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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1 님의 서재입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과학적으로 살아남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LEV1
작품등록일 :
2022.10.31 13:13
최근연재일 :
2022.12.28 22:25
연재수 :
6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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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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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69,180

작성
22.11.11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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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피에르의 온도(1)

DUMMY

“이야, 확실히 영주님은 영주님이시네. 효과 죽이네요. ‘진실의 손’의 효험이 있긴 한가 봅니다. ”

“하하... ”


나란히 길을 걷던 릴리가 씁쓸하게 웃었다.


“돌아가면 릴리 씨 것도 하나 써 달라고 해야겠어요. ”

“그렇지만 안 되셨어요. 잡화점 아저씨도... ”

“그러니까 투자는 신중하게 해야죠. ”


진실의 손에 대한 흉흉한 소문 때문인지 잡화상은 내가 내민 신분증명서를 읽자마자 대경실색을 했다.


그리고는 이쪽이 따로 묻지도 않았는데, 스스로의 불우한 처지를 주절주절 늘어놓으면서 용서를 구했다.


말하기를, 몇 달 전부터 자기들끼리 찰싹 달라붙는 팔면체의 신비한 돌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토렌스 백작령의 귀부인과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며 장신구 재료로 쓰여 날로 시세가 뛰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연줄을 동원해 야금야금 쟁여두었는데 막상 팔려고 하니 판매로가 막혀버렸다고.


프란츠 자작과 토런스 백작 사이에서 감도는 전운 때문에 두 도시 사이의 장삿길이 봉쇄령으로 막혀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직 전쟁이 가시화되지는 않았지만 프란츠 자작이 상속 후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신종선서를 하지 못했다는 것과, 이틈에 토런스 백작이 호손을 되찾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


프란츠 자작은 도시 내에 있는 모든 자원의 토런스로의 유출을 경계했고, 토런스는 토런스대로 호손시가 버티는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르는 은화들을 지급하면서까지 그의 자석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털자니 도무지 팔리지를 않는 상황.

당연했다. 영주님조차도 점심식사로 귀리죽을 먹는 소도시에 액세서리 수요가 많을 리 없으니까.


한마디로 존버하다 망해버린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흠. 그런데... ’


“와! 저기가 부두인가 봐요. 같은 바다라도 주변에 건물들이 있으니까 느낌이 다르네요! ”

“저기, 릴리 씨? ”

“네? ”

“지금 여기는 몇 년도인가요? ”

“어... 아직 겨울이 지나지 않았으니 AD 997년인가 그럴 걸요? ”

“AD요? 설마 ‘Anno Domini’? ”

“무슨 뜻인데요, 그게? ”

“혹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

“네? 그 분이 누구신대요? ”


그래, 알 턱이 없겠지.

여기는 이세계고 천주교든 개신교든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가 없을 테니까.


그치만 하나님은 믿는데 예수님은 모르는 수녀 복장을 한 여자아이라니, 내 시각에서는 대체 무슨 혼종인가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초코파이교 신자로서는 아무래도 좋은 얘기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제 고향과 비슷해서 착각했나 보네요. 그럼 AD는 무엇의 약자인가요? ”

“어, 그게... 그것까지는 모르겠네요. 죄송해요. ”

“아닙니다. ”


어쨌든 거의 딱 1000년도인 건가.


서기로 치면 내 세상에서도 한창 중세였을 시기다. 물론 ‘중세’ 자체가 장장 천 년에 이르는 긴 기간이니 엄밀히 말하면 중세 전기 끝이나 중기 시작 무렵이라고 해야겠지만.


그럼 이곳 사람들을 나와 같은 호모 사피엔스 혹은 사람속의 생물이라고 가정하고, 평균적으로 유사한 능력을 가지고 비슷한 문명을 쌓아왔다고 추측해도 되려나.


그렇다고 하면...


“앗! 저기 저 길쭉한 건물이 등대인가 봐요. 멋있다! 그죠? ”

“릴리 씨? ”

“네? ”

“릴리 씨는 실제로 자석을 봤던 게 방금이 처음인가요? 물론 저랑 처음 만난 날은 빼고요. ”

“...이제 보니 제 말은 전혀 안 듣고 계셨네요. ”

“음... 미안해요. 아까부터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


뾰로통한 표정을 한 릴리가 오랜만에 눈을 흘겼다.


“아무튼. 네, 처음 봤어요. 생각보다 예쁘게 생겼더라고요? ”


대답한 그녀가 갑자기 입을 딱 벌렸다.


