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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1 님의 서재입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과학적으로 살아남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LEV1
작품등록일 :
2022.10.31 13:13
최근연재일 :
2022.12.28 22:25
연재수 :
6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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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043
추천수 :
2,527
글자수 :
469,180

작성
22.11.21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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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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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신명재판(5)

DUMMY

“벌써 내일이네요. ”


맞은편 침대에 앉아있던 릴리가 잠이 오지 않는지 둥글게 차오른 달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떨립니까? 본인이 나가는 것도 아닌데. ”

“미르 씨는 안 그래요? 내일 결과에 따라 자작님도 시녀장님이랑 궁내관님도 어떻게 되실지 모르잖아요. ”

“예전에는 마을로 돌아가지 못해 안달이셨으면서, 지금은 그분들 걱정이 되시나 보네요. ”

“우으, 놀리지 마세요. 알고 보니 다들 좋은 분들이셨다고요.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주시기도 했고... ”

“이쪽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그런 이상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은 사태 해결에 도움이 안 되겠죠. ”

“미르 씨는 그게 말처럼 쉽게 되시나 보네요. ”


무릎을 끌어안으며 퉁명스레 대꾸한 그녀에게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사실 저도 속으로는 많이 떨린답니다. ”

“치, 그럴 줄 알았어! 역시 그렇죠? 괜히 센 척 하시고. ”

“하지만 저까지 티를 내면 지금 제 앞에 계신 어떤 분이 더 불안해하실 거잖아요? 그래서 참는 중입니다. ”

“...할 말 없게 만드시네요. ”


살짝 긴장이 풀렸는지 릴리가 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분위기도 조금은 나아졌고, 내 기준으로는 아직 잠에 들기 이른 시각이라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의외였습니다. ”

“뭐가요? ”

“이번에 아주 작정하고 배우시던걸요? 검술이요. ”

“아. ”


내가 말 타기에 익숙해질수록, 선생을 맡은 릴리는 자연스레 시간이 남아 멍 때리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게 신경이 쓰였는지 잭슨과 엠마는 남는 시간에 호신용 검술이라도 배워보지 않겠냐며 그녀에게 제안했고, 릴리는 잠깐 고민하나 싶더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열심히 배웠다.

진짜로 열심히.

잭슨이 자기가 지도해온 병사들 가운데서도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은 없었다며 혀를 내둘렀을 정도로.


그동안 얼마나 고팠는지가 짐작이 갈 정도였다.

말을 아끼던 릴리가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문 밖을 한동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역시 이상한가요? 하나님의 사도로서 사람들을 돕겠다고 맹세한 주제에, 사람들을 해치려고 만든 날붙이를 쓰는 법을 배운다는 게... ”

“전혀요. ”


나는 단칼에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이곳의 기사들도 별의 여신인지 뭔지를 믿는 신도가 아닙니까? 제 나라의 역사에서는 호국을 위해 종교인들이 군대를 일으키는 경우도 빈번했고요. ”

“그랬나요? ”

“게다가 릴리 씨가 배우는 건 살법이 아니라 호신술이잖습니까? 이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잘 생각하셨어요. 험한 세상에서 자기 몸은 자기가 지킬 줄 알아야죠. 지금까지는 운 좋게도 아무 일 없으셨지만... ”


그 말에 릴리가 움찔거리더니 입술을 뻐끔거렸다.

삼켰던 말은 상당한 시간이 지나고서야 밖으로 나왔다.


“운이 좋은 것은, 아니었어요. ”

“네? ”

“아무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고요. ”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돌이켜 보니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여행 도중 몇 번이나 습격을 당했다고 말했다. 과거에 따라다녔다던 가필드 용병단도 눈치를 보니 지금은 전멸한 모양이고.


그런 상황에서 깨끗하고 치료효과가 있는 물을 만들 수 있을 뿐인 소녀가 제때 탈출할 수 있었을까?


