신명재판 탓에 긴장을 많이 했는지 릴리는 침대에 눕자마자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나 역시 피곤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쪽은 눕고 나니 도리어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결투 재판이 끝난 후에도 베일의 귀부인을 상대하고, 라딘의 시신을 수습하고, 앤을 포섭하는 등 일이 바빴다.

덕분에 자연스레 뒤로 미뤄 왔던 승리의 고양감이 뒤늦게 밀려들어온 탓이었다.


비록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자신은 그동안 뒤에서 숨은 주역으로 활약하며 불리하기 짝이 없던 호손시의 상황을 이렇게까지 뒤집어놓는 데 성공했다.


물론 ‘오라클’로 수집하고 검증한 지식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것도 내게 주어져있는 능력이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내 생각에 따라 주변의 세상이 척척 움직여주는 느낌.


명색이 과학자라지만, 간신히 타이틀만 딴 수준에 불과한 석사 연구원인 내게 그 느낌은 생소한 것이었다.


내 세상에서 나는 새로운 지식과 기술로 세상을 이끄는 주역이 아니라, 이미 나와 있는 이론을 배우고 익히기에도 급급한 엑스트라에 불과했으니까.


교수님의 도움 덕에 그나마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익을 담당할 뻔 했지만, 하필 바로 전날 영문도 모른 채 이곳 이세계로 떨어져서 아등바등 살아남아온 신세다.


그런 내게, 자신과 오라클의 지식을 이용해서 내 세상에 있던 선진 문물을 전파하고 변혁을 이끌어내는 것은 생각보다도 놀랍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솔직히 잠깐은 무슨 신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기도 했을 정도니까.


그래, ‘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떠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지 딱 한 달째가 되는 날.


별이 쏟아지는 하늘에서 보았던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뜨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에 내가 들었던 말.


[그럼 다음 보름달이 뜰 때까지. ]


그 말이 맞는다면 오늘 나는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될 것이다.


비행기에 타있던 나를 이곳으로 데려와 자신의 대전사로 삼으려하는 금발녹안의 여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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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바다의 밀과 악마의 열매(1) +1 22.11.28 810 2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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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두 번째 신탁(1) +7 22.11.27 837 30 13쪽
36 신종계약(5) +3 22.11.26 862 24 13쪽
35 신종계약(4) +13 22.11.26 907 32 14쪽
» 신종계약(3) +3 22.11.25 906 24 13쪽
33 신종계약(2) +5 22.11.24 921 29 15쪽
32 신종계약(1) +6 22.11.23 950 3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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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신명재판(6) +5 22.11.21 935 30 16쪽
29 신명재판(5) +5 22.11.21 952 31 17쪽
28 신명재판(4) +4 22.11.20 1,006 31 18쪽
27 신명재판(3) +2 22.11.20 1,017 41 11쪽
26 신명재판(2) +5 22.11.19 1,007 33 14쪽
25 신명재판(1) +4 22.11.18 1,037 36 15쪽
24 곰과 여우와 돼지(4) +4 22.11.17 1,025 35 14쪽
23 곰과 여우와 돼지(3) +5 22.11.17 1,040 37 18쪽
22 곰과 여우와 돼지(2) +5 22.11.16 1,059 38 15쪽
21 곰과 여우와 돼지(1) +4 22.11.15 1,085 42 12쪽
20 피에르의 온도(6) +4 22.11.14 1,083 37 13쪽
19 피에르의 온도(5) +2 22.11.14 1,073 38 16쪽
18 피에르의 온도(4) +3 22.11.13 1,089 37 13쪽
17 피에르의 온도(3) +3 22.11.13 1,156 42 16쪽
16 피에르의 온도(2) +3 22.11.12 1,273 39 14쪽
15 피에르의 온도(1) +1 22.11.11 1,341 34 18쪽
14 호손시(市)의 사정(2) +1 22.11.10 1,413 39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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