“어어? 그런데 그게 자석이었어요? ”

“응? 그래서 보고 있던 거 아니었습니까? ”

“네엣? ”

“혹시 그걸로 나침반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계속 보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아니면 왜 그렇게 오랫동안... ”

“어, 어어... ”


릴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무, 물론 그랬죠! 아, 아니! 그게... 사실은 아니었지만요. ”


갈팡질팡하던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생각해 보니 쇠에 달라붙는다고 했지 자기들끼리 붙는다고는 한 적이 없네. 나침반에 든 침이 자석이란 사실도 알려주지 않았고. ’


초등학교 과학시간부터 자석의 성질에 대해서 배우고 냉장고 마그넷 등으로 익숙해진 현대인과 달리, 자석을 처음 접한 그녀가 ‘쇠붙이에 달라붙는 물질’과 ‘자기들끼리 달라붙는 물질’을 따로 생각한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고개 드세요. 돌이켜보니 제 설명이 부족했네요. ”

“우우... ”


사실은 그게 그거지만. 왜냐면 이 시대의 자석은...


-툭!


생각하며 걷던 와중에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혔다.


“에구, 죄송합니다. ”

“아닙니다. ”


다행히 시비가 걸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정중한 목소리에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순간,


“찾고 있었습니다. ”

“네? ”

“이미르 휴브리스 님 맞으시죠? ”


말쑥한 차림새의 청년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앤더슨 상단의 부단주, 로버트 앤더슨이라고 합니다. ”


깔끔하게 숱을 친 갈색 머리카락의 청년이었다.

귀족처럼 거만한 말투를 쓰거나 말을 늘이지는 않았지만, 입고 있는 옷의 재질과 광택, 흰 피부를 보니 평범한 성민은 아니었다.


“앤더슨 상단이요? ”


나는 그의 손을 잡는 대신 되물었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손을 거둔 그가 뒷머리를 긁었다.


“엇, 들어본 적 없으십니까? 토런스나 린우드를 거쳐 오셨다면 모르실 리가 없는데. ”


바다 밖, 아니, 별 밖에서 온 내가 너를 알 턱이 있나.


“학자님은 서쪽에서 오셨으니 처음 들으셨을 거예요. ”

“오! 서쪽이라면 대양 너머에서 말입니까? ”


릴리의 설명에 청년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외국 분이라고는 들었지만 설마 바다 밖에서 오셨다니... 언젠가 건너가 보고 싶었는데 덕분에 희망이 생기네요. ”


이채를 띤 푸른색의 눈동자가 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그러던 그가 조금 실망한 눈초리로 콧숨을 내쉬었다.


“흐음... 하지만 옷은 이곳의 의류점 거군요. 로브는 조금 더 고급인 걸 봐서 호손 영주님 물건 같고. 바다 건너 외국의 복식이 궁금했는데 이거 아쉽게 됐습니다. ”


입맛을 다시는 그 앞에서 나는 운동화를 슬며시 로브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다지 다를 건 없습니다. 이쪽의 수준이 한 천 년 정도 앞서있단 것만 빼면요. ”

“하하! 고향을 사랑하시는 마음이야 이해합니다마는 이 호손은 신성제국에서도 가장 촌구석이지요. 제국의 수도, 아니, 남방의 대영주께서 계시는 카탈리나 공국으로만 가도 훨씬 다양하고 고급 진 물건들이 많답니다. ”

“뭐,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전 바빠서 이만... ”

“아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학자시란 분이 왜 이렇게 성미가 급하십니까? ”


깔끔한 영업용 미소를 지은 로버트가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 같이 점심이라도 한 끼 어떠십니까? ”

“먹었습니다. ”

“그럼 식후 술이라도 한 잔? ”

“낮술은 취미가 아니라서. ”

“편하게 맥주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나요? ”

“끈질기시네요. 죄송하지만 조만간 영주님의 만찬에 가야 하니 거절하겠습니다. ”

“아, 거기라면 저도 갑니다. 이따가 같이 가시죠. ”


의외의 대답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젊지만 노련한 장사꾼은 그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휴브리스 님께도 손해가 될 얘기는 아닐 겁니다. 저희 앤더슨 상단은 언제나 ‘상호이득’을 추구하거든요. ”

“글쎄요. ”

“우선 저희가 갖고 온 마차가 있으니 함께 가시면 성까지 편하게 모셔다 드릴 수 있을 겁니다. 필요하신 물건이나 가고픈 장소가 있으시다면 안내할 직원을 붙여 드릴 수도 있고요. 일단 이야기만 들어보시죠. 싫으시면 그때 거절해도 그만 아닙니까? ”


그가 부둣가의 어느 가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도시의 몇 안 되는 명물도 즐기면서 말이죠. ”


그 말에 고개를 돌려, 물고기 그림과 함께 드물게도 글귀가 쓰여 있는 간판을 본 순간 프란츠의 신분증명서를 봤을 때처럼 글자들이 재조합되었다.