잡혔다면 도망은 어떻게 쳤을까? 도망 후에는 스스로가 만든 물로 버틴다 쳐도 탈출과정은?


분명 엄청난 고생을 했을 터였다. 어쩌면 목숨까지 빼앗기진 않았을지언정 몹쓸 일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안 좋은 기억을... ”

“운이 좋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려주셨어요. ”

“네? ”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다고요. 운이 좋았던 게 아니에요. ”


나는 다소 어안이 벙벙해져서는 되물었다.


“어... 그러니까 그 말씀은 릴리 씨가 잡혀서 뭔가 몹쓸 일을 당했다거나 그런 적은 없다는 거죠? ”

“적어도 제 기억에는요. 그분의 가호 덕분이죠. ”


야이, 식겁했네.

그런 말을 왜 저렇게 우울모드로 하는 거야?

따지고 싶었지만 그 전에 릴리가 말을 덧붙였다.


“‘저’한테는 없었어요. ”

“...아. ”


나는 그제야 그녀가 슬픔에 잠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몇 년씩 여행하는 동안 릴리라고 왜 동료가 없었을까?

여행길에 엄청난 도움이 되는 능력을 가진 데다 밝고 아름답기까지 한 한창 때의 소녀인데.


가는 곳마다 들러붙는 사람들이 있었을 테고, 그중에는 진짜 좋은 사람들도 몇 명쯤은 있었으리라.


하지만 릴리는 여행 도중 몇 번이나 습격을 받았고 겨우겨우 탈출한 끝에 혼자서 대륙의 서쪽 끝에 도달했다.


그래. ‘혼자서’ 말이다.


“미안합니다. ”

“아, 아니에요. 시각이 늦었으니 이만 자죠. 미르 씨도 오늘은 일찍 주무세요. 내일은 중요한 날이잖아요. ”

“그래야겠네요. ”


나는 돌아누워 억지 잠을 청했다.

그녀의 말처럼 고민으로 잠을 설치기엔 내일은 너무 중요한 날이었다.



* * *



1. 시각 : 다음 보름달이 뜨는 날의 이른 오후.

2. 장소 : 호손과 토런스 사이에 위치한 론데일 평원.

3. 입회인 : 각 도시의 시녀장 및 시종장과, 카탈리나 공국에서 보낸 공증인들.

4. 수행단 : 각각 50명 이하 규모로 경호를 위한 최소한에 그치며, 궁병을 비롯한 원거리 병과는 대동하지 않는다.

5. 결투자 : 본인 또는 입회인들에게 미리 알린 대전사.

6. 무기 : 기사의 상징과도 같은 군마와 랜스.

7. 방식 : 한 쪽이 전투불능이 되거나 항복할 때까지의 마상전투로,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하더라도 결코 죄를 묻지 않음.


이상이 호손과 토런스가 합의한 결투 재판의 골자였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당일 아침.

임시로 목책을 두른 타원형의 경기장에는 당사자들과 입회인들을 제외하고도 수백 명이 넘는 각계각층의 구경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야! 언제 시작한대? ]

[이른 오후라고 했으니 해가 중천에 뜨면 시작할 걸? ]

[늦네. 그림자를 보면 이미 된 것 같은데. ]

[근데 두 귀족들께서는 왜 결투 재판을 하시는 거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대서 와보긴 했지만. ]

[아니, 그것도 모르고 왔어? 듣기로는 토런스 백작님께서 호손 자작님의 폭정을 심판하려고 만든 자리라던데? ]

[야, 폭정은 무슨! 그거 헛소문이야, 헛소문! 세상에 어느 폭군이 금싸라기 같은 신약을 돈도 안 받고 백성들한테 나눠 주시겠냐? 심지어 토런스에도 기부하신 걸로 아는데. ]

[신약이라면 그 부자병 치료제 말인감? ]

