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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1 님의 서재입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과학적으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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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1
작품등록일 :
2022.10.31 13:13
최근연재일 :
2022.12.28 22:25
연재수 :
6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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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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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69,180

작성
22.11.17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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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글자
18쪽

곰과 여우와 돼지(3)

DUMMY

게일은 어젯밤 촌장 집을 수색하던 도중에 지하실 구석에서 꽁꽁 묶여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증언에 따르면 그저께 내 심부름으로 해수를 길러 바다까지 갔다 왔던 것이 억울해서, 진짜 우물에서 바닷물이 나오는지 확인해보려 했다는 모양이다.


그러다가 나처럼 바람 소리에 위화감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그곳이 우물이 아닌 수직갱도임을 알 리 없는 게일은 하필이면 촌장한테 찾아가서 상담했고, 잠깐 기다리라는 그의 말을 듣고 멀뚱멀뚱 서 있다가 퍽 소리와 함께 정신이 아득해졌다고 한다.


그러고는 쭉 지하실에 갇혀 있다가 증거와 여죄를 찾고자 촌장 집을 수색하던 궁내관 잭슨에게 발견된 것이었다.


“나랑 마을 사람들도 모자라서 영주님까지 속이려고 들다니, 아주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왔구먼. ”

“촌장 입장에서 이곳은 원래 토런스의 땅이었고 곧 토런스에게 돌아갈 곳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그쪽에 붙는 편이 이득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결과는 보다시피 이렇지만요. ”


나는 주인 잃은 집의 테이블에 게일과 마주앉아 마음대로 끓인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역시 제법 맛있는 차다. 어제 프란츠 자작의 성에서 마신 것보다 나을 정도로.

촌장이 그동안 번 돈을 어디다 써왔는지 알만했다.


“근데 잡혀간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요? ”

“음, 글쎄요. 모르긴 몰라도 한 명 빼곤 금방 풀려나지 않으려나요? ”

“예? 진짜입니까? ”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되물어온 그에게 대답했다.


“어제 이 마을에 있는 광산을 발견했을 때, 프란츠 자작님께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마을 사람들이 멋대로 광산을 개발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밝히는 것, 또 하나는 광산을 ‘이제 막 발견하고 개발한’ 것처럼 속이는 것이었지요. 지혜로우신 프란츠 자작님께서는 후자를 선택하셨고요. ”

“이유를 아십니까요? ”

“전자를 택한다면 자기를 속인 고얀 녀석들에게 응당한 벌을 내릴 수는 있겠지만, 대신 자기 영지의 광산조차 챙기지 못한 미숙한 영주라는 오명 역시 뒤집어쓰게 될 겁니다. 게다가 프란츠 영주님의 거친 성정에 관한 소문도 아직 다 가라앉지 않았으니 민심에도 좋지 않을 테고요. 양쪽 다 토런스에게는 호손을 집어삼킬 좋은 구실이 되겠죠. ”

“아아, 듣고 보니 그렇구먼요. 휴, 다행입니다요. ”


한시름 놓은 듯한 그의 표정에 나는 되물었다.


“의외네요? 전 게일 씨가 아쉬워할 줄 알았는데. ”

“쇤네가 말입니까요? ”

“촌장과 패거리들은 그동안 게일 씨를 업신여기고 따돌려왔잖습니까? 복수할 기회를 놓치신 것 같아서요. ”

“고소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마는, 녀석들 목이 매달리는 것까지는 쇤네도 바라지 않습니다요. 그놈들이야 그렇다 쳐도 딸린 식구에게는 무슨 죄가 있습니까요? ”

“그렇기는 하네요.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이 대화는 어제 압송된 자들 중 한 명만은 제외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프란츠가 폭군은 아니라지만, 앤더슨 상단을 통해 토런스와 내통하며, 자철석을 몰래 채굴해서 팔아치운 패거리의 주범을 그냥 풀어줄 만큼 무르지는 않았다.


고용인이 한 명 있을 뿐 딸린 가족도 없고, 토런스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광산 개발과 관련된 죄를 직접 묻기는 어려운 상황이라 해도, 마을의 장으로서 관리에 실패한 책임이 있으니 애초에 무죄 방면은 무리였다.