[피에르의 온도. ]

[시원한 맥주와 따뜻한 대구요리 전문. ]


나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럴까요? ”

“오오, 감사합니다! ”

“아, 물론 이야기만 들어보는 걸로. ”

“물론입니다. 그러면 이쪽으로... 참. 이쪽의 아가씨는 그동안 저희가 엄선한 다른 가게에서... ”

“아뇨. 그건 안 됩니다. ”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죄송하지만 듣는 귀가 많으면 곤란한 얘기라... ”

“그녀 역시 저와 같은 프란츠 자작님의 손님입니다. 무슨 볼일이신지는 몰라도 릴리 양은 저와 함께 있을 겁니다. 아니면 이 얘기는 없던 걸로 하죠. ”


로버트가 들고 온 이야기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나에 관해 제법 파악하고 온 것은 분명했다.

만일 그 와중에 ‘생명수의 소녀’에 대해 들었다면?

아니, 오히려 그녀가 목적이고 방해자인 나를 치워놓기 위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그러시다면 함께 모시지요. ”


로버트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식당에 들어서자, 안내하러 나온 점원이 다소 놀란 얼굴로 고개를 숙이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곧 요리사라기보다는 용병단장이나 도적단 두목 같은 직함이 어울려 보이는 근육질의 남자가 나왔다.


“오! 로버트 부단주님 아니신가? 오랜만이로군. 우리 맥주가 그리워서 왔소? 아니면 대구포? ”

“하하, 겸사겸사요. 일단은 일 얘기로 왔습니다. 2층 방은 혹시 비어있나요? ”

“요즘은 토런스 방향에서 오는 손님들이 없으니까 텅텅 비었지. 원하시면 쭉 올려 보내지 말까? ”

“그래주시면 좋겠네요. 조금 민감한 사업 얘기라. ”

“그러도록 하지. 음식은... ”

“불러주시면 제가 문 앞에서 듣고 가지러 가겠습니다. ”


어, 씨! 깜짝이야?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에 나는 그만 움찔거리고 말았다.


“이 사람은 누굽니까? ”

“제 수행원 겸 호위입니다. 한 상단의 부단주쯤 되면 아무래도 이런저런 위험에 노출되기 마련이니까요. ”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

“후후, 칭찬 감사합니다. 은화 값은 하는 친구지요. 놀래어드린 점은 죄송합니다. ”

“죄송합니다, 휴브리스 님. ”


로버트에 이어, 로브와 후드도 모자라 검은 가면까지 눌러쓴 호리호리한 체구의 사람이 내게 목례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의외로 연배가 있는 여자 같았다.


“그럼 자리가 준비되는 대로 모실 테니 좀만 기다리시오. 몇 주 넘게 비어있던 곳이라 요샌 청소도 안 했거든. ”


근육질 사내가 점원에게 지시를 내리자, 그녀가 물통과 걸레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보던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이쪽으로 내려왔다.


“그나저나 두 선남선녀께서는 여기 오신 게 처음인가? ”

“이야기는 종종 들었습니다. ”

“껄껄, 이야기만으로는 부족하지! 생긴 걸 보니 이쪽 태생은 아닌 듯한데, 아마 오늘 여신님의 인도에 절로 감사를 드리게 될 거요! ”


오, 자신감 보소. 불안과 기대감이 동시에 올라가는 걸?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이곳의 주인장 되시나요? ”

“아차! 그러고 보니 아직 소개도 안 했구먼? 내 이름은 피에르 고르멧이오. 척 보면 알겠지만 ‘피에르의 온도’의 주인장이자 주방장이지! ”


과연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그가 떡 벌어진 어깨를 폈다.


“‘피에르의 온도’라, 식당 이름 치고는 희한하네요. ”


아이스 브레이킹을 겸해서 한 질문에 로버트가 대답했다.


“그렇죠?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물론 피에르 씨의 설명을 듣고 나서는 납득이 갔지만요. ”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

“음! 무릇 요리의 생명은 정확한 온도라고 생각하기에 내 붙여놓은 이름이라오. 예로 맥주는 차갑게, 스프는 따뜻하게, 구이는 뜨겁게, 튀김은 아주 뜨겁게 만들어야 제 맛이 나지. ”

“호오? ”


하는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뭔가 다른 느낌이 든다.