[난 부자병은 없지만 공짜로 주신대서 먹어봤는데 그동안 쌓인 피로가 확 풀리더라! 내 마누라는 심심하면 다리에 경련이 왔는데 며칠 먹으니까 그것도 싹 나았다더라고. ]

[세상에! 그 정도면 만병통치약 아녀? ]

[잠깐, 그 약이 호손에서 온 거였어? 어쩐지 온 동네를 뛰어다녀도 구할 수가 없더라니. ]

[구할 수 없지는 않을 걸? 듣기로는 앤더슨 상단인가? 그 쪽에서 그 약을 몰래 사들여선 물에 타서 판다던데? ]

[아, ‘생명수’인가 뭔가 하는 그거? ]

[하! 난 아프면 아팠지 괘씸해서라도 그건 안 사먹는다! 공짜로 뿌린 약을 그냥도 아니고 물에 타서 양을 늘리고는, 1갤런 당 은화도 아니고 금화를 내놓으라고 하더라고! ]

[우와, 심하네. 그건... ]

[그런 폭리를 취하고도 여태까지 아무런 조사나 처벌이 없는 걸 보면, 분명 백작님의 가신들 중에 뒷배가 있는 게지. ]

[말조심해! 지금 여기 구경 오신 귀족님들도 많아. ]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솔직히 호손 자작님에 대한 질 나쁜 소문들도 나는 그쪽에서 퍼뜨린 모함 같아. 지가 찔리니까 상대편을 깎아내리는 거지. ]

[에이, 아무리 그래도 설마... ]

[야야! 이러쿵저러쿵 말해봤자 진실은 여신님께서 아실 테니까 두고 보자고. 그쪽 말이 맞는다면 여신님께서 자작님 챔피언의 손을 들어주시겠지. ]

[그래, 맞아! 쓸데없는 소리 그만들 하고 잠자코 여신님의 뜻이나 지켜보자고! ]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이런저런 대화들이 오갔다.

때로는 분위기가 격앙되어 싸움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썩은 청어 같은 호손 놈들이 감히 뭐라고? ]

[입 다물어, 토런스의 돼지들아! 네놈들이 입만 열면 똥을 안 닦고 만든 소시지 냄새가 나니깐! ]


그때마다 양쪽의 병사들이 나서서 말렸지만, 결투 재판의 조건상 제대로 된 군대를 끌고 올 수는 없었기에 완벽한 통제는 어려웠다.


한편 호손 측보다 두 배는 크고 화려한 천막 안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아르노는 치밀어 오른 짜증에 발을 굴렀다.


“에잇! 앤 녀석의 복귀는 아직이냐? ”

“예... 아무래도 그냥 시작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구경꾼 사이에 이쪽에 불리한 소문이 퍼지고 있어서... 전서구를 통해서 입수한 정보로도 충분히 승산은 있으니까요. ”

“흐음. 분명히 ‘왼쪽 겨드랑이’라고 했지? 프라도 경. ”

“이젠 경이 아니라 자작님인데... ”

“어엉? 뭐라고? ”

“아, 아닙니다. 맞습니다. 거기가 약점이라 하더군요. ”


뚱뚱한 몸을 한껏 찌그러뜨린 프라도의 말에 라딘 남작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외쳤다.


“핫!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은 정보였다. 말안장 좀 만져봤다고 평민 주제에 감히 기사 흉내를 내는 무두장이 따위! ”


그동안 놈도 나름대로 훈련을 했겠지만, 진짜 전장을 뛰어다닌 적도 없는 반푼이일 뿐이다. 역전의 용사인 자신에게 감히 생채기 하나라도 낼 수 있다면 칭찬해 줘도 좋으리라.


“좋다! 가라, 라딘! 당연하지만 반드시 이기고 와라! ”

“예! ”


투구를 받아든 라딘이 백작에게 목례한 다음, 자기처럼 거대한 말을 끌고 자신만만하게 천막에서 나왔다.