그 와중에 게일을 공격하고 감금했던 사실이 밝혀졌으니 ‘빼박’이었다.

앞으로 촌장은 두 번 다시 자기가 쟁여둔 귀한 차를 입에 대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가두는 선에서 끝나다니, 생각보다 유하게 넘어갔구먼요? 솔직히 쇤네는 촌장 그 양반은 사지가 찢기거나 저잣거리에 목이 내걸릴 줄 알았습니다요. ”

“토런스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광산을 몰래 개발하고 운영한 죄를 묻지 않기로 한 이상, 촌장에게도 반역죄를 묻기는 어려우니까요. 릴리의 청원도 있었고요. ”

“예? 릴리가요? ”

“네. ”


나는 조금 전 성에서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릴리 씨. 진심입니까? ]

[네. 누구에게나 기회는 있어야 하니까요. 신 앞으로 가기 전에 스스로의 죄를 속죄할 수 있는 기회는요. ]


현대의 내 세상과 달리 아직 중세인 이곳에는 수형자를 수용하는 교도소의 개념이 없었다.


지하 감옥이야 있지만 어디까지나 몸값을 받거나 재판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포로와 죄수들을 임시로 수용하는 공간일 뿐.

정해진 형기를 살며 속죄하는 형벌로서의 자유형(自由刑) 따위는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상 사실상 적지의 내통자로 취급받고 있는 촌장의 처분은 상당히 끔찍한 것으로 정해져있었다.


처형 또는 추방령.


전자야 말할 것도 없고 후자 역시 식량도 여비도 없이 성 밖으로 쫓아내는 것이라 굶어 죽거나 늑대 밥이 되란 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그를 동정하거나 옹호해줄 생각은 없지만 그럼에도 현대인인 내게는 찝찝한 처분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고 시대가 시대인 만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가장 큰 피해자인 릴리가 나섰던 것이다.


“실은 이번에 몰수한 촌장 패거리들의 은화를 릴리한테 주려고 했습니다. 그동안 당한 착취의 보상으로요. ”

“아, 그러셨구먼요! 잘 하셨습니다요. 솔직히 그 애한테는 못할 짓을 했지요. 그 성격에 분명 사양했을 테지만 학자님께서 어떻게든 잘 설득하셔서... ”

“아뇨. 이번에는 두말 않고 받았습니다. ”

“엇, 그랬습니까요? 하긴 그렇게나 고생을 했으니. ”

“네. 그래서 저도 처음에는 드디어 이 녀석이 정신 좀 차렸나 했는데 그 뒤에 한 일이 가관이었죠. ”

“어쨌는뎁쇼? ”

“돈을 바로 다시 반납했거든요. ”

“예? 그럴 거면 애초에 왜 받았답니까? ”

“돌려주며 말하길, 자신은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만족하니 돈은 죄인들을 위해서 써 달라고 하더군요. 특히 촌장은 신 앞으로 불려갈 날이 머지않은 사람이니, 그를 처형하는 대신에 살아서 속죄하게 하고 거기에 들 비용으로 자기 몫의 은화를 써달라고요. 그를 가장 원망해야 마땅한 녀석이 그런 말을 하니 어쩌겠습니까? 들어주는 수밖에요. ”


게일이 떡하니 입을 벌렸다.


“시상에나... 진짜로 어디서 온 성녀님이신가? ”

“그러게 말입니다. 제 고향에도 ‘원수를 사랑하라’거나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도 내밀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진짜 실천으로 옮기는 건 처음 봤어요. ”


혀를 차며 내뱉은 나는 뒤늦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 물론 ‘이 세상’에선 말입니다. ”


씁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내 세상의 한 사람이 떠올라서였다.


게일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허, 이거 참... 듣고 나니 더 부끄러워지는구먼요. 그동안 쇤네들은 그런 착한 아이를... ”

“그러니 게일 씨도 반성하고 개과천선하십시오. ”

“암요. 그래야지요. ”

“밀가루 삥땅치는 짓도 지금부턴 자제하시고요. ”


슬쩍 던진 말에 게일의 얼굴에 확 그늘이 졌다.