“조리하는 온도뿐만 아니라 그것을 손님 앞으로 내어갈 때의 온도도 중요하다오. 그걸 최대한 잡아두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잔이나 그릇으로 나무 대신 주석을 쓰지. 비싸기는 하지만 더운 건 덥게 시원한 건 시원하게 유지시켜 줘서 맛과 풍미가 훨씬 올라가거든! ”

“...브라보! ”


아무래도 이번에는 정말로 다른 것 같다!


“그렇습니다! 요리는 과학이지요, 암요! ”


이 시대에 이런 과학적인 접근법으로 요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니, 기립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응? 과학? 과학이 뭐요? ”

“아, 제가 연구하는 학문인데... 아무튼 칭찬입니다. ”

“흠. 약사들이 하는 얘길 들어보면 내 맥주야말로 최고의 보약이라고 말하곤 하던데, 비슷한 의미인가? ”

“그렇습니다. ”

“껄껄, 고맙소. 내 그 기대에 반드시 부응해드리지! ”


마침 내려온 점원이 위층을 가리키며 고개를 숙였다.

두근대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계단을 올랐다.

몇 개의 테이블을 지나, 따로 벽으로 구분된 제법 깔끔한 방으로 안내받았다.


그리고 몇 분 후,


[밀 맥주 두 잔 먼저 나왔습니다! ]


아래층에서 점원이 음료가 나왔음을 소리쳐 알리자 로버트의 수행원이 내려가더니, 큼지막한 주석잔 2개를 가져와 나와 로버트 앞에 내려놓았다.


“오오오오... ”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눈앞에서 넘실거리는 황금빛 액체와 새하얀 거품.

불투명한 주석잔이라 사실 거품 밑은 안 보이지만 밀 맥주라고 하니 어련히 황금빛일 터다.


개인적으로는 라거 취향이지만 이게 어딘가 싶었다.

귀리 맥주도 있기는 했는데 그건 쳐다보지도 않았다.


“릴리 씨, 부탁이 있는데요. ”

“네? ”

“이거 제가 먼저 마셔버려도 됩니까? ”

“하하... 그러세요. 제 것도 곧 나올 텐데요, 뭐. ”

“고맙습니다. ”


이야, 맥주다...

이게 대체 얼마 만이냐?


게다가 얼음장 같지는 않지만 나름 차가워.

손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슬며시 올라온다.


못 참겠네, 정말!


-꿀꺽! 꿀꺽!


그대로 원샷했다.

아쉽게도 내 세상의 맥주만큼 탄산이 많진 않았지만 나름 맛좋은 맥주였다. 덕분에 한 번에 들이키긴 더 쉬웠고.


“캬! 스며든다아... ”

“한 잔 더 주문할까요? ”

“크, 그럽시다. ”

“요리도 하나 시키시겠습니까? 이따 만찬에 가시겠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기도 아까우니까요. ”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

“음, 뭐로 할까요? 여긴 포도 유명하고, 스프나 구이도 좋지만 지금은 철이 아니라. 맥주 안주라면 역시 포로? ”

“튀김. ”

“예? ”

“튀김. The end. ”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튀김은 제대로만 만들면 실패할 수 없으니까요. 맥주와의 맛 궁합도 좋고요. ”

“뭘 좀 아시네요. ”

“기름이 아주 많이 들어가서 비싼 것만 빼면요. 이거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해 봐도 될 것 같은데요? ”


메뉴판을 덮은 로버트가 웃으며 수행원에게 전달했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사실 주워 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여기서는 튀김이 꽤 비싼가보네요. ”

“어디서나 그렇죠. 학자님 나라에선 안 그렇습니까? ”

“이쪽이야 뭐... 바깥에서 놀던 애들이 심심하면 간식으로 사먹는 게 튀김이니까요. 너무 많이들 먹어 대서 탈입니다. ”

“굉장히 유복한 장소인가 보군요. 바다 너머는... ”


감탄 반 의심 반으로 대답한 로버트가 자세를 고쳤다.


“역시나 보통 분이 아니십니다. 과연 ‘진실의 손’의 속임수를 꿰뚫어보신 분답군요. ”


방금 맥주를 깔끔하게 원샷한 게 다행이었다.

지금껏 마시고 있었다면 분명 사레가 들렸을 테니까.