7피트(213cm)에 달하는 키에 몸무게가 300파운드(136kg)에 이르는 거구의 기사. 그런 그가 탈 전투마 역시 그 가치가 제국 금화 80닢, 리나 은화로는 1000닢에 이르는 일명 ‘뛰어 다니는 대저택’이었다.


애초에 라딘이 성미에도 맞지 않는 징수관직을 별 불만 없이 수행해온 것도, 그로 인해 생긴 북방 상단들과의 연줄과 부수입을 차곡차곡 모은 덕에 녀석 같은 명문혈통의 전투마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놈과 함께 시시한 산책이나 대련 대신 제대로 된 결투를 해볼 날이 온 것이다.


경기장에 도착한 라딘은 힘껏 발을 굴러 단숨에 말안장 위에 올라탔다.


체고만도 웬만한 장정보다 큰 전투마 위에 거체의 기사가 위풍당당하게 앉아있는 모습.


무(武)를 아는 자라면, 아니, 눈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그 위용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으리라.


10년 전의 영광스런 나날로 돌아간 기분을 느끼며 라딘 남작은 투구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벅차오른 마음에 눈을 감고 경기장으로 들어오니, 예상한 대로 구경꾼들 사이에서 환호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그래! 이래야지!


그는 한 손으로 말고삐를 고쳐 잡고 이쪽을 바라보는 소녀와 귀부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기 위해 눈을 떴다.

동시에 당혹감에 휩싸였다.


‘뭐, 뭐야? ’


수백 명이 넘는 구경꾼들 중에, 이쪽을 보고 있는 자들은 이제 보니 수십조차 안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맞은편에서 오고 있는 다른 기사를 향하고 있었다.


“우와! 저건 뭐야? ”

“저거라니! 궁내관 나리께 실례되는 소릴. ”

“말고, 저 갑옷 말이야! 나 저런 거 처음 봐, 언니! ”

“마치 여신님께서 내려 보내신 천사 같군... ”


누군가가 내뱉은 말처럼 그 모습은 천사였다.


물론 하늘을 나는 날개 달린 천사는 아니었다.

하얀 새의 날개 대신 은빛의 갑주를, 부드러운 깃털 대신 단단한 쇠미늘을 가진 전장의 천사였다.


정교하게 요철이 잡힌 흉갑과 매끈한 곡선구조의 폴드런, 뱀브레이스, 건틀렛이 상체를 빈틈없이 감쌌고, 하체 역시 곡면가공한 미늘을 겹쳐 만든 폴드와 태싯으로 물샐 틈 없이 방비했다.


관절 부위는 미늘 여러 개를 겹친 다음 대갈못(리벳)으로 고정해 방호력과 기동성을 확보했으며, 우아한 유선형의 그리브와 사바톤은 발가락 하나의 노출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흉갑에 고정된 아흐메(Armet) 투구는 시야확보를 위한 구멍 외에는 머리 전체를 꼼꼼하게 가려, 그 눈빛을 볼 수 없는 멀리서는 마치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안에 들어있는 것 같은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여신의 군대가 지상으로 내려왔다면 저런 모습일까?

하늘의 사절단(天使)이 아닌 하늘의 전사대(天士)라는 의미의 천사라면 저것이야말로 분명 그 현현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판금갑옷(플레이트 아머)의 수려함에, 구경꾼들은 물론 라딘조차 할 말을 잊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선택하고 만 침묵은 이윽고 활활 타오르는 질투심과 적개심으로 바뀌었다.


‘빌어먹을 무두장이 자식이! 신분세탁도 모자라서 저딴 기물을 입고 사람들을 현혹해? ’


기사 된 자로서 차마 부녀들의 시선을 빼앗긴 탓이라고 하기에는 면목이 서질 않았다.


그래서 라딘은 울컥 차오른 감정을 무용이 아닌 기물에 의존하는 상대방에 대한 경멸로 포장했다.