“촌장한테 들으신 겁니까요? ”

“물론 마을의 유일한 제분소 운영자이시니 그럴 욕심이 나는 것도 이해는 합니다만... ”

“쇤네는 삥땅 따위 친 적 없습니다. 한 번도. ”


그의 말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참...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말이지요. 느그 애비한테 그만 좀 떼먹으라 하라고. 어릴 적에는 그때마다 부끄러워 이마가 달아올랐습니다요. 몇 번은 감히 아버지한테 대든 적도도 있었지요. 하지만 그때마다 그분은 허허, 웃으시면서 그게 방앗간지기의 숙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이해를 못했지요. 당신께서 세상을 떠나고 제가 제분소를 맡게 되기 전까지는요. ”


게일이 푹 한숨을 쉬더니 물어왔다.


“밀알을 빻으면 부피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

“당연히 줄어들겠죠. 알갱이의 크기가 작을수록 간격이 훨씬 촘촘해질 테니까요. ”

“그렇습니다. 거의 반절 이하로 줄어듭니다요. 그 당연한 걸 마을 놈들 태반은 이해를 못했고요. ”


그의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혼자 처음 제분소에 나온 날 쇤네는 다짐했었습니다요. 마을을 위해 이 한 몸 열심히 불살라 집안의 오명을 씻겠다고 말이지요. 그래서 첫 해에는 그동안 관습적으로 이쪽 몫이었던 밀기울까지 싹싹 쓸어 담아 챙겨줬습니다. 가축먹이나 춘궁기의 비상식량으로라도 쓰라고요. 그랬더니 무슨 소문이 돌았는지 아십니까? 쇤네가 깨끗한 밀은 가로채고 밀기울을 섞었다고 수군거립디다! ”


게일이 자기 앞에 놓인 홍차를 쭉 들이켰다.


“후우. 그래서 다음 해에는 깨끗한 밀가루만 담아줬지요. 그랬더니 이젠 대놓고 떼먹는다며 욕지거리를 하더군요. 이후로는 아주 천민 취급이 따로 없었습니다. 회의를 하다가도 쇤네만 들어가면 하던 말을 뚝 멈추질 않나, 품앗이를 할 때도 나만 쏙 빼놓고 가지를 않나. 그나마 내 편을 들어준 분은 궁내관 나리뿐이었습니다요. 다른 마을 놈들과는 다르게 정직하게 사용료를 낸다면서 예쁘게 봐주시더군요. 소문으로는 다른 마을의 평민 출신이시라는데 그래서 이짝 생리를 좀 아셨는지도 모르지요. ”


사정을 듣자 나는 동병상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료에 비해 가공품의 크기가 확 줄어드는 것은 무두질 역시 마찬가지니까.


“미안합니다. 제가 그동안 오해를 한 것 같네요. ”

“아닙니다요. 그나마 이렇게 터놓고 이야기하니 응어리진 마음이 풀리는 기분이구먼요. 오히려 고맙습니다요. ”

“아뇨. 제가 고맙습니다. 덕분에 게일 씨한테 안심하고 맡겨도 되리라는 확신이 드네요. ”

“아까 말씀하신 일 말입니까요? ”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따라오시죠. 다른 분들도 슬슬 준비되었을 겁니다. ”



* * *



마을 우물에서부터 시작된 갱도는 인근의 종유동굴로 이어져 그대로 바다까지 통하고 있었다.


덕분에 촌장과 패거리들은 다시 우물로 나올 필요 없이 바로 해안가로 빠져나올 수 있었고, 거기서 바닷물로 몸을 씻어 몰래 광부 일을 하다 온 것을 감추어왔던 것이다.


바로 그 동굴 입구에 우리 다섯은 서 있었다.


계획의 입안자인 나와 내 세트(?)인 릴리.

마을에서 풍차를 이용한 제분소를 운영하는 게일.

경험 많은 정련업자이자 대장장이 조나선 스미스.

그의 주군이자 호손의 영주인 프란츠 폰 호손.