“어떻게 그걸? ”

“하하! 그 반응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가짜였군요? 누구를 보내 봐도 ‘거짓’만 나오기에 혹시나 했는데. ”


젠장, 떠본 거였구나.

맥주랑 튀김에 눈이 팔려서 말려버렸다.


“편하게 한 잔 하자더니 이런 식이면 글렀네요. ”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사실 진작부터 의심하고는 있었습니다.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마법사가, 고작 이런 깡촌에 몇 년씩 머물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오래된 이야기처럼 마을 처녀와 사랑에라도 빠졌다면 모를까. 다만 제가 직접 확인하려다가 일이 잘못되면 골치가 아파지니 외부에서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킁... ”

“그런데 이 시국에 영주님이 직접 작성한 신분증명서를 가진 외국인이 있다고 하니까요. 그래서 혹시나 싶었는데, 하하, 역시나였네요! 방금의 무례는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


깍듯이 고개를 숙인 로버트가 솜씨 좋게 말을 이어갔다.


“이거, 이거, 이러면 이야기가 빨라지겠는데요? 저희가 영주님께 악의를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딴 사람은 몰라도 학자님께서는 알아주실 테니까요! ”


은근슬쩍 나를 띄워주면서도 마치 그래야 된다는 양 슬슬 분위기를 몰아가는 것이 잔뼈 굵은 장사꾼다웠다.


“그렇습니까? 전 잘 모르겠는데. ”

“에이, 왜 이러십니까? 저희 상단은 이익을 좇을 뿐 누굴 해치거나 지키려고 드는 용병 집단이 아닙니다. ‘거래한 모두에게 이윤이 돌도록 하라! 단, 그 첫 번째 자리를 앤더슨에게!’, 이것이 앤더슨 상단의 신조이자 좌우명이지요. ”

“반대로 이득이 있다면 기꺼이 지키거나 해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말로는 뭘 못할까요? ”

“정말입니다. 현명하신 분이니 이야기를 듣고 직접 판단해보시면 아실 겁니다. ”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지만 그다지 신뢰는 안 가네요. ”


[밀 맥주 두 잔 더 나왔습니다! 튀김 하나도 곧 나가요! ]


마치 설전을 진정시키려는 듯이 잔이 더 올라왔다.

나는 새로 나온 맥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아무튼 빨리 좀 끝내주시겠습니까? 제가 이 사랑스러운 맥주를 마실 때에는 가만 놔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거든요. ”


어느 예절교육 영화에 나온 대사를 딴 말에 로버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요. 다름 아닌 오늘 저녁 만찬과 관련된 얘기입니다. ”


가볍게 목을 축인 그가 손깍지를 끼고는 자세를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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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바다의 밀과 악마의 열매(3) +3 22.11.29 718 24 13쪽
40 바다의 밀과 악마의 열매(2) +3 22.11.28 746 21 16쪽
39 바다의 밀과 악마의 열매(1) +1 22.11.28 810 21 14쪽
38 두 번째 신탁(2) +5 22.11.27 810 29 14쪽
37 두 번째 신탁(1) +7 22.11.27 837 30 13쪽
36 신종계약(5) +3 22.11.26 862 24 13쪽
35 신종계약(4) +13 22.11.26 907 32 14쪽
34 신종계약(3) +3 22.11.25 905 2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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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신명재판(5) +5 22.11.21 951 31 17쪽
28 신명재판(4) +4 22.11.20 1,006 31 18쪽
27 신명재판(3) +2 22.11.20 1,016 41 11쪽
26 신명재판(2) +5 22.11.19 1,007 33 14쪽
25 신명재판(1) +4 22.11.18 1,036 36 15쪽
24 곰과 여우와 돼지(4) +4 22.11.17 1,025 35 14쪽
23 곰과 여우와 돼지(3) +5 22.11.17 1,040 37 18쪽
22 곰과 여우와 돼지(2) +5 22.11.16 1,059 38 15쪽
21 곰과 여우와 돼지(1) +4 22.11.15 1,085 42 12쪽
20 피에르의 온도(6) +4 22.11.14 1,083 37 13쪽
19 피에르의 온도(5) +2 22.11.14 1,073 38 16쪽
18 피에르의 온도(4) +3 22.11.13 1,089 37 13쪽
17 피에르의 온도(3) +3 22.11.13 1,156 42 16쪽
16 피에르의 온도(2) +3 22.11.12 1,273 39 14쪽
» 피에르의 온도(1) +1 22.11.11 1,341 3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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