정작 그 자신도 토런스의 장인에게 특별 주문한 최고급 사슬갑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


점점 가까워진 호손 측의 기사가 투구를 벗으면 얼굴이 보일법한 거리에 섰다.


과연 토런스의 1/5도 되지 않는 호손의 인구를 감안하면 저 정도면 잘 뽑았다 싶을 정도의 다부진 체구였다.


말에 탄 자세나 무게중심도 제법 안정적인 것을 보면 나이만 어렸어도 종자로 삼아 키워봄직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 부질없는 소리였다.

백작님의 허락이 떨어진 이상 자신은 절대로 저 무두장이 가짜 기사에게 손속을 두지 않을 테니까.


주제도 모르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마음껏 유린하다가, 목숨을 구걸하는 순간 허파나 심장을 있는 힘껏 깊이 꿰뚫어 주리라.


그렇게 삭이지 못한 분을 풀고 있던 라딘의 눈에 마침 딱 맞는 먹잇감이 걸려들었다.


“하! 스스로를 기사라고 칭하는 자가 계집들이나 쓰는 발받침을 덜렁덜렁 달고 오다니? 네놈은 수치심도 없느냐! ”


그 말에는 할 말이 없는지 백은의 갑주를 입은 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라딘 남작은 이때다 싶어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자, 다들 보아라! 저 추태야말로 영주를 잘못 만나 땅에 떨어진 호손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으니! 사자 아비 밑에 고양이 자식 없다는 말도 옛말이로구나! 본인의 부족한 무(武)을 숨기려고 내보낸 대전사라는 작자의 수준조차 이렇게 한미하기 짝이 없어서야! 내 여신님의 뜻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여... ”

“듣고 있자니 입이 참 길군, ‘라딘 경’. ”


라딘이 일장연설을 이어가기 위해 숨을 삼킨 순간, 맞은편의 기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말투와 단어 선택은 남작으로 하여금 다음 말을 잊고 역정을 내게 하기 충분했다.


“네 이놈! ‘라딘 경’이라니? 천한 무두장이 놈이 반짝이는 갑옷 좀 입었다고 나와 맞먹으려 드느냐? ”

“여전히 목소리만 크지 사고는 꽉 막혀있군. 8년이면 사람도 조금은 바뀔 만한데. ”

“이, 이 자식이 감히...! ”


다음 말이 결정타였다.


“그러니 아직도 ‘경’을 못 벗어났지. 안 그런가? 라딘? ”

“개새끼가! 그 입 닥치지 못해? ”

“공작 전하의 대리인도 계신 자리에서 입이 많이 거칠군. 자네야말로 입 닥치지. 기사는 입이 아니라 승리로 주군에게 그 가치를 증명하는 법일세. ”

“감히 너 따위가 내 앞에서 기사도를 논하느냐? ”


자칫하면 기사의 결투가 아닌 시정잡배의 싸움이 될 것 같은 분위기에, 경기장 중앙에 따로 마련된 관중석에 앉아 있던 베일을 쓴 귀부인이 손짓했다.


[카탈리나 공작 전하의 대리인께서, 입씨름은 그만두고 어서 여신님의 뜻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


“봤나? 공작 전하의 대리인께서도 나와 뜻이 같으시군. 장담컨대 여신님께서도 그러실 테지. ”

“닥쳐라! 내 네놈을 절대 살려 보내지 않을 테니, 그 오만방자한 입을 놀린 것을 후회하게 될 게다! ”


마지막으로 대화를 주고받은 두 사람이 동시에 뒤로 물러나 100피트(30m) 간격으로 마주섰다.


[신명재판을 시작하라! ]


-뿌우우우!


울려 펴진 뿔피리 소리와 함께 두 기사가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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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곰과 여우와 돼지(2) +5 22.11.16 1,059 38 15쪽
21 곰과 여우와 돼지(1) +4 22.11.15 1,085 4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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