“그런데 릴리야 학자님 일행이라 같이 왔다손 쳐도, 저 어린놈은 누굽니까요? 꼴도 완전 거지꼴인데... ”

“나 말인가? ”


금발의 소년이 후드를 내리자 게일이 기겁을 했다.


“히이익! 영주님? 쇠, 쇤네가 죽을죄를... ”

“호들갑 떨지 말게. 내가 뭣 하러 이런 차림을 했겠나? 오히려 잘 변장한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는군. ”


다시 얼굴을 감춘 금발의 소년이 말했다.


“한데 슬슬 설명해주지 않겠나? 이미르 공. 오랜만의 외출이 설레긴 하지만 마냥 서있자니 바람이 춥군. ”

“네. 시작하지요. 먼저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

“음... 따지는 건 아니네만 귀공의 나라에는 설명을 질문으로 시작해야 하는 문화라도 있나? ”

“아. 제 교수님... 아니, 스승님의 말버릇이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옮아버렸네요. ”

“그렇군.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네. 계속하지. ”

“그러죠. 스미스 씨? ”

“편하게 조나선이라고 불러주십시오. ”

“알겠습니다, 조나선. 혹시 그동안 제련을 하면서 철을 녹여보신 적이 있습니까? ”

“녹인다고 하심은 어느 정도로? ”

“물론 물처럼 콸콸콸 쏟아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


그가 허어, 하고 입으로 바람소리를 내었다.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용암 속에 집어넣거나 전설에 나오는 용의 숨결에라도 닿지 않은 이상에야. ”


그렇군. 저 정도 경력자가 아예 지식조차 없는 걸 보니 확실히 이 일대에서는 처음이겠네.


“그래도 노 안의 온도가 높을수록 더 빠르게 양질의 철이 나온다는 사실은 아시지요? ”

“물론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풀무질을 하는 것 아닙니까? 공기를 불어넣어 불이 더 활활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요. ”

“혹시 여기서는 일일이 손으로 바람을 넣습니까? ”

“제가 젊었을 적에는 그랬습니다만 요즘에는 발을 쓰는 놈으로 풀무가 바뀌었습니다. 덕분에 예전보단 훨씬 몸이 편해요. 나오는 철의 질도 제법 올라갔고요. ”

“하지만 여전히 인력이로군요. ”

“예에. ”

“동력으로 수차를 써볼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

“호오, 수차라? ”


내 말에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조나선이 고개를 저었다.


“흥미로운 말씀이지만 여기서는 어려울 겁니다. 호손의 강은 원래도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10년 전 대지진으로 유속이 더 줄어버린 터라 곡식을 빻는 물레방아도 겨우 돌리는 수준이거든요. 훈련된 직인이 풀무로 하는 것만 못할 겁니다. ”


듣고 있던 게일이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요. 우리 마을만 해도 지진이 나기 전에는 여느 마을처럼 수차를 썼었지요. 하지만 안 그래도 작았던 개천이 지진이 난 이후로는 거의 못 쓰게 돼버린지라, 아버지께서 고심 끝에 풍차를 만드셨던 겁니다요. 밤이 되면 방향이 바뀌긴 하지만 그나마 낮에는 계속 해풍이 부니까요. 강이 얼어붙는 겨울이면 도시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도 상당했습죠. ”


나는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반문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수차란 게 꼭 강의 흐름에 맡겨야만 하는 물건은 아니잖습니까? ”

“위에서 물을 떨어뜨리는 방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것이 가능하다면야 좋기는 하겠지만... ”


머뭇거리는 게일을 이번에는 조나선이 지원하고 나섰다.


“확실히 그 방식이라면 사람 힘보다 나을 겁니다. 하지만 이 일대는 평지라서, 걸어서 반나절 거리에 있는 강 상류에서 물을 끌어와야 하겠지요. 그것만 해도 한 계절이 지나가는 대공사가 될 테고요. ”

“양수기를 쓴다고 하면요? 여기에도 물을 퍼 올리는 장치 정도는 있을 것 아닙니까? ”

“밭에 물대기용으로 쓰는 나선식 양수기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도 결국 사람이 돌리는 물건인지라... 제련용 수차를 돌리기에는 속도가 느릴 겁니다. 아시겠지만 제련이 몇 시간 만에 뚝딱 되는 작업도 아니고요. ”


거기서 나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투로 태클을 걸었다.


“아니. 그걸 왜 사람 손으로 돌립니까? ”

“예? 그야... ”

“풍차로 할 수 있는 건 곡식을 빻는 것만이 아닙니다. ”


나는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운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국토의 26%가 해수면보다 낮은, 어느 풍차와 튤립과 축구감독님의 나라를 떠올리면서.


“풍차에 나선식 양수기를 달아 자동양수기를 만들고 그 옆에 수차를 달 겁니다. 밤에 대륙풍이 불더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날개 방향을 바꿀 수 있게 할 거고요. 바람이 약하거나 방향을 바꾸는 동안 풍차가 멈출 때를 대비해 물을 저장해 둘 저수지도 만들 겁니다. 크고 아름답게. 공사에 들어가는 금화야 앤더슨 상단에서 후하게 대줬으니까요. ”


여기서 나선식 양수기란 아르키메데스 양수기를 말한다.


원통형의 장치를 물 위에 놓고 내부의 스크류를 돌리면 그것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물을 퍼 올리는 원리로, 지구에선 기원전 3세기 경 발명된 이래 현대까지 쓰이는 재래식 양수기의 표준.


이를 풍차와 연결해 자동화시킴으로서 네덜란드는 무려 700년 전부터 전기나 증기기관 없이도 국토를 간척해왔다.


“아아? 그렇구만요! 풍차에 방아 대신 양수기를 달아주면 그게 바로 자동양수기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

“제가 살고 있던 곳에서도 양수기 자체는 2300년 전에 개발됐지만, 거기에 풍차를 접목시켜 쓴지는 끽해야 천 년밖에 안 됐습니다. 여기가 느린 건 아니지요. ”

“대단하시군요. 과연 영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


두 기술자는 내 말에 놀라워하면서도 짐짓 신이 난 듯했다.


“서둘러야겠군요. 겨울이 와서 땅이 굳고 개천이 얼어버리기 전에 공사를 마치는 편이 좋을 테니. ”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갑자기 개천이 왜 나와요? ”

“예의 마을에 있던 풍차를 쓰실 계획 아니십니까? 광산 입구도 마침 그쪽에 있고... ”

“저기, 그러면 마을의 제분소가 없어져버리는뎁쇼? ”

“아. 그렇겠군. 새로 하나 만들어야 하나? ”


조나선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 때문에 게일 씨가 여기 있는 겁니다. 설계도는 제가 드릴 수 있지만 실제로 만드는 건 아무래도 아버지 대부터 풍차를 봐온 게일 씨가 나을 테니까요. ”

“흠흠. 쇤네도 감히 그렇게 생각하구만요! ”

“그리고 마을에서는 일단 하던 방식대로 천천히 철을 생산하고 계십시오. 앤더슨 상단이 토런스 쪽에 붙어먹은 이상 항의를 빌미로 방문하거나 하며 이쪽을 염탐할 게 빤하니까요. ”

“그렇군. 마을의 광산은 미끼로 던져주고 실제로는 이곳에서 반격을 준비하자는 얘기지? ”

“역시 이해가 빠르시네요, 프란츠 자작님. 네. 보다시피 내륙으로 들어가야 하는 마을보다는 해안가인 이쪽의 바람이 훨씬 셉니다. 끌어올릴 수자원도 더 풍부하고요. 심지어 웬만한 추위에는 얼지도 않는 물입니다. ”

“바닷물 말이로군! ”

“마침 갱도와 이어진 저 동굴 덕에 들키지 않고 자재도 운반할 수 있으니 형편이 좋게 됐지요. ”


모여 있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마침 종유동굴 옆이기까지 합니다. 정말 ‘그것’을 만들기에 이 이상 좋은 입지가 있을까 싶다니까요. ”


이번에는 다들 알아듣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말해주지 않겠나? 그래서 ‘그것’이 대체 무엇이냔 말이네. ”

“이겁니다. ”


나는 그려온 설계도를 쫘악 펼쳤다.


“초고열 용광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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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두 번째 신탁(1) +7 22.11.27 837 